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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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장 (53 - 61)
 밤중소리  02-01 | VIEW : 991



  (53) 첫 것과 둘째 것

   (히브리서 10:1-10)


  오늘 본문 9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폐하신 첫 것은 무엇을 말하며 세우신 둘째 것은 무엇인 것입니까? 왜 하나는 폐하심을 받고 또 하나는 세우심을 받은 것인가? 이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일에 중요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1. 첫 것은 왜 폐해졌나?

  하나님은 첫 것을 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폐하여 버리신 첫 것이란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의를 약속하신 첫 번째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폐하셨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율법이 인간에게 의를 약속하였지만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유명무실한 이 법을 폐지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1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실 구속의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법도로 살아 있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짐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났다,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뜻은 율법이 그 법을 어기는 그리스도들에게 대하여 구속력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간통죄란 죄목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에는 이런 법 조항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도 앞으로 간통죄가 형법에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사람들이 간통을 했어도 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간통죄를 범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같은 죄는 구속력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인간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의 경우도 이와 똑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구속력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8: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 율법의 구속력 때문에 율법을 지켜 왔지만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죄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2. 둘째 것으로 세우신 은혜의 법

  여기서 하나님은 둘째 것을 세우시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의도 줄 수 없고 생명도 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이 안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 주시고 생명도 주시는 다른 법을 세우시게 된 것입니다. 이 법이 은혜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율법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은혜의 법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십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굉장히 큰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들에게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의를 주겠다고 약속은 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은 선천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율법이란 법은 절대로 지킬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빚 좋은 개살구 격입니다. 약속이 있으면 무엇합니까? 그것을 지킬 수 없을 때는 그 약속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신기루 같은 율법의 약속을 폐하시고 새로운 은혜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믿음의 의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의와 생명을 주시는 일에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작정하시고 율법으로 주실 것이라고 하신 첫째 것을 폐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로 하나님이 폐하신 첫 것은 불완전한 속죄 제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의와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 정죄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 율법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속죄제물을 드리는 제사제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에게 온전한 의를 줄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에 그 속죄제물 역시 온전히 죄를 용서해 주는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율법처럼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짐승의 피가 죄로 죽게된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인생들이 근본적으로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첫 것인 짐승의 속죄 제물을 폐하시고 둘째 것인 그리스도의 속죄의 법을 새롭게 세우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이 완전한 제물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를 정죄했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는 율법처럼 계명을 지키는 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믿음의 의인 것입니다.





  (54)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오신 예수

   (히브리서 10:5-10)


  우리는 어제 첫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폐해지고 둘째 것을 세우셨는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첫 것이란 곧 율법을 가리키는데 이 율법은 1절에서 밝히시기를 다만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그림자는 참 형상이 올 때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의 참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첫 것인 율법은 폐해지고 둘째 것인 예수 그리스도로 세우신 은혜의 법이 세워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7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우실 사명을 가지시고 세상에 오실 일에 대한 시편40편에 예언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기록은 다윗의 기도로 나오지만 실인즉 구약적인 제사와 율법을 폐하시고 새로운 은혜의 법을 세우시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한 시이지만 그 영적 배후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임하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5절에서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란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실 일에 대한 것이며 그 때에 이루실 주님의 사역에 대한 자기 고백의 예언으로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와 예물은 첫 것인 율법에 대한 의식인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에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해답이 4절에 나와 있는데 ‘이는 황소와 송아지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와 예물은 원래가 속죄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이며 참 형상이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와 예물이 아니신 것입니다. 삼상15:22절에서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6:8절에서 ‘공의와 인애와 사랑과 겸손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므로 이 같은 그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원치 아니하신 것은 폐하시고 원하신 것을 취하신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하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은 구약을 말합니다. 두루마리는 옛날 구약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양피지를 가리키는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이 같은 두루마리에 율법서, 시가서, 역사서, 선지서 등을 기록했습니다. 두루마리 책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런데 7절 말씀에 의하면 이 같은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자기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기록된 책이 성경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두루마리 책에 나를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입니까? 요6:38-40절 말씀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그런 사람들은 하나도 잃어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뜻을 이루시기 위해 어떻게 세상에 오신 것입니까? 빌2: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인 율법을 이루심으로 그것을 폐하시고 자신의 피로 새로운 둘째 것, 은혜의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예수님은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우시기 위해 세상에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는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운명하실 때, ‘다 이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림자인 첫 것은 폐해지고 참 형상인 둘째 것이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나와 깊은 관계를 가지신 분입니다.






