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이메일 : bamjoongsori@bamjoongsori.org

 

  
히브리서 11장 (62 - 82)
 밤중소리  02-01 | VIEW : 1,041

  (62)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

   (히브리서 11:1-2)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떠나서는 생활 할 수 없을 만치 믿음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를 나그네 생활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으며 장차 그곳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고난을 당하며 시련과 환난의 고통도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나는 것인가? 이에 대한 정의가 히11:1절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첫째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이란 말은 바란다, 희망한 다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바라지고 있는 것들’이란 뜻입니다. 이 바라지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신념이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계속 바라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바람, 곧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가 바라지는 소망도 있을 수 없고 그 소망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이란 말은 본질, 혹은 실재 확인이란 뜻입니다. 이 말씀을 쉽게 간추려 설명한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미래의 소망에 대하여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성취되고 이루어지는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소망으로 얻은 것입니다. 천국도 소망에 속한 장래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그 많은 약속도 우리들이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들이며 실제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롬8: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그곳으로 달려가는 노력을 통해서 그 소망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특징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꿈속의 일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잡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하여 그것들을 우리가 소유한 것처럼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약속한 것들

  우리가 천국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천국에 가 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권사님이 천국에 다녀왔다는 간증을 통해서 그 천국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국은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가 볼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소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학작품이나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천국은 약속을 받은 사람이 소망으로만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에겐 천국을 볼 수도 없으며 보여 줄 수도 없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막11:24절에서 실감 있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믿고 기도한 일에 대하여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헛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것도 아닙니다. 실재이기 때문에 믿음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약5:15절에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시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말씀은 허황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인즉 허황 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면 아직 병든 상태에서 호전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롬4:18-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고 했습니다. 그의 바람은 자기의 신념이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네 자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에 따른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생애를 살아간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63)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히브리서 11:1-2)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란 보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보여지지 않는 상태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증거란 말은 드러나다, 선포하다 는 의미의 뜻이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해 비밀히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과학적으로 체험적으로 증거가 안되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 비밀한 것들을 확실한 증거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국은 없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비밀한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비밀한 곳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찾고 우리의 믿음으로 그곳을 확실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1. 믿음이 없으면 소망으로 살아갈 수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어 있는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신앙의 증거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 뿌리가 견고하고 확실합니다. 견고하고 확실한 뿌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마24:35절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꿈이 아닙니다. 모두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꿈에서 보는 허상으로 생각하면 그 말씀에서 오는 축복을 하나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손으로 지금 잡을 수 있는 실체인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순종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2.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이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믿음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습니다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 믿음을 자기자신이 만들어 보려고 힘쓰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엡2:8절 말씀에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이 선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선물을 받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 선물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십니다. 롬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그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다음에 믿음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실 하나님을 만나야 믿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영적으로라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만남이야말로 성경적인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모습은 그의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믿음은 회개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회개한 사람과 회개치 못한 사람과의 신앙적인 수준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과 회개는 언제나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회개하기에 재빠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바람직하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의 생활입니다. 순종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렵고 무거운 짐은 모두 자신이 지시고 우리에게는 가벼운 짐만 지우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순종이 어렵다고 하는 말은 믿음이 없이 순종을 하려니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한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순종은 쉬운 것입니다. 믿음의 힘으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순종하려고 하는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께 보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힘을 반드시 공급해 주십니다.

  결론 : 믿음이 없으면 소망도 한낱 꿈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이 분명하게 언약하신 축복도 떠도는 구름처럼 우리 손에 잡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증거 없는 믿음은 그 생활에 흥미가 없고 힘들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른땅을 촉촉이 적시는 이슬비처럼 우리의 메마른 심령을 적셔서 믿음을 통해서 바라는 소망을 실상으로 붙잡아 여러분의 소유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4) 선진들의 증거

   (히브리서 11:1-3)


   성경에는 소망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소망이란 말은 성경적으로 볼 때 신앙적인 말입니다. 우리들이 소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분명하고 확실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우리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우리의 노력으로 그것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소망이 아닙니다.

