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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4장 (15 - 19)
 밤중소리  01-31 | VIEW : 779



  (15)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서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바탕은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받은 대로 행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권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준 권면은 ‘주 예수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준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신에서 바울이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이 실인즉 주 예수로 받은 명령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의 표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바울의 이 같은 권면을 받아 드려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언제나 정지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정지는 정체를 의미하며 정체는 신앙생활의 파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입니다. 좋은 군사란 그들을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드리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모집한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을 군사로 모집한 주님을 위한 좋은 군사로 그분에게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사는 싸워야 하며 이 싸움은 쉬면 안됩니다. 군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더욱 많이 힘쓰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뜨거운 열심을 의미합니다. 롬 12 : 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뜨거움이 없으면 얼마 안가 열심이 식어지며 주의 일에 나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이라고 하는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싸움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순종도 우리의 기도도 이 더욱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어제보다 더욱 아름다운 믿음, 오늘보다 더욱더 좋은 믿음을 가지기 위해 더욱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맥이 빠진 것처럼 매사에 희미한 사람, 영적 감각이 무뎌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에 실격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더욱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다음에 많이 힘쓰라고 했습니다. 많다는 말은 량을 의미합니다. 많은 량을 생산하라는 뜻입니다. 숙련공일수록 생산량이 많아지는 것처럼 더욱 열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음란한 행실을 책망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몸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의 거룩함과 존귀함을 지키는 일은 그 첫째가 음란에서 자기를 지키는 일입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취하라는 말은 아내외에 다른 여자와의 음란한 행실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여인과 음란한 행실을 하면 이미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취하는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다음에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색욕은 절제하지 않으면 음란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음란한 행실을 즐기는 일은 남자들의 색욕에서 나오는데 이런 일은 이방인들이 즐겨하는 일이지 그리그도인들은 그들의 행실을 본받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음란한 도시 가운데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교인들이 이 같은 색욕으로 말미암아 음란의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색욕을 좇는 일에 분수를 넘으면 형제를 해하게 됩니다. 음란한 행실로 인하여 희생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음란은 한 가정을 능히 파탄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병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을 내야 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입니다. 음란을 버리고 우리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옷 입어야 하며 더욱 많이 주의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6) 부르심의 목적

  (데살로니가전서 4:7-8)


  서론 :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부정케 하려하심이 아니라 거룩케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음란한 생활에서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음란으로 자기들의 몸을 더럽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몸이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으니 음란으로부터 지켜 더러움에 거하지 않고 거룩함과 존귀함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1. 부정케 하심이 아님

  바울은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로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들로 지난날의 죄 가운데서 살아온 그 삶을 계속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로 그 같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사실을 밝혀 준 것입니다.

  (1)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 나머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인 줄 알면서 ‘하나님이 용납하여 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를 계속 저지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에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당장에 없을 때는 하나님이 용납해 주시거나 이해, 동조하시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좀처럼 그 자리에서 일어날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일은 결코 우리들로 부정을 저질러도 좋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일단 그의 백성으로 만드신 후에는 우리들로 다시는 지난날의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을 용납치 아니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는 믿음으로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다면 그런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지난날에 부정한 생애를 살아왔지만 그런 우리들로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죄악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들을 참포도나무인 그리스도와 접부치심으로 참포도나무 가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의 들 포도나무의 결실을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 11 : 17절에서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 15 :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밝혀 주고 있는데 우리들로 부정케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시키시려는데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초대교회로부터 기독교에는 이단들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영혼의 구원만을 중시한 나머지 육은 구원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라고 하며 오히려 육은 원래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는 구원론이 그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6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그 가운데 어찌 살리오’라고 이런 악한 무리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일축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 죄 가운데 계속하여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거룩케 하시려는데 그 뜻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죄에 대하여 미워하십니다. 빛이 어두움과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그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고후 4 : 6).

