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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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장 (13 - 17)
 밤중소리  02-01 | VIEW : 2,824



  (13)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

  (베드로후서 3:1-7)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를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러 구약에 기록한 거룩한 선지자들의 예언과 사도들을 통해 주님이 명령하신 바를 기억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종말에 교회에 기롱하는 자들이 일어나 주의 재림을 부인할 것이란 사실을 경계하면서 그들의 이 같은 거짓말에 속지 말 것을 특별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기롱한다는 말은 희롱한다는 뜻으로 진실한 것인데도 그것을 실없는 농으로 여겨 오히려 비웃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 기롱하는 것인가? 4절에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에 대해 너희는 그것을 믿느냐 이 어리석은 자들아 하면서 조롱하며 비웃는 자들이 나타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기롱하는 자들의 등장

  베드로 사도는 ‘먼저 이것을 알라’고 당부했습니다. 무엇을 알라고 한 것입니까?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온다고 했습니다. 온다고 한 말은 교회에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하는 기롱하는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의 재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을 기롱하는 자들이라고 했으며 이런 자들이 종말에 하나님의 교회에 나타나 미혹할 것이라고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거짓 선생들은 그 증거로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온 이 세상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거늘,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상태로 인류의 역사가 계속하겠거늘 주의 다시 오시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에 대해서 마24:48절에서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의 재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이란 주의 재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강단에서는 어떤 때는 주의 다시 오심을 설교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설교는 신부를 단장시키는 메시지가 아니라 성도들로 깊은 잠을 재우는 자장가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야29:10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경종하시기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으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주의 재림을 믿고 준비하는 성도들이 있겠느냐는 탄식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실 기간 동안, 주의 재림에 관한 얼마나 많은 교훈을 주셨으며 주의 재림을 준비시키는 일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경종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들은 마땅히 주 재림의 메시지를 복음의 주축으로 삼아 성도들을 가르치며 그날에 소망을 갖게 하며 그날을 준비시키는 생활로 인도해야 하거늘 그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주의 재림을 무시하고 엉뚱한 메시지로 성도들로 세속적인 생활에 정착하게 하고 영적으로 깊이 잠들게 하는 기롱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불로 임하는 마지마 심판

  그런데 이런 자들의 관심은 어디 두고 있는 것인가? 3절에서 이르기를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한다’고 했습니다. 정욕을 좇아 행하는 목회자에게는 재림의 메시지가 없습니다. 주의 재림 시 자신부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피하고 성도들로 주의 재림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들 거짓 선생들에 대해 노아의 때에 물의 심판을 잊으려 하는 불 신앙적인 태도임을 책망하고 노아의 때는 물의 넘침으로 멸망을 당했지만 주의 재림의 날에는 하늘과 땅이 불사른바 될 것이라고 경종 했습니다. 물의 심판은 홍수 심판으로 땅위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죽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있을 불의 심판은 하늘과 땅이 동시에 불로 사름을 당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계6:12절에서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이 모습은 일곱째 대접 심판에 내리시는 불의 심판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불의 심판을 위해 이 불을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셨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보존해 두신 것입니까? 이 땅 깊숙한 지하에는 지금도 이 불꽃이 이글이글 타면서 이 지구를 불태울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늘과 땅이 홍수 심판과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 이 지구가 지금가지 보존되어 왔습니다. 주의 재림의 날에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4)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베드로후서 3:8-9)


  베드로 사도는 8절에서 하나님의 날 수에 대하여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같은 표현은 하나님께서 천년을 하루로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시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계산하고 구애받는 시간과 공간에 인간과 같은 구애를 받으실 분이 아니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하루와 천년

