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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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장 (13 - 18)
 밤중소리  02-01 | VIEW : 2,249



  (13)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

    
  우리는 1절에 나온 말씀에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생각이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좋은 일에 생각이 깊은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생각이 미천한 사람은 그의 인격이나 그의 활동에 경솔한 면을 나타내 보입니다. 효자다 열녀다 하는 말들은 별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에게 깊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면 효자가 되고 일편단심 남편만을 생각하는 삶을 살면 열녀가 되는 것입니다.

  1.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생각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유식하게 표현하면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생각하는 일들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사람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골3:2절에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생각하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술을 생각하면 술꾼이 됩니다. 낚시를 생각하면 낚시꾼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언제나 위엣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잇는 것입니다.

  생각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옅은 생각이요 하나는 깊은 생각입니다. 옅은 생각이란 육신에 새겨진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마음에 품은 것이 아니라 머리에 기억되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좌우되기 때문에 변덕을 잘 부립니다. 예수를 믿어도 변덕스럽게 믿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입니다. 한때는 반짝했다가 얼마간 지나면 사그라집니다. 문제가 생겨야 교회에 나오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깊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 생각은 마음에 새겨진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그 무엇으로도 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 같은 생각을 말합니다. 예수의 생각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떠나지 않는 상태, 예수의 생각으로 마음이 꽉 들어찬 상태, 이런 상태의 마음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는 먼저 우리들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부르심 곧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백성이란 놀라운 칭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의 두 가지 사역

  우리는 1절에서 우리 주님의 두 가지 사역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 시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입니다.

  (1) 예수를 가리켜 ‘믿는 도리의 사도’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의 사도 시라는 뜻입니다. 사도란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토로스’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가 됩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오직 단 한분의 믿음의 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2) 다른 한 가지는 예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란 사람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속죄 제사를 드리며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의 기도를 하는 직분 자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을 대변하여,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시는 사도의 직분 자로서 다른 한 가지는 사람을 대표하여 사람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죄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역에 대한 예수님에 관하여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는 우리가 배울수록 그 진리가 깊으며, 더 알수록 더욱 신비스러움을 바라보며 더 깨달을수록 그 은혜가 말할 수 없이 큰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로서의 예수를,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히브리서는 바로 이 같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게 하기 위해 기록된 성경인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배우면서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그리스도를 잘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예수를 내 마음에 깊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14)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

   (히브리서 3:2-6)

    
  히브리서 기자는 2절 이하에서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세와 그리스도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모세를 등장시켜 그리스도와 비교한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이 모세를 메시야의 표본 인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율법에서 메시야를 증거 할 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하므로 그렇게 인식되어 온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모세와 비교하여 그가 모세보다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 에 대하여 증거하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확실히 증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집에서의 충성

  저자는 본 절에서 모세와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집에서의 충성심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의 모세의 충성심은 성경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민12:7절에서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세와 비교해 볼 때 감히 비교될 수 없을 만치 우월한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다욱 큰 영광을 받을 만한 분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비교에 있어서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다’고 한 것입니다. 집 자체는 존귀치 않습니다. 그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영광을 누릴 집주인이 존귀한 것입니다.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가 그러하다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4절에서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해 준 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 말입니다. 3절에서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 하다는 말씀으로 모세는 집에 비유되고 그리스도는 집을 지은 자라는 뜻인데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으로 집을 지으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사실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2. 모세는 사환으로 그리스도는 아들로 충성

  두 번째로 모세와의 비교에서 5절과 6절에서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은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했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세가 한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선지자로서의 충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장래에 말할 것이란 창3:15절에서 언약하신 구세주의 언약으로 구약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모세를 비롯하여 말라기까지 모두 이 일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예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세가 일한 하나님의 온 집이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구약의 교회는 곧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께 충성한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분으로 이루실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충성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을 사환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환이란 메시야인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증거 하는 선지자로서의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6절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그의 집 맡은 아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의 집이란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하나님의 온 집과는 다른 의미의 집입니다. 모세의 충성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 맡은 아들의 신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그의 충성은 집 맡은 아들로서의 충성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그가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그의 죽으시기 까지 복종하시는 충성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편협적인 것이며 이스라엘에 국한시킨 잘못된 것이며 모세를 메시야의 표본 인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관이란 사실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6절 하반 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집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을 뜻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망의 담대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자랑인 것입니다. 이런 자랑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감사도 나오지 않고 감격도 없으며 삶의 보람도 없습니다.

