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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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26-36)
 밤중소리  01-29 | VIEW : 1,261



  (26) 하나님과의 화평

  (로마서 5:1-2)


  서 론 : 바울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의를 얻은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면 율법아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두려움과 정죄 의식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생활을 못한다면 세상에 얽매인 생활 속에서 지난날의 육신의 정욕과 탐심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1. 믿음으로 의를 얻은 우리

  화평이란 말은 화목, 평안, 평강을 뜻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면 그것은 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I) 믿음으로 의의 얻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먼저 하나님과의 원수의 담이 헐어져야 합니다. 원수의 담이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죄악을 말합니다. 이 죄악의 담이 무너지지 아니하고는 화목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담을 허시는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이 같은 화목이 가능케 된 것입니다(엡2:14-18).

  하나님과의 화평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싼 길이 열려야 합니다.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마지막 외치심과 함께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그 찢어진 휘장 한가운데의 길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입니다. 이길 외엔 다른 아무런 길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4:12).

  하나님과의 화평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가능합니다. 탕자가 입고 있었던 옷을 벗기고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 새 옷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옷입니다. 이 옷을 입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 화평은 고사하고 진노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2)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평의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 사람의 생활은 어떻게 나타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의 생활은 첫째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 나타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인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화평의 교재를 이루십니다(요4:23,24). 다음에 하나님과의 화평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소원의 간구로 하나님과의 화평의 표시입니다. 진실한 간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과 응답이 나타납니다(시145:18,19).

  다음에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생활에 들어간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새로운 삶에 들어갑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명한 말씀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자들의 생활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2.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 우리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서 있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우리의 영적인 장소를 말합니다. 이 자리는 곧 은혜에 들어간 자리라고 밝혀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출발점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1) 그러므로 은혜 안에 들어갔다는 말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문은 구원의 문인데 이 문은 믿음으로만 들어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2) 아무나 믿음으로 은혜 안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선물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2:8 ; 요 4:10 ; 행 2:38).

  (3) 그리고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어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후사의 영광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했습니다(롬8:17,18).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현실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결 론 :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의를 얻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을 위한 모든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평을 누리는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소망의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27) 성도의 환난과 소망

  (로마서 5:3-4)


  서 론 :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환난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누구나 무시하거니 경히 여길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환난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환난에 성경적으로 대처하는 슬기로운 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은 신앙생활의 파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에 찾아오는 환난을 통하여 놀라운 영적인 풍성한 결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비록 우리 앞에 환난이 온다고 해도 오히려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환난이란 말은 ‘들립시스’로 억누른다. 괴롭힌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상태를 말합니다.

  (1)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환난이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님께서도 필요 없이 아무에게나 환난을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처음에 인간 사회에 환난이 도래한 것은 죄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아담이 이마에 땀이 흘러야 식물 을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라든가 하와가 잉태하는 고통을 받은 것 등은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우리들의 생애에 당하는 환난이 하나님께 대한불순종의 죄로 인한 것임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레26:14-20).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찾아오는 경우의 환난도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욥1:11-12). 그리고 그리스도의 환난에 동참하는 환난도 있습니다(계1:9).

  (2)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환난을 주시는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범한 죄의 형벌로 주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윗 왕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삼하12:9-12).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죄는 사유함을 받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형벌이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또한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1:7).

  (3)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당할 때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내 보입니다. 낙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잠24:10).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환난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환난이 닥쳐왔을 때 하나님 앞에 불평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 환난이 더 오래 계속될 것입니다.

  환난을 만났을 때에 성도들의 신앙적인 태도는 먼저 자신에게 온 환난에 복종하는 자세입니다(욥1:20,21). 다음에 성도들은 그가 당하는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시18:6, 34:17). 그리고 환난 날에 성도들의 취할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의뢰입니다(시37:39, 46:1). 다음에 환난을 당한 성도들은 그 환난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롬12:12). 마지막으로 환난을 당한 성도들의 가장 높은 신앙적인 자세는 즐거워하는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에서도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셨고, 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2-4).
  
  2.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이룬다

  사도 바울이 환난을 즐거워하는 이유로 맨 마지막에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 과정이 몇 가지 들어가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1) 환난은 성도들로 어려움 속에서 인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환난은 일정한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찾아오고 나서기까지는 일정한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그 환난의 기간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인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2) 환난 중에 인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난을 당했을 때 그 환난을 인내로 이길 사람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녹8:15).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서 그의 자녀들에게 인내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내의 훈련을 통해서 소망의 경주에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루고 그 결과 연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 사람은 이미 가장 순수한 것으로 증명되는 결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는 반드시 결실합니다(녹8:15). 성도의 인내의 결과는 “너희로 온전하게 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약1:4).

  결 론 : 바울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되는 일입니다. 이 후사를 이루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8:17). 이 같은 우리의 소망은 환난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들이 환난을 당할 때 온전히 인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 인내가 연단이 되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품은 그 위대한 영광의 소망을 이루는 원동력이 될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28)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로마서 5:5-8)


  서 론 :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무엇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었는가? 우리의 구원이 어떤 대가를 치러 받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적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적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셨는가에 대한 영적 지식이 부족한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의 소망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우리들의 소망을 헛된 것이 아닐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란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불신으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 한다고 하셨습니다.