  1. 무엇으로 소망을 보는가?

  그러면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영원한 생명을 말하며 부활을 말하며 하늘에 있는 천국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이 같은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선진들이란, 믿음으로 살아간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요 선배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골1:5절 말씀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소망을 쌓아 두셨습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소망을 우리는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아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안경을 쓰고 그곳을 바라보면 확실한 증거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일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보아야 그 천국이 보이며 믿음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어야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의 안경은 무슨 재료로 만들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다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찾으며 그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그 소망이 확실해 지고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잘못된 신앙들

  오늘날 교회에 믿음으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소망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말씀이 아니라 이적으로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이적은 복음도 아니며 믿음도 아닙니다. 이적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메시야로서의 여러 가지 이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이적을 친히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했으며 또다른 이적을 원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이적을 원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시고 요나의 이적 밖에는 보일 이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이적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주님의 부활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이적을 부활에 대한 이적으로 한정시키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이적을 믿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이적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시험하시려고 하나의 시험의 도구로 쓰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신13:1-5절 말씀을 보면 어떤 선지자가 일어나 혹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룰지라도 그 말을 청종하면 안 된다고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시험하사 이적을 중히 여기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나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 신앙입니다. 은사 신앙이란 은사를 받아야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은사위주로 신앙 생활을 것을 말합니다. 약 20여년 전, 한때 방언 운동이 굉장히 번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받은 증거는 방언에서 나오기 때문에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확인하 수 없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거나 교회 성전에서 이 방언 받기 위해 할렐루야 고함을 지르고 방언을 흉내내려고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부린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께서 필요한 사람에게 은사로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에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무엇인가 보려고 하고 무엇인가 들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일에 기우러져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환상이니 이상이나 환청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런 신앙에 마음이 쏠리게 되면 신비적인 신앙에 빠져 들어가 믿음이 병들게 됩니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어도 귀에는 들리는 음성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의뢰하며 그 말씀을 따라가는 신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믿음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삼는 생활을 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으로 증거를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사람입니까?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65)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

   (히브리서 11:1-3)


   히브리서11:1-3절 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중요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시간 이 문제를 가지고 강해했습니다. 오늘은 본문 3절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배우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다윈의 진화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에 대한 논란은 옛날부터 과학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지구의 형성의 각가지 학설은 비 성경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고 우리는 다만 성경에 나타난 말씀에 의하여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으로부터 온 것인 줄 믿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설에 가장 위협적으로 나온 것이 소위 다윈의 진화론입니다. 다윈이란 사람은 1809년에 태어나 1882년까지 살아온 1800년대의 사람으로 영국의 세계적 물리학자로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사람으로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 박물학에 흥미를 가지고 깊숙이 연구한 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진화론을 간략히 말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물질로부터 여러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생명체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를 예로 들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 만년 전의 모습은 원숭이였으며 그 이전의 모습은 더 단순한 존재로 그 기원을 거슬려 올라가면 아메바와 같은 단순 세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의 증거는 세계도처에서 수집한 화석에 의하여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것을 체계화하여 쓴 책이 다윈의 진화론으로 오늘날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주는 책으로 사탄의 작품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창조역사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창조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1:1절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증거해 주는 첫 번째의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천지창조는 저 하늘의 뭇별이나 해나 달이나 우주 만물의 모든 존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45:12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탄생 기원에 대하여 별의별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지만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엷은 지식과 천박한 지혜를 비웃으시는 것입니다. 렘31:37절에서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창조역사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으며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시어 축복해 주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그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원숭이가 아니라 지금 우리보다 더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서 온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까지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들입니다. 모든 만물에는 만물의 시작이 있습니다. 이 시작 이전에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존재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셨을 뿐입니다.

