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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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장 (83 - 92)
 밤중소리  02-01 | VIEW : 1,511



  (83)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히브리서 12:1-2)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위대한 신앙의 행적을 살핀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사실들을 그들 신앙인 들의 뒤를 따라 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생활에 대한 교훈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을 경주와 연결시켜 11장의 믿음의 선배들과 한 경주장을 달린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런 경주를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경주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두 가지 있는데 이 경주를 방해하는 요소가 바로 우리의 몸을 지배하는 죄악이라는 사실과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는 일에 결정적으로 장애 요소가 되는 이 죄를 친히 다스리시기 위해 징계를 내리시며 이 징계의 결과 우리는 그 경주를 끝까지 달릴 수 있다고 하는 징계의 유익에 대해 누누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 앞에 당한 경주

  1절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달려가는 믿음의 생애는 외로운 투쟁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증거도 증인도 없는 허공을 달리는 무익한 경주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허다한 증인들은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증거로 세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이 걸어간 믿음의 생애를 본받는 일은 결코 허무한 일이 아니며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는 일에 벗어버려야 할 일과 바라보아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함에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요일2: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의 발목이 세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롯의 시대나 노아의 시대 사람들이 이런 생활을 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우리 주님께서 경종하신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 것을 사랑하는 나머지 뒤를 돌아보다가 구원의 결정적인 자리에서 소금기둥으로 굳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우리의 경주를 달리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찾기 위해 주님을 찾아 나온 한 부자 청년은 그의 재물이 그에게 무서운 짐이 되어 근심하며 주님을 떠났습니다.

  2.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다음에 벗어버려야 할 것이 ‘얽매이기 쉬운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대상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말씀했습니다. 얽매인다는 말은 얽어매어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없도록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바로 죄가 그런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날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죄가 명하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죄의 종의 자리에서 벗어났으며 죄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멀리 떠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했던 죄의 권세는 사라졌지만 죄의 세력은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탐심 가운데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들로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그 가운데 얽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고 가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런 권세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들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부려먹을 권세는 분명 상실하여 종이 호랑이가 되었지만 먹지 못할 곶감 찔러나 본다는 격으로 신앙 생활의 방해꾼으로 우리 주변을 맴돌면서 우리의 경주에 걸림돌 구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의 함정에 빠져 그 가운데 얽매인바 되면 더 이상 경주를 계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벗어버리는 일에 대하여 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죄는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굴복할 사람들이 아니요 죄와 더불어 맞서 싸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죄를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경주장을 달려야 할 경주자들입니다. 이 경주장의 목표는 주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완성을 이루는 그 나라에 가기까지 이 경주를 달리려면 먼저 세상 것으로 무거운 짐이 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를 얽매이게 하여 이 경주장의 경주를 방해하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벗어버리고 이 경주에 끝까지 달려가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84)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히브리서 12:1-2)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1절에서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위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경주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2절에서 우리가 이처럼 달려갈 믿음의 경주의 목표점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경주에는 분명한 목표지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목표가 잘못됐다면 아무리 잘 달려가도 그 경주는 허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히브리서 기자는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경주의 목표를 예수께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경주의 목표로 삼고 달려가려면 그 분이 달려가신 길을 따라 가야 할 것임을 밝히면서 그가 걸으셨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란 단어는 지배한다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믿음을 지배하는 분으로 우리의 믿음은 오직 그 분에게만 있다는 뜻입니다. 선진들이 증거와 실상으로 삼고 달려온 믿음도 그 분께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목표도 그 분께만 있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를 목표로 삼고 경주한다면 그 경주는 올바른 믿음의 경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로 오신 분이시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분 예수를 우리의 믿음의 주로 삼는다면 우리의 생애는 오직 그 분만을 위한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10:37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2.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

