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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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장 (17 - 23)
 밤중소리  01-31 | VIEW : 2,302


  (17) 세 가지 삼가야 할 일

  (빌립보서 3:1-2)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과 세 가지 삼가야 할 일에 대하여 언급해 줍니다. 하나는 개들을 삼가라했고 다음에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마지막으로 손 할례당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1.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에는 기뻐함이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몸이었음에도 이 같은 말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기뻐하는 생활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 5 : 40절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위하여 채찍에 얻어 맞았을 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당시, 밤중쯤 되었을 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로 착고에 채워져 있는 상태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 일에는 아름다운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 5 :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잇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을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이 나의 모든 생애를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기억해 두십니다.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을 믿고 이 말씀에 근거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는 일을 생활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기쁨을 주시고 우리의 생에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2. 세 가지 삼가야 할 일

  바울은 2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세 가지 삼가야 할 일에 대하여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1) 개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결하고 지조 있는 생활을 강조한 경종입니다. 개들은 불결한 존재입니다. 정조관념이 없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개에게는 포악한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되 지난날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갔을 때처럼 개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정결한 마음은 회개에서 나옵니다. 신앙의 지조는 진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마치 개들처럼 배회하면서 더러움에 협력할 동조자를 찾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라는 말은 조심하라,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그들에게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죄를 낙으로 삼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악행을 하는 일을 예스럽게 여기며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행악자와 가까이하면 그들과 한 무리가 됩니다. 방비가 없는 선은 언제나 악에게 먹히웁니다. 교회에서 이들을 사랑이란 미명아래 받아 드리면 조만 간에 그들의 손에 의해 교회는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바울은 손 할례당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손 할례당이란 의식적인 할례를 최상으로 여기는 무리들을 의미합니다. 손 할례란 원래 몸에 상처를 준다는 뜻인데 이들은 몸에 할례의 상처를 주는 것으로 선민된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바울이 특별히 이들에 대하여 경종한 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특히 이들 손 할례당에 의해 많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받아 드린 후에도 할례를 전제조건으로 절대시했으며 할례의 무익함을 주장하는 바울에게 도전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에 의해 갈라디아 교인들이 미혹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로 정죄했습니다.

  결론 : 바울은 자신이 세우고 말씀으로 양육한 빌립보 교인들이 좋은 신앙을 지속적으로 간직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를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 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개들을 삼가야 하며 행악하는 무리를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손 할례당을 경계히야 합니다.  





  (18) 바울이 말하는 할례당

  (빌립보서 3:3)


  서론 : 바울은 2절에서 손 할례당을 삼가라는 경종을 주고 3절에 와서 성경적인 할례당은 누구인가에 대해 언급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받아온 할례란 원래 복음으로 의를 얻는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할례는 그 실체인 복음이 나타났을 때 당연히 그 모습을 감추고 복음의 의를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의식에 철저했던 유대주의자들은 복음을 받아 드린 이후에도 할례를 계속하였고 할례를 무익한 것으로 주장하는 바울을 매도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부득불 할례의 참 의미를 밝혀 주려는 것입니다.

  1. 할례의 의의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외적 표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할례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성별한 하나님의 백성의 표식으로 유대인들은 반드시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성별을 명하신 것인가?

  (1)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사야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성별되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시작이 되며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태어나실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순결한 혈통이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혈통을 중히 여기시어 이방인과 구별시키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세상에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해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은 순전하게 온전히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보존할 책임 있는 족속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하시고 메시야에 대한 끊임없는 약속을 주시면서 그들로 그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3) 그러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으로 메시야의 혈통이 계속될 필요성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등장한 교회에 의하여 보존하게 되었으므로 메사야의 혈통도 유대인들에 의한 말씀의 보존도 무너져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별된 백성으로 받아온 할례가 복음 안에서 새로운 성별된 백성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율법적인 할례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2. 신약에 나타난 참 할례