  이 우주만물이 하나님으로 창조된 사실을 믿음으로 알 수 있고, 이 모든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을 알 수 있다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믿음으로 안다면 우리의 소망이 비록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확실한 실상으로 그리고 증거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언약을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죄 사함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의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천국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 언약을 확실히 받을 수 있습니다. 선진들이 가지고 살아온 믿음이 바로 이 같은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우리의 생애에 우리가 바라는 모든 소망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소망 가운데 축복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 지며 그 믿음으로, 말씀에서 언약하신 실상을 볼 수 있으며 말씀을 증거로 삼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66)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

   (히브리서 11:4)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2절에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말씀하고 4절부터는 이 선진들의 믿음으로 증거를 삼고 살아온 사람들의 믿음의 생활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첫 인물로 등장시킨 믿음의 선진으로 아벨을 들고 있습니다.  

  1. 제사로 의로운 자라 증거 받은 아벨

  창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인류 최초의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서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경우는 어떠합니까? 롬4:1-3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줄을 끝까지 믿었는데 하나님은 이 같은 그의 믿음을 기쁘게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4:18-22).

  가인과 아벨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 저주받은 땅에서 낳은 아들들입니다. 이들이 장성해서 제각기 기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사 때가 되매 제각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 제사에서 하나님은 양을 잡아 제물로 드린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농산물로 제물을 삼은 가인의 제물은 물리치신 것입니다. 이 때 가인은 시기심이 가득하여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그러면 왜 가인의 제물은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 받으셨는가 이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받는 일에 결정적인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여기서 제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사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사라고 하는 하나의 방법을 주심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제사는 제물을 드리는 형식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양으로 가인은 농산물로 드린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두 가지 제물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화목 제물이요 다른 하나는 속죄 제물입니다. 화목 제물은 짐승을 잡아 각을 떠서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는 것으로, 속죄 제물은 짐승의 피로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기시고 그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일에 대한 그림자로 율법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각기 달랐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대하여 언제나 분명하게 명하셨습니다. 곡식으로 화목제와 속죄제로 삼는 일은 없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웠습니다. 자기가 애써 노력하여 수확한 것으로 제물로 삼고 그것을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이 같은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가인의 마음에는 선한 것이 없었습니다. 6-7절. 가인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9절.

  그러면 아벨의 제물을 보겠습니다. 아벨은 양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양이란 제물에 믿음의 근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양을 잡아 드리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아벨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것입니다. 아벨은 아담으로부터 전수 받은 하나님의 속죄의 언약을 믿고 따랐습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았다고 했는데 왜 잡은 것입니까? 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창9:1-3. 그것은 양으로부터 피와 기름을 빼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양과 기름으로 제물을 삼았다고 한 것입니다. 양의 피와 기름이 어떤 일에 쓰여졌는가 알아보면 민18:17절에서 양의 피는 단에 뿌리고 그 기름은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물인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가인의 제물보다 더 나은 제물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제물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제물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인물이나 인격이나 선행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 드린 제물로 인해서인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결론 : 지금 세상은 두 종류의 인종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가인의 자손이요 하나는 아벨의 자손입니다. 이 같은 후손은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물 한 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물을 드리는 인류는 가인의 후손이요 아벨의 제물을 드리는 인류는 아벨의 자손입니다. 가인의 자손은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려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후손은 그의 믿음의 제물로 인하여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으시어 화목제물과 속죄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 다른 속죄제물이나 화목제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67) 에녹의 믿음

   (히브리서 11:5-6)


  오늘은 에녹의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녹은 어떤 이유로 믿음의 선진으로 볼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란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에녹이 죽음을 보기 전 그를 하늘에 옮기 우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의 제사로 하나님의 의를 인정받았다면 에녹은 그의 생활,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믿음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1. 에녹이란 인물

  성경에서는 에녹의 인물과 생애를 아주 짧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록 속에 담겨진 그의 생애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에녹의 일생은 간단명료합니다. 그는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속에서 자녀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결국 365세를 살았는데 그의 생애는 하나님이 데려가심으로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365세란 나이만도 노인인데 그 당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나 하와까지도 땅에 살아 있을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누린 연세를 살펴보면 깜짝 놀랄만한 장수였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담이 930년, 셋이 912세, 에모스가 905세, 게난이 910세, 마할랄렐이 895세, 야렛이 962세, 에녹이 365세, 므두셀라가 969세, 라멕이 777세, 노라가 950세 그리고 그 후, 아브라함이 175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나이가 홍수 심판 이전까지는 굉장히 길었지만 그 후에는 급격히 줄어들어 200세를 넘기지 못했으며 아브라함은 175세로 줄어들었고 그 후부터 더 단축되어 갔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80세를 넘기기가 어려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시90: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

