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빌립보서 4장 (24 - 31)
 밤중소리  01-31 | VIEW : 1,081



  (24)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1)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1절에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라고도 했습니다. 비록 빌립보 교회 안에 책망 받을 만한 많은 성도가 있었지만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품에 안았고 주 안에 설 것을 당부하므로 그들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기와 함께 천국 경주장을 달려가 줄 것을 원했습니다.

  1. 양 무리를 사랑한 바울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사랑했습니다.

  (1) 사랑하고 사모했다고 했습니다. 양 무리를 향한 목자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로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목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양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확답을 들으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는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주님의 양 무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는 주의 양 무리를 참으로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양 무리들에게 사랑이 안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양 무리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 무리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사모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떨어져 있으면 사모하게 됩니다. 간절히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 사모하는 심정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2) 바울은 양 무리들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목자는 바울처럼 양 무리들을 기쁨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에 보람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양들이 잘 될 때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양은 항상 목자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로 인하여 늘 근심과 염려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양이 병들면, 양이 실패하면, 양이 사고를 당하면 이 모든 괴로움의 짐이 목자에게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목자에게 기쁨을 주는 양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주 안에서 살아가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같은 성도는 목자의 기쁨이 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열심을 내는 성도들은 목자에게 기쁨이 됩니다. 목자와 함께 교회를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성도는 목자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알았습니다. 목자의 면류관은 양 무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로 값 주고 사신 양 무리들을 기업으로 목자에게 주셨습니다. 자기 기업에 충성할 때 그 양 무리는 곧 하나님 앞에 상급이 됩니다.  

  한 성도, 한 성도가 자신의 면류관이 되므로 그 양 무리들을 잘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귀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면류관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성도들에게 간곡히 권고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 안에 서기 위해서는 첫째로 진리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로 허리띠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토대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립니다. 진리의 토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잘못된 길을 가므로 바울의 근심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다음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순종의 생활을 배워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만 받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순종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은 은혜를 받는 것으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고저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힘써야 그 대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음에 소망을 굳게 잡고 달려가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다가 손에 잡은 소망을 놓쳐 버리면 그대로 세상의 늪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결론: 여러분은 목자에게 사랑을 받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양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 같은 방법은 주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순종하는 생활을 잘하며 헌신하고 충성할 때 저절로 목자의 마음에 심겨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 굳게 서는 생활을 하시어 목자의 기쁨이요 면류관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5)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4:2-3)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여 교회에 거슬리는 두 부녀들에게 같은 마음을 품고 협력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부녀들의 이름이 하나는 유오디아요 다른 한 명은 순두게라는 여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도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력한 바울의 유력한 부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간에 분쟁이 있다는 말이 바울에게 들려 온 것입니다.

  1. 부녀들로 인한 빌립보 교회의 분쟁

  교회의 분쟁에는 여자들이 많이 개입됩니다. 교회에서 여자들의 파워가 쎄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일어난 분쟁이 어떤 것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지만 대개의 경우, 교회의 운영 문제로 다투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 부녀들의 이름을 밝히면서 권면한 것을 보면 바울과도 잘 아는 사이인 것으로 짐작케 하는데 바울이 그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부녀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 정중하면서도 간절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두운 곳에서 빛을 비취는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흑암의 권세가 틈타는 곳입니다. 사탄이 교회를 훼방하는 일 중에 하나는 교회로 분쟁케 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를 놓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분쟁에는 허용되는 것이 있고 허용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분쟁이 허용된다는 말은 만약 교회에 이단이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힐 때 교회에서는 그들 무리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진리를 파수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조만 간에 사탄의 교회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거짓된 복음을 막아야 합니다. 악의 세력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면 안될 분쟁이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일 외에는 절대로 분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기와 파당으로 말미암은 분쟁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눅 17 : 17절에서 주님은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지고 분쟁하는 집은 무너진다고 경종하시므로 화합하고 용납하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분쟁이나 다툼은 교만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의 권면

  바울은 다툼을 끝내는 일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다툼은 서로가 자기 의견대로 되지 않을 때 나오는 법입니다. 자신의 의견이 가장 접합하고 사리에 맞으며 교회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인 줄로 고집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충돌이 생겨 분쟁이 나고 심한 경우에는 교회가 서로 갈라지는 일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나뉘어진 서로의 의견의 일치점을 찾아야 합니다.