  예수님이 구원의 사역을 완성한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육신적인 혈통과 성별된 백성으로 표시하는 할례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예표나 그림자로 뒷켠으로 물러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성별의 표시가 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같은 의식이 하나님의 백성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으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중생만이 하나님의 백성의 성별된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초대교회 시대에 교회 안에 할례의 유익을 주장하면서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해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공박하면서 성경에서 말씀해 주는 참 할례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 할례당의 자격으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바울의 말은 성령 안에서 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참 할례당이라는 주장입니다. 예배도 성령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 예배라야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도 성령 안에서 합니다. 성령으로 하는 봉사라야 열매가 있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할례로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실상인즉 성별된 생활도 못하였고 아무런 열매도 없었습니다. 참 할례당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적 할례는 이제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속죄, 구원,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하나님의 사죄와 의와 구원과 천국을 주신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3) 참 할례당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혈통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신적으로 신뢰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합니다.

  결론 : 우리는 어떤 율법적 행위나 할례의 행위 등 어떤 인간의 공로에 의한 의를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성별된 생활을 하는 우리가 참 할례당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19) 무엇이 유익한가

  (빌립보서 3:4-9)


  서론 : 바울은 2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손 할례당이라 지칭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고 3절에서 참 할례당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증거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4절부터 자신의 경우를 예를 들어 자기가 육체적으로 말하면 할례를 주장하는 그들보다 얼마나 자랑할만하며 혈통적으로도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한 입장에 있지만 자신이 그런 것들을 자랑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유익한 것으로 여기지도 아니하는 이유를 복음적으로 해명해 주고 있습니다.

  1. 바울이 육신으로 자랑할만한 일 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자신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이 주장하고 자랑하는 하례의 경우와 혈통의 경우를 들어 말합니다.

  (1) 바울은 내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그가 할례 받은 일이 율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완전한 할례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 볼 때 바울은 유대인으로써 신뢰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할례가 무익한 것임을 주장하는 것은 할례는 할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성별시키는 일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였으므로 복음이 온 이상, 할례는 무익한 것임을 주장한 것입니다.

  (2) 바울은 자기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족속이요 자파를 따진다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유대인이며 그러므로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임을 자랑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3) 다음에 바울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십계명 뿐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생활을 통해서 스스로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기까지 했습니다.

  (4) 바울에게는 이 모든 것 위에 열심이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선두에 서서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도 찬성하며 그 증인으로 옷을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다메색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갔었던 사람입니다.
  
  2. 왜 육신의 일을 해로 여겼나?

  그러던 바울이 그러면 왜 육신의 일을 해로 여긴 것인가? 바울은 7절에서 “그러나”라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이 있기까지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 길에서 하늘 보좌에 계시는 주님을 직접 뵈었으며 소경이 되어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은 일, 바울의 회심, 아라비아에서의 3년간의 기도생활 등, 그는 그 동안 많은 과정을 겪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영원 전에 바울을 하나님의 종으로 택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연유로 바울은 지난날의 생애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생애의 길을 걸은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부터는 그의 인생관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안 후로부터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온 것입니까?

  (1)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의 그 어떤 생애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해로 여기는 일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보다 우선한 것은 없었으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방해해도 좋을 존재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명예도, 바리새인이란 체면도 그 해박한 지식이나 학문도 자랑스러운 가문도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한 것입니다.

  (2) 그러면 바울의 이 같은 자세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자신의 존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기 위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가문에서, 학문에서, 율법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려는 바울의 노력은 그리스도에게 미치게 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더 고상한 지식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의보다 더 온전한 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일꾼이 된 것은 이 같은 그의 인격전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바울처럼 능력 있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회생하면 바울의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20) 바울이 소망한 부활

  (빌립보서 3:10-12)


  서론 :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연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고자 한 것입니다.