  인간 사회에서는 하루와 천년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계산으로 진행시켜 나가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산과 인간의 계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풀기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입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 있어서 우리는 24시간의 하루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도 24시간의 하루의 제약을 받으신 가운데 그의 창조를 이루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의 생각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루가 인간의 계산으로는 24시간의 시간에 얽매인 시간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24시간의 하루가 인간이 계산하는 천년 아니 더 많은 시간으로도 활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은 24시간의 시간적인 하루에 얽매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시90:4절에서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7천년 전에 창조하셨다고 해도 인간의 과학적 판단이나 증거로는 지구의 생성이 수 10억 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용되는 하루 동안에 10억 년의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으로 이 사실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와 연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 임하실 것이라고 하는 주의 재림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일에 대하여 엄청난 시기가 지낸 는 데도 곧 오시지 않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롱하는 자가 와서 ‘주의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기롱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신다면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 비록 2천년이 넘는다 해도 한 밤중의 한 경점 만도 못한 짧은 기간인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의 기간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리 긴 기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범사에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이유

  베드로 사도는 9절에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과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더뎌도 그것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두 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 기간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소요되는 기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요셉에게 약속한 약속이 늦게 요셉에게 이뤄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리고 애굽에서 갖가지 시험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 꿈에 보여주신 약속을 성취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아들 이삭에 대한 약속을 25년만에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왜 늦어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 그에게 일어날 이 모든 일들을 이미 아시고 섭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작정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인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오래 참으신다고 하신 말씀은 아직 경성하여 신부의 단장을 준비치 못한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이 한 명도 그의 생명에 이르는 일에 낙오됨이 없게 하시기 위해 길이 참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는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한계의 끝이옵니다. 그러므로 안일한 가운데 정욕적으로 살아가다가 심판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경성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님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는 일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일에도 인내함으로 약속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15) 도적 같이 임할 주의 날

  (베드로후서 3:10-13)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게 하시려고 천년이 하루 같이 오래 참으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는 작정하신 심판의 날이 이르면 반드시 그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기간이 언제인지는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1. 주의 날

  이 날을 베드로 사도는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날이란 주의 재림의 날을 의미하고 인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이 주의 날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눅21:34-36절에서 예수님은 이 시기를 ‘이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단12:1-3절에서 다니엘은 ‘그 때’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습1:18절에서 이 날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날이 언제 오느냐에 대해서는 그 년, 월, 일, 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다만 징조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의 시기를 연구할 때 조심해야 하는데 그 시기를 날짜로 알려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사실과 그러나 징조적 시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10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에 담긴 뜻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적 같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24:43절에서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도적은 밤에 나타납니다. 밤은 사람들이 잠을 잘 때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밤중에 소리가 났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이 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도적이 오니 깨어 방비하라는 경종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살전5: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 되면 주님은 우리에게 도적 같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낮의 아들, 빛의 아들로서의 영적 무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날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하여 마24장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날을 어떻게 준비하며 마지 할 것입니까? 마24장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곧 오실 줄로 알고 준비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눅21장에서는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눅12장에서는 ‘혼인 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여러 말씀으로 볼 때 주님이 오시는 재림의 날은 아무나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맞이한다고 했어요? 준비한 성도들만이 맞이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깨어 있는 성도들만이 맞이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주의 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주의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10절에서 아주 간략하게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은 간략하지만 사건은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입니다.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말씀은 계16장에 나오는 일곱 대접 심판 중에 마지막 대접인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이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 심판의 모습은 이 지구 자체가 활화산이 되어 폭발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때 땅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불이 올라오기 때문에 땅과 그 중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이 지구의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하고 일이 이렇게 풀어질 터이니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하나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신부의 단장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상은 이처럼 무서운 심판으로 멸망을 받지만 우리는 그의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






  (16)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후서 3:14)


  오늘 본문 14절에는 주의 날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성도들의 자격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주의 재림은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이 같은 주의 날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이란 말씀입니다.
  
  1.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힘쓰라

  그러면 이런 주의 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몸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의 날을 사모할진대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도록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힘쓰는 일이 없이는 절대로 평강 가운데서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이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 즐거움으로 맞이하는 그런 만남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까?

  (1) 불법한 자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7:23절에서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2) 악한 종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마24:48절 이하에서 악한 종들에게 내려질 징계에 대하여 엄히 경종 하셨습니다.

  (3) 미련한 처녀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25:10절에서 이미 닫혀진 문 앞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4)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달란트의 사명을 감당치 못한 종들입니다.

