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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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장 (23 - 26)
 밤중소리  02-01 | VIEW : 1,627



  (23) 지나간 때가 족한 죄악 생활

  (베드로전서 4:1-5)


  본문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강조하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본 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한 말은 육체의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고난을 마치 갑옷처럼 삼으라는 뜻입니다. 갑옷이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이 몸에 방패로 무장하는 옷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치 영적 싸움을 싸우려 나가는 전사들과 같으므로 죄와 싸울 때 입어야 할 영적 갑옷을 입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육체의 고난이 유익

  1절과 2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이 성장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신앙의 성장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일에 큰 유익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고난이란 육신적으로는 싫지만 영적으로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히12: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1절에 있는 말씀처럼 고난을 통해서 죄를 그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범죄의 습성은 믿습니다로 그냥 고쳐질 수가 없습니다. 징계를 주시고 고난의 역경을 걷게 하심으로 그 과정에서 죄를 멀리하고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오는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고 죄를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대개 완강하고 완악했던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를 보게 되는데 그들에게 온 육체의 고난을 통해서 이런 결실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119:67절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했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말씀해 줍니다. 시34:19절에서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나 태도는 항상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란 이제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내 생애 전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과거의 죄와 허물은 모두 용서하시지만 이제부터의 나의 생애는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강력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하나님은 내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2. 지나간 때가 족한 우리의 죄악된 생활

  3절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난날 자기 생활에 있었던 죄에 대하여 미련을 갖거나 아쉬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지나간 날 우리가 즐겨 행하며 우리의 생활에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를 그 가운데로 이끌어온 죄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음란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 음란의 요소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소욕은 절제하기가 어렵고 그 유혹 앞에는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강력한 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로는 지나간 때로 족하게 여겨 이런 유혹에 이끌리거나 그 함정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다음에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정욕이란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대개의 경우, 비도덕적인 요소가 작용하며 죄악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정욕을 억제해야 하며 정욕이 불같이 일어날 때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불을 꺼야 하는 것입니다.

  술취하는 일이나 방탕이나 연락이나 무법한 우상 숭배 등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의 생활 습관이나 그의 육신적인 욕망을 따르면 안됩니다. 이런 일은 우리들이 이방인으로 살아갔을 때 그 때의 생활로 족하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결론 :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으며 이상히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비방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결국 심판자이신 주님 앞에 가서 자신의 행동을 직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행했던 그런 육체의 일에 마음을 빼앗길 사람들이 아니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4) 종말 성도의 기도와 사랑과 봉사

  (베드로전서 4:6-11)


  베드로 사도는 6절에서 심판의 하나님에 대하여 경종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시며 모든 사람들은 그 심판대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직고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죽은 자란 그간 육신이 죽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고 산 자란 하나님이 심판하실 그날에 살아서 그 앞에 설 생존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므로 이 심판을 받을 영적 생명들이 그 육체가 살아 있을 동안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복음을 들어야 할 일은 육체는 죽어야 하지만 영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라

  베드로는 우리에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경종해 줍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란 말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심판은 일곱 대접 심판으로 마쳐집니다. 이 날에는 땅속에 이미 예비된 하나님의 불로 온 세계가 불타게 되어 땅속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기가 매우 가까운 때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종말 성도들에게 세 가지 점을 경계했습니다. 하나는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라리는 말은 지금은 잠을 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적같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라고 한 말은 지금은 게으름을 필 때가 아니란 뜻입니다. 롬12: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부지런해야 하며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또 열심을 품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교회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재림에 소망을 가지고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근신하여 기도하라

  다음에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신의 정욕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 일이 하고 싶지만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의 생활이 근신하는 생활입니다. 근신은 시련과 인내가 밑거름이 됩니다. 우리에게 오는 시련은 우리로 근신해야 할 수 있는 훈련이 되며 인내는 그 자체가 근신의 다른 한 면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생활을 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생활의 방향이 기도와 전혀 다르다면 그런 기도에는 능력도 없으려니와 응답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활이 기도에 합당해야 하고 그 신앙적인 방향이 기도의 방향과 한 방향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기도 생활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3.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다음에 8절에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사랑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허물을 덮어줌이 없이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나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구원의 확신을 주고 믿음의 능력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유익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사랑하는 생활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서로 대접하는 일에 원망하지 말고 기쁘고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다음에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봉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청지기는 종처럼 헌신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들입니다. 서로 봉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론 :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가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한다는 자만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25)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

  (베드로전서 4:12-16)


  베드로 사도는 1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 중에 당하는 시험에 대하여 ‘불시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험은 불로 연단하여 하나님께서 쓸만한 연장을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시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련이란 말은 연단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시험은 우리의 유익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익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생활이 믿음 가운데서 온전해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시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받기 위한 하나의 훈련 과정으로 우리의 생애에 반드시 따르게 마련입니다.

