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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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 (30 - 37)
 밤중소리  02-01 | VIEW : 1,073



  (30)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

   (히브리서 61-3)


  그리스도를 영접한지 이미 오래되어 단단한 음식을 취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조차 아직도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연약한 히브리 교회의 성도들을 안타까이 여긴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초보적 교리에서 벗어나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터를 닦지 말라고 하는 초보적 교리는 어떤 것들이냐에 대하여 본문에서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일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들로 성도들은 이런 교리적 지식을 잘 배우고 견고히 해야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같은 교훈에 대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자주 흔들렸던 것입니다.

  1. 죽은 행실의 회개

  우리는 초보적인 도리에 매달려 언제까지나 젖만 먹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믿음의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달리기 쉬운 그리스도 도의 초보적인 도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는 말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회개란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기독교에서 회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들의 회개입니다. 이들의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반드시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회개 없이는 예수를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회개를 구원의 회개라고 합니다. 이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던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할 때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던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일에 대하여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인 것입니다. 이 같은 회개는 오직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단 한 번의 회개로 이루어지며 그 효과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회개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전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회개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회개를 마친 사람들입니다.

  이 회개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회개가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 회개가 없이 우리가 우리의 생활이나 생애에서 하는 모든 회개는 회개의 가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이 회개로서 우리는 아담으로 내려오는 사망의 원죄가 소멸되고 우리가 아직까지 지은 모든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평생의 모든 죄까지도 사죄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6:2-7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으므로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

  다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 저지르는 죄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당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는 육신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육신이 죄의 유혹을 받아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 생활로 처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회개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회개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회개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회개가 아닙니다. 이 회개는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그의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죄는 정죄 받을 죄가 아닙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죄는 불신자들이 받는 정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처리를 받아야 할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불순종에 대한 회개인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회개가 없으면 세상 사람들과 성별되지 못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불순종하면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은 육신의 사람의 죄악의 근성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영으로 육을 죽이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죽은 행실을 온전히 죽이지 못하고 그 가운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짓는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회개에 철저하지 못하므로 신앙생활 한지가 오래 되었으나 항상 어린아이들처럼 젖만 먹는 어리석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에 철저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새사람의 행실로 자신을 단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31)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

   (히브리서 61-3)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의 성도들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으면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성장이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그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이도 교회에 잘 나오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사람인가? 습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성령이 주신 믿음이 아니라 육신적인 습성에서 자라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어려움을 당할 때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머리로만 자라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뿌리 없는 고목 같으며 화병에 꽂은 꽃꽂이 같아서 겉보기에는 신앙처럼 보이지만 성장과 결실이 없는 죽은 신앙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히11:6절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시고 나를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믿음은 혈육으로 기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경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칭찬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순종하는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으로 성장하는 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갖지 못하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초보적인 교리에 얽매어 늘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세례에 관한 교리

  그리스도인은 세례에 대하여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져야 세례를 받은 교인    으로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세례와 구원과의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천주교나 또 기독교 안의 어떤 교파에서는 세례를 구원의 조건에 결부시켜 하나님의 구원을 세례에 구속을 받게 하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세례는 구원에 절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에 흔들리면 어느 교인이 침례 교회로 교적을 옮길 때 또 침례 형식의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선행에도 있지 않고 세례에도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하나만으로 얻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같은 예수를 믿어도 사회 혁명가로서의 인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메마른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핀 사랑의 성현으로 받들어 섬기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신 모든 사건을 믿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길이요 방법입니다.

  세례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고 하는 표로 받는 신앙고백의 의식입니다. 세례에 이런 믿음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례 자체엔 아무런 구원의 능력도 없습니다. 구원의 보증도 아닙니다.

  회개란 우리가 이제 죄에서 깨끗해 졌다는 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증표도 아닙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세례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벧전3:21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으니 이제 그 가운데서 더 살아갈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에 대하여 살았으니 내 생활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겠다고 하는 신앙적인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이런 신앙을 가지지 못하므로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더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 세례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함입니다. 이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실을 명심하고 참 세례의 생활 가운데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영적 연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2)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히브리서 6:1-3)


  다음에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기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고 했습니다.