  의견이 다르고 방법이 달라도 섬기는 주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주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서로간 약간씩 양보하여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돕고 아직까지 주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동역자들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도와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참으로 자기와 멍에를 같이한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멍에란 복음을 위한 십자가를 말합니다. 바울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바울이 하고저한 복음 사역에 생명을 다하여 협력해 준 일꾼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 부녀들에 대하여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나 지금이나 부녀들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부녀들을 빼면 교회를 운영하거나 교회를 위해 일할 일꾼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이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도우란 말은 이들이 하려는 복음 사역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협력하여 많은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이들에 대하여 대단치 않게 여겼고 이들이 하려는 복음 사역에 대하여 거치는 돌처럼 방해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바울에게 들렸든 모양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그들 부녀들의 이름을 다 거론하지는 아니했지만 그 중에 한 명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는 말로 글레멘드라고 하는 아름다운 주의 일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글레멘드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바울의 동역자들을 대단치 않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결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며 바울이 인정하고 주님이 인정해 주는 일꾼이란 사실을 이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권면을 통해서 교인들끼리 분쟁을 삼가야 할 것과 복음에 힘쓰는 자들에게 협력해 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줄로 압니다.





  (26)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기쁨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기쁨을 창조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의 특색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의 삶에 아주 특별한 특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왠지 모르게 기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슬픈 것 같지만 기뻐하고 괴로운 것 같지만 기쁨의 삶을 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인 것입니다. 만약 기쁨이 없이 지낸다면 그 사람은 소망이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애에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1)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자기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섭리는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실패했을 때에도 전혀 변함이 없이 내 생애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애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기뻐하라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한 말은 권면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의 명령입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밝히고 권하며 명하는 모든 말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것이거나 성령께서 바울의 글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전달하게 하시려고 감화감동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이 같은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제한을 두면 안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전도서를 보면 사람의 생애에는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또한 춤을 출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리의 생애 중에서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웃을 때만 아니라 울 때도 기뻐하라는 것이고 춤출 때만 아니라 슬퍼할 때에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은 우리의 생의 모든 조건과 환경을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기쁨은 바로 이 같은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그 기쁨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값진 보물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주를 인하여 핍박을 받고 모든 악한 말을 들을 때에도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관원에 잡혀 매 맞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들은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3. 누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이처럼 기뻐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뻐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같은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1)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만이 이 같은 기쁨의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심령 속에 가득히 찰 때, 그의 심령 속에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그 사람의 생애에 찾아오는 모든 불행도 이길 수 있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생활은 주님을 잃어버린 생활입니다.

  (2)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들만이 이 같은 기쁨의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망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어려움이나 시련도 소망으로 바라보면 그로 말미암아 장차 나에게 무한한 유익이 오게 되며 축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애에서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기쁨은 우리에게 퍽 유익합니다. 기쁨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기쁨은 가정에 사랑과 축복을 줍니다. 기쁨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기름지게 합니다. 기쁨은 교회에 화평을 줍니다. 기쁨은 인생의 어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 관용을 베풀라