  다음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온전케 하신다는 말은 자기 스스로의 온전을 의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왜 믿는 것입니까?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단번에 없이해 주셨습니다. 그의 피는 우리의 죄를 소멸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히 말소해 주시므로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히7:25절에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을 믿는 일은 이미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을 보장받는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5: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 분 예수만이 홀로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이 분 외에는 다른 어떤 믿음의 주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행4:12절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분만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의 목표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에서 이 분 예수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우리도 그 분을 본 받아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는 일에 장애 되는 모든 어려움을 인내로써 이겨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이 바라보신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물론 이 일을 감당하심으로 얻으신 그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 일에 대해 빌2:6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그가 당하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부끄럽다고 마음에 새기지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그들이 겪은 시련과 핍박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히11:35절에서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5:11-12절에서 하신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결론 :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이 분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경주장을 달려가되 그 분이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시며 십자가의 부끄러움까지도 개의치 않으신 그 믿음을 본 받아 그 분과 함께 누릴 영광을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끝까지 인내로써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85)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3-4)


  3절부터는 목표점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생애에 대하여 인내로써 승리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의 주시며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본으로 삼으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교훈해 주십니다. 이 일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주시는데 하나는 죄와 싸우는 일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일입니다.

  1.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생애 달려갈 경주장은 우리의 삶에 피곤을 주며 낙심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합니다. 우리가 악과 더불어 싸울 때 그 싸움의 기간이 길고 상대방이 악랄할 때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피곤에 지치게 되는 경우를 많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오는 모든 어려움을 인내로 참으셨습니다. 2절에서 이 일에 대하여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장을 달려가면서 우리 앞에 부닥치는 이런 난관들을 만났을 때 이 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그 분이 겪으신 고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가 종의 형체로 세상에 오신 일, 그가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이에게 죽도록 충성하신 일,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의 괴로움은 우리로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해 본으로 보여 주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이겨야 할 악의 세력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평안한 중에 주님 앞에 이르기를 바라는 생활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애에는 고난과 시련과 징계와 핍박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며 또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우리의 생애 중에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늘에서 받는    상급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11:35절에서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대가가 클수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로부터 받는 즐거움과 기쁨이 더욱 큰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놀랄 만한 상급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그 영광에 동참케 하시기 위해 약간의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롬8:17절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후4:17절에서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받을 영광에는 이 땅에서의 고난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만날 때마다 피곤하여 낙심될 그런 시기에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 예수를 생각하므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피 흘리기까지란 말은 순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란 뜻입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악의 세력에 의해 많은 시련과 연단을 받고 핍박 가운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러나 아직 피를 흘리는 순교의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는 말로 힘을 내라고 격려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1장에서 거론한 믿음의 선진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인내로써 끝까지 싸울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나오는 죄와 싸운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밖으로부터 오는 죄와의 싸움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우리의 안에서 우리를 찌르고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죄를 말합니다. 이런 죄와의 싸움에도 게을리 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의 경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달려가야 할 경주입니다. 이 경주의 낙오자가 된다면 우리의 소망은 허사가 되며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은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경주장에서 만나는 이 같은 고난을 인내로써 견디고 이기려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86) 참 아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

   (히브리서 12:5-13)


