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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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 (15 - 22)
 밤중소리  02-01 | VIEW : 1,095



  (15)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복

  (베드로전서 3:1-5)


  성경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는 최대의 요구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우리들 가정이 이 같은 구원의 격전장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가정이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온 가정이 구원을 이루는 일은 성경에서 굉장히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의 가정도 베드로가 방문한 고넬료의 가정도 모두 온 가족이 구원받은 가정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남편에게 순복하라

  우리는 1절에 나오는 말씀에 대하여 너무 고루하고 일방적인 구시대적 교훈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읽어보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기본 권리나 구원의 대상이나 축복에 있어서 남녀간의 구별이 없습니다. 특히 성적인 범죄, 간음죄에 있어서도 여자들만 일방적으로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쌍방이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남녀 동등권이 보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 있어서의 남편과 아내의 위치, 가정의 질서를 위한 남편과 아내의 권리에 있어서는 분명한 한계선이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의 남편과 아내의 위치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으로,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믿지 않는 남편을 가진 가정에서의 아내의 슬기로운 생활 태도를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순복이란 말은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의미로 절대적인 복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같은 규율은 하나님이 애초부터 정하신 가정의 법도인 것입니다. 이런 법도가 무너질 때 그 가정은 질서가 무너지게 되고 질서가 무너진 가정은 평화로울 수가 없으며 가정의 행복을 찾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아내가 순복하는 방법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순복하는 일에 있어서 ‘이와 같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1) 베드로가 말하는 ‘이와 같이’란 말은 2:18절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주종관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마치 사환이 주인에게 순복하듯 그런 자세로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에서의 지위나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복 관계에 대한 하나의 예인 것입니다.

  (2) 엡5:21절에서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라는 남편에게 평생 복종하면서 살았는데 그 태도가 마치 주께 복종하듯 사랑과 공경과 순종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엡5:24절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온몸이 머리에 순종해야 몸이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이유를 선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 밑에서 좋으나 싫으나 노예처럼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아내의 자유에 속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고전7:14-15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을 가진 아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벗어버리려 하지 말고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기 생애를 희생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 그 아내는 남편에게 어떤 행위를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2절에서 정결한 행위를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단장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아내의 정결한 행위는 믿지 않는 남편으로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결론 : 남편은 아내의 신앙의 진가를 판별하는 감시병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의 신앙의 진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믿지 않는 남편입니다. 그에게 인정을 받는 신앙을 가진다는 일은 그 사람의 구원에 전제조건이 됩니다. 불신 남편의 구원을 위해 진실한 믿음을 정결한 행위로 보여 주는 아내가 되도록 힘쓰는 아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6) 속 사람의 단장

  (베드로전서 3:3-6)


  베드로 사도는 3절 이하에서 여인이 갖추어야 할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겉모양의 단장은 진정한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요 속 사람의 단장이야말로 여자들이 취해야 할 참 단장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다운 여인

  여자는 아름다움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단장으로 그 몸에 덧입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인다는 의미에서보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가꾸려는 마음은 거의 본능적입니다.

  자기 미모에 자신감을 가진 여자들은 교만합니다. 자신의 미모에 스스로 미혹되어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잠31:30절에서 여인의 미모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자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자기 배우자를 선택할 때, 얼굴의 미모만 바라보고 장가들었다간 큰코다친다는 사실입니다. 얼굴 고운 것은 거짓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 얼굴이 영원히 그 상태로 존재할 것이 못되고 나이에 따라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양귀비 같은 얼굴도 나이만 들면 할머니 얼굴이 되며 죽으면 송장의 모습으로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따라가는 남자는 거짓된 것과 헛된 것을 붙잡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 헛된 것과 거짓된 것으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2. 여자가 단장해야 할 몸

