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이메일 : bamjoongsori@bamjoongsori.org

 

  
히브리서 13장 (93 - 99)
 밤중소리  02-01 | VIEW : 2,195



  (93) 가장 긴요한 권면

   (히브리서 13:1-4)


  히브리서 13장은 히브리서의 결론으로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생활의 권면과 당부가 나옵니다. 특히 1절로 4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가장 긴요한 몇 가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과 손 대접하는 일과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들을 생각해 줄 것과 혼인을 중히 여기며 침소를 더럽히지 말 것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형제 사랑하기와 손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1절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란 단어는 혈육적인 형제를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 연합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2:11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가 되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25:40절에서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심문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내 형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형제의 사랑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용서에 있습니다. 이 용서는 거의 무제한적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고 한 가지로 슬퍼하며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랑은 교회를 이루는 끈끈한 연결 줄입니다. 이 사랑의 줄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교회가 믿음으로 견고해 지며 사탄의 공격과 핍박으로부터 진리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손님 대접하는 일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천사를 대접했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인데 아브라함이 자기 집을 찾은 손들을 극진히 대접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알고 보니 여호와의 사자들이었으며 이 일로 아브라함은 이삭의 잉태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확고히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도 주님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이란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마25:35절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3절에서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옥에 갇힌 자들과 학대를 받는 자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혼인을 귀히 여기란 말씀은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는 끝까지 한 몸으로 서로 사랑하고 위로해 주며 존중해 주라는 뜻입니다. 혼인을 경히 여기는 나머지 혼인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쉬 이혼을 하거나 부부간 경망스럽게 행동하는 일은 마땅히 금지되어야 합니다.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부간의 침소는 깨끗하고 거룩합니다. 부부간의 성적 결합을 더럽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침소를 더럽히는 경우가 더러운 것입니다. 침소를 더럽힌다는 말은 혼외 정사를 뜻합니다. 침소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부부지간입니다. 이를 벗어나면 침소를 더럽히는 결과가 되며 이런 일은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침소를 더럽힌다. 음행한다, 간음한다는 말은 모두 비슷한 내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모두 성생활에 관한 경종이 되는 말입니다. 왜 성경에서는 이런 성적 범죄에 대하여 엄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성적인 범죄는 인간의 도덕적 마지노 선이 무너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의 질서가 무너지면 가정이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 질서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음행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한 음란한 행위를 말합니다. 짐승과의 교접이나 남성들간이나 여성들간의 동성애 등의 온당치 못한 성행위를 가리킵니다. 간음이란 말은 율법적인 의미가 주어진 말입니다. 부부간이 아닌 이성과의 음란한 행동이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에 대하여 엄히 다스리시겠다고 경종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이 금하신 죄에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경건의 연습이 필요하며 죄에 대하 두려움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신앙적인 의지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부부생활과 지식을 가지고 이처럼 무서운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94)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히브리서 13:5-6)


  본문 5절에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생애에 지침이 되는 교훈입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란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1. 돈을 사랑치 말라

  5절에서 ‘돈을 사랑치 말라’고 했습니다. 돈 곧 재물에 대한 경종은 성경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딤전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왜 이처럼 돈에 대하여 대단히 위험한 것처럼 경종해 주는 것입니까? 돈은 정말로 우리가 가까이하면 안될 그런 존재인 것입니까? 그러면 왜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까?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의 비중을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재물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애 중에 우리에게 내리시는 축복 가운데 하나일 뿐, 그것을 섬기거나 우리의 마음을 재물에 빼앗겨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딤전6:9-10절 말씀을 찾아보시겠습니다. (       ). 이 말씀에 따르면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을 사모한다는 의미로 나와 있습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사람이 어떤 대상을 우러러 받들고 마음으로 섬기는 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연히 돈에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미혹은 우리로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롯이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발람이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러했고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재물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재물에 초연 하라든가 재물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소유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사업을 경영해서 많은 재물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일은 결코 죄악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축복이기도 합니다. 돈에 마음이 빼앗기고 돈에 의해 자기 생애가 좌지우지된다면 이런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결국 돈 때문에 믿음에 큰 손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생활 태도는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 생활에 대하여 언제나 만족스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에 대하여 족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안다고 해서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며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법칙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재물은 날로 많아지며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며 저축하므로 더 나은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족한 줄 모르는 사람은 미혹을 받기 쉬우며 부정한 방법에 마음이 기울기 쉬운 것입니다. 현재의 내 생활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장차의 축복을 만들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나를 돕는 자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그가 우리의 모든 생애를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면 그 분이 그의 백성들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그가 언약하신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입니다. 마6:31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모든 일에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만의 비밀한 비법을 가리켜 주신 것이 아닙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란 말은 과연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또 나를 떠나지도 아니하시니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는 이처럼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만 확고히 가진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데 사람들이 내게 어찌할 것입니까?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난하건 부유하건 높은 자리에 있건 낮은 자리에 있건 잘살건 못살건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합니다.