  5절부터는 하나님의 징계의 유익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징계가 그리스도인들을 온전케 하는 일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하여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징계가 없이는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또 징계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히12장에 징계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 일은 이 글을 받아 읽는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많은 시련을 받고 있으며 또 낙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은 고난이나 시련은 믿음의 경주에 유익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 주면서 힘을 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징계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채찍을 맞는 징계와  우리의 육적 사람을 벗게 하시며 영적인 결실을 맺게 하시기 위해 내리시는 훈련으로서의 징계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건 징계는 아버지와 자식간의 올바른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징계를 받을 때 이것을 올바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주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경히 여긴다는 말은 징계를 징계로 여기지 않거나 자신에게 온 어려운 일에 불만을 품는 일을 말합니다. 노아 홍수 시,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은 홍수로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그 일이 하나님의 심판인줄 인정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운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징계인줄 모르면 사람이 회개할 수 없고 오히려 불만을 토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꾸지람도 징계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 말대로 징계로 나타납니다. 혹은 병으로 혹은 실패로 혹은 고난으로 혹은 시험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징계는 우선 우리의 생애에 괴로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낙심은 금물입니다. 낙심은 우리의 신앙을 퇴보시키며 침륜에 빠지게 할 뿐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2. 징계를 받는 태도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참 아들들에게만 내리신다는 사실과 징계는 아들의 유익을 위해 필수적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비가 자기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일에 대하여 징계가 없다면 그 아들은 버리운 자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징계를 받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된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로부터도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징계 없이 장성한 아들이 어디 있을 것입니까? 하물며 영의 아버지께서 어찌 징계가 없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영의 아버지의 징계가 육의 아버지의 징계보다 우선하는 이유는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 뜻대로 하는 징계지만 영의 아버지는 우리의 참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기 위해,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과 하늘의 상급을 위해 주시는 징계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절 말씀에서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에게 있는 나쁜 습성을 고치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한 채찍으로 내리시기 때문에 육의 사람이 죽고 영의 사람으로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참음으로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징계는 채찍이기 때문에 쓴 것입니다. 징계를 즐겁다고 여길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받을 당시에는 슬펴 보입니다. 슬퍼 보인다는 말은 쓰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얻어맞는 일이기 때문에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한 것입니다. 연달한 자란 익숙하게 단련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연달하기 까지엔 많은 징계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의의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는 게 아닙니다. 징계로 연달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12절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좌절되고 소진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일으키는 일은 징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13절에 나오는 말씀 중에 저는 다리란 마음의 동요로 흔들리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흔들리는 발을 똑바로 세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라는 뜻입니다.





  (87) 화평을 좇으라

   (히브리서 12:14)


  우리는 14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 나타나는 열매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목표에 비하여 얼마나 미약한가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를 보지 못하리란 말씀은 구원에 절망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왜 화평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고전14: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화평의 반대말은 어지러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지러움은 질서가 파괴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화평이 없는 사회는 무질서의 사회이기 때문에 분쟁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결국 인류에게 파멸을 주는 것입니다.

  화평에 대하여 주님은 마5: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의 범위에 대해서 롬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화평은 어떻게 하는가.

  화평의 결과는 화목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과의 화평을 통해서 우리에게 화평을 이루는 일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들과의 화평을 위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과의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겸손을 말합니다. 사랑과 겸손이 없이는 어떤 화평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원수와의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롬5: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라고 했습니다. 화평은 상대방이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들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성도들간의 화평이 없으면 질시와 투기가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으며 경원을 당하게 되어 결국 복음의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성도들간의 화평은 먼저 죄의 용서로 이루어집니다. 이 죄는 특히 자기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지은 성도의 죄를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의 생활에 중대한 도전을 받는 말씀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박탈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구원을 가졌다고 해도 우리는 죄를 범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여 죄의 용서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죄에 용서가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적인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여 사죄를 받을 때까지 우리는 은혜로운 성도의 생활을 못할 것이며 영적인 많은 괴로움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의 도전은 마18:21절에 있는 베드로의 질문에서 나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용서의 생활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 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평은 죄의 용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평의 자세에 있어서 내가 먼저 화해를 상대방에게 청해야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형제와 화목하는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6절 말씀. 그런데 화평은 다른 사람 아닌 나의 유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님은 25절과 26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음에 우리는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의 화평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선행으로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마5:15-16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이 본다면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셨습니다.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에는 어느 경우건 진실과 희생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없이는 화평의 기초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화평이 불가능합니다. 회생이 없이는 화평의 재료가 없기 때문에 화평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화평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화평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내 가정에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화평이 이뤄져야 평안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88) 거룩함을 좇으라

   (히브리서 12:14)