  1. 안수문제

   안수는 성경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안수를 받는 경우가 있고 직분 자를 세울 때 안수를 받습니다. 어느 것이건 안수는 기름 부움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눅13:10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병자를 위해 안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수하심으로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병자가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주의 종에게 안수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막10:16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종의 안수 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행8:17절 말씀을 보면 사도들의 안수 기도로 성도들이 성령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려는 성도가 목사의 안수 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 헌법 규칙 제12조에 의하면 ‘교회에서 헌법에 의지하여 성직을 받은 자 외에 병자를 위하여 함부로 안수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능력을 받았다고, 은사가 있다고 성직자가 아닌 집사나 장로나 권사들이 교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는 일은 삼가야 할 일입니다.

  안수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하며 안수로 나타난 효과는 안수자의 능력이나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나타난 사실을 인정하고 안수 자는 결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직분 자들에게 하는 안수는 집사나 장로를 세울 때 시행하는 안수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이 안수에 신중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수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수를 함부로 주고받거나 안수 받는 일을 경솔히 여기면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대개 이런 유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늘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더 깊고 넓은 영적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죽은 자의 부활 문제

  죽은 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소망임과 아울러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계도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소망도 희미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이란 언제까지 가도 젖만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더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몸은 영체가 아닙니다. 부활체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기 위해 아들과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이 부활에 관한 진리를 잘 배우고 이해하고 깨닫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부활의 교리가 아직 확고히 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부활 관을 가지고 부활을 소망으로 삼아 신앙 생활을 하려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숙한 신앙의 단계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순교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첫째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부활은 상급부활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왜냐 하면 이 부활에 참여하는 순교자들은 지상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하게 되며 하늘에 올라간 후에도 그 왕권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시기에 이뤄질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활은 일반적인 부활로 마지막 부활이라고 하며 생명의 부활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부활의 시기는 천년왕국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천국에 올라갈 때 이루어 질 것입니다.

  3. 영원한 심판의 교리

  다음에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하여 회개치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영원한 심판에 대한 경종으로 예수님이 비유적으로 경종하신 일이 있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두려운 말씀을 깨닫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젖이나 먹고 자라는 신앙이 언제나 어린 자리에 있는 것은 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는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어제까지나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초보적 교리와 그리스인의 생활을 잘 감당하여 우리의 신앙의 차원을 영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완전한 대로 나가기를 힘쓰는 성도들만이 성장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3) 믿음에서 떨어지는 죄

   (히브리서 6:4-8)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신학적으로도 많은 논쟁이 계속되는 구절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를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타락하여 지옥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히6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가지고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1. 문제의 풀이

  (1) 이 문제의 키는 4-6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한번 비췸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한 번 빛을 얻었다는 말은 빛을 받았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잠시 동안 빛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빛의 소유자인 것이 아니라 빛의 비췸을 잠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얻기까지는 빛의 비췸을 여러 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의 비췸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하시고 어느 정도 이해하도록 하십니다. 때로는 은혜를 주시기도 하시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도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씨앗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는 분명 구원이 보장된 경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드리고 그 말씀에 소망을 가지고 그 말씀으로 인한 시험이 오기까지 얼마간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그가 신앙에서 떨어지기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 착각을 주었으며 구원받은 무리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 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비췸만을 받아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빛을 받아 빛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사란 표현은 성령이 주시는 각가지 은사를 말합니다. 은사는 고전12장에는 성령의 9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성령의 은사는 구원받은 포적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시는 은사가 아닙니다.