  (빌립보서 4:5)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주고 곧이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관용이란 말은 너그럽게 받아 드리는 마음과 상대방을 용서해 주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 관용은 사랑과 서로 연계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너희 관용을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겉으로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관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관용을 또한 나타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1. 화평은 관용에서 온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평을 이루시는 일에 어떤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관용을 베푸셨다고 하셨습니다. 롬 3 : 25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신 일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우리의 모든 죄를 간과하심으로 하셨다고 말씀해 줍니다. 간과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지은 죄가 태산보다 더 높지만 그것을 용서하시는 관용을 베푸신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화평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형제들 간에 화평을 이루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이루는 첫째 조건이 관용인 것입니다. 관용이 없으면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관용은 아무나 그리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관용에는 용서가 따라야 합니다. 시기와 미움을 가진 마음으로는 관용이 나올 수 없습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용서가 있어야 관용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용서는 관용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용서가 없이는 관용이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들에게 관용을 베풀려면 먼저 그 형제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관용하는 마음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악한 말을 하거나 손실을 끼치는 행동으로 나왔을 때 관용을 베풀려면 인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인내는 관용에서 오는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바라볼 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용을 받아야 할 부족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살아가야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내 형제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데 이 같은 일은 자신의 부족을 통감하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용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주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한 후,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의미 있는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주께서 가깝다는 말은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의미로 아람어로 ‘마라나타’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주님의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갔기 때문에 주님이 곧 오십니다 고 하는 이 ‘마라나타’란 말이 교인들간의 인사말이 되어 왔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주께서 가깝다고 한 말은 우리가 더욱 경성하여 주의 뜻대로 살아가야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준말입니다. 이 말은 위로요 격려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운데 그들처럼 마라나타란 의미로 인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이 가깝다는 말을 하면 오히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이 세대는 패역한 세대요, 믿음이 없는 세대요, 노아의 때와 같은 롯의 때와 같은 세대인 것입니다.

  주 재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주께서 가깝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신앙적으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매우 가깝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소망이기 때문에 그 소망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적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 관용에는 화평이 따릅니다. 관용에는 기쁨이 따릅니다. 관용하는 생활이랴말로 나에게 무한한 유익이 되며 내 신앙의 성장에 밑거름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8) 감사함으로 구하라

  (빌립보서 4:6-7)


  서론 : 우리의 생활에는 가끔 염려해야 할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염려를 어떻게 대처하느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염려를 대처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6절과 7절에 나와 있는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그 범위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라고 하신 이 말씀은 아무 일에 도란 의미로 우리의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염려를 통털어 일컫는 말입니다. 적은 일은 말할 것도 없고, 큰일, 복잡한 일, 단순한 일, 중대한 일, 사소한 일, 개인적인 일, 가정적인 일 등,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처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 염려는 우리에게 이로움보다 해로움을 줍니다. 주님은 너희가 염려함으로 너희 키를 한자나 더 크게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염려는 불 신앙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애를 믿음으로 맡기지 못했을 때 염려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때 염려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생애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했을 때 이 염려가 엄습하는 것입니다.

  (3) 염려는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 나를 불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염려는 세상 근심에 잠기게 하고 이 세상 근심은 우리에게 결과적으로 사망을 이루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염려를 어떻게 해야 하나?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 것입니다.

  (1) 우리의 염려해야 할 일들을 우리는 염려대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염려하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아기들이 무엇이 필요하면 엄마에게 달라고 하듯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염려도 자신이 짊어지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기도와 간구인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는 동일한 표현이지만 기도는 반드시 간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간구란 간절히 구하는 신앙적인 기도의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염려를 맡기고 그 해결을 부탁하는 일은 간절히 구하는 기도로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기도의 자세는 감사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받기도 전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받을 것으로 확신할 때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감사함으로 간구하는 기도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믿음의 기도에는 응답의 역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2) 7절에서 “그리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처럼 우리의 모든 염려를 감사함으로 아뢰면 이란 뜻입니다. 이런 기도에는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우리의 간구를 어떻게 처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이런 기도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식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지각에 뛰어나신 섭리로 우리를 주장하시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인가 구하면 기도의 응답을 믿기 때문에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일차적인 응답에서 오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이 선물은 성경이 주십니다. 그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속에서 더욱 큰 믿음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결론 : 우리는 무슨 염려를 안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민하고 그 고민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는 생활을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염려를 키우면 그 염려가 우리들에게 의심을 안겨 주고  우리의 믿음의 길을 가로막으며 급기야 그 염려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우리의 생애를 짓누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염려를 당신에게 맡기라고 하십니다.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십니다. 이 생활이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생애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며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29)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비결