  2. 에녹의 믿음

  에녹은 믿음의 생애를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무려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300년간의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의 생애 중에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를 살아온 것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란 말씀의 원어는 ‘그 하나님 곁에서 행하다’ 또는 ‘그 하나님 가까이서 살더니’란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시140:13절에서는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요일3:24절에서는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세상에 죄악이 관용했던 시대에 살아온 사람입니다. 에녹에 대한 기사가 유다서에 약간 언급되어 있습니다. 유1:14-16말씀을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경건치 않은 죄인의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원망하는 자들과, 불만을 토하는 자들과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순종치 않고 그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지 못하여 노아 홍수 심판 시에 물에 잠겨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에녹은 365세에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주검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에녹을 승천시키신 것입니까? 이 일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에녹처럼 죽지 아니하는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에녹의 승천은 하나님의 심판 이전에 있을 그리스도인의 공중 휴거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하늘로 취하신 것은 에녹으로 장차 이 땅에 임할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한 지역에만 해당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방주에 들어간 생명체만이라도 살 수 있는 심판이 아닙니다. 이 지구가 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나 이 지구를 온통 불태우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서 살아남을 인류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에녹처럼 하늘로 이끌리심을 받는 성도들만이 새시대의 유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홍수 심판에서의 구원은 에녹과 노아로 나타나 있습니다. 에녹은 심판 전에 들림 받은 구원이요 노아는 심판 중에 방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방주로 구원을 베푸셨지만 인류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 시에는 에녹과 같이 하늘로 끌어올리심으로 구원하십니다.

  결론 : 에녹은 수도승처럼 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집에서 자녀를 기르면서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얼마 안됩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68) 노아의 믿음

   (히브리서 11:6-7)


  히11:6절에 나오는 말씀은 1절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맥의 말씀입니다.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6절에서 이 말씀을 주석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런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두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신앙생활의 연륜을 쌓아도 헛수고입니다.

  1.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

  그러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무엇을 근거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분명한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믿게 되며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을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가장 악한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도 주시지 아니하시고 화도 내려주시지 않는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신다고 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상입니다. 그런 중에도 가장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은 그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노아의 믿음

  오늘은 노아의 믿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구원함을 받으므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을 받았을 때,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었습니다. 홍수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가운데서 경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노아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심판의 경종을 받은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그 심판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불의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노아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의 심판은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이미 끝났고 앞으로 장차 이 세상에 임할 심판은 불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물의 심판을 거울삼아 장차 우리에게 닥쳐 올 불의 심판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의 심판과 불의 심판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인간의 죄악이 관용할 때 내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창6:13,  계18:4. 인간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여 물의 심판이 내려진 것처럼 불의 심판은 인간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침으로 내려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의 공통점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종말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노아의 때에 비유해서 경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고 먹고 마시는 탐심과 환락 위주의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의 공통점은 홍수 심판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인줄을 몰랐던 것처럼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핵전쟁으로 죽고 천재지변으로 혹독한 재앙을 만나도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인줄 모르고 더욱더 악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공통점은 그 당시에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곳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만 살아남은 것처럼 마지막 심판 시에는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구원을 얻어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노아와 같은 믿음으로 종말적인 불의 심판에서 건지심을 받으려면 우리의 한평생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창6:8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이유에 대하여 노아는 그 당시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 때문에 노아처럼 심판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노아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경고를 믿음으로 그와 그의 가정이 구원을 받았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의의 후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노아처럼 우리의 온 생애 동안 그 심판을 준비하는 생활을 통해서 노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69) 아브라함의 믿음

   (히브리서 11:8-19)


  아브라함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중심 인물이며 성경 전체에서 아브라함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큽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믿음을 몇 가지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거할 때에도 외방에 있는 나그네처럼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나이 많아 경수가 그쳤으나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삭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미쁘신 분으로 그 분을 믿고 의뢰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족보에서 첫째 인물로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형성하시고 그 민족을 통하여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가 성경에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히11:18절 ‘네 자손이라 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갈3:16절 말씀에서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제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한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창12: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땅이 어디인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길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기뻐하셨습니다.