  1. 부활의 권능

  우리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려고 하는 바울의 위대한 신앙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권능이란 말과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표현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고전 15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 이하에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말씀해 주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10절에서 언급한 부활의 권능이란 말은 그리스도와 연결된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란 말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에 대하여 알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이 같은 표현은 자기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려는 큰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한 가지로 말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바울은 고전 15 : 40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모두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활의 첫 열매이자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부활의 영광은 그가 성육신으로 세상에 내려오시기 이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원하고 바란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이런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부활은 바울 뿐 아니라 지난날 많은 선지자들도 바랬던 부활입니다. 히 11 : 35절 말씀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부활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첫째부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첫째부활 자들에 대한 영광에 대해 계 20 : 5절 이하에서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했으며 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에 참여하여 영광의 부활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그의 생애에서 받은 복음을 위한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겸손하고 두려운 심정으로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뤘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고난에 참여하려는 싸움을 싸워 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싸움을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말했습니다. 롬 8 : 17절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한 바울의 말은 자신의 경우를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으며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노라고도 말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말은 장차 자신이 받을 영광스러운 부활을 바라보고 그 부활에 참여하려는 바울의 신앙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아 편지를 쓰면서도 아직 그 목표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소망을 바라보고 그 자신의 남은 생애를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들도 더 나은 부활의 영광을 보라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바울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생애를 보내야 하겠습니다.    





  (21) 바울의 천국 경주

  (빌립보서 3:13-16)


  서론 : 바울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본 받는 일로 모든 부활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부활을 첫째부활이라고 말하며 이 부활의 영광은 순교자가 받을 수 있는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이 면류관을 소망한 것입니다.

  1.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했다.

  바울은 이 소망에 대하여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 부활을 푯대로 하여 남은 생애를 좇아가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확신이 없었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남은 생애의 순간까지 오직 그것을 목표로 달려가는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 상급을 얻기 위하여 어떤 자세로 뛰는 생애를 살아간 것입니까? 13절에서 이르기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잃어버리고”라고 헸습니다. 바울은 지금 경주장 마지막 꼴인 지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이제 그곳까지 얼마 남지 아니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마지막 스피드를 내야할 그런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는 경주를 달렸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경주장에서 뒤에 있는 것에 미련을 두고 달린다면 그 선수는 우숭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롯의 식구들도 이 경주장을 달렸는데 롯의 아내가 그만 뒤를 돌아보다가 실격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경주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잊어버려야 할 뒤엣 것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달리기에 필요 없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에게 자신의 학식이나 명예가 거치적거리는 일이었다면 바울은 그것을 벗어버려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잃어버리지 못하면 마음의 줄이 되어 우리의 마음과 몸을 세상에 묶어 두기 때문에 달리기 경주에 1등으로 꼴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편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은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잡아야 할 앞에 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얻으신 부활의 권능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면류관으로 여겨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려는 소망이 바울의 마음에 꽉 들어찼으며 바울은 이 소망만을 유일한 달리기 목표로 달려간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면류관이외에는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직 한 일”이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로 이 일만을 푯대로 하여 달려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구원과 상급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의 큰 도전을 시도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도전이란 구원과 상급에 대한 새로운 인식입니다. 구원과 상급을 혼돈하면 안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구원을 받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상급에 동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자격이지만 상급은 하늘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에서 누릴 권세인 것입니다. 한국에 태어나면 모든 국민은 한국의 시민권을 얻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안에는 여러 가지 계층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장관이 있으며 명예스럽고 영광스러운 직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베대의 어미에게 이르시기를 “당신의 아들들을 내 좌우 편에 앉히는 일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였든지 그들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상급이 자신을 위하여 예비한 것으로 믿고 달려간 것입니다. 상급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그만큼 계급이 많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면류관으로 나와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급은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받을 높은 계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계급은 잠시 잠깐동안 계속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계급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회생하면서 이 상급을 위한 경주장을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이 달려간 경주장을 지금 우리도 달려가고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들에게는 1 등을 한다는 영광의 비전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들도 자세를 가다듬고 이 길을 바울의 심정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22) 나를 본 받으라

  (빌립보서 3:17)


  서론 : 바울은 17절에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 신앙에 있어서 자기를 본 받기를 원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들과 같이 성숙하지 못한 그들의 신앙이 성장하고 믿음에 견고하기 위해서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생활을 본 받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1. 본 받아야 할 일