  하나님은 여인들의 참 미모에 대하여 성경적인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세운 미모의 표준에 의해 여인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표준에 의해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여자가 자신의 미모를 영원히 간직하고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께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정을 받는 일에 대한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외모는 무엇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1:24절에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고 말씀하고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시온의 딸들이 사치할 일에 대하여 이사야를 통해서 경종하셨습니다. 사3:16절에서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장식품에 대하여 발목거리,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 귀고리, 팔목 고리, 면박, 화관, 발목 사슬, 띠, 향합, 호신부, 지환, 코고리, 예복, 겉옷, 목도리, 손 주머니, 손거울, 면사포 옷, 머리 수건, 너울 등이라고 했습니다. 시온의 딸이란 여자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세속적인 사치 생활을 삼가야 합니다. 돈이 있고 생활의 여유가 있고보면 여자들이란 누구나 이런 몸치장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30장에서 아굴은 말하기를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돈이 생기면 그 돈을 몽땅 하나님의 사업에 쓸 것 같지만 돈이 손에 들어오면 갈 때 생각 다르고 올 때 생각 다르다고 우리의 마음이 변덕스럽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시139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옵시며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는 간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여인들이 단장해야 할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4절에서 하나님 앞에 값진 단장의 비결에 대하여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고 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숨은 사람은 어떻게 단장하는 것입니까?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온유하고 안정한 것이란 딤전2:10절에서 이 같은 단장에 대하여 ‘선행’이라고 한 것입니다. 딤전3:11절에서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여자들의 단장인 것입니다.

  그 얼굴이 아무리 미모로 다듬어진 여인이라도 은혜가 없는 생활, 믿음에서 떨어진 생애를 보낼 때 보세요. 어찌 그리 흉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요?

  결론 : 정말로 아름다운 여인은 하나님 앞에 값진 여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눈에 예쁘게 보이려고 외모로 치장하는 여인입니까?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나님 앞에 값진 것으로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시키십니까? 값진 단장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시는 단장으로 아름다움을 가꾸시는 여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7) 남편의 아내에 대한 태도

  (베드로전서 3:7)


  오늘 본문 7절에는 남편된 자들에게 주는 아내에 관한 교훈이 나옵니다. 남편들이 아내와 동거하는 일에 세 가지로 교훈을 삼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부부 관은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의무만 강요하거나 어느 한편만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그런 불합리한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을 주께 대하듯 공경하고 순복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남편의 노예 같은 존재로 인식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 대한 응당한 대우와 사랑과 존경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도 아내들과 동일하게 아내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한평생 함께 동거해야 할 아내에 대한 남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했습니다. 지식이란 난하주를 보면 말씀이라고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여자의 특성이라든가, 성품적인 조화, 부부 생활의 본질 등 이 같은 여러 문제에 있어서 단독적인 판단이나 남성 본위의 생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처신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아내에 대하여 ‘더 연약한 그릇’임을 알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연약하다는 말은 연하고 약하다는 뜻으로 밟히면 짓눌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면 날려가고 던지면 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내를 조심스럽게 다루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랑으로 감싸주고 이해해 주라는 뜻입니다. 창2:18절에서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도와주는 배필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에 대하여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배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연약한 그릇일진대 소중하게 간직하여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억압적으로 굴복시키는 일은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참 이유에 대하여 7절에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아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일에 있어서 아내나 남편이나 하등 구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유업을 이을 자란 사실을 잊지 말고 협력하는 생애를 살아가야 하며 서로 신앙 생활에 유익하도록 신앙적 유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본향을 찾아 나그네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생활에 협력자와 동반자로 부부를 결합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아내들이 비록 남편보다 한 단계 낮은 자리에서 남편을 섬기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동등한 자녀로서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한쪽이 죽으면 부부관계는 끝나는 것입니다. 천국에까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먼저 죽으면 남자면 장가가도 상관이 없으며 여자는 시집가도 죄가 안돼는 것입니다. 부활한 후에도 서로 다시 만나 부부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의 관계, 부부 생활은 단지 이 세상에서 뿐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서로 외롭지 않고 또 태어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생산하기 위해 부부 관계가 필요한 것이지 그 외에 다른 의미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부부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차별이 없는 한 형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귀히 여기라는 말씀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알라는 뜻입니다. 아내란 남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내가 없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평생 자신을 반려자로 자기 인생을 보살펴 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해 주며 가정에 따듯한 사랑의 분위기로 아름다운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존재가 아내이기 때문에 이 존재를 귀히 여기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네 아내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에 대하여 대단히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함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7절 종반에서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화평은 순복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들 가정에 이것이 없으면 기도가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다스리고 비인격적으로 다룬다면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내와의 사랑과 화평에서 더욱 힘있게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서로의 의무를 이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18) 복을 유업으로 받을 자의 생활