  (5) 염소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25:31절 이하에서 양과 염소를 가르실 때 왼편에서 지옥에 가기를 기다리는 염소의 무리 중에 낄 것입니다.

  (6) 어리석은 부자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눅12:18절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자들에 대해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셨습니다.

  (7) 마음이 둔한 자로 그날에 주님 앞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눅21:34절에서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8)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자리에 들어간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마22:11절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무리는 내어쫓았습니다.

  마7:21절에서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소망으로 삼는 자마다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 어떤 일에 힘써야 하난?

  그러면 어떤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점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점이란 더러움을 뜻합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에 더러움이 없어야 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약1: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세속적 생활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생애를 함께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의 때의 생활을 하고 있는 세속적 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흠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빌2:15절에서 세상에서 세상의 빛들로 나타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빛을 나타내는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 내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 빛을 세상에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봄철에 씨를 뿌리고 온 여름철 내내 그것을 가꾸고 손질하지 않으면 어떻게 가을에 추수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 들이 힘씀이 없이 어찌 천국을 찾이할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힘쓰는 이가 들어간다고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소망이 크면 클수록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이라고 하는 이 시간을 언제나 기회로 포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입니다. 순종을 시작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기회입니다. 지금이란 시간은 기회로 삼으면 늦지 않고 기회로 삼지 않으면 늦는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참으로 주님의 날을 사모하며 그날을 소망으로 삼으시려면 오늘의 이 시간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힘쓰고 애쓰는 생활로 그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뿌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17)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후서 3:1-18)


  오늘로서 베드로 후서의 강해를 마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특히 3장에서 주의 재림에 관한 성도들의 경성과 그 두려움을 경종하면서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참으심은 그리스도의 인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큰 괴로움 중에도 원수의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15절에서도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에 될 줄로 여기라’는 말로 주의 재림이 더디다고 방심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사모하며 그날에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가 되기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참으심의 두 가지 면

  하나님은 두 가지 면에서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는 멸망 받을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이것은 아무도 자기 죄로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이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감사하여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롬2: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판은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악을 심판하심에 있어 그 악에서 돌이키기를 기다리심에 오래 참으십니다. 이에 대하여 인생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참으심에 대하여 오히려 더욱 악을 행하는 일에 악용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8:11절 이하에서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우리의 죄악대로 그 즉시 즉시 하나님의 징벌이 내려진다면 우리 중에 아무라도 살아 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사42:3절에서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최종적인 심판을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날이 주의 날입니다. 이 날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와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한 자들을 심판하시되 이 땅에서 아주 멸절 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참으심입니다.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속히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를 받을 때, 한번 깊이 자기 행실에 대하여 살펴보면 더 일찍 더 많이 징계를 받아야 마땅했을 자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인 들은 징계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심의 한계선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계선에 이르기 전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회개치 못하면 끝까지 그 죄를 추궁하고 응당한 보응을 내리실 것입니다.

  2. 알기 어려운 경의 말씀에 조심하라

  16절 말씀에는 성경 말씀 중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인용한 알기 어렵다는 경의 말씀은 주의 재림에 관한 계시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일에 그 받은 지혜대로(계시) 썼고 다른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했습니다. 알기 어렵다는 말은 무식한 자가 자기 지혜나 생각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고 연구해야 할 경의 말씀을 천박한 지식이나 잘못된 지혜로 해석을 시도하다간 필경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알기 어려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느 한 구절만으로는 분명한 뜻이 나오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약2:24절에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만 인용하여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믿음에서 나온 행함이 그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뜻이지 행함이 곧 의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2) 삼상28장에는 사울 왕이 만난 신접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죽은 사무엘과 접촉하여 사무엘과 대화를 하며 그 내용을 사울 왕에게 고합니다. 이 내용은 그 내용 전개가 어떻게 나왔던 간에 사무엘을 가장한 사탄의 역사이지 죽은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와 신접한 여인과 대화를 나눈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억지로 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천주교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마리아의 무죄 설, 동정녀 설, 승천 설 등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한 것으로 이런 자들에 대하여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더욱 믿음으로 성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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