  (55) 영원한 구원

   (히브리서 10:11-14)


  오늘 본문 말씀 중 14절 말씀은 우리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진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쉽게 간략히 말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그의 피의 대가로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구원이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옛날부터 신학적 크다란 논쟁이 되어 온 교리 문제로써 구원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를 받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 중, 죄를 범했을 때에, 그 죄로 인하여 멸망을 받느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속한 장로교회의 입장은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른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멸망할 수 없으며 한 번 주어진 구원은 절대로 변함이 없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1. 한 번 에 족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왜 한 번으로 족한 것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얻는 구원은 새로운 생명을 받는 일을 말합니다. 요1:12절에서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는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난 자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한 명의 의인도 없으며 한 명도 구원에 이를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치와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그의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한 명도 아담의 자손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아담 안에서 온전히 아담과 하나가 된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 생명적인 연합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자는 한 명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6: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했다고 그 이유로 영생이 취소되거나 생명을 잃어버린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모두 가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지만 그러나 죄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를 짓는 경우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짓는 경우입니다. 아담 안에서 짓는 죄는 하나는 원죄요 하나는 고범 죄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심판을 받게 되고 고범 죄로 그 받는 형벌의 경중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죄는 이미 원죄는 소멸되고 고범 죄뿐인데 이 고범 죄는 이미 용서받은 것들입니다. 용서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처리되는 것입니다. 이 처리는 두 가지가 따릅니다. 하나는 징계가 따르고 하나는 하늘의 상급에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이미 드려졌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 드린 속죄제물은 양이나 송아지나 염소 따위의 피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잡아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죄를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소나 양이나 염소와는 달리 거룩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그의 피는 죄인들을 단번에 온전히 속죄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과 영생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만일 죄를 범할 때마다 새로운 제사를 드려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죄를 범할 때마다 다시 세상에 오셔서 계속적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그가 한 번 피를 흘리신 것으로 죄인의 온전한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 다음에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은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 뿐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언제 어떻게 범죄할 것이란 사실까지 벌써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런 장래적인 일이 우리의 구원을 소멸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증해 줍니다. 롬8:1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죄란 말은 죄 값으로 받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또 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소멸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변질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 예수님은 하늘의 지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히10:14절에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56) 그 날 후에 세울 하나님의 언약

   (히브리서 10:15-18)


  11절에서 14절까지는 땅에서 제물을 드린 제사장과 하늘의 지성소에 계시는 제사장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땅위의 제사장들은 매일 하나님의 성전에 서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이유는 한 번의 제사로는 계속적으로 범하는 사람의 죄를 속죄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범할 때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사람의 죄를 기억나게 하거나 사죄의 은총을 맛이나 볼 정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영원한 속죄 제물로 단번에 드리신 것입니다. 12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분은 이제 속죄제물로서의 그의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1.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이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새 언약은 예전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16절에 그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날 후’라고 하신 말씀은 첫 것이 지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린 이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날에 세울 언약은 돌비에 새겨진 율법으로 된 언약이 아닙니다. 16절 이하에 있는 말씀은 예레미아31:33-3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우리의 마음에 새기는 새 언약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두고 우리 마음에 기록하십니다.

  이것은 진리를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주 하시는 역사를 말합니다. 성령은 진리를 증거 하십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로 진리를 믿게 하십니다. 우리는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새 언약을 우리들로 믿게 하사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새 언약의 체결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우리 생각에 기록하는 일은 성령의 내주로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서 나의 영과 하나가 되어 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배하시고 나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 새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남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관계를 롬8:14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원수의 담은 무너지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언약이 새 언약인 것입니다.

  다음에 새 언약의 약속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다시 기억치 않으시겠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난날의 더럽고 추한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기억도 아니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분명히 회개한 죄에 대하여 다시 들추어내어 추억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완전히 용서를 받은 일이며 하나님께서도 기억에서 잊으신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끄집어내어 상처를 입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한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거나 그 사람에게 회상시켜 주는 일로 상처를 입혀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일을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잠정적인 것이거나 일시적인 것이거나 조건부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영원히 변함없는 구원이심을 믿고 우리의 구원에 결코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57) 사죄자의 신앙적인 자세

   (히브리서 10:19-20)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영원하신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로 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그냥 죄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그 고귀한 피로 속죄해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상실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죄의 용서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을 엄격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7: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어도 좋으냐는 문제에 대해 바울은 롬6: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라고 말씀했고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죄를 받은 사람은 그 사죄함에서 오는 참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죄의 용서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이 그 마음에 넘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축복이 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내 인생에 평안함과 감사가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선언을 들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은 형용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사죄에서 오는 축복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온전한 제사로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받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보겠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특권

  (1) 우리에게 지성소가 열려져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땅위의 지성소는 성소 뒤에 있어서 휘장으로 막혀져 있으며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차례씩 들어갔지만 이 지성소가 하늘로 옮겨진 후에는 땅의 지성소는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 것을 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이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가는 것입니까? 그 지성소에도 휘장이 내려져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문제와 직접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휘장이 사라져 버렸다거나 휘장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씀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성소 휘장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휘장 가운데로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늘에 지성소에도 들어가는 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롭고 산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어 주신 길인데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열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휘장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로 그 길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휘장이 찢겨져 하늘의 지성소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말은 하늘 문이 열렸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다만 우리들의 신령한 눈이 어두워 바라볼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시간은 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때 그 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제사장의 직분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릴 그 때입니다.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물을 드릴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나 형제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찢겨진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 앞, 지성소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하심이란 사죄의 은혜요 돕는 은혜란 하나님의 인도하십입니다.

