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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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장 (19 - 26)
 밤중소리  02-01 | VIEW : 1,205



  (19)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의 약속

   (히브리서 4:1-8)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유는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나의 신앙 생활의 큰 경종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일에 대하여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들이 느끼고 깨달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깨달음을 위해 히브리서는 강도 높게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과정이 교회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안식 세계로 가는 하나의 노정기의 그림자로 보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이 같은 실패를 통하여 그들처럼 안식에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가나안 안식의 참 뜻

  히브리서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언약하신 가나안 안식의 약속은 우리들에게 주신 참 영적 안식의 그림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는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애굽이라는 도성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애굽이란 나라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세상을 상징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까지는 애굽이란 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난 그들은 한평생 노예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생애는 우리들이 죄악 세상에 태어나 죄의 종으로 한평생 노예 생활을 하다가 급기야는 죄 값으로 죽어야 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용케도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자기 신분을 얼마간 속여 왔지만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일로 죄인인 자신의 신분이 탄로되어 광야로 쫓겨난 것입니다.

  (2) 다음에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살펴보면 바로는 세상 임금으로 불려지고 있는 사탄의 상징적 존재입니다. 바로가 끝까지 이스라엘을 추적하여 죽이려 든 것과 같이 사탄은 끝까지 이 세상 사람들을 죄에 얽어매어 종으로 부려먹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일은 교회와 세상과의 간격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일로 바로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홍해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교회간에는 그 가운데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너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옛 생활이 그립고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싶어도 중간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으므로 건너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을 사모했지만 결국은 단 사람도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곳은 교회뿐입니다. 자신이 교회 생활이 싫다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생활이 어렵다고 세상으로 나가 보세요.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세상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잔득 얻어맞기만 하고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3) 광야란 교회 생활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에서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한 것입니까? 그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애굽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지난날 세상에서 살아간 방법대로 살려고 하다간 반드시 실패합니다. 광야에는 쌀이 없습니다. 물도 없습니다. 고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애굽에서 살아간 생활 방법이 통할 리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시며 기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광야의 지도자로 모세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율법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5) 광야에는 여호수아란 인물이 나옵니다. 이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율법이 실패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갈 일은 율법이 할 일인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광야 생활 40년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 생활의 한 생애를 상징해 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땅은 안식의 땅의 그림자일 뿐 참된 안식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안식이 아니라 다른 안식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알에 대하여 앞으로 며칠간 계속해서 공부하면서 안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깨달으려는 것입니다.





  (20) 가나안 안식의 참 뜻

   (히브리서 4:2-3)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안식은 실인즉 신약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이며 그들에게 약속한 안식이란 그들에게 성취된 것이 아니라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 안식에 대한 그림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일에 대하여 고전10:1절 이하에서 그 신령한 뜻을 보여 주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11절에 와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6절에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로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그들이 당한 일을 거울로 삼을 일에 대한 분명한 언급입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행한 것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1. 우리의 경계로 주신 이스라엘의 패역

  (1) 고전10:6절 하반 절에서 저희가 악을 즐겨 하는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니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지옥에 갈 염려는 없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이렇게 자랑하면서도 실인즉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악을 즐겨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하다가 죄를 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즐거워하는 일은 없으며 죄란 사실을 알면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죄의 길에서 돌이킬 줄 모르며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다면 그들은 마치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님을 따르고 모세의 뒤를 따라가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 받은 것처럼 참 안식에 미치지 못할 것임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2) 다음에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거울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율법과 양심이 우리의 죄를 보여 주는 마음의 거울이 되는 것처럼 안식에 들어가는 거울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다음에 11절 후반 절을 보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갈 소망이 말세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만 가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경우로 보아 분명하다는 사실을 경계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한 점이 네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7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탐심이란 우상 숭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탐심으로 움직이면 목사이건 장로이건 성도들이건 다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강조한 점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음은 영적 간음과 육적 간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가 그리스도인에겐 치명적인 범죄인 것입니다. 영적 간음죄는 이단을 따르거나 거짓된 진리에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생명이 반드시 죽습니다. 육적 간음은 자신의 인생이 파멸되고 가정이 파괴되며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원망이 아니라 늘 감사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일에 대하여 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생활에 유익이 될 수 없다면 그 말씀은 들으나마나 입니다. 지금 교회에 들으나마나 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러면 그 말씀이 왜 유익함이 되지 못한 것입니까?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말씀과 화합치 못하면 그 말씀이 아무런 유익도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에게만 유익이 됩니다.