  (2)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희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온 우리의 생활이 새롭게 그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새로운 땅, 하나님 나라를 소망으로 삼고 살아갈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고향을 떠난 것처럼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일에 근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에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하신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를 얻은 사람입니다. 행위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만큼 온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의를 얻은 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후사’라고 약속하셨는데 이 후사한 이삭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3:1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통하여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언약을 믿었으니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요8:56절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생 일대의 큰 시험이 왔습니다. 그것은 백세에 나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왜 이 같은 시험이 온 것인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17-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사랑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순종의 한계를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인 이삭을 통해서 알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시험에 아브라함은 합격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활의 신앙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믿음은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의 명을 따라 제단에 바친 것입니다.

  결론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믿음대로 그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형성하셨으며 이삭의 씨로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생활을 이루시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아브라함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70)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

   (히브리서 11:13-16)


  본문 13절로 16절까지는 이들 구약시대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소망으로 삼고 살아온 근원적인 근거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들 믿음의 선진들의 소망은 이 땅에 둔 생활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한 성,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예루살렘 성으로 곧 천국을 소망으로 살아간 것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그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생활을 했는데 그 본향이란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하늘에 예비한  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말씀을 통해서 구약 시대에 살아간 사람들 중에도 믿음을 따라 천국에 올라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믿음을 따라 죽은 선진들

  13절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따랐다고 하는 믿음이란 무엇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으로 표현된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했는데 그들이 그들의 생애 중에 멀리서 보고 환영한 것이란 그들이 찾아갈 본향으로서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살아서 이 같은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표현은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실행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의 생애를 살아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10절 말씀을 보면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는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 가운데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하면서 그 나라를 동경하고 그 나라가 반드시 성취될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이 같은 선진들의 증거는 무엇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보다 더 확실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요14:2-33절 말씀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성도들에게는 이런 확실하고 분명한 약속이 없었지만      믿음으로 그 나라를 소망하고 그들의 삶의 목적을 그 나라에 두었던 것입니다.

  2.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선진들의 믿음

  이 같은 믿음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신앙에 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먼 장래의 일로 생각하는 나머지 재림의 준비나 신부의 단장에 대해서는 듣기조차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까? 마24:42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셨으며 44절에서 이어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눅21:36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비록 우리의 생애 중에 주의 재림이 없을지라도 그것을 바라고 재림의 주를 영접할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이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예비된 본향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의 생애를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말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 땅이 자신들의 본향이 아니라 장차 본향에 들어가는 나그네길이란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들이 등지고 나온 고향 땅이 본향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언제인가 그곳에 돌아갈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망한 본향은 그들이 떠나온 고향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본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에 있는 우리의 본향보다 더 나은 본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본향은 이 땅에 있어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본향이 있는 곳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사모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본향이 눈에 보이는 곳이거나 지금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실상’이요 ‘증거’로써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이 성에 대하여 고후5: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의 본향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장막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본향인 사실을 믿으시고 그 나라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71) 이삭의 믿음

   (히브리서 11:20)


  본문 20절에서 이삭의 믿음에 대하여 매우 간략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은 약속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도 이 약속으로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죄로 죽게 된 인생에게 그 아들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어 그 언약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이삭

