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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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장 (1 - 7)
 밤중소리  02-01 | VIEW : 762



  (1) 시몬 베드로

  (베드로후서 1:1-2)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 전서를 보낸 후 두 번째로 보낸 편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전서에서 이미 고난에 대해서 많이 언급했기 때문에 후서에서는 주로 교회 내부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를 종말론적 견지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보낸 둘째 서신인 이 베드로 후서는 그의 임종에 가까웠을 때에 썼으며 로마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시몬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수제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시몬이란 이름은 갈대란 뜻으로 그가 거듭나기 이전에 부르던 이름입니다. 베드로란 아람어로 반석이란 뜻인데 이 이름은 그의 유명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주님이 직접 부쳐주신 이름입니다. 베드로란 이름은 그의 이름이라기보다 교회의 신앙적 초석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몬과 베드로, 이 두 이름은 마치 야곱과 이스라엘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교만과 거짓된 성품이 얍복강에서의 기도로 무너지고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통해서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주님이 주신 이름으로 하나는 심적 변화의 결과에서 온 이름이요, 하나는 영적 진리의 깨달음에서 온 이름입니다.

  2.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이유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자리에 반드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목전에서 그 이름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래도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나 신뢰는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늘 제자들 가운데서 지도적 입장에 서 있었으며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님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에 제일 먼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을 따랐던 많은 무리들이 주님에 대한 메시야 관이 무너지자 모두 주님 곁을 떠날 때, 주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네게로 가오리이까’하면서 주님의 힘이 되게 한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죽어도 버리지 않겠노라고 장담한 제자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주님을 잡으러 무리가 몰려 왔을 때, 다른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베드로는 용감히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른 제자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급한 탓으로 실수는 했지만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영적 진리를 잘 깨닫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지금도 역대 교회의 모범적 신앙 고백으로 우리의 설교에 인용되어 오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기뻐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는 회개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를 타시고 전도하신 후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 고기가 많이 잡히자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고백했으며 주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후에도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는 회개를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목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네가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물으심과 함께 내 양을 먹이라는 목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남은 생애를 살아가다가 종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1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기 때문임을 말씀해 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며 우리의 소망은 빈 껍데기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후사의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주신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이런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베드로와 함께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을 받는 일에는 지위의 상하도 없고 신분의 구별도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감사하면서 주님을 아는 주님께 대한 지식으로 베드로가 축원한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받은 생명과 경건

  (베드로후서 1:1-3)


  오늘 본문 3절에서 베드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속한 생명과 경건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가진 의를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일에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 베드로가 밝힌 이 말씀은 롬5:17-19절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우리에게 정죄가 오고, 사망이 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이 오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죄의 전가’ 또는 ‘의의 전가’라고 말합니다. 전가란 말은 그대로 고스란히 넘겨주었다는 뜻으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되고 그 죄 값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의인이 되고 그의 대속의 은혜로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구원에 관한 핵심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그 즉시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자가 되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그로부터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의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주님이 요15:5절에 포도나무의 비유로써 이런 신비한 관계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연합 관계에 있습니다. 떨어지면 살수가 없으며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얻게 된 생명과 경건은 주님의 영광과 덕으로써 이루신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영광에 관한 것이며 경건은 덕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시며 하늘의 생명입니다. 주님의 이 신비한 생명을 사도 요한은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증거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지상에 계셨을 때에도 이 생명을 소유라고 계셨으며 이 사실이 부활로 확인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연합에서 오는 그리스도인의 소유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며 이런 신기한 일은 그의 능력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들과의 이런 신비한 연합 관계에 대하여 마치 두 몸이 하나를 이루는 부부간의 신비한 결합과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전6:15절에서 바울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지체와 몸은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의 생명도 그의 의도 그의 경건도 그의 영광도 그의 기업도 모두 우리의 소유인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딤전2:11-12절에서 이 일에 대하여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편지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기업에 대하여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들은 이런 연합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 들만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어려운 시련과 시험을 이기고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 경건에 속한 모든 것도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의가 내 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경건도 내 경건이 되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 분의 거룩하심, 그의 겸손하심, 그의 온유하심이 모두 내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는 그런 부요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론 : 이런 일은 인간의 지식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견고히 붙드시고 그 안에 거하는 생활을 통해서 놀라운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베드로후서 1:4-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입니다. 본문 4절에서 이르시기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1.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첫째로 주안에서 우리가 받아 누릴 영광의 소망은 보배로운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보배란 표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 들에게 가장 존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처럼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무엇으로 주신 것입니까? 벧전1:18-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 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보배로운 약속을 어떻게 여기며 어떻게 간수하고 있는 것입니까?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귀한 보배처럼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손에 잡혀서 내게 실질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그 어떤 고난의 대가를 치른다 해도 바꿀 수 없을 만치 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8장에서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의 지극히 작은 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왜 베드로는 이처럼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뜻이 변함이 없으실 것을 스스로 맹세하신 약속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도 말할 수 없어 큰 약속이 되십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은 누구와도 이처럼 큰 약속을 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 아들 독생자를 주시며 그 아들을 통해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시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약속이신데 이 약속을 변치 않게 하시려고 맹세로 하셨습니다. 이 약속으로 우리는 우리 죄의 사유함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우리는 의심하지 말아야 하며 의심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기 때문에 큰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이 약속을 받은 자의 의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이런 위대하고 놀라운 약속을 주신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 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신의 성품이란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이런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은 심령의 변화를 받아야 하고 생활의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육신으로 심어 온 우리의 생활을 영으로 심는 생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두었던 소망을 하늘의 소망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런 약속을 받았다는 우리의 생활이 옛날 그대로 육신의 정욕 가운데 살아간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이처럼 큰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요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며 짓밟는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목적과 배치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약속을 주신 목적이 우리들이 옛날의 생활대로 살아가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일에 더욱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5절 이하에서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덕을 쌓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광신자처럼 되어 버릴 것입니다. 다음에 덕에 지식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덕에는 지식이 따라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덕은 덕의 가치가 없습니다. 지식에 절제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절제가 없는 지식은 교만이 되기 때문에 이런 지식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절제에 인내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일시적인 절제는 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제 생활을 하려면 인내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에 경건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인내에는 경솔함이 없어야 합니다. 천박함도 없어야 합니다. 경건히 따르는 인내여야 합니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을 겉으로 보이는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형제에 대한 사랑의 교제가 없다면 안됩니다. 그리고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결론 :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을 이루어 나가는 생활의 참된 모습입니다. 열매를 맺는 생활을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케 하시려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까?