  (95)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13:7-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이루신다는 사실과 이 같은 진리는 창세 전에 이미 결정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을 택정하신 사실을 의미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가르치며 말씀으로 인도하던 인도자들을 생각하여 그들의 교훈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을 본받아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라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르고 성도들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리리 호숫가에서 가진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너는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에는 주님의 양인 교회의 성도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인도하는 목자가 있습니다. 이 목자는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에 의해 관장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를 받은 교회에게 이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인도해 온 지도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두고 때때로 그들이 가르친 교훈을 추억하며 자기의 신앙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은 그들이 어떤 생애를 지냈으며 어떤 모습으로 그의 생애를 마쳤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를 이끌어 온 교회의 지도자들, 하나님의 종들은 대개의 경우, 핍박 중에 고통을 당하며 시련 중에 환난을 이기면서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들의 생명까지 복음을 위해 버리는 순교의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그 같은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동일하시다.

  8절에 나와 있는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그의 구원을 이루시며 그 아들을 믿음으로만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하도록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주시고 신약 시대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사실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절대적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10:8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창세 이후로 양의 문이신 구원의 주는 오직 예수님 뿐이란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11:26절에서 모세의 믿음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7절에서 말씀하신 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온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했으며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은 바뀌고 시대는 변해도 그 분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주이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히브리서 기자는 9절에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교훈으로 잘못된 교훈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 다른 교훈의 하나가 그 다음에 나오는 식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음은 은혜로써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식물이란 말은 구약에 나오는 율법적인 규례를 의미합니다. 정결한 음식으로 깨끗케 하는 규례인데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 육체에 제한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의 예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예법 자체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것으로 온전한 것이 온 이후로는 그림자로 보여 주신 율법적 규례나 예법은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골2:16절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장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실 구속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것들을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려거나 이 같은 율법적 규례에 얽매어 신앙 생활을 하는 일은 자기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율법으로 굳게 함이 아닙니다. 어떤 음식의 규제로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로써 굳게 해야 합니다. 은혜로써 굳게 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라는 뜻입니다.

  결론 :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변할 수 없는 분입니다. 아울러 그 분에 관한 견해나 그 분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나 구원의 은혜는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님에 대한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진리를 마음에 깊이 간직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96)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브리서 13:10-13)


  오늘 본문의 내용은 구약적 제물인 짐승과 신약적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속죄의 제물로 고난을 당하신 예수를 따라 예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는 좀 어려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사실에 대한 구약과의 비교설명입니다.

  1. 구약적 속죄 제물과 그리스도의 제물

  10절과 11절에서는 구약적 제사 제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부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하는 제단은 희생 제물을 올려놓는 구약적 제단을 의미합니다. 모든 제물 중 고기는 제단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으나 속죄 일에 드리는 희생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제물은 어떻게 처리한 것입니까? 11절에서 이르기를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차례씩 속죄 일에 지성소에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때 제사장은 송아지의 피로써 자기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린 후, 백성들의 죄를 위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고기는 영문 밖에서 불사른 것입니다. 영문 밖이란 병영의 문으로 성문 밖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속죄 제물로 잡은 짐승의 고기를 불태운 것입니다. 이처럼 짐승의 고기를 성문 밖에서 불지른 이유는 속죄 제물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레16:2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쇠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라.’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1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영문 밖이란 성문 밖과 같은 뜻인데 11절에서 ‘영문 밖에서’란 말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해 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이 의미해 주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문 밖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일은 이스라엘이 속죄 일에 백성들의 속죄 제물을 불태운 것처럼 속죄 일의 속죄 제물을 온전히 이루신 사실을 나타낸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신 죄인의 자격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은 죄가 없으셨지만 그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인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저주받으신 바 되어 성문 밖에서 그의 몸을 불사르시는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짐승으로 제물을 삼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에 다시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삼는 속죄 제물을 드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9:13,1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2.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한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로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 능욕을 지자’고 했습니다. ‘그 능욕’이란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12:2절에서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신 그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참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다음에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등지고 오직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을 의미합니다. 영문 안은 멸망 받을 도성입니다. 그곳에는 소망도 없고 속죄도 없으며 영생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영문 밖으로 나와 그에게 나아가야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에는 보다 큰 소망과 보상이 있습니다.