  이삭의 생애 중에는 훌륭한 일이 많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신 믿음은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두 아들에게 그 언약에 따라 축복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태어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원래 무자한 처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언약에 의하여 이삭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남녀간의 단순한 결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결정되며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예정에 대해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아들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약속 없이 태어난 아들이요 이삭만이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약속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이삭의 믿음에 대하여 창세기에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신앙적인 면을 보여 주는 몇몇 사건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삭이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에 끌려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 제물 인줄을 모르고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산에 올라가 자기를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이삭은 아버지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노쇠한 늙은이요 이삭은 기력이 왕성한 소년이었습니다. 아버지께 반항하고 그 손을 뿌리쳐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 손에 순순히 자신을 맡겨 밧줄로 묶게 하고 나무 덤이 위에 올려놓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어려서부터 순종의 신앙을 가진 믿음의 아들이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제물로 원하신다면 제물로 바치기를 원했던 아름다운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2. 이삭이 아들에게 한 축복 기도

  이삭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믿으며 자라 온 이삭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야곱과 에서를 낳았습니다. 창25:21절 말씀을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치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함에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삭은 그 성품이 심히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창26장을 보면 이삭이 아비멜렉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가서 장막을 칠 때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시기하는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싸우게 되었을 때 이삭에게는 그들을 물리칠 힘이 있었지만 싸우지 않고 다른 곳에 이르러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은 노년에 이르러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두 쌍둥이 아들 가운데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에서가 장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동생인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이르기를 ‘너는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삭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작전으로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분장시켜 눈이 어두운 남편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아마 이삭은 하나님께서 이삭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이유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두 아들에게 축복 기도를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장남의 약속이 야곱에게로 돌아갔을 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두려운 마음으로 장자의 축복이 이삭에게로 돌아갔음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삭의 집에 난데없는 환난이 닥쳤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기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킨 것입니다.

  결론 : 이삭의 위대함은 그의 믿음과 순종과 기도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이런 인간성과 믿음은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적 유산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상으로 바라보고 증거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72) 야곱의 믿음

   (히브리서 11:21)


  본문 21절에서 야곱의 믿음에 대하여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지만 그의 임종시에 가서 요셉의 각 아들들에게 믿음으로 축복해 주었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1. 야곱의 생애

  우리가 성경에서 야곱이란 사람을 대할 때 야곱은 너무나도 평범한 인물이라는 데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가정에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 중 동생입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아이를 생산치 못하여 아기가 없자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입니다. 이들 쌍둥이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싸웠는데 역대로 그 자손들이 싸워 왔으며 이 싸움은 인류의 종말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야곱은 해산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하여 부쳐진 이름인데 그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야곱이라 하면 얻어맞는 사람의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만드는 징계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형을 제치고 형이 받을 축복을 자기가 받으려 고하는 이기적 성품,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자기 것으로 만든 욕심, 아버지를 속인 간교한 행동 등은 하나님이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그에게 약속한 축복을 받기에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야곱의 연단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괴나리봇짐을 지고 벧엘에 이르렀을 때 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언약을 주셨고 야곱은 그 자리에 돌 단을 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 서원 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살아갈 동안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라반으로 야곱을 미워하게 하셨고 그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형을 골탕먹인 대가로 라반으로부터 품삯을 자주 변경 받았으며, 그리고 아버지를 속인 대가로 라반으로부터 20년간이나 속임을 받는 생애를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게 되었는데 라반의 집에서 도망하여 고향으로 가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에 의해 환도 뼈를 꺾임으로 깨져 야곱이란 이름을 ‘이스라엘’로 고침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생애는 새롭게 전개되며 육신적인 야곱은 죽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새사람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야곱의 변화는 오랜 세월에 걸친 하나님의 연단의 손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고비에서 시련을 받고 계시는 분은 그 시련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를 연단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는 야곱의 믿음이란 요셉의 아들들에게 준 믿음의 축복기도를 말합니다. 야곱은 형 므낫세와 동생 에브라임에게 기도할 때 손을 어긋맞겨 기도했습니다. 오른손을 동생에게 올려놓고 기도한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옛날 자기처럼 형을 팥죽으로 기만하지도 않았고 아버지를 속이지도 아니했지만 야곱은 손자들에게 기도해 줄 때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 기도를 해 준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야곱의 기도대로 에브라림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또하나의 야곱의 믿음은 그가 고센 땅에 온지 17년만에 자신의 주검이 가까이 왔을 때 자기 몸의 장사를 위해 애굽 땅에 매장하지 말고 조상의 무덤에 묻히기로 아들에게 맹세시킨 일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결론 : 이삭의 인생에 비하여 야곱의 생애는 너무나도 험준하고 굴곡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야곱에게 반드시 그의 인생의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생애에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야곱과 같은 우리들의 변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의 인생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야곱의 인생을 배워 환도 뼈가 부러진 연후에 가서야 변화되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내 몸을 주님께 헌신하므로 야곱으로부터 이스라엘로 변화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73) 요셉의 믿음