  그러면 성도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거룩해 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을 거룩케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그 열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함이 되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성도들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끊임없는 감화와 감동으로 성도들의 생활에 깊이 개입하시어 거룩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결론 :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을 저버리면 그것은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오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경종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까? 부정한 열매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열매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들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거룩함을 위해 더욱 많이 힘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7)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

  (데살로니가전서 4:9-12)


  서론 :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로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대로 형제를 사랑한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교인들이 형제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한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그 신앙이 성숙한 단계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마게도냐에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대로 사랑했다는데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것입니다.
  
  1. 형제 사랑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으며 율법은 우리를 정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율법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케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으로 율법을 온전케 하신 것입니까? 사랑으로 온전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온전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나오는 첫째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 밝혀 주고 있는 계명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저주를 주시기 위해 주신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온전케 하신 사랑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마 22 : 34이하에서 어느 율법사가 질문하는 계명에 대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5계명부터 10계명에 이르는 대인 관계의 계명에 대해서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사랑이요 사람에게도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요 13 : 34절에서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계명은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십계명에 나오는 정죄의 계명보다 더 적극적이요 능동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십계명은 사랑에서 나왔으며 사랑은 십계명보다 더 위대하고 우위에 있는 계명입니다.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얻지만 계명에 집착하는 그리스도인은 의무감과 두려움에서 억지로 지키려하기 때문에 불안과 초조감을 줍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열매로 보고 구원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요일 3 : 14절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십계명을 지키는 일로 구원의 증거를 삼으라고 하신 일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하신 일도 없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일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생활의 의무라고 하신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별개의 사랑이 아닙니다. 요일 4 :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2. 형제 사랑은 무엇이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범위를 넒힌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1) 사랑은 서로 도와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말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형제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거나 도움을 주어야 할 형제들에게 도움의 손을 뻗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말 자체가 실천적이며 실제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사랑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형제에 대한 용서에 대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사랑은 이웃에 악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에 진실하고 무고하지 아니하며 까닭 없이 미워하지 않는 일입니다.

  결론 : 형제에 대한 사랑은 교회를 세우는 줄입니다. 사랑은 온전히 매는 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바 형제의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십계명을 지키는 일보다 더 값진 생활이며 하나님 앞에 생명의 결실이 있는 생활인 것입니다.




  (18) 자는 자들에 대한 소망

  (데살로니가전서 4:13)


  서론 :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잔다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 잠을 잔다고 한 것입니까? 잔다고 한 말은 죽은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다시 깨어날 소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1.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죽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음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 죽음이란 육신과 영혼이 각기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은 우리들의 많은 관심을 끕니다. 우리들에게 죽음이 있는 이상,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1) 영혼 수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육체와 함께 잠을 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안식일교회가 있습니다. 대개 이단적인 교회에서 이런 주장을 폅니다. 이들의 주장인즉 죄 값은 죽음이라고 했는바 그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은 땅에 묻히고 영혼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둘 다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마지막 날에 부활로 함께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자기들의 주장에 맞는 몇몇 구절을 가지고 이단적인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에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먼저 성경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는 가운데 합리적인 해석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고전 15 : 16절 이하에서 말씀해 주는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하는 성경구절을 내세웁니다. 이들의 주장은  그리스도들인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망하였을 것이란 내용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고전 15장은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는 문제를 다룬 성경이 아니요 그리스도인들의 죄의 처리와 최종적인 소망에 관한 부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올라가 안식을 취하고 있는 죽은 성도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증거해 주는 부활은 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죽어 무덤에 그 육신이 잠들고 계셨을 때 그의 영혼도 함께 잠드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회개하는 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영혼이 육신과 분리해서 천국이라고 하는 낙원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바울의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를 이가고 승리한 선언이시기 때문에 만약 그의 부활이 없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으며 여전히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죽은 자들도 죄의 사유함이 보장되지 않았으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망하였을 것이란 주장인 것입니다.