  결론 : 참 안식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아직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이 안식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본보기로 보여 주시며 안식에 들어갈 하나의 경계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유의할 점은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말씀을 믿는 일과 순종하는 일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은 들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 경계로 보여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안식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걸어간 불신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일로 경계를 삼아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을 본 받지 말고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 제 칠일의 참 뜻

   (히브리서 4:4-9)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3절에서 이르기를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안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소망으로 기다리는 천국의 안식이 하나님의 안식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안식

  히4:4절에는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몇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되는 날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중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안식일의 성경적 유래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 안식일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칠 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을 절대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장로의 유전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안식교 같은 기독교계의 일부에서도 이스라엘이 율법에서 지켜온 토요일 안식일을 고집하고 그리스도인이 만약 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우리는 4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 안식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칠 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안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안식은 이레 중 제 칠일에 국한시킨 그런 의미에서의 안식을 가리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 칠일에 누리신 안식은 율법에서 명령한 안식일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신 그 새로운 하나님의 안식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명하고 있는 안식일은 이 같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로 온전한 안식이 올 때까지 존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2. 두 가지 의미의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께서 내 안식이라고 말씀하신 그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안식이 처음에는 하나의 모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가나안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안식이 약속되었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 약속이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은 영영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다른 날의 안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안식을 위해 재 칠일에 안식하셨고 이 안식이 확실하고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안식이기 때문에 율법에 안식일을 정하여 그것을 지키도록 명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의 비밀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안식의 소망은 아직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9절에서 ‘그런즉 안식 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 쉬는 안식에 대하여 계14:13절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저희 수고를 거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안식을 소망하면서 살아갔습니다(빌1:22-26). 이 안식이야말로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말합니다.

  이제 율법적인 안식일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인데 그리스도께서 그 그림자의 실체로 오셨으며 참 안식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주셨고 그 안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율법아래서 참 안식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나 율법에 따라 필요한 것이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안식일이 존재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골2:16절에서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결론 : 율법적인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해졌습니다. 만약 이 안식일을 지키려면 다른 율법의 계명도 지켜야 하며 혹 그런 것들을 지켰다고 해도 의로워질 수 있거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받아 정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기념하고 그 안식에 소망을 두게 하시는 새로운 날을 주셨습니다. 그날을 성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하 안식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우리에게는 율법이 제시하고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 새로 주신 주의 날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의 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22)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브리서 4:10-11)


  1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제 칠일에 안식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 주셨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안식에 실패하므로 다른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해 안식일을 지키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로 이루실 안식의 그림자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의 속죄 제물로 죄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안식의 확실한 약속으로 그 안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1. 안식에 들어가도록 어떻게 힘쓰나?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구약적인 율법적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힘쓰는 사람은 율법에 얽매어 율법의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로 안식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힘 쓸 일은 안식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힘써야 하는 것입니까?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안식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앞으로 들어갈 하나님의 안식에 대하여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경종해 주므로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향하여 생애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3:13절 말씀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유혹을 받아 드리면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 불순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마치 그들의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멸망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 안식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롬6:11     절 말씀에서 그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의 뜻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죄에 대하여 마치 죽은 자처럼 죄의 유혹을 받지 마라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과 영원한 생명적 연합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와 같이 여기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바로 이런 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의 사람이 죽은 줄로 여기고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으로 육의 정욕과 죄의 유혹을 이기는 싸움에서 육을 죽이는 훈련을 잘하여 마음의 강퍅을 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면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히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자가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아야 할 대상은 우리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게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신 참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안식을 우리의 소망으로 끝까지 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안식에 대한 소망과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므로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안식을 소홀히 여겨 불순종하는 생활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11:6절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이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뒤에 있는 것은 잃어버리고 앞에 있는 상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광야 같은 교회 생활에서 안식의 땅을 바라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확실한 안식의 소망을 끝까지 붙잡고 안식의 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것처럼 약속은 받았지만 실패한 전철을 밟지 말고 순종하고 힘쓰는 생활을 통하여 약속의 땅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3)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히브리서 4:12-13)