  옛날 사울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예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발람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발람의 당나귀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사람의 방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은사를 받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야 할 것이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은사를 받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에 참여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참여한다는 말은 잠깐동안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을 말합니다. 부흥회 같은 곳에서 크게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다든가 어떤 환상을 보았다든가 성령의 부인할 수 없는 역사를 체험한 상태를 성령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4) 다음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순종은 지속적으로 계속하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인한 시련이 올 때에는 말씀에서 떠나게 되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세의 능력이란 말은 영생과 천국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6절에서 이르시기를 만약 이런 생활을 하다가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호개케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어떤 범죄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옳은 길에서 벗어났다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뜻으로 믿음에서 영영히 떠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2. 이 말씀의 참뜻을 생각하자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타락하기 이전까지는 얼마간 교회에 나와서 알곡처럼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자신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신의 거짓된 모습이 들어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타락하는 일이 그 일입니다. 이 타락의 동기가 어떤 죄에 기인했든지,  다른 사람의 권면에서 온 것인지 환경의 변화에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때 이들은 믿음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가라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적으로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던 경우에도 멸망의 자리에 이르거나 구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것처럼 보일 때도 있겠지만 결국은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들임을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생활의 결실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결론 : 오랜 신앙 생활 중, 아무런 열매가 없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기 쉬운 것입니다. 열매가 없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신앙 생활을 한다면 이런 경우에 해당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경종으로 삼아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34)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는 것

   (히브리서 6:9-12)


  오늘 본문 10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기억해 두시는 두 가지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를 힘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 두 가지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자비는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모든 불의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주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죄를 초월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혹 범죄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계속적으로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은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해 주시고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시지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억해 두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장사꾼이 외상 장부에 외상값을 치부하듯 우리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상급을 주시기 위해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짐없이 기억해 두신다고 하는 사실은 이 또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이 이처럼 자비하신 분이신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이신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 하사 너희 행위를 기억해 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어떤 행위를 기억해 두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행위란 신앙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우리의 축복과 하늘의 상급은 행위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란 곧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를 말합니다. 믿음과 행위는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는 그 말씀을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결실이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른 또 한가지의 열매가 있습니다. 잠12:14절에서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입술의 열매도 상급의 열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록이 우리의 방정맞은 입술로 인하여 사라져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믿음의 입술을 가져야 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입술입니다.

  우리의 구원에도 우리의 입술의 시인이 따릅니다. 롬10장에서 이르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2.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는 것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기억해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는데 생명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품고 있지만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열매로 나타낼 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랑을 나타낼 때 지극히 주의해야 하고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이나 공명심이나 자기의 자비심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의 이름을 위해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이 성경적 교훈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나타내는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서 다른 이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은밀한 중에 베푸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자기가 한 일에 나팔을 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물질을 주는 것만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일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일은 더 큰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은 진실이 따라야 하고 정성이 깃들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도들을 섬긴 일을 기억해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을 섬기는 일에는 인색하고 섬김을 받는 일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첫째로 성도를 돌보아 주는 일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먹을 것이 없을 때, 병들고 외로울 때 위로해 주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다음에 섬기는 일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인도하는 일을 말합니다. 잘못된 길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돌보아 주는 사랑의 보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모든 행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런 일에 소망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기억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또한 기억하시어, 그 언약대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얼마나 기억되는 일을 한 것입니까?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보다 많이 기억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상급을 받는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5)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히브리서 6:13-16)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공허할 뿐입니다. 이 소망에 대하여 바울은 롬8장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생을 말합니다. 이 우리의 영생에 관한 것은 지금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소망으로 삼고 우리의 전생애를 이 소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같은 질문의 해답이 곧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1. 맨세로 세우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 우리들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일에 대하여 말씀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말씀을 믿는 자에게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맹세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예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약속하신 것입니까?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맹세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대아우르 땅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떠났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당시의 나이는 75세였으나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에는 100세로 25년간이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받았으며 많은 재물을 받아서 당대의 대부호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우를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일에 있어서 인간적인 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이삭을 낳을 당시는 아브라함의 나이가 이미 100세나 되어 죽은 자와 같이 되었고 아내 사라도 나이 많아 경수가 끊겼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면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 빠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   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신의 환경이나 세월의 흐름이나 자기 몸의 조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중에 있었는데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이루실 것을 믿고 끝까지 기다림으로 그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롬4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의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맹세로 보이신 하나님의 약속

  그러면 하나님은 왜 맹세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를 그 이유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17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습니다. 만약 형편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이 수시로 변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는지 받지 못할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을 해도 약속대로 축복을 받을는지 그렇지 않을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일에 대하여 그 뜻을 변치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18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결론 : 언제나 맹세는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절대로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약하는 행위인데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기 이름을 가리켜 맹세하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처럼 약속하신 것을 변경하실 수 있다면 그 분은 이미 하나님이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그 약속의 토대 위에 믿음을 세워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6) 누가 약속을 받을 자인가?