  결론 :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놓치지 않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의 집이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말하며 영생과 천국의 유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5) 안식의 불합격자

   (히브리서 3:7-13)

    
  우리는 그간 예수님의 위대성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만유의 후사로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천사와도 비교할 분이 아니시며 유대인들이 숭배하는 모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한 분만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인생을 승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신 8절 말씀을 보니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서도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그는 마치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이스라엘처럼 안식에 들어갈 기회를 상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광야의 시험을 거울 삼으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시험 중에 그들의 마음의 강퍅함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마음의 강퍅으로 인하여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가지 견고히 잡지를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실족하여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우리에 대한 하나의 경종과 거울로 보여 주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광야란 하나의 시련의 장소입니다. 왜 시련의 장소인가? 그곳엔 물이 없습니다. 양식도 없습니다. 고기도 없습니다. 길도 사납습니다. 안식할 곳도 없습니다. 그러면 광야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뱀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는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인 것입니다. 이 광야는 오늘날 교회를 상징해 줍니다. 세상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라면 천국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교회라고 하는 광야 길을 한평생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을 나그네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광야는 육신적으로 살만한 곳이 결코 아닙니다. 물이 없는 곳이 광야니 기갈의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광야에는 양식이 생산되지 않으니 살아가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안식처가 없으니 쉴 만한 곳도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온 것입니까?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살아갔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와 마셨습니다. 이런 일등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하여 신8: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교회 생활과 광야 생활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시련의 장소입니다. 그러면 이 시련은 어떤 시련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하시는 시련의 장소인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육신대로 살아갈 곳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고 육신대로 살아가면 반드시 시행착오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인생을 실패한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생애가 왜 형통하지 못하며 어려움 속에서 실패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육신대로 살아가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광야임으로 육신으로는 교회 생활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했었다면 그들은 광야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지 아니해도 좋았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의뢰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창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곳은 영적인 광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육신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축복이 오지 않고 목이 갈하는 어려움이 오고 배가 주리는 가난이 오고 행로에 지치는 피곤이 오며 뱀에 물리는 질병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한 한 것처럼 신앙 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결론 :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언약한 축복된 생애를 살아가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들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 왔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16) 마음을 강퍅케 말라

   (히브리서 3:7-13)
    

  광야 생활에 승리는 인내와 소망과 순종과 하나님 의뢰에 있었습니다. 광야란 시련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때때로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조금만 마음을 가지고 육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면 그 때부터 광야의 어려움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려움이 와도 인내로 길이 참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기적이 창조되며 말씀대로 성취하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 생활을 하는 사람은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받는 모든 시련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마음의 눈을 떠서 좀더 먼 시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일체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인내도 버리고 소망도 버리고 순종도 버리며 하나님 의뢰도 버렸습니다. 그들은 왜 이 같은 광야 생활에 따라야 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버린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먹혀들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왜 강퍅해 진 것입니까? 13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아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은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강퍅하다는 말은 성질이 괴팍하고 고집이 센 악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1) 마음이 강퍅한 자의 신앙 생활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순종치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순종을 하려 해도 생각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상태로 있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강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죄의 유혹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유혹을 받아 드릴 때 그 마음은 순종의 의욕이 사라지고 육신의 정욕과 탐심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강퍅한 사람이 하는 일이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미혹된다는 것입니다. 10절 하반 절에서 ‘너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죄의 유혹에 미혹을 쉬 받는 것입니다. 미혹을 물리칠 능력이 상실된 것입니다. 다음에 ‘내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가리키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길은 그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뒤로 던질 때 소망의 길이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마음이 강퍅한 자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고 시험을 통해서 증험했지만 그래도 40년 동안이나 시험하는 생활을 계속하므로 이들에게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선언을 내리시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러면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까? 12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악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가 염려해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염려와 권면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할 수 있는 방법’임을 가리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말씀만을 순종하는 일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증거하신 것을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이 증거를 무시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식의 축복에서 제외됩니다.

  결론 : 우리는 마음이 강퍅하여 죄의 유혹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거역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처럼 육신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결국은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여 멸망한 일을 기억하고 마음의 강퍅으로 인하여 안식에서 제외되는 불행한 생애를 살아가면 안돼는 것입니다.






  (17)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

   (히브리서 3:14)


  오늘 주신 14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시작과 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좋은데 끝이 나쁘면 그것은 실상인즉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시작은 좋았지만 끝은 나빴다고 바울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참 잘 한 일이지만 그것이 육체로 마친 일은 대단히 잘못된 일로 좋게 시작한 일이 결과적으로 유익이 없었습니다.