  1.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베드로 사도는 이런 불 시험이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축복의 하나님을 믿는데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오는 것일까? 하나님은 나의 길을 형통케 하시고 평안한 길로 인도하실 터인데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이 찾아오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의심하고 낙심하면 안됩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자기가 당하는 시험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이상이 여기는 일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면 그는 시험을 통해서 회개하여 더 큰 은혜를 받았으며 한평생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의인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혹독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시험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며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있었고 더욱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는 더욱 큰 사명을 받을 수 있었으며 주의 이름을 위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형태이건 믿음의 선진들이 겪은 이런 시험을 우리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시험이 우리의 생애에 어려움을 주고 많은 고통을 주기 때문에 베드로는 ‘불 시험’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자기에게 닥쳐 올 때 이상한 일을 만난 것처럼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의 복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시험이건 부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인 것입니다. 이런 값있는 시험을 기피한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에 누락될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애통할 일입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불 시험이 어떤 것이건 그 시험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이길 수 있고 그 시험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혹이 자신의 실수나 과실로 시험이 왔다고 해도 그런 시험에서 고난을 잘 참고이기면 그 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진다면 시험에서 오는 고난을 이길 수 있으며 그 일이 오히려 자신의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의 고난에서 오는 유익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낼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 누가 그 앞에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까? 불같은 시험을 많이 당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14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시험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이요 다른 하나는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받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영광스러운 고난이지만 자기 죄악의 결과에서 오는 고난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로는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이란 말씀을 순종하는 중에 오는 고난을 말합니다. 순종에는 핍박과 인내가 따르기 때문에 고난의 짐을 져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도 그런 고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그 고난이 지기 싫어서 우리는 전도하는 일에 얼마나 나태한 것입니까?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추구하다가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박해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 앞에서는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결론 : 우리가 이런 일로 고난을 받을 때 절대로 부끄럽게 여기면 안됩니다.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생애에 이런 고난이 많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 이런 고난을 감사함으로 지고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베드로전서 4:17-19)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시련, 그리고 주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경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세상 사람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의 순서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에 앞서 먼저 그의 집인 하나님의 교회부터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계9장에 나오는 첫째 화는 교회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교회의 심판이란 말은 알곡 중에서 쭉정이를 갈라내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버리고 음녀 세력을 이루었던 세속적인 교회도 불에 사름을 받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왜 심판이 교회로부터 시작되느냐? 이 문제는 세려 요한이 마3:11절과 1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일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는 일로 이 일이 종말에 첫째화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일은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을 말합니다. 지구가 불에 살라짐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타작마당의 쭉정이들도 이 불에 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렘25:29절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겔9:3절에서 6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두려움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죽음의 재앙을 내리실 때, 먼저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인을 치라고 명하시고 그 이마에 표 없는 자들을 모두 죽이되 ‘내 성전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성전에서 시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시작하라는 명령이며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이란 교회의 목사, 장로, 권사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약3:1절에서 무엇이라 말씀한 것입니까?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영광이 큰 직분은 그만큼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의 두려운 심판

  베드로 사도는 18절에서 ‘만약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의는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는 의로운 행실과는 상관이 없으며 법적으로 보장된 의로 우리는 이 의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 겨우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어쩌다가 얻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애 동안에 많은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고 시련 중에서 고통을 당하며 선을 이루기 위해 많은 어려운 길을 걸어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렇게 쉽게 그냥 흘러온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 생애를 살아가면서 본향에 소망을 두는 가운데 많은 눈물을 흘리며 고난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에서 자기 정욕과 세상의 욕망대로 살아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날에 설자리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나 죄인들은 주님 앞에 설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시험은 우리의 구원에 유익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일진대 이런 고난에는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고 우리들로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축복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베드로가 본문에서 주장한 대로 인내함으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판을 우리에게 먼저 하신다는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 날에 누구에게나 안전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진리에 굳게 서서 끝까지 인내하여 재림의 주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안전한 곳이여 피난처가 되지만 쭉정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 : 교회안에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로 자라는 불행하고 저주스러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말로 영광스러운 나라의 유업을 이어 받을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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