   (히브리서 6:17-20)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에게 그 뜻을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에게 하셨기 때문에 그 기업을 받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

  (1)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사과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은 먼저 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하실 때 이삭을 주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4:2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과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인데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으며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들인 것입니다.

  (2)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함을 얻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히9:14-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사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으로 받는 백성이 되려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여야 하는 것입니다. 갈4장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을 받는 자들이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롬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주님의 영광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까?

  (5)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으로 받을 자라면 인내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10: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볼 때 다음 세 가지 조건을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응답이 늦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주실 시기에 어김없이 이루어 주십니다. 더디게 응답하시는 경우도 없지만 일찍 응답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절할 때,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때 그 때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내 뒤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법칙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을 쉽게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더디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참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의 약속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멀리 저버리고 자기의 뜻만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뜻을 행한 후에 주시는 보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맹세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것입니까? 이 약속은 성경에 한줄기 힘찬 광맥처럼 뚜렷하게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맹세로 하신 약속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서는 믿음의 뿌리가 내려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느냐는 질문은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느냐는 말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만이 시련 중에도 끝까지 참을 수 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분명 성령을 따라 난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바라봅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하신 그 언약을 믿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그의 약속을 소망으로 삼고 끝까지 달려가는 승리자가 되십시다.





  (37) 견고한 영혼의 덫

   (히브리서 6:17-20)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약속의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 기업은 하늘에 간직한 놀라운 축복으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바로 이 축복의 소망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소망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일에 맹세로 약속하심으로 그 뜻이 변치 아니하심을 확정지으셨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1. 영혼의 닻

  이처럼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약속은 우리에게 있어서 마치 영혼의 닻이 된 것입니다. 배에 있어서 닻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바다에 파도가 일고 바람이 심히 불 때 만약 그 배에 닻이 없다면 그 배는 끝없이 표류하다가 침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닻은 튼튼한 줄에 단단히 매여져서 바다 밑창에 힘있게 박힘으로 배로 어떤 풍랑 가운데서도 파선되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이 있는 것은 마치 이 배의 닻 같아서 세상 물결에 결코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망망한 바다와 같습니다. 이 바다에는 거센 바람도 불어오거니와 사나운 물결도 밀려옵니다. 광풍노도가 밀어닥치는 날이면 인생이라고 하는 연약한 작은 배는 이런 세상 풍랑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혹은 낙심하기도 하며 혹은 침몰하기도 하며 혹은 절망에 빠지기도 하며 혹은 파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영혼의 닻이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풍랑 속에서도 염려할 바가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이 되어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닻이란 하나님의 맹세로 약속하신 우리의 소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닻은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휘장 안은 지성소를 말합니다. 이 지성소는 구약적인 지성소가 아닙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지성소는 일년에 한차례씩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성소는 하늘의 지성소를 의미하며 이곳에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어떤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에 따라 희미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지성소 안에 먼저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튼튼하고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에 시련과 고난이 와서 우리가 그 거센 세파 가운데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어려움은 겪을지언정 우리의 소망은 결단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하늘의 지성소에 견고히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 닻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이 계시는 하늘의 지성소에 견고히 붙들려 매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흔들어 뽑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8장에서 이처럼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5:24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밝혀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누구든지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과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바치는 우리의 노력과 인내는 결코 헛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음으로 확고한 소망을 갖지 아니하면 마치 닻 없는 배처럼 우리 인생이 요동하여 세상으로 흘려 떠내려 갈 것입니다.

  2. 휘장 안에 들어간 닻

  19절에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휘장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휘장 안에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전와 지성소와의 사이에 가로막혔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리’고 하셨습니다. 이 성소 휘장이 찢겨지고 우리 예수님이 먼저 그곳에 들어가심으로 우리에게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지금 헛된 것을 붙잡고 헛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영혼의 닻이 되어 이미 주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하늘의 지성소에 내려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차람 확실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흔들리 말며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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