  1. 시작이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신앙생활은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를 거의 모두가 신앙생활의 시작을 잘 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작이 잘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먼저 교회에 잘 출석하는 사람입니다. 직분을 주면 신앙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판단입니다. 처음에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하는 가운데 신앙적으로 성장한 사람을 보면 직분을 받고 10여 년 후에 보아도 그 버릇 그대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주일 예배만 나오고 다른 예배에는 얼씬도 안 합니다. 그러면 왜 흐리멍덩한 신앙이 그의 온 생애를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견고히 잡아야 할 것을 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릴레이 선수들이 달려오는 선수의 배턴을 확실히 잡지 않고 무조건 뛰어가면 아무리 잘 뛰어도 등수에 들 수 없습니다. 잡아야 할 것을 잡지 않고 뛰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 확실히 잡아야 할 것이란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인들이 잡아야 할 것

  (1) 이에 대하여 히10:2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굳게 잡아야 할 것은 믿는 도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면 믿는 도리의 소망은 무엇을 말합니까? 빌3:9-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꽉 잡아야 할 믿는 도리의 소망이란 첫째로 그리스도에게서 난 의입니다. 우리는 이 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완전한 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의를 소유하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나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의를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의를 내 소유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의를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2) 다음에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할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란 분은 우리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시간부터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실 분이시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붙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란 이름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란 이름보다 더 사랑스러운 이름을 불러 보신 일이 있습니까? 질병 중에 불러도 좋고 실패 중에 불러도 좋고 순교의 사형장에서 불러도 좋은 이름이 이 예수 이것만 왜 그 예수의 이름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은 왜 이렇게도 예수에게 차며 무심한 것입니까? 그 분에게 왜 이렇게도 인색한 것입니까?

  우리는 이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이 분께 소망을 두고 이 분만 붙잡는 생애를 보내신다면 우리의 생애는 이 예수로 말미암아 보람있고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수를 견고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3) 다음에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할 것으로 부활의 권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인과 부활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시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령적 연합은 바로 이 두 가지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속죄의 은혜를 받았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하늘의 새 생명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지 못하고 무덤에 묻혀 있으시다면 우리는 무슨 생명을 받아 영생하며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견고히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의욕이 없습니다. 마음에 뜨거움이 없습니다. 이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그 출발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와 부활의 권능과 하늘의 상급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할 절대적인 확실성을 하나님은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는 미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거짓이 없으시며 천지는 없어져도 그 분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신뢰하고 그 분을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18)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의 땅

   (히브리서 3:15-19)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그리스도에게 약속한 안식과 직결된 사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건에서 교훈을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히브리서는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히 4장에 가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의 안식의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 받은 사실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종해 주므로 우리의 불순종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에 대하여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이유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에서 멸망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나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19절에서 순종이 없는 그들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믿음과 순종은 떨어질 수 없는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3:36절에 나와 있는 말씀은 의미심장한 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들을 믿는다는 말과 아들을 순종한다는 말이 똑같은 의미로 나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하나님께 대한 가장 큰 순종은 무엇입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이 순종을 저버리면 우리에게는 영생도 없으며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이 순종은 영생과 천국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할 순종은 무엇입니까? 그 아들에 대한 순종입니다. 아들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바를 순종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에게 영생이 있고 부활 있고 소망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에게 순종하지 못한다면 그런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되겠습니까?

  2. 듣는 사람의 태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강퍅한 마음으로 들을 때 그 말씀이 어찌 좋은 밭에 씨앗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면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 거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지만 마음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세상 말은 잘 알아듣고 대단한 흥미를 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암만 들어도 캄캄하고 흥미를 상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 사람의 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례 받은 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말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할례란 말은 회개한 사람의 귀를 말합니다. 회개치 못한 사람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혹 깨달아도 순종치 않으므로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거부함으로 마음이 완악해 진 사람들에게는 그 귀를 듣지 못하게 하시고 그 눈을 감겨 보지 못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13:14절에서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인용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할례 받은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10: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순종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식은 회개함으로 그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

  다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계속하여 죄를 짓는 생활을 해 왔다는 데 있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불순종은 죄가 되며 그 일이 계속될수록 보다 큰 죄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지 아니함으로 안식의 약속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신뢰에서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순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 같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에게 엄숙하게 경종해 주시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라고 하는 광야생활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이 광야생활을 성공적으로자 하는 사람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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