  결론 : 죄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하게 씻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또한 그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새롭고 산길이 항상 열려져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58) 보좌에 나아갈 자격자

   (히브리서 10:21-25)


  22절에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씀했습니다.

  1. 누가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가?

  누가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 자격 요건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22절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참 마음을 가진 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양심의 악을 씻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은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 씻음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 받아 그 양심의 악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몸을 맑은 물로 씻음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23절 말씀에서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는 자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이 땅위의 것이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롬8장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소망에 흔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염려하는 생활로, 세상을 바라보는 생활로, 죄악의 유혹을 받는 생활로 소망에 흔들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만 굳게 잡되 결코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2. 모이기를 힘써라

  교회 생활에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24절과 25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생활의 중요한 원리는 서로 돌아보는 일인데 특별히 사랑과 선행에 대하여 격려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란 곳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시기 잘하는 사람, 투기심이 많은 사람, 다른 사람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사람 등등 실로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잘 섬기며 선행하는 사람에게는 중상이나 모략 대신에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모범적인 성도들에게는 주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고 격려를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교회란 곳은 모이는 곳입니다. 사람들의 모임이 없이는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불러모으신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을 이루는 곳입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우리가 그 지체가 됩니다. 그래서 주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이는 일에 서로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시는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그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모이고 주일 찬양예배에 모이고 삼일 밤 예배에 모이고 구역 예배에 모이고 새벽 기도회에 모이고 심야 기도회에 모이고 여하튼 모이기에 힘쓰는 교인이 온전한 교인 구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임의 유익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이면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에 말씀으로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임이 있는 곳에 우리 주님이 친히 임재하시어 축복해 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임에서 다른 사람의 흉이나 보고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고 신앙에 유익이 없는 무익한 말이나 늘어놓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임은 많은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임이 끝나면 곧 집으로 달려가 집안 일도 살피고 아이들도 보살피고 남편에게도 아내로서의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에게 거부감을 주거나 예수를 믿는 여자가 왜 저러냐는 식의 비방을 들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참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올바른 회개를 하신 것입니까? 또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소망을 견고히 잡지 못하고 세상일로 흔들리는 일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저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59) 짐짓 죄를 짓는 자

   (히브리서 10:28-29)


  오늘 본문에는 ‘짐짓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한  두려운 경종이 있습니다. 26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린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짐짓 범하는 죄’란 무엇이며 이 죄가 어떤 것이기에 ‘다시 속죄하는 제가가 없다’고 하신 것인가?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 그리스도의 제물을 욕되게 하는 죄

  예수님은 우리의 온전하신 속죄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 해도 그 죄에 대하여 사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1:9절에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씩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죄’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5:16-17절을 보시겠습니다. (       ). 이 말씀으로 볼 때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죄에 대하여 두 가지 면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2:31-32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가지는 히6:3절 이하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2. 짐짓 범하는 죄의 종류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고 한 말씀은 그 진리를 믿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성령의 끊임없는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아 교회도 나오고 복음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는 짐짓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짐짓 이란 말은 ‘일부러’ ‘고의적으로’란 뜻입니다. 이미 진리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일부러 거역하는 사람들, 그 진리를 못들은 척 하는 경우, 그에게 구원의 은혜가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짓 죄를 범한다’ 또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죄를 범했다’ ‘타락했다’는 말은 우리가 육체로 범하는 어떤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거짓말했다거나 살인을 했다거나 간음죄를 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해 주는 죄란 진리에서 떨어지는 죄, 구원의 은혜에서 벗어나는 죄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그 은혜를 멸시하는 죄를 가리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 역시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에 경종을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믿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역사 하심과 인도하심을 끝까지 거역하는 자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여 구원의 길에서 스스로 떠나는 일입니다.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은혜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히6:6절에서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을 보내신 것 이상, 우리를 구원해 주실 다른 사랑의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을 속죄 제물로 보내신 일은 하나님의 최대 최상의 사랑이요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같은 죄에 대해서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았는데 어떻게 속죄의 제물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데 그 분을 짓밟고서는 다시 드릴 속죄 제물이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 27절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죄’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히4:2절에 있는 말씀처럼, 들은 말씀과 자기의 믿음이 서로 화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를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들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60)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생활

   (히브리서 10:30-31)


  본문 32절에서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 우리의 생활에 두 가지 변화가 온 사실을 실감 있게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의 심령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의 마음은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는 생활을 추구하기 때문에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환경의 변화입니다. 주위로부터 우겨 쌈을 당하는 곤고함을 당하게 됩니다.