  지난 시간에 이어 14절 말씀 중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씀에 대하여 공부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거룩함을 좇으란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하여 교훈하시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1. 거룩과 그리스도인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거룩해졌다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거룩한 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요 세 번째는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이미 거룩하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거룩하다’는 선언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무리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이 같은 선언은 우리가 거룩해서이거나 거룩해져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의의 소유자가 됩니다. 구원의 확정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지 못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에도 이를 수 없습니다. 천국 백성으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이상, 우리에게 거룩하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선언은 합법적인 것입니다. 변질될 수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취된 우리의 영적 신분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뤄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2.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는 또한 거룩한 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1:15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거룩한 자신의 위치를 지키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라는 말씀은 진리의 말씀에 굳건히 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좇으란 말씀은 거룩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생의 열매를 맺어야 할 생명 나무들입니다. 그 나무에는 필연적으로 거룩함의 열매가 맺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의 본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성장하는 나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거룩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열매가 맺지 않는다면 좋은 나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겨졌으며 우리의 행위가 죄를 행하기에 담대한 자리에서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할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들입니다. 예수님은 요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접부침을 받은 가지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열매는 내가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맺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열매를 가리켜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권능으로 성령에 의해 맺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나약하고 도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함의 결실을 맺을 수 없는 죄인들임을 깨닫고 통탄스러운 심정으로 성령께 의지하며 그의 도우심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간절한 열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한다면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빌1: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거룩함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거룩함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시는 의미는 하나는 우리들로 사람들 앞에서 거룩함의 표적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않는 일에 결코 합류하거나 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않은 자리에서 빠져 나오라는 의미가 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곳이 그의 설자리요 거룩한 자리가 그의 앉을 자리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말이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하며 거룩한 곳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항상 거룩함을 좇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9)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히브리서 12:15-17)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오늘은 15절에서 말씀하시는바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에 대한 것과 내일은 16,17절에 나오는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에 대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특히 두려워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몇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뜻입니다. 교회에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에 똑같은 씨앗을 뿌렸지만 열매를 맺는 밭은 한곳뿐이었습니다. 세 곳의 밭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구원의 은총을 말합니다. 왜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까? 구원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일에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값도 없이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주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귀하고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누구인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를 보화가 감추인 밭으로 비유하시면서 한 나그네가 이 밭을 발견하고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팔고 그 밭을 샀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이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경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히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모르고 자기 생애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생활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2) 다음에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은혜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은혜로 주신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생애를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열매를 맺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은혜를 거역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불신앙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며 회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는 여전히 나오며 교회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며 권리 행사를 단단히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행실을 고치지 않고 있으며 나중에는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교회에서 자라는 쓴 뿌리

  다음 두 번째로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열매를 맺는 나무에 있어서 뿌리란 그 나무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열매는 뿌리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쓴 뿌리란 독이 있는 뿌리로 그 나무에서 자라난 열매란 자연히 독이 있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쓴 뿌리는 교인들이나 교회에 괴로움을 줍니다. 그래서 괴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특별히 경계해야 하는데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종류는 다른 사람에게 독을 주는 존재로 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사망으로 이끄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계2장을 보면 두아디라 교회에 이런 쓴 뿌리가 나서 교회를 타락시켰습니다. 이 교회에 나타난 쓴 뿌리는 자칭 선지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 자가 교회에 나타나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고 했습니다. 한 쓴 뿌리로 인하여 교회 전체가 피해를 본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는 거짓된 진리, 배교로 더러움을 입게 하는 쓴 뿌리가 있습니다. 애초부터 배교자의 모습으로 교회에 침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떠난 자들이 사탄의 가르침을 받아 쓴 뿌리가 된 자들입니다.