  바울은 자기가 가진 믿음이 어디서 온 것인 줄을 알고 있었으며 왜 자기가 자기 생명을 다하여 그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소망이 너무나도 확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온통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경우를 보면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자기처럼 소망 있는 삶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무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세속적 생활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무엇을 본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1) 그리스도를 가장 존귀히 여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바울은 실제적으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노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진실한 것, 참 진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가 곧 예수이심을 바울은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자신의 믿음을 본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2) 바울은 육체를 자랑하지 않는 일에 자신을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육체로 자랑했습니다. 그들의 할례 의식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외식적인 모든 행위가 그러했습니다. 할례나 무 할례나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믿음만이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잡는 일에 자기를 본 받을 것을 원했습니다. 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 자였으며 율법의 조문으로는 죄로 책잡힐 것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로서는 영생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구원을 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그가 써 보낸 서신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의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이 의에 굳게 서서 그 길을 잘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4) 바울은 위로부터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 좇아가는 일을 해 왔습니다. 바울의 이런 신앙생활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앙의 거울입니다. 바울이 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은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부활로 받을 수 있기를 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소망을 거울 삼아  천국의 경주장을 잘 달려 갈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늘 바울 곁에서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일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킵니다. 이들의 생활은 언제나 바울을 본 삼아 바울에게 순종하고 따랐으므로 모든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뿐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늘 곁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이들의 믿음의 생활도 본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들이 그들에게 보여준 그대로 본을 받아 바울을 본 받으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믿음의 행실을 보여 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 생활에 있어서 자기 한 사람의 위치가 모든 성도들에게 대단히 크게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들의 생활이 다른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지도층에 속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과 생활이 다른 사람들의 본을 보여 줄 수 있어야 그 교회가 제대로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교회 앞에 공개된 생활임을 알아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좋은 영향을 끼치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원래가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 계시고 너무 높으신 위치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히 우리의 지도층의 생활을 눈여겨보면서 본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처럼 그의 생활에 티가 없어야 하며 본 받을 만한 본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늘 본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23) 바울의 눈물의 호소

  (빌립보서 3:18-21)


  서론 : 바울은 17절부터 21절에 이르기까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눈물겨운 간절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따르지 아니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에 나타나고 있는 소문은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찌하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복음의 사슬에 매이게 하여 열매 맺는 성도들로 성장시키기 위한 간절한 바람으로 눈물로 호소하며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권면은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권면으로 듣고 주님이 가슴 아파하시는 우리들의 어린 신앙의 자리에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바울의 눈물의 권면

  바울이 지적한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1)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죄가 소멸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죄의 은총을 배척하는 일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일 때문에 십자가를 외면하는 생활을 한다면 이들은 십자가의 원수된 자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율법의 사명은 인간들에게 죄를 지적해 주고 그 죄를 정죄하는 일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구원이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십자가에 와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선생의 구실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빌립보 교회에는 율법의 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노라고 외식적 생활을 해 왔으며 할례를 주장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 잘못된 복음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만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놀라우신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 주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올바로 섬기지 않는 일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빌립보 교인들의 잘못된 신앙

  그러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 중 많은 형제들이 어떤 신앙생활을 하기에 이토록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생활이 십자가의 원수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까?

  (1) 저희 신은 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은 배로 하나님을 삼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며 헌신하며 충성하는 일보다 그들의 배를 위하는 생활을 살아간 것입니다.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육신의 일 때문에 다투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2)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 중, 많은 무리들이 추구한 영광은 바울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부활의 권능을 알려고도 아니했으며 그 권능에 참여하려는 노력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처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생활은 부끄러운 영광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사람들이 따라가는 세상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부끄럽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수치를 감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3)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빌립보 교인들 중, 많은 형제들은 땅에 얽매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세속적 신앙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홍수 심판으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소속된 사람들임을 밝힌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은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들에게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주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나 그들은 주의 재림에 관하여 전혀 외면하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세상 것만을 추구하는 일에 열심을 냈으며 그들의 신앙생활을 땅에 것에 맞추며 살아간 것입니다.

  결론 : 이 같은 빌립보 교인들의 생활 태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된 생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는 그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갈 것을 눈물을 흘리며 빌립고 교인들에게 간곡히 권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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