4. 종말의 계시

제 1 장 : 계시의 나타남
제 7 장 : 교회의 알곡 추수
제 12 장 : 환난날의 교회와 예비처
제 19 장 : 아마겟돈 전쟁과 주의 재림
제 22 장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향
1. 종말론의 올바른 인식


종말론(終末論)이라고 하면 복음의 영역(領域)을 넘은 신학으로 잘못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요한계시록이 경계를 받으면서도 또 한편 천시(賤視)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겠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종말론이야말로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임을 알아야 한다. 종말론이라고 하면 주로 요한계시록을 주축(主軸)으로 전개되는 인류의 종말적인 사건들을 가리키는데 '주의 재림' '심판' '부활' 등에 관한 성경적인 고찰을 종말론이라고 정의(定義)할 수 있다.

이들 문제는 그 하나 하나로 볼 때,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가진다. 종말론이란 바로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성경 연구이며 요한계시록 역시 이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지하고 친숙한 태도로 이 말씀을 대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통해서 종말론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할 수 있다.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종말론이 없으면 성경의 결론을 내릴 수 없다.

(1) 주의 재림은 기독교의 절대적인 교리이다. 주의 재림이 없는 기독교는 틀림없이 이단(異端)이다. 그런데 재림에 대
      한 성경 연구를 등한히 할 수 있는가?
(2)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소망이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데 그 부활에 관한 성
      경적 연구를 소홀히 할 수 있는가?
(3) 인류의 종말에는 심판이 있다. 인류에 대한 심판이 없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데 이 심판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에 대하여 등한히 할 수 있는가?
(4) 그리고 신약 성경의 강조점은 무엇인가? 주의 재림을 대망하고 준비하는 성도들의 신앙적인 자세가 아닌가?

눅12:35-40 "......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24:48-51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 ."
벧후3:3-1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 모든 일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2. 요한계시록 해석, 무엇이 문제인가?

왜 목회자들이 요한계시록 연구를 기피하는 것인가? 그 요인을 지적한다면 요한계시록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요한계시록 해석에 문제점이 많다. 그러면 이같은 문제점은 무엇이 가져 온 것인가? 이것은 성경이 가져 온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신학이 가져 왔다. 오늘날 신학은 성경을 해석하는 절대적 원칙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이같은 신학에 얽매어 성경 해석의 범위를 견제(牽制) 받기 때문에 성경적인 올바른 해석을 시도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말하자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적 해석'이 아닌 '신학적 해석'이 권위를 가지고 성경 해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요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되어 요한계시록 해석에 혼선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신학적 장벽은 '천년기 설'(千年期說)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이 어떤 신학적 '천년기 설'을 취하느냐에 따라 해석의 각도가 천태만상으로 나타나며 해석의 방향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필자는 여기서 요한계시록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천년기 설에 있어서 '세대주의적 해석', '무천년주의적 해석', '전천년주의적 해석' 등 세 가지 신학적 견해를 밝히면서 요한계시록 해석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

(1) 세대주의적 해석 방법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한때 종말론 해석이 '세대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며 올바로 강해해 보려는 목회자들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무엇인가? 세대주의 신학(世代主義神學)이 요한계시록 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대주의 해석에 경계심을 늦추게 되며 오히려 매료되어 함정에 빠지게 된다.

'세대주의'란 세대주의 신학을 의미하는데 이 신학은 18세기 영국의 '존넬슨다비'에 의해 제창되었으며 그후 '스코필드'에 의해 신학적 체계를 갖추어 미국의 신학계를 휩쓸었고 계속하여 전 신학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이란 세대주의 신학에 의해 정립된 종말론을 말하는데 원래가 세대주의 신학이란 세대주의 종말론에 그 연구의 초점을 두고 출발한 신학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종말론 해석에 있어서 대략 다음 몇 가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와 함께 유대인들을 위한 종말론적 계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교회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야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셨는데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서 죽인 결과 그들
    의 메시야 왕국이 연기됨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교회 시대이다.


㉰ 성경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교회 시대는 바로 여섯번째 시대에 속한 세대로, 7년 대환
    난은 교회 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회복을 위한 종말적인 회개 기간이다.
교회 시대는 '7년 대환난 전'까
    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말의 7년 대환난 이전에 '공중 휴거'되어야 하며 이 땅위에 임하는 7년 대환난을 겪지 않는
    다.

이것을 알기 쉽게 하나의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표'에서와 같이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7년 대환난 전 휴거설'이 전제된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신학적 핵심 사상이 바로 '7년 대환난 전 휴거'이다. 이 사상은 세대주의 신학이 그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이은 세대주의 신학의 '7세대론'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내용을 혼란 속에 빠트리게 한 진원지(震源地)가 되어 있는 것이다.