  (2) 죽으면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다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그들이 죽자 곧 천사가 와서 그들의 영혼을 데리고 하나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하나는 음부로 데리고 갔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비유이지만 비유라도 사실과 모순된 비유는 비유로 인용될 수 없습니다.

  (3) 예수님은 몸과 영혼을 분리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0:1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은 잠을 자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생명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물론 부활은 영과 육이 함께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사는 일이지만 부활은 아직 우리들에게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영생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신 우리의 영혼이 육신의 몸과 함께 무덤에서 잠을 잔다는 말은 영혼도 함께 죽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요6: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죽은 영이 살리심을 받았는데 그 영이 육신과 함께 땅에서 잠을 잔다면 살리심을 받았다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5) 바울은 우리의 육의 몸이 죽으면 하늘에 우리가 거처할 영원한 짐이 있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고후5:1-2). 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소망은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산 증거로 우리에게 보장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같은 보증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소망으로 있지만 우리의 육체가 죽으면 우리의 영은 주님께로 올라갑니다. 이 사실은 성경이 분명히 우리에게 그 비밀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19) 그리스도인의 공중 휴거와 성도의 부활

  (데살로니가전서 4:14-18)


  서론 : 바울은 성도들의 부활 문제를 다루면서 주의 재림 시에 있을 부활과 휴거 문제에 대해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계시가 됩니다. 원래 바울의 이 같은 언급은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죽은 자들에 대한 많은 의문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에게 올바른 부활 관과 사후 관을 심어주어 죽은 자들의 가족과 성도들에게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1. 주의 재림

  16절에서 바울은 주의 재림에 대하여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 재림에 대한 이 모습은 주님께서 적그리스도의 군사들과의 마지막 결전을 위해 아마겟돈에 재림하시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계19:11절 이하에 나오는 계시에서 주 재림과 그의 심판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때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16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만을 보면 이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하여 주님의 재림 시에 동시에 지상에 내려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부활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 첫째부활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계시는 성경에 여러 가지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다양하게 단편적으로 나오는 문제에 대하여 어느 한 가지로 정립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고전15:22-2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의 순서가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부활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이기 때문에 이 순서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의 부활이 있는데 이 부활은 계20:4절 이하에서 순교자의 부활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말씀해 주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부활’은 바로 이 첫째부활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부활의 시기는 천년왕국이 지난 후, 흰 보좌 심판 시인데 이 때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되며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도의 공중 휴거

  바울은 17절에서 성도들의 공중 휴거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란 말씀이 그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지상에 생존해 있는 모든 성도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무리들 중에는 대환난 전 하나님의 예비처에 들어가 보호를 받고 있는 슬기 있는 처녀들과 기름을 준비치 못하여 대환난에 남게 된 미련한 처녀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환난 중에서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받으며 환난을 통과하여 끝까지 남는 자들입니다. 다음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로 유대인의 구원입니다.

  이들 세 무리들은 주의 재림과 함께 공중으로 천사들에 의하여 끌어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지상에는 일곱째 대접 심판이 진행 될 것이기 때문에 지상에서의 최후의 탈출이 되겠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내려와 지상에서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싸워 그들을 섬멸시킨 후, 첫째 부활 자들과 공중에 올라오셔서 지상에서 휴거 된 성도들과 함께 모이게 되는데 이때 성도들은 이처럼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공중 휴거 시 모든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 받아 신령한 몸으로 휴거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고전15:51절 말씀과 연결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 일어나는 부활과 변화는 주의 재림 시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유업을 받을 시기인 천년왕국 후가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전15:24절의 ‘그 후에는 나중이니’란 말씀의 그 시기에 있을 대부활인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 같은 주의 재림 시에 있을 심오한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는 이유는 그들이 죽은 자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소망 없는 자같이 슬퍼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위로해 주려는 의미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의 놀랍고 위대한 소망입니다. 이 같은 소망을 우리도 믿음으로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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