  (4)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베드로후서 1:8-1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배롭고 큰 약속을 주신 것은 우리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케 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1. 원시적 그리스도인과 근시적 그리스도인

  베드로는 8절에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기 않게 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 흡족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생활에 어떤 일이 따르느냐에 대해 베드로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욕적인 썩어 질 것을 피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에 이미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잘못되게 사용하면 안됩니다. 이적이 은혜가 아닙니다. 은사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를 사모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지식을 얻게 되고 그 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며 그 은혜 가운데서 믿음으로 성장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의 생활에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 없는 자가 되기 않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열매는 아무나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으로 인한 세상의 썩어 질 것을 피하는 생활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원래가 소경은 눈이 감겨졌기 때문에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소경된 그리스도인 들은 원시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멀리 있는 것이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우리가 갈 천국을 소망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소경이 되어 소망적인 생활을 못하고 땅의 것을 찾는 근시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열매 맺는 생활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죄의 은혜를 잊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사실을 잊어 버린 사람은 소경이 되어 원시치 못하는 것입니다.

  2.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10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라고 권고합니다. 즉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소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반드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택하심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하나님의 예정을 말합니다. 이 부르심과 택하심이 두 가지로 보이지만 실인즉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양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었다는 증거요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다면 그 사람들에 대한 부르심이 반드시 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말씀이 롬8:30절에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배롭고 큰 약속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약속으로 부르시기 위해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흔들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떤 고난이 와도 그 고난으로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11절에서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너희에게 넉넉히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구원도 엄격히 말하면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겨우 받는 구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넉넉히 얻는 구원입니다.

  결론 : 우리가 이 같은 생활을 하면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넉넉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겨우 얻는 구원도 있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이요 상급이 전혀 없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힘쓰는 생활을 통해서 넉넉히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항상 생각하라

  (베드로후서 1:12-18)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를 써 보낼 때 이미 그가 주님 앞에 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많았으려니와 그가 어떤 죽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14절에서 그는 ‘내가 이 장막을 벗어날 날이 임박한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글을 써 보낸 이유는 자신이 세상에서 떠난 후에라도 그들이 베드로가 전한 권면을 생각나게 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서신을 보낸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진리에 선 자의 자세

  베드로 사도는 이 서신을 받는 교회가 이미 베드로가 전한 교훈을 알고 있으며 진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12절에서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들은 아무리 교훈의 말씀을 듣고 진리에 서 있다고 하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시와 때를 가지지 않고 삼킬 자를 찾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훈과 진리에 대하여 항상 생각하고 따르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같은 노파심에서 베드로가 이 서신을 보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이나 진리의 가르침은 언제나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교훈도 징계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잠9:7절에서 ‘거만한 자를 징계하지 말라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힌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를 주시며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요15:2절에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를 잘 깨닫고 우리의 믿음이 진리의 터전 위에 굳게 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이 없이는 노력하고 힘써도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진리가 없는 은혜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어떤 부흥사는 집회 때마다 덕스럽지 못한 말하기로 유명한데 그 집회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 들은 이번에도 욕을 먹으러 가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잡소리나 좋아하고 충격적인 욕설이나 좋아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잘못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가 10년, 20년이 넘었어도 구원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입니까? 예수가 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하는지, 부활의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이 그냥 그럭저럭 이래저래 믿는다면 이 또한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인 들이 왜 그리 은사를 좋아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이는 은사를 좋아하는데 병 고치는 은사라든지 예언의 은사라든가 방언의 은사라든가 여하튼 은사를 받으면 다 된 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성령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구원도 아니고 축복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2. 주의 강림과 그의 능력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