  (베드로전서 3:8-9)


  그리스도인들은 복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입니다. 이 복은 물론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엡1: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예정하신 자들에게 약속된 복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려고 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런 복을 받을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를 부르신 목적

  우리들이 부르심을 입을 당시에는 우리는 복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이요 복을 받을 공로라고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생활도 이런 생활을 계속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가 세상에서 문벌 좋은 자들도 아니며 지혜 있는 자들도 아닙니다. 세상의 미련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로 세상의 강한 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의 뜻은 우리들로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열매를 맺히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열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의 죽으심에 함께 죽었으며 그의 살아나심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참 뜻은 우리들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도 마7:19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셨습니다.

  2. 형제들에 대한 사랑

  그런데 요즘 교인들을 보면 한심스러운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교회에는 열심히 나오기는 하는데 그의 생활에는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곳에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열매에 대해서 몇 가지로 구분하여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베드로 사도는 먼저 기본적인 교인들 간의 생활 자세로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들입니다. 한 몸에 함께 붙어서 함께 움직이는 한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을 같이 하는 생활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손이니 눈이 아니라고 싸우면 그 몸은 파괴됩니다. 손이나 눈이나 마음을 같이하여 한 몸을 이룰 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2) 다음에 체휼하라고 했습니다. 체휼이란 말은 다른 사람을 동정해 주는 따듯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 것같이 생각하여 마음이 뜨겁게 움직이는 동정을 말합니다.

  (3)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라고 한 말은 지속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가치는 그 사랑을 오래도록 지속한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은 남에게 베풀지만 실은 그 효과는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받는 사람보다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있습니다. 사랑은 더욱 큰사랑으로 승화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4) 불쌍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집안처럼 모이고 예배드리며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불행을 당한 많은 형제들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라는 말은 그들에게 따듯한 온정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혹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입원 중에 있는 형제들 혹은 천재지변으로 집이나 전토를 잃고 거리에 나서게 된 형제들, 혹은 갑작스런 사고로 불행을 당하게 된 형제들, 어려운 살림으로 식생활에 고통을 당하는 형제 등, 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 내가 겪는 것처럼, 내 가족이 당한 것처럼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사랑의 손길을 뻗혀야 할 것입니다.

  (5)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모든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서로간 겸손한 자세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교만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을 제치고 자기가 머리가 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교만자의 대적자가 되실 것이라고 경종해 주셨습니다.

  (6)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는 일은 원수를 자기가 갚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게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할 일은 원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원수에게 복수할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욕을 축복으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복을 빌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를 위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결론 :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하고저 하면 안됩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의 영역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실 자에게라도 선을 베풀며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복을 유업으로 받아야 할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9) 생명을 사랑하는 자의 열매

  (베드로전서 3:10-12)


  베드로 사도는 복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에 대한 사랑의 열매를 열거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구약 시편34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들이 스스로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

  우리는 10절 말씀에서 우리의 이목을 이끄는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란 말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결실을 맺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려면 믿음과 소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을 귀히 여깁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말은 구원받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참으로 귀합니다. 이 생명의 가치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며 이 생명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부활을 약속해 주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육으로 심는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심어 영생으로 거두는 생활을 하며 이런 영적 생활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성령으로 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갈6:8절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란 천국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날이 약속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좋은 나를 바라보고 살아가며 그 좋은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생활은 자기 인생을 세상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소망을 이루는 한 과정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 길을 나그네로 여기고 그 종착점이야말로 좋은 날을 볼 수 있는 그 좋은 곳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롬8:24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요14:1절 이하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친히 예비하신 그곳에 갈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 분의 다시 오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사모하는 것입니다.