  (빌립보서 4:8-9)


  서론 : 8절 9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생활은 그 사회에 적응하는 도의 생활에 그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는 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도의 생활에도 솔선 수범해야 하며 사회인의 지탄을 받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곳에서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으로 따라야 할 도의 생활에 대하여 자기를 표본으로 하여 본받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사회적 도의 생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에서 적응해야 할 도의 생활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 무엇에든지 참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 생활에서 가장 명심해야 할 일은 진실함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인들에게 진실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은 동서고금 어느 사회에서나 그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표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엇에든지 경건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이란 도덕적인 거룩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도덕적 생활에 흠이 있으면 사회인들의 지탄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생활이 투명하게 비취게 되는데 그 투명성을 간직해야지 그 안에 흠집이 발견되면 안됩니다. 사회인들 앞에서 불 경건한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3) 무엇에든지 옳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이나 친지들 간에 경우에 어긋나는 일로 비난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저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그는 참으로 옳은 일만 한다고 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4) 무엇에든지 정결하라고 했습니다. 정결이란 말은 행실과 마음가짐에 있어서 깨끗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모든 생활 면에 깨끗함과 순결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5)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 할 만 하라는 말은 사랑을 받을 만 하라고 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무엇에든지 사랑을 받을 만한 행실을 해야 하며 친근해야 합니다.

  (6)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 하라고 했습니다. 칭찬을 듣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선행에서 나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착한 일을 하여 너희 빛을 비취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착한 일은 이웃에게 빛을 비취게 됩니다. 그것이 칭찬으로 돌아오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덕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행실,, 곧 덕행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림이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일, 칭찬을 듣는 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도의적 행실이나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을 만한 일에 있어서 바울이 말한 바를 생각하여 힘써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권면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9절에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설교로 전한 바를 배우고 바울이 전한 바를 듣고 바울의 생활에 대하여 보고들은 바를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진실한 것을 가르쳤으며 올바른 것을 받게 했으며 진리의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그리고 말과 행실에 있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함께 하시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활에 항상 평강이 넘칩니다. 그런데 그분을 모시는 비결은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 평강의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0) 자족하기를 배운 바울의 생애

  (빌립보서 4:10-13)


  서론 : 바울에게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 인하여 주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말은 빌립보 교회가 이전에 바울의 복음 사업을 위해 종종 재정적 도움과 선물을 보내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어떤 연고에서인지 잠시 중단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싹이 나기  시작했는데 이에 바울이 감격하였으며 이 같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태도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로부터 이 같은 도움을 받았던 일과 지금 다시 그런 일이 계속된데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한 것은 그가 어떤 사심이나 물욕에서가 아니라 주의 복음을 위해 반드시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이 배운 생활의 비결

  바울은 11절로 13절에 이르기까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가졌던 생활상의 태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생활은 자족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족하는 생활이 결코 자기자신이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해 가면서 배운 생활철학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입장에 대하여  한 마디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 그리고 가난할 때 물질적 도움을 받고싶어 하며 또 도움을 받을 때 기뻐하지만 바울의 경우는 자신의 처지가 궁핍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 궁핍하므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요할 때 신앙생활을 잘 하고 그겋지 못할 때 낙심하는 경우가 많지만 바울의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1) 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자족한다는 말은 스스로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은 모든 당면한 생활에 있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은 심히 어려운 가운데서라도 복음을 효과 있게 전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가 경제적으로 어떤 입장에 있던지 그런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해 나갈 수 있으며 만족할 수 있는 생활의 비결을 터득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습니다. 비천하다는 말은 인생의 가장 말단의 형편에 놓여 있는 비참한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을 그런때에도 태연자약하였으며, 기뻐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며 소망을 견고히 잡고 살아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천한 가운데서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다운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성도들이 어려움을 만나고 가난한 처지에 있다고 그 품위를 손상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재물이 풍부할 때 그의 처신이 자신의 신앙생활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신앙의 영향을 끼치는데 바울은 그에게 아무리 풍부한 물질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그런 일이 없이 비천에 처해 있을 당시에나 다름없이 처신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분에 넘치는 물질적 도움과 천사와도 같은 대접을 받아 온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 때 바울은 교만하지 않고 그 물질이나 대접에 맘을 빼앗기지 않고 그 중심이 늘 주님을 향하여 뜨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배부르며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배부르면 생의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배고프면 괴로움으로 여깁니다. 풍부하면 만족합니다. 궁핍하면 낙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모든 환경 속에서도 잘 적응하여 그 어떤 경우를 만나거나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생애를 살아온 바울의 비결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13절에서 말씀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인격에서 나온 일도 아니며 바울이 힘써 노력한 대가로 그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이 세상을 살아간 목적이 세상에 있는 물질을 바라거나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즐겁고 기뻐할 것을 원하고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쁨으로 삼았으며 하늘의 상급과 소망을 바라보는 것으로 영광으로 삼았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본 받는 일은 우리의 생애에 바울과 같은 영광을 안겨줄 것입니다.