   (히브리서 11:22)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았고 또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몸종들을 첩으로 맞아 4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나온 아들들이 12명으로 이들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야곱의 가장 큰사랑을 입고 있었던 아내 라헬의 아들로 태어났고 라헬은 요셉 밑으로 베냐민을 해산하다가 아기만 살고 어머니는 그만 죽었습니다.

  1. 요셉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섭리

  우리는 요셉의 생애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뜻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란 사람의 일생은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뢰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요셉의 믿음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그에게 약속하셨는데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소망으로 삼고 그 소망을 믿음으로 그의 생애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이 꿈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주신 꿈을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자신의 인생을 살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꿈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기 위해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믿고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떻게 꿈을 이루게 하셨는가?

  요셉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꿈은 곡식 단과 하늘의 별들에 관한 것으로 자기가 모든 형제들의 아비가 될 일과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형의 곡식 단들이 요셉에게 절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의 양식을 요셉이 먹일 일에 대한 것이며 하늘의 있는 형들의 12별들이 자기별에게 경배한 것은 요셉이 모든 형들 위에 뛰어난 왕이 될 것이란 꿈으로 하나님은 이런 꿈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의 온 생애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셉에게 주신 꿈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몇 번인가 주검을 초월한 위험한 시련을 겪게 하셨으며 유혹을 이기게 하시고 인내로 기다리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서 그를 애굽의 바로 왕다움의 치리자로 삼으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믿음의 생애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나의 모든 일은 내가 하려는 내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임을 알고 그 일이 실패해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지만 낙심하거나 원망치 아니했습니다. 그가 그 오랜 감옥 생활 속에서도 모범적인 죄수 생활을 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요셉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성실하게 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잠16:3절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애굽에서 자신의 길을 오직 하나님께 의뢰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의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믿음에 대해서 그의 임종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날 것과 자기 해골에 대한 조치에 대하여 명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창50장에 마지막 절에 가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언약의 땅이 아닙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렸지만 그 땅이 영원한 도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가나안에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정착하려고 하지 말고 이 땅을 떠나라고 명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영광을 누리고 부요한 생애를 살아간다고 그곳에 소망을 두고 삶의 터전을 삼아서는 안됩니다.

  요셉의 믿음은 견고하고 단호했습니다. 자신은 애굽에서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큰 영광을 누렸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애굽 땅에서 살았지만 자신이 죽은 후, 그 해골만이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 매장하리라고 결심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런 요셉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만 하면 우리의 생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74) 모세의 믿음

   (히브리서 11:23-26)


  본문에는 모세의 부모와 모세의 믿음이 나옵니다. 천하의 큰 흉년을 만나 야곱이 요셉을 따라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의 식구까지 모두 70명이었는데 400년이 지나자 60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 후 요셉도 죽었고 요셉을 아는 애굽의 왕들도 죽었습니다. 애굽의 새로운 왕이 치리 할 때, 수효가 많아진 이스라엘 민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고 아들을 낳을 수 없도록 법으로 조치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밀리에 아들들을 낳았고 슬기로운 이스라엘 산파들은 이스라엘 여자들의 생리적인 핑계를 대어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을 살려내어 인구를 번식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중에 레위족인 그랏의 아들 아므람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아 모세을 낳은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더 이상 집에서 키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떠내려가게 하므로 때마침 강가에서 목욕을 하든 바로의 딸 공주에게 발견되어 공주의 아들로 키우게 된 것입니다. 모세란 이름은 ‘물에서 건졌다’는 뜻으로 이 이름은 바로의 공주가 지어 준 이름입니다.