  2. 이런 자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러면 이런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십니다.

  (1) 첫째로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악한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악한 말이란 모략, 모함, 거짓말, 욕하는 말, 악담하는 말, 저주하는 말 등으로 생명을 사랑하거나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2) 다음에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궤휼이란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트리는 일을 말합니다. 사기로 골텅 먹이는 일입니다. 고의로 잘못된 길로 남을 이끄는 일 등이 궤휼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3)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악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악인을 인도하려고 악한 무리 속에 들어가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은 악에서 떠나라, 어두운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4) 화평을 구하여 화평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은 용서와 이해와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에 머물러 있어도 그곳에 화평을 심어줄 수 있는 화평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은 소경도 아니시고 귀머거리도 아니십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응답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상실하면 소망이 아니라 허공을 맴도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믿음은 생명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 생명을 가꾸고 성장시켜 그 나라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날이 온다는 사실을 믿고 그날을 사모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0) 선행과 의를 위한 고난

  (베드로전서 3:17)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생이나 고난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솔로몬 왕은 전2장에서 사람의 생애에 대하여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냐 일평생에 근심하여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고 술회한 것처럼 우리의 생애에 슬픔과 수고를 빼 놓으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시련이나 고난은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것처럼 죄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벧전2:20절에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명심해야 할 일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고난으로 이 고난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에 대해서 14절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고 했으며 17절에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

  베드로 사도는 13절에서 권면하기를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말씀해 줍니다. 열심히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선한 일을 열심히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엡2:10절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은 보편성을 띈 선이라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려면 선한 일에 대한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잠3:27절에서 이르시기를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욕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우리 손으로 이제는 선을 이루는 일에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하되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열심히 하라는 말씀은 선과 악의 싸움에 있어서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편에 서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는 선한 보응이 있습니다. 금생의 축복과 내생의 상급입니다. 비록 그 선을 가로막는 고난이 따르는 경우가 있겠지만 낙심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갈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않으면 거두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전3장에서 솔로몬 왕은 ‘사람이 사는 동안에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알았다’고 말씀했습니다. 선을 열심히 행하여 심으면 그 열매는 반드시 평안과 건강과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2.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생활

  베드도 사도는 14절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선과 의는 어떻게 구별 짓는 것입니까? 선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일반적인 도덕적 행위를 나타나는 열매를 말합니다. 그러나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된 진리에 속한 문제인 것입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일은 일반적인 고난을 가리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입니다.

  선을 행할 때 그 선행에 대하여 해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으려고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의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에는 놀라운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마5:10-12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5절과 16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의를 위해 간직해야 할 몇 가지 사실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고 했습니다. 핍박자들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이런 협박과 공갈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로 소동치 말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비방하고 무시하며 매도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그들에게 그 소망에 대한 대답을 늘 준비해 두며 온유와 두려움으로 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양심적인 생활을 못하면 비방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결코 악을 행하는 일로 고난을 받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이 그리스도인인 까닭에 선행을 함으로 고난받는 일이 있다해도 차라리 그런 일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야지 악을 행하는 일로 고난을 받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를 위해 고난을 받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의를 위한 일로 고난을 당할 때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21) 옥에 있는 영들

  (베드로전서 3:18-20)


  성경에는 여러 곳에 해석하기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로 교파간의 교리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구원론에 대한 차이점이 생겨났으며 신학적인 견해 차이를 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난해 구절이라고 말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19절이나 20절 말씀이 그런 난해구 중에 하나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내용인즉 문맥을 따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영으로 살리심을 받아 그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영들이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 순종치 않았던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본문을 해석함에 세 가지 방법으로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 시대에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의 날 불순종하여 옥에 갇혀 있는 영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전파하셨다는 설 등입니다.