  오늘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는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입니다. 히1:1절에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구약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전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음에 다른 하나는 이 모든 날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이 오늘날 신약이라고 불려지는 성경입니다.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삼위 되시는 분 중에 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절대적인 분이심으로 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서신서 등은 아들을 증거하시는 아들의 영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은 그 아들의 말씀 가운데 포함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엇을 하셨나?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사역을 그의 말씀으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히11:3절 말씀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일이 창1:1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역사를 에스겔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깊은 골짜기로 옮기심을 받았을 때, 그의 눈앞에는 죽은 사람의 뼈만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앙상한 뼈를 바라보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는가’고 물으셨습니다. 에스겔은 이 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뼈들을 향하여 명령했습니다. 그랬더니 에스겔이 대언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뼈들이 움직이더니 살아 있는 여호와의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대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한 번 말씀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안식도 이 같은 맥락에서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부터 몇 천년 전에 어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해도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이 땅에서 소멸됨이 없이 계속 살아 움직여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운동력이 있다는 말은 살아서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장차 인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낱낱이 심문을 받으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2장에서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하실 이가 있으니 곧 나의 말이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한사람의 예외자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어떤 공력에 의하여 용서를 받거나 그 사람의 덕행이나 선행을 통하여 구원받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사함 받는 일이나 구원받는 일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누구를 심판하시느냐는 문제에 대하여 알려면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요3:18절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는 문제에만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안됩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 있어도 오직 그 말씀에 따라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만이 그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안식의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안식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효력이 있습니다. 순종치 아니한 이스라엘을 본 받지 말고 약속을 믿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24)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4:12-13)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한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 이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 하시는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라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감찰하신다는 말은 ‘세심한 것까지라도 자세히 보아 살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감찰하시는 자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 존재로 나타낸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앞에 숨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책망을 들을 때, ‘우리가 어찌 할꼬’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찢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죄를 지적 받았을 때 아무리 그 말씀을 무시하려고 해도 드러난 죄에 대한 처리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 죄를 버리던가. 아니면 말씀의 책망을 들으면서 그대로 죄 가운데 살아가던가 입니다. 후자일 경우, 물론 하나님의 후속조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빛으로 들어옵니다. 이 빛 앞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 중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어 내어 어떤 죄라도 드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들어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성령에 의해 그런 권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마치 벌거벗은 자 같이 그 수치를 감출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통회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케 되며 죄 사함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 앞에는 숨겨진 죄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양심이 모르는 죄는 사람들이 회개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귀한 문제인 영생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던 일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 가장 무서운 인간의 죄인데도 양심은 그런 것들에 대하여 전혀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기는 해도 회개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죄를 고의적으로 숨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언제인가는 그 죄를 스스로 인정하여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하거나 마음이 죄로 멍들어 있거나 그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죄를 드러내어 책망하며 회개케 하는 능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바른 생애와 얼마나 깊은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시119:9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우리의 행실을 무엇을 따라 삼가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주의 말씀을 따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려는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활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생활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이유는 범죄치 않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사람은 그 말씀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범죄 할 수 없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앞에 직고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행한 그대로 행위 책에 전부 기록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행한 그대로 보응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 어떤 것이라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영적 무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위협을 느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그 말씀대로 역사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좌우에 날선 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가져오는 모든 유혹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탄의 유혹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대항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고 그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는 이 말씀의 무기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령의 검을 가지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25)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4:14-16)


  예수님과 대제사장과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에 대하여 대제사장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은 율법적인 대제사장인 것이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른 대제사장이심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이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4:1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1.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