  (97) 영구한 도성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히브리서 13:14-16)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삶의 목표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목표점을 우리가 찾아가는 본향으로 말씀해 주고 있으며 그곳을 영구한 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는 나그네길을 걷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그네는 그 길의 종착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그 나그네가 목표로 삼고 걸어가는 본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본향은 하늘에 영구한 도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 목표점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나그네길을 걸어간다면 그는 소망이 있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올 것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이 땅에는 없는 곳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은 장차 올 것인데 이 장차 올 나라는 우리가 찾는 영구한 도성으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에도 재물로는 갑부에 해당하는 거부였지만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서 살아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 ‘히11:10절에서 이르시기를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구한 도성이 없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며 호화스러운 집을 짓고 그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즐겨 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올 도성인 하늘의 성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살아갔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장에서 열거한 그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에 대하여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보다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기 위해 더 낳은 부활을 얻으려고 생명까지라도 바쳤다고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누릴 영광이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구한 도성이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이 지신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생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최상의 생활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장차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차란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애가 마쳐지고 육신을 벗어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날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주의 재림으로 오는 인류의 종말 시기를 가리킵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

  15절에서 ‘이러므로’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이러므로 란 말은 그러기 때문이란 뜻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구한 도성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1) 하나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왜 제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제사란 구약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제사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제물로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지므로 구약적 제물을 제단에 드리는 제사는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는 구약적 제물을 제단에 올리는 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찬미의 제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영적 제사인 것입니다. 이 찬미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찬미에 대하여 15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인 것입니다. 롬10:10절에 이르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마음으로 진실한 신앙 고백이 동반한 찬양은 바로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는 열매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찬미에 대해서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늘,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찬미의 제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븐 좋을 때만 부르고 예배 시간에만 부르고 어쩌다가 생각나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부르는 찬양이야말로 찬미의 제사인 것입니다.

  (2) 다음에 16절에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일은 착한 일의 열매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서로 나눠주는 일은 구제의 손길을 말합니다. 있는 자는 없는 형제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 이런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목적은 형제들에게 선을 베풀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일을 하라는데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을 주신 것은 그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데 있습니다. 그런 일에 우리의 입술을 쓰고 그런 일에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면 하나님은 더욱 많은 은혜와 재물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제사,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릴 것과 선한 일과 서로 나눠주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98) 목자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

   (히브리서 13:17)


  17절에 나오는 말씀은 양인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꼴을 먹일 목자간의 상호 관계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말씀은 물론 양 무리들에게 그들을 주안에서 양육하는 목회자에게 대할 태도에 대한 교훈적인 권면이지만 또한편 목자들이 어떻게 양 무리들을 돌 볼 것인가에 대한 목회자의 목회 자세에 대해서도 아울러 교훈해 주신 말씀입니다.

  1. 교회를 인도하는 목회자의 자세

  먼저 본문에 간단히 나온 목회자의 자세 즉 주님이 바라시는 목회자 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양 무리들의 영혼을 위해 경성하는 자임을 말씀해 줍니다. 너희 영혼을 위해 경성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경성이란 말은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는 양 무리들을 위해 마땅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목자들이 자기 양떼들을 위해 밤새워 지키며 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지 않도록 늘 보살펴 주는 목자로서의 책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다윗이 어렸을 당시 자기 아비 집의 양 무리의 목자로 양을 칠 때에 그가 어떻게 그 양 무리들을 지켰는가에 대하여 다윗의 고백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삼상17:34절에서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고 사울 왕에게 고한 것입니다.

  교회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공격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공략합니다. 하나는 거짓 진리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참 생명을 죽이는 쑥물입니다. 다음에 세상의 영화와 영광으로 유혹합니다. 기복적인 신앙은 이 유혹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시기를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은 교회가 세속에 물들어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세상의 영광과 재물을 따라가는 시대가 될 것이란 경종인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양 무리들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양 무리들을 기키는 자세가 바로 경성인 것입니다.