  1. 종말론적인 문제

  이 문제는 종말론에 깊이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모로 연구하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 시간에 이 문제에 관하여 성경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문제점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말은 부활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육의 몸이 죽지 아니하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2) 두 번째 문제점은 19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옥에 있는 영이라고 하신 그 옥이란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옥은 지옥이나 음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옥에는 많은 사람들의 죽은 영이 거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영이 한정되어 있다고 말씀해 줍니다. 20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인데 노아의 날 불순종했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3) 옥에 있었던 영은 이처럼 노아의 시대 사람으로 한정시켰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파했지만 그들은 그 경종을 믿지 않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장사하고 집을 짓는 생활을 하다가 멸망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겨우 여덟 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당시 물로 심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불신자였으며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이 겨우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셋의 후손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섬겨온 하나님의 아들들이 많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를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홍수 심판으로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시사해 주는 말씀이 고전5:4절에 이처럼 나와 있습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살아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들은 비록 불순종으로 물의 심판을 받아 육신으로는 죽임을 받았지만 그들에 대하여 특별히 배려하시어 옥에 가두어 두셨다가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그의 영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그들로 옥에서 풀려 나와 천국에 가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구속사상 오직 한번뿐인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20절에서 노아의 날에 불순종한 영들이라고 그 대상을 지적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영들입니다. 결코 지옥에 있는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 영들이 불신자들이라면 구태여 노아의 방주가 등장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노아 시대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상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주님의 전파하시는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불순종한 죄로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받아 육체적인 심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홍수 심판으로 죽은 굉장히 많은 수효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혼들을 천국으로 보내시지 않고 옥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만드시어 그곳에 그리스도의 날까지 갇혀 두셨다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 옥에서 풀어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신학적으로나 구원론적인 면에서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연옥과 연결시켜서는 안됩니다. 연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단 한번뿐인 일로 예수님의 영의 전파로 이미 끝났습니다. 그 시대적 배경을 노아 시대로, 그 대상을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사람들로 국한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노아의 시대 외 다른 시대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22) 세례의 의미

  (베드로전서 3:21-22)


  물과 세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세례는 물로 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세례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그 근거는 율법에서 물로 정결케 하는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외칠 때,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베푼 사실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마3:5절에서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란 물로 씻는 정결케 하는 율법적 의식에 근거를 둔 것으로 부정한 것들을 물로 씻어 정결케 하는 것처럼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물로 세례를 받으므로 정결케 한다는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물 세례의 정확한 기원과 그 시작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요한은 마3: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란 말에서 회개시키는 율법적 의식에서 이 세례가 등장했으며 세례를 받음으로 정결함을 받은 줄로 여긴 것입니다.  

  1. 세례의 기원

  베드로는 세례의 기원을 노아의 방주에다 두었습니다. 그 당시 물은 두 가지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는 심판의 역사인데 회개를 거역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역사를, 회개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이처럼 물은 심판과 회개의 한 상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전10:1-2절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널 때 홍해가 갈라져 그 가운데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홍해라고 하는 거대한 물 가운데를 지나감으로 물로 정결함을 받은 것으로 비유하여 바울은 세례와 연계시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죄를 이기시고 죄에 대한 심판을 이긴 표입니다. 노아가 방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물의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표로 삼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구원의 표라는 표현은 구원의 증거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표가 상품이 아닌 것처럼 단지 표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전12:13절에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세례는 성령 세례인 것입니다. 구원의 증거도 성령 세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물세례를 받는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런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이 없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표로 삼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소유자인 사실을 믿을 때, 세례가 우리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2. 세례의 참 뜻

  21절에는 이 같은 세례의 참 뜻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세례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죄의 사유는 결코 세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수 백 번 받았다해도 그것만으로는 옛 사람 그대로이며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물은 정결케 하는 하나의 의식의 표현이요 물로 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하나의 의식적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는 성령의 세례로서만이 실제적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눈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곧 물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요는 물로 세례를 받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는 목적이 실제적인 성령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 받은 사람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새로운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 두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골 3: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중생치 못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고 받지 않고 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세례를 받았다면 죄에 죽고 의로운 생활로 새로운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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