  1. 모세의 믿음

  모세는 어려서부터 유모로 젖을 먹였던 어머니로부터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동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루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로 일하는 공사장에 갔다가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탄로가 나게 되어 애굽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미디안 지방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목축업을 하고 있는 이드로의 집 머슴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도로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고 40여 년간을 목동 생활을 계속해 오다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에 대해 24절 이하에서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칭함을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세상의 영광에 도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태어나게 하신 것은 그로 애굽의 왕이 되게 하시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다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며 어떤 생애를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목적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낙은 잠깐동안만 지속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낙은 어떤 낙이든 죄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낙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받게 되는 고난을 더 귀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일이란 사실입니다.

  2.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

  그런데 26절 말씀에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분은 여호와의 사자로 이 분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는 비록 신약에서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들어갔을 때 그 안에 또다른 한 명이 그들과 함께 거닐고 있었는데 그를 가리켜 신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는 장차 될 일에 대한 예언에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날 메시야에 대하여 ‘나 같은 선지자’란 표현을 썼습니다. 모세는 이 때에 이미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하는 그 모든 일이 오직 그 분을 위한 일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처럼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더 기쁘게 여겼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다음 구절에 나와 있는 대로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임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모세의 믿음을 상기하시면서 마5:11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모세는 눈앞에 있는 이 세상 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예비된 더 나은 상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결론 :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모세는 믿음을 가지고 그의 생애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모세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주시는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승리적인 생애를 살 수 있습니다.





  (75) 애굽을 떠나온 믿음

   (히브리서 11:27-29)


  27절부터 29절까지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올 당시의 모세의 위대한 믿음을 몇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을 떠나 올 때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유월절의 예를 정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사실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애굽을 떠난 담대한 믿음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그는 이 소명을 기피하려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모세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애굽 땅에 정착하고 있는 이스라엘 벡상들을 설득하여 애굽을 떠나게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노예로 부려먹고 있는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빼내는 일은 더욱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애굽에 있는 동족에게 가서 말하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시고 그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시고 그의 손을 폼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문둥병이 발하게 하시는 등, 모세에게 이적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담대한 믿음으로 애굽에 가서 바로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왕의 협박과 핍박을 견뎌내고 열 재앙의 이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며 자기를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섭리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친구처럼 모세를 만나서 이야기 하셨으며 모세를 사람 앞에서 하나님처럼 높여 주셨습니다.

  2.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시고 결과적으로 열 번째 재앙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열 번째 재앙이 애굽에 사는 모든 가정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을 정하여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의 천사가 피를 바른 집은 장자를 죽이지 않고 그냥 넘어가리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로 말씀대로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유월절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을 잡아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대로 양의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입니다.

  이로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그날 밤 죽임을 당했지만 고센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를 유월절의 영원한 절기로 정한 것입니다. 이런 유월절의 예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제사제도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런 유월절의 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3. 홍해를 건넌 믿음

  모세의 인도를 받고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주변에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의 정예군이 이스라엘을 뒤쫓아 왔습니다.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바로 왕의 군대의 추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이 두려운 일이 그들의 눈앞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모세를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말하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보시고 모세에게 명하여 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홍해로 내밀게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지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바다를 믿음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 군대는 갈라진 홍해 바다에 들어가 뒤쫓기는 했지만 그들은 물에 엄몰되어 죽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홍해를 건넜기 때문이지만 애굽 군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근거도 없이 홍해를 건너다가 물이 수장되어 버린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집니다. 그 말씀을 근거로 순종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결론 : 우리들의 생애에는 간혹 홍해를 건너가야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모하게 자기 생각대로 홍해를 건너가려다 간 애굽 군대처럼 홍해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그 물 속에 엄몰되어 수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홍해를 만났을 때 믿음으로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PREV :   히브리서 12장 (83 - 92) 밤중소리 
 NEXT :   히브리서 10장 (53 - 61)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