(2) 무천년 설의 해석 방법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천년기 설'을 인정하지 않는, 다시 말하면 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해석 방법이 '무천년적 해석'이다. 이 '무천년 설'은 '전천년 설'과 함께 보수 신학의 산물이다. 한국의 보수 신학의 맥은 박형룡, 박윤선 목사 등에 의해 전래되어 왔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전천년 설'을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이들 이후에 세계적 신학 추세에 따라 무천년 설이 고개를 쳐들었으며, 지금은 보수 신학의 보루(堡壘)라고 자부하고 있는 모 총회신학대학의 경우, 거의 모든 교수들이 무천년 설을 취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성경에는 '무천년적 해석'을 취해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해석이 성경적 해석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두 가지 문제 때문에 무천년적 해석을 취했다가 오히려 성경 전체의 중요한 내용을 왜곡되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천년 설에 배치되는 다른 모든 성경적 근거를 올바로 처리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천년 설에 배치되는 성경의 내용을 '상징적 방법'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에 나오는 숫자적인 표현, 종말적인 사건으로 등장하는 모든 계시를, 그들 특유의 상징적 방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무천년 설은 종말론에 관계된 모든 사건을 무천년 신학에 입각하여 연구하기 때문에 종말론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기 됨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 이들은 '1260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마흔 두달' 등의 계시를 전시대로 해석한다.

㉯ 첫째 부활을 실제적인 부활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중생 사건으로 본다.

㉰ 지상에서의 '천년 동안 왕노릇한다'는 계시를 죽은 성도들의 천상에서의 생활로 해석한다.

㉱ 마귀를 천년이 차도록 무저갱에 던져 잠그는 일을 교회 시대에 있어서 마귀를 속박해 두는 일을 의미한다고 해석한
    다(계20:2-3).

㉲ 주의 재림 시에 있을 '성도들의 휴거'를 실제적인 휴거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로 해석한다.
물론 위와
    같은 해석은 굉장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명백한 표현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22:18-19).

(3) 전천년 설의 해석 방법


전천년 설(前千年說)이란 종말론 해석에 있어서 천년왕국을 전제(前提)로 하는 해석 방법이다. 전천년 설은 '세대주의적 해석'이나 '무천년 설'의 경우와는 좀 다르다. 전천년 설의 해석은 한 두 가지 방법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세대주의적 해석과 비슷한 방법의 전천년 설이 있다. 말하자면 어느 한 가지를 택하자니 마음에 안 들고, 이곳 저곳에서 짜깁기 하여 맞춘 종말론으로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 같은 짜깁기식 전천년 설을 선호한다.

역사적 해석 방법도 있는데 신학적 이론으로는 '무천년 설'과 비슷하다.'역사적 전천년 설'이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하여, 계시된 사건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언제인가는 실현된다고 보는 신학적 견해를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는 사실 외에는 무천년주의를 신봉하는 신학자들처럼 종말적인 사건으로 등장하는 문제들, 1260일의 경우, 두 증인의 경우, 적그리스도의 경우, 짐승의 표의 경우 등 대부분을 상징적 방법으로 해석한다.

(4) 문장적 해석 방법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말이다. 알고 보면 인간의 신학도 성경을 성경으로 잘 해석해 보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성경은 하나의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문장적 해석 방법을 취해야 한다. 문장(文章)이란 말은 하나의 완성된 글을 의미하는데 문학(文學)이란 말과 동일시된다.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의 구원의 사역을 계시로 보여 주신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분야를 '계시 문학'(啓示文學)이라고도 표현한다. 요한계시록을 문장적으로 해석하려면 다음과 같은 순서의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종말적 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따라야 한다.

㉯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대한 전체 내용의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 종말적 사건으로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하나 별개로 구분된 독립적인 계시인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으
    므로 사건과 사건간의 올바른 연결이 필수적이다.

㉱ 한 사건을 해석하기에 앞서 그 장 전체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따라야 하며 한 사건, 한 사건이 맥(脈)으로 이어져 나
    가야 한다.

㉲ 비슷한 사건이 등장하는 경우, 서로간의 연결 관계, 같은 사건인가 여부 등을 명백히 구분해야 한다.

㉳ 성경에 나오는 종말적인 계시는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편적 사건의 계시들이기 때문
    에 어느 한 사건을 가지고 전체적인 해석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例 : 첫째 부활의 경우

계20:4-5절에 나오는 '첫째 부활' 문제는 종말론적인 면에서나 교리적인 면에서나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이 부활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첫째 부활에 대한 문제를 기존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해 온 것인가? 첫째 부활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이라고 정의해 놓았다. 이은 부활에 대한 신학적 정의(定義)는 종말론 해석에 큰 오류를 가져 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계20:5-6절에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 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 이 성구의 해석에서 만약 첫째 부활자들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라고 단정해 버린다면 괄호 안의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대상이 불신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수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신학자들은 이들에 대하여 성경에도 없는 '둘째 부활'이란 명칭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첫째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 둘째 부활은 불신자들의 부활이 되어 버렸고 성도들의 부활은 주의 재림시에, 불신자들의 부활은 천년 왕국이 지난 후에 있다고 못을 박아 놓았다. 정말로 그런 것인가? 이 문제를 문장적으로 해석해 보자. 계20:4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할 자들이 두 종류의 성도들로 구분되어 나오고 있다. 첫 종류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로 나오는데 그 문맥처럼 이들은 순교자들이다. 두번째 대상자들은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라고 말씀해 준다.

'살아서'란 말은 '카이 에제산'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서'란 뜻이다. 이들도 죽었던 성도들로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롯하기 위해 첫째 부활자로 살아난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첫째 부활의 대상자들은 '순교자'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시에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만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게 되는데 이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란 불신자들인 것이 아니라 첫째 부활에서 제외된 모든 성도들을 일컫는 말로 이들은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야 생명의 부활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자세한 해석은 계20:4-6에서 찾아 볼 것)


종말론 연구 민병석 저서와 그 내용 주일 설교(1~6권) 새벽을 여는 성경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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