  (1)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말은 우리의 소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너무나도 값진 것입니다.󰡒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성취까지는 많은 시련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우리의 소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닌 증거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부은바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야의 언약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그 언약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구원의 속죄의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영원한 생명과 하늘에 예비된 영광의 후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됨으로 우리의 소망은 그 어떤 경우에도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타난 사랑의 확증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알려주기 위하여 인간의 극치한 사랑과 비교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지신의 생명을 회생하는 일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의인을 위한 경우요, 다른 하나는 선인을 위한 경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의인을 위한 경우는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의인이란 ‘디카이오스’로 결백한 사람, 공의로운 사람, 무죄한 사람을 뜻합니다. 쉽지 않다는 말은 가까스로 있다는 말로 거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자신들이 죽는 자리에까지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생명의 위기가 왔을 때에 그들은 한결같이 도망쳐 버렸고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조차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인이란 말은 ‘아가도스’로 좋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물론 이 선한 사람이란 말속엔 의롭다고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보다 사랑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 말로 의로우면서도 사랑이 많은 사람의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의롭고 선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혹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보면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3)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함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의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베풀 수 없는 사랑을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나타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죄인이란 하나님을 대척하는 자를 말합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을 행하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의와 선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죄인을 말합니다(롬3:10-18). 이 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은 인간의 사상과 사랑을 초월하신 신비적인 사랑이신 것입니다.

  결 론 : 이것은 하나님의 큰사랑이요 큰 구원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3).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랑이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부은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소망을 견고히 잡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29) 구원 얻은 자의 생활

  (로마서 5:9-11)


  서 론 :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귀중한 대가를 치른 결과에서 온 것입니다.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으며 우리의 의나 구원이나 소망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함을 얻은 이후의 생활에 대하여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

  사도 바울은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의는 순전히 은혜임을 밝히면서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 믿음자체에 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가 그 근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의는 그리스도의 피가 그 발생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는 사죄의 은총이 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9:22).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망은 곧 피 흘림을 말합니다. 그러나 죄인의 피 흘림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죄 없는 자의 피 흘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피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사죄뿐 아니라 우리에게 깨끗함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 1:7-9). 그리스도의 피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우리로 그리스도안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는 일에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였습니다.

  (3)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니고 있는 의는 “얻을 것이라”가 아닙니다. “얻을 수 있다”가 아닙니다. “얻었느니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과거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결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에 대하여 세 가지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란 것이고 둘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요 세 번째는 그의 사르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시기 이전에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이 진노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진노로로 인류를 심판하십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히9:27). 이 심판은 사람이 죽은 후에 누구나 면할 수 없는 영적인 심판입니다(녹16:19-31).

  (2)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사죄는 또한 하나님과의 화목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일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그 죄가 용서받았다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자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화목된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진노에서 벗어났으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죄책에 눌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을 얻었은즉 담대함으로 소망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확실하고 영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고 말했습니다(롬8:35).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신 데 누가 정죄하겠느냐”고 했습니다(롬8:33).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고 했습니다(롬8:3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했습니다(롬8:32).

  결 론 : 그러므로 오직 즐거워하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즐거움이 없는 생활은 아직 은혜가운데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여 즐거워하는 생활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된 이 한가지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의 생애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환난 중에도, 고난 중에도, 핍박 중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0)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로마서 5:12)


  서 론 : 한사람으로 말미암은 죄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의가 온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는 일에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또 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성경해석과 인류의 구속사에 대한 바른 해답을 주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1.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

  우리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씀에서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은 “좋았더라”의 세상이었습니다(창1:31).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2.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이 같은 세상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1) 아담은 생명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명하신 생명언약은 이러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파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 언약이란 인격체로 창조된 인간에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과 같은 인격체로 지음을 받은 사질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조건으로 그가 순종해야할 한가지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2) 아담의 죄에 뱀이 가담한 것은 죄의 기원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을 죄의 종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롬6:17,20). 죄의 종이란 말은 사단의 종이란 말과 같은 뜻을 나타냅니다. 사단으로부터 죄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밝혀주고 있는 죄의 기원은 뱀으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뱀이 사단이었느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뱀도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창조 역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예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창1:31). 그러면 어찌하여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간교하다는 말은 간사하고 교활한 성품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것은 간교한 사단이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미혹했기 때문에 뱀이 간교한 존재로 등장한 것입니다. 뱀에게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건넨 것입니다. 사단이 뱀 속에 들어가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죄로 인도한 것입니다.

  (3) 죄를 지은 장본인은 하와였지만 아담이 모든 책임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도 그 실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담은 아내인 하와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진 것은 하와가 그 실과를 먹은 후인 것이 아니라 아담이 먹은 후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창3:6,7). 우리는 여기서 죄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인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안 먹은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4) 불순종의 결과는 아담에게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라고 말한 아담은 실과를 먹기 이전에도 벗은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벗은 몸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게 된 것은 선악을 알