  베드로 사도가 전한 복음은 16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알게 한’ 일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증거는 공교히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은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원어적으로 볼 때 ‘파루시아’란 말은 미래적인 단어로 주의 재림을 가리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재림에 관한 여러 가지 징조나 심판에 있어서 사실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공교히 꾸민 이야기로 돌려 그것을 우화적으로 해석합니다. 벧후3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의 재림 시에 있을 여러 가지 사건들은 사도들이 받은 분명한 계시로 말씀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종말에 관한 여러 계시를 상징적 사건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변화 산에서의 주님의 영광을 모습을 증거 하면서 주의 강림하시는 일과 그의 능력에 대하여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딤후3:14절에서 ‘너는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 격려하기를 항상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고 그 진리의 터전 위에 믿음을 쌓은 성도라도 항상 생각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깊이 깨닫고 은혜의 터전 위에 믿음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의 성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6) 더 확실한 예언

  (베드로후서 1:16-21)


  베드로 사도는 16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통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생각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스꽝스럽게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그럴듯하게 꾸민 이야기로 여길 것입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은 이미 신학자들 간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의 대속의 죽으심, 그의 부활, 그리고 그가 다시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심, 이런 것들은 성령의 가르침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허망하게 들릴 수 있는 일들입니다.

  1.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일들이 결코 자신이나 사도들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계2장과 3장에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마쳐질 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고 말씀해 주심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없이는 진리의 말씀을 공교한 이야기로 돌릴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육으로는 영으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으려니와 믿을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5:2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6:13절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일에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들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듣고 깨닫고 믿는 일은 허락된 사람들이 따로 있는데 이들이 잃은 양들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된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13:10절-12절에서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드린 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 주신 본문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혜가 남달리 출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천국의 놀라운 비밀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가 내세운 두 가지 증거

  베드로는 이 진리를 증거 하는 일에 두 가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1) 한 가지는 자기 자신의 체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사도가 없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사도란 주님과 생활을 함께 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15:27절에서 예수님을 증거할 자격자를 말씀하심에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재판에서 증인의 역할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 무죄에 대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에 주님께서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으신 모습을 친히 목격했으며 주님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 이상 확실한 증거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확실한 일에 기초를 둔 증거이므로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베드로는 19절에서 ‘또 우리에게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여기서 예언이라고 한 말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곧 기록된 성경을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예언은 베드로가 친히 변화산에서 본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이 같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하여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어두움이란 죄악 세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요한은 이에 대하여 요1:5절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등불은 분명히 세상에 비취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비취어지는 이 등불은 성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속에 비취어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19절 종반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샛별이란 다시 오시는 재림 주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기까지 너희가 이런 예언에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주의한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연구하고 살피고 읽는 일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이 있습니까? 이 빛을 따라 어두움이 거치고 날이 새어 주님이 오시기까지 여러분의 생애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예언의 풀이

  (베드로후서 1:20-21)


  20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예언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1. 예언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예언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첫째로 예언은 사람의 말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이란 사람이 생각한 것을 자기 이성이나 자기 판단에 따라 기록한 글을 말합니다. 사람의 말 중에도 유명한 명언이나 금언이 있어서 소위 ‘어록’이라고 하여 역사에 길이 남기도 하며 민족적인 교훈으로 길이 보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무리 유명 인사나 지도층 인사가 한 말이나 글이라도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런 일과는 상관이 없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2)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글이나 말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이란 언제나 육신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현세적인 일이요 물질적인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이란 영적 일이요 내세적인 일이기 때문에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3) 다음에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받아야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구약 시대의 감동은 대개의 경우, 선지자의 입술에 말씀을 주심으로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자기 입으로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토를 달았습니다. 겔7:1절의 경우를 예로 들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감동하심은 사도들의 심령 속에 영감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인 하나님의 오묘하신 진리를 깨닫거나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글로 써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벧전1:24절에서 이르시기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개 됨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당신의 모든 말씀을 완전히 나타내셨습니다. 계1:2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3. 예언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예언의 풀이는 세상 학문의 풀이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사로이 푼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인간의 이성으로 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의 이성적인 지식으로나 명철로 깨달을 수 있거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성경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풀이하려는 여러 가지 신학적 방법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결론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방식의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무오한 말씀으로도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비이성적인 신화는 빼야 한다는 것이 그 사람들의 주장인 것입니다.

  (2) 성경을 사탄의 간교한 지혜로 풀이하는 일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구인회란 자칭 예수는 계21장에 나오는 천국의 성곽의 척량이 144규빗인 것을 1+4+4 = 9란 방식으로 해석하여 구씨인 자기가 천국의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3) 종말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도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방법으로 할 것입니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구원의 도리가 여기서 나오며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예언의 해석에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결론 : 올바른 성경 해석은 올바른 설교와 연결이 됩니다. 특히 주의 종들은 성경을 바로 배우며 연구해야 하며 양 무리들은 그 말씀을 잘 분별하며 또 그 말씀을 영적으로 잘 받아 드려 올바른 신앙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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