  결론 : 너희는 돌아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돌아보는 일은 먼저 자기 자신부터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늘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활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는 생활인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들로 자기가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움은 영적인 더러움이기 때문에 속히 진리 가운데 돌이키지 아니하면 양심에 화인을 맞게 되고 그렇게 되면 회개할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경종을 삼으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90)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

   (히브리서 12:15-17)


  16절에서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에 대한 경종이 나옵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경종은 어느 시대의 교회이건 늘 거울로 삼아 성도들의 생활에 범하기 쉬운 이 종류의 죄를 멀리 하고 자기를 불 신앙적인 더러움에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1. 음행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성경에서는 구약이건 신약이건 음행하는 자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엄히 경종하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음행이란 성적인 부도덕을 의미합니다. 음행이란 단어는 간음이란 말보다 범위가 넓습니다. 간음은 법적인 문제에 국한할 수 있는 말이지만 음행이란 말은 모든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음행에 관하여 혹독하리 만치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까?

  음행은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모든 부도덕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음행하는 생활을 계속하고는 거룩한 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음행이란 범죄 중에서도 가장 부끄럽고 은밀한 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 앞에서 감추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가 음행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게 달콤한 맛을 주며 육체적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일을 벗어버리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음행은 자신의 인생 뿐 아니라 가정의 순결을 파괴하기 때문에 가정에 파탄이 오게 되고 부부간의 사랑에 금이 가게 되고 이런 현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온 사회가 음란 화되어 소돔과 고모라 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이런 현상을 드러내 놓고 있으며 사탄은 성도들의 가정에까지 이런 미끼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음행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부부간의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늘 사랑 안에서 부부 생활이 원만히 이뤄져야 하며 그 자녀들에게 가정의 순결과 부부간의 사랑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성적 유혹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 유혹에서 이기려면 늘 자제하는 힘을 길러야 하며 경건 생활에 힘쓰도록 말씀을 묵상하며 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음행 죄가 무서운 것은 유혹을 좀처럼 물리치기 어려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처럼 그 자리에서 재빨리 빠져 나올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음행은 그 범하는 자에게 있어서 의도적이며 계획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2.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를 두려워하라

  다음에 히브리서 기자는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한 그릇 식물을 위해 판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비유적이 교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의 백성된 명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장자의 명분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에게만 주신 특권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만한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반열에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장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정한 자만이 장자로서의 특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는 말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의 그 귀한 명분을 귀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 곧 하나님의 백성된 이 특권을 귀히 여길 줄 모른다면 에서처럼 망령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물질이었습니다. 배가 곺은 에서에게 당장 자기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장자의 명분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동생 야곱의 계략에 넘어가 팥죽 한 그릇에 그것을 팔아먹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장에 자기에게 어떤 물질적 유익이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쉽사리 말씀을 버리고 물질을 취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러 지고 행동이 따르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일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못하는 사람, 물질 때문에, 어떤 육신적인 긴요한 일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일 따위는 지금 우리 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결론 : 17절에서 이르시기를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버린바 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크게 경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자만하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망령된 행실로 인하여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버림받을 것이란 두려운 경종을 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91) 우리의 이른 곳

   (히브리서 12:18-24)


  오늘 본문에는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차이점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율법과 복음과의 놀라운 차이점을 비교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당시의 그 두려움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이처럼 두려운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의 시온산에서 내려진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으며 그곳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 곧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시므로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을 주는 속죄의 피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곳이 우리가 이른 곳이라고 한 것입니다.