  (31) 하나님께 풍성한 대로 채우시리라

  (빌립보서 4:14-23)


  서론 :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신에게 보내준 물질적 도움에 대하여 그들이 자신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것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 10 : 41절에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복음을 위해 자신이 당한 그 많은 괴로움에 참여한 자로 인정하여 이 일에 그들도 자기와 같은 상급을 받을 것임을 언급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크게 격려를 주는 말씀입니다.

  1.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잊지 못하는 이유

  바울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든 초기에 그에게 많은 애로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자신의 생계에 대한 물질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물질이 많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는 이 일까지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시기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원하여 바울의 생활비를 부담하여 주고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드는 일절의 비용을 기쁨으로 담당해 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의 물질적 도움을 17절에서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선물을 받은 것도 기쁘지만 그것보다도 바울에게 선물을 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과실을 맺은 것이며 또 그들에게 이 과실이 더 많기를 위함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하는 바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준 일은 비록 인간인 바울에게 건네 준 것이지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베푼 이런 사랑에 대해 풍성한 대로 그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일꾼을 도와 주는 일은 그 도와주는 일이 몸으로건 물질로건 기도로건 반드시 하나님이 기억하시며 그가 한 이 일에 대해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는 선행을 위한 사람에게는 30. 60, 100배로 갚아 주시기 위해서이며 악행을 행하는 자들에게 갑절로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 바울의 문안과 축도

  바울은 언제나 그의 서신 마지막에 가서 교회 식구들에 대한 문안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문안 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는 모든 성도들의 문안도 빠트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 가운데서도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에게 문안을 부탁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한 가이사란 당시 로마의 황제를 말하며 가이사 집 사람이란 가이사 집에서 기거하는 사람들이나 그 집 노예들과 아마 인척들까지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로마에서 옥에 갇히는 생활 가운데서 알게 된 사람들이며 바울에 의해 복음을 받아 드려 성도가 된 형제들일 것입니다.

  바울은 23절 끝절에 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는 축도를 끝으로 편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축도는 그 당시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으로 바울은 서신 마지막에 가서 반드시 이 같은 축도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 28 :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1) 제자를 삼는 일은 양의 목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양을 맡기셨으며 목자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2) 다음에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례는 목자들에게 주신 권한입니다.

  (3) 다음에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목자는 그리스도의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4) 또 한 가지 권한은 성도들에 대한 축도 권입니다. 축도 권이란 주의 종들이 직접 주의 이름으로 베푸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이 축복의 선언은 ‘주의 이름으로 가도하나이다’로 복을 축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기를 원하나이다’는 식으로 중보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직접 선포하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있을 지어다’로 끝맺게 됩니다.

  결론 : 이 같은 축도는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도적 권한은 오늘날 주의 종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주의 종들은 예배를 마감하는 끝머리에 가서 이 축도로 친히 주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NEXT :   빌립보서 3장 (17 - 23)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