  1.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신32:35-36절 말씀을 30절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원수라고 하신 말씀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26절에서 말씀해 주신 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의 죄는 속죄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위해 드릴 속죄 제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원수들에게 엄중한 심판으로 갚으십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이 땅위에서 하심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끝까지 참으시면서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에 비례해서 심히 두렵게 나타납니다. 그들의 육체가 죽는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히9: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자색 옷 입은 부자가 들어간 음부란 곳이 그 심판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에 백보좌 심판을 거쳐 둘째 사망의 장소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사망의 두려움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주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

  다음에 다른 또 하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에 대하여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 받을 대상자가 원수인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이라고 하신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들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이들 중 하나는 교회의 가라지 들입니다. 교회에는 알곡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가라지도 함께 있어서 알곡과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의 존재는 교회에 암적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원수가 이들을 심었다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날에 이 원수를 불태우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또 하나의 심판의 대상자는 누룩입니다. 누룩은 악한 교훈으로 진리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진리에서 돌이키게 하고 이단을 형성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나오는 이세벨의 교훈이 이 누룩에서 나온 쑥물입니다. 바울은 이 누룩에 대하여 갈5:7절에서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했습니다.

  (3) 다른 또 하나의 심판의 대상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육신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등한히 하는 자들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악한 종이 이들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증거도 없는 믿음을 인정하지 아니하십니다. 믿음을 나타내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열매인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시기에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생활은 믿음을 스스로 저버린 생활이 됩니다.

  3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두려 울진저’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란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 스스로 시험해 보라는 말씀을 명심하여 자기 신앙에 대한 온전한 확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빨리 돌이켜 열매 맺는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이 교회에서 가라지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닌가 늘 자기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열매도 없으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 하고 죄를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속죄의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바른 생활을 하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인줄 믿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 아닌가 스스로 살펴보는 가운데 소망을 견고히 붙잡고 흐트러짐이 없는 믿음의 생활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61)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히브리서 10:32-39)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언제나 그 믿음의 담대함에 승리의 비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35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상을 얻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히브리서는 구약적 언약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기 어려운 유대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이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구약적 율법에 얽매어 믿음에 많은 제한을 받으면서 확고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에서 언약된 메시야이시며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구약적 속죄 제물의 완성임을 성경적으로 증명하며 배도적인 신앙의 두려움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으로 새 힘을 얻어 앞으로 닥쳐올 여러 환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담대함을 주기 위하여 지금 이모저모로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빛을 받은 후에 받는 고난

  히브리서 저자는 32절에서 지난날 그들이 믿음을 받아 드린 후에 그로 인하여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고난을 회상시키고 있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들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빛을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에서 핍박을 받은 일은 명백한 사건으로 종교사나 역사 서적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절대시하는 동족들에게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에 많이 나타나 있으며 사도들과 많은 복음의 일꾼들은 이런 상황에서 순교의 제물로 많은 피를 흘린 것입니다. 이들이 받은 고난에 대하여 몇 가지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방은 복음이 이방 종교와 전혀 다른 방법의 의와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우상 숭배를 반대하고 거절하는 일은 지금도 같지만 이런 배타적인 성경 진리가 그 당시 이방 사회에서는 크나큰 비방거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가두거나 매질을 하거나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혹독한 환난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업을 이어가는 산업도 빼앗겼습니다.

  2. 고난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소망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이 같은 고난과 환난을 참음으로 이길 수 있었는가? 어떻게 이런 시련을 기쁘게 당할 수 있었던가? 34절에서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산업은 이 땅위에 있지 않습니다. 이 땅위에서 우리가 경영하는 산업은 다만 더 낳은 우리의 영구한 산업을 얻기 위한 삶의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산업을 포기하므로 영구한 산업을 얻을 수 있다면 기쁨으로 그 길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태도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산업에 대하여 우리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언급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있을 상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산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4:12절에서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실 일은 영구한 산업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신앙의 담대함을 가지고 그 어떤 고난과 환난의 시험 중에도 배도 하는 일을 하거나 불순종하는 일로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 살아가는 성도이건 주의 재림에 소망을 두고 고난과 환난을 이겨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는 생활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질 자들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할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로써 심판 받을 대상자들이 아니라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인내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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