  (2) 경성하는 자세에 대하여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회개할 자란 말은 빚 보증인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빚을 보증하는 사람의 책임은 대단히 무겁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빚 보증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빚 보증을 잘못 서 주면 그 책임을 증인이 고스란히 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양 무리들에게 이 같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가 하나의 기업화되고 또 목회자가 권위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때문에 이런 성경적 교훈은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려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양  무리를 맡은 목회자에게 반드시 빚 보증인으로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4:45절 이하의 말씀에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에게 주시는 상급과 악한 종들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인도하는 자에 대한 양들의 자세

  교회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양들의 자세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하나는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희로 이 일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는 것입니다.

  (1)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양과 목자는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직분을 배정하셨습니다. 엡4:11절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주님은 이처럼 여러 직책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성도들을 인도하는 목회자의 직분은 귀하고도 중합니다. 이런 직분은 모든 교회 성도들이 알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교회에 세우신 목자임을 알고 범사에 순종하며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말을 인간적인 대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전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명하는 바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왜냐 하면 이들은 우리 영혼을 위해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영혼을 위해 애쓰며 힘쓰는 목회자로 그런 사명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도록 하는 일은 성도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그런 일을 근심으로 하게 할 때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일은 주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자기 영혼의 보증인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종을 괴롭히는 일은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결론 : 우리의 생애는 교회에서 시작되고 교회에서 마감됩니다. 교회야말로 양의 우리인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종을 대접하여 그들로 근심으로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99) 바울의 축복기도

   (히브리서 13:18-25)


  작년 12월 2일 처음 히브리서를 강해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오늘 아침 100회 째로 강해를 다 마치게 됩니다.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교회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을 마감하면서 그들에게 권면의 말을 쓴 것을 용납하라는 겸손한 양해를 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기를 축원하면서 서신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1. 저자의 기도와 송영과 축복

  저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하면서 그들을 향한 이 서신의 내용이 선한 양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이 편지를 마감하면서 20절과 21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말로 송영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원함에 예수님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큰 목자란 말은 양의 오직 하나뿐이신 진실한 목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목자라고 하셨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야말로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그 분은 세상에 있는 모든 양 무리들의 참 목자이십니다. 이 땅위에 목자의 직위를 가지고 양 무리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종들이 많지만 이들은 큰 목자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잠정적으로 주신 직분에 불과할 뿐, 예수님만이 영원한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입니다. 구약의 짐승의 피는 이 분 예수가 오시기 이전까지의 언약의 그림자로서의 피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그의 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완전히 이루셨으며 이제 이후로는 다른 피를 흘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로써 그가 모든 인류의 속죄의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롬1:4절에서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피로써 우리와 평강을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낸 저자는 이 평강의 하나님이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한다’는 축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여 그의 뜻대로 살 수 있기를 원하는 의지만 보인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우리의 생애를 주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선한 일에 온전케 하시는 것은 우리들로 자기 뜻을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다음에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선행은 하나님 앞에 즐거움을 주는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이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생활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우리들로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한 것입니다.

  2. 마지막 인사

  21절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이 편지를 받아 볼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로 경계하고 훈계하며 책망한 말에 대하여 ‘권면의 말’이란 부드런 말로 표현하면서 그 같은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용납하란 말은 본문에 나와 있는 모든 훈계에 비해서 보다 부드러운 말로 위로를 주려는 생각에서 사용한 말입니다. 23절에서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디모데를 우리 형제란 이름으로 부르고 그에 관한 기사를 이곳에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히브리서를 쓴 저자가 사도 바울이란 설이 유력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문안이란 주 안에서 평안을 주고받는 인사입니다. 이 서신은 아마 이 서신을 전달한 사람이나 이 서신을 받을 만한 처지에 있는 직분자가 교회 안에서 읽는 것으로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모든 사람들의 문안에 대한 인사를 빼지 않으므로 친밀감을 표시했으며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론 : 25절에서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 지어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새벽마다 이 말씀을 귀담아 들으신 여러분들에게 히브리서를 받아 읽은 그 옛날 히브리 교회 성도들에게 저자가 선언한 것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REV :   히브리서 11장(2) 11:30-40 밤중소리 
 NEXT :   히브리서 12장 (83 - 92)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