  14절에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대제사장은 곧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그러면 예수를 가리켜 왜 큰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그 분은 이 땅위에 존재했던 율법하의 대제사장과 같은 존재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대제사장은 율법을 따라 세워진 사람들로 대제사장이란 직분을 맡아 왔습니다. 이들은 레위의 혈통으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세워진 사람들로 직분만 대제사장일 뿐 모든 것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율법에 의해 세워진 직분상의 대제사장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맹세로 되셨다고 했습니다. 히7:20-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110:4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누구의 반차를 좇았다고 하셨습니까? ?  (  )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누구의 반차를 따라 되었습니까? ?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레위 족속인 것이 아니라 ?  멜기세댁이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이건 순서를 따라 그 직위를 인계 받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은 레위 족속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  족이신가요? 유다 족이십니다. 이 족속은 절대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족속입니다. 그런데 왜 그 분은 성경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에 근거해서 레위 족속도 아닌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것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 점을 성경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이곳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멜기세댁은 레위 족속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제사장이란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창14:18절 참조).

  2.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우리의 대제사장

  멜기세댁은 유다 족속이 아닙니다. 멜기세댁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아브라함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후, 이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아무에게도 인계되거나 전수된 일이 없습니다. 그 후에 생긴 제사장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 지파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취하신 일은 율법에 의해 내려온 레위 지파의 반차를 좇은 것이 아니라 바로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을 이어 받은 제사장 직분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우리의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언제나 이의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어떤 절차에 의해 받게 되셨는가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경적 근거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런 이의를 달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적 제사장직만을 고집하므로 예수의 대제사장 직을 거부해 온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세우시기 위해 이미 창세기에서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시고 그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의 법적 증거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대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실체가 오면 사라져 버릴 레위 족속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로 세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인간을 제사장으로 세웠다고 했습니다. 약점이란 온전해 질 수 없는 결점인데 이것은 인간의 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언제나 율법을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영원히 온전케 되신 분입니다. 그는 하늘의 생명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에게는 죄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이 직분을 가지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분은 이 땅위에 계시는 제사장이 아니시오 하늘의 지성소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위에서 제사장 직분을 가진 대제사장은 하늘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범궤 앞에서 하나님께 대속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장차 나타날 일에 대한 분명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은 그림자가 되시는 지성소에 들어가신 분이 아니라 새롭고 산길을 통해서 하늘의 지성소에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지상의 대제사장은 죽음으로 인하여 대제사장의 변동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원한 우리의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영원히 변동됨이 없는 분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보좌 앞에 나아가 우리의 대제사장 앞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26)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

   (히브리서 4:14-16)


  본분 15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는 말씀입니다.

  1. 우리의 연약을 맛보신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을 맛보신 대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계셨을 때 그 육체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연약함을 맛보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배곺음도 당하셨으니 배곺음의 고통도 아시는 것입니다. 시험의 어려움을 겪으셨으니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그 어려움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치 말라고 하시면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능히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또 시험 받을 즈음에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히7: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모든 백성들을 한 명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일2:1절에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죄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계셔서 우리의 대언자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힘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힘입고 살아간다는 말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처리를 이미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힘입은 자란 뜻입니다. 마지막 다른 한 가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실한 소망을 가진 자란 뜻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힘입은 사람들은 온전히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이 같은 대제사장이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이 같은 대제사장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지 모르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생각은 우리에게 소망을 든든히 해 주며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며 어떤 시련 속에서도 결코 낙심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먼저 우리의 속죄의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으로 어떤 경우에서도 나를 온전히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만 사죄의 은총이 있으며 그에게만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속죄도 의도 영생도 소망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6절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그릇들임으로 범죄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죄를 범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을 찾아 그분께 간구하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의 속죄의 피를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뿐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도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죄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도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항상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는 바로 우리가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새롭고 산길을 통해서 은혜의 보좌와 직통으로 뚫린 자리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주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그 자리는 다른 자리가 아닙니다. 은혜의 보좌라고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안식의 땅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지난날 모세의 음성을 듣고 패역했던 이스라엘처럼 강퍅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경종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죄를 범해도 시험이나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마시고 우리의 대제사장 앞으로 나아가기면 하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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