  1. 시내산의 두려움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우리의 이른 곳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른 곳이란 우리가 와 있는 현재의 영적 장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결코 시내산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타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으로 율법을 주신 곳입니다. 그곳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율법에는 죄인에 대한 정죄가 있을 뿐 사죄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율법을 주신 시내산의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내산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이라고 했습니다. 만질만한 산이란 표현은 이 산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능히 가서 만질 수 있고 올라갈 수 있는 유형적인 산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만한 신령한 산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산의 형편에 대하여 불붙는 산, 검은 구름,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산에 임재하셨을 당시의 두려운 모습을 구약 성경에 있는 그대로 나나낸 말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출19장에서는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고 하셨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고 나팔 소리가 커지며’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떨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에는 사람들 뿐 아니라 짐승까지라도 가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명하셨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하여 일제히 더 이상 말씀하지 말 것을 간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율법은 이처럼 두려운 가운데 모세가 받았습니다. 율법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을 주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받은 자는 마땅히 이 계명에 의해 심판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이른 곳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이 예루살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와 있는 곳은 시내산이 아닙니다. 시내산의 두려움은 율법과 함께 사라지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온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 곳은 시온산입니다. 시온산이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지성소는 땅의 지성소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휘장을 찢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시고 그 길을 통해서 올라가신 하늘의 지성소를 의미해 줍니다. 땅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애는 시내산에 임하셨던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의 돌 판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돌 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종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른 산은 하늘의 시온산인데 그곳에는 법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그 안에는 소나 염소의 피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받은 곳은 이처럼 시온산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른 곳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장차 이 도성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는 이런 영광스러운 하늘의 예루살렘이 약속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또 그곳에는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천사들은 이 나라의 주인들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유업을 이어 받을 존재들도 아닙니다. 이들은 장차 우리들을 섬기는 심부름꾼으로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지켜 주고 보디가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는 장자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장자들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여러 교파가 갈라져서 서로 찢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하늘에는 오직 하나 뿐인 장자의 총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총회가 곧 하늘의 교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상 교회는 하늘 교회의 하나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올라가서도 하늘의 교회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찬양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며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무엇보다도 대견스러운 것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뿌린 속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그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해 주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 곳은 바로 이런 곳입니다. 그 나라에 소망을 두시고 그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애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92)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히브리서 12:25-29)


  오늘 본문에서도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에게 대한 엄중한 심판의 경종이 나옵니다.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새 언약은 결코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을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까지 포함되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25절에서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신 자란 ‘땅에서 경고하신 자’이신 시내산의 하나님을 의미하고 또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이신 시온산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땅이란 시내산을 의미하며 이처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내려 오셔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어긴 사람들에게조차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을 강조해 줍니다. 율법의 명령은 준엄했습니다. 누구든지 그 명령을 어긴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율법에 의해 죄인의 사슬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 하나님 앞에 의를 얻을 수 있는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이스라엘이 모든 일에 이 율법을 거역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사실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하여 25절 중반에서 ‘하물며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하늘은 22절에서 말씀하신 하늘의 시온산을 말합니다. 그 시온산에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셨지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도 계셨고 아벨의 피보다 더욱 큰 사죄와 구원의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의 뿌린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땅의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의 시온산이며 그 은혜는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로 이루셨습니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피로 내리신 은혜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시내산의 율법은 정죄의 역할을 하지만 시온산의 은혜는 속죄와 구원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경고는 무엇입니까?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엄중한 경종이 따랐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3:18절에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더 무섭다는 것은 율법에서 정죄하는 그 정죄보다 더 무섭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분을 배반하는 불순종의 자리에 빠지거나 배교하는 죄를 범하지 마라야 하는 것입니다.

  2. 진동하지 아니할 나라의 유업

  26절을 보면 두 종류의 ‘진동’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진동은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하셨을 때 있었던 진동으로 이 진동에 대하여 18, 19절에서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진동은 율법의 엄위와 그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진동과는 달리 더 무서운 진동이 있을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6절에서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 또 한번 있을 이 진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의 재림으로 인한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계6:12절 이하에 나오는 여섯째 인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운다’고 하셨습니다. 이 진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으로 율법에 의한 심판보다 더 두려운 심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동치 아니할 새로운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 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진동치 아니할 나라는 하늘의 시온산을 의미하며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입니다. 그곳에는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우리의 영원한 교회가 있으며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도 계십니다.

  결론 : 이처럼 우리는 영원히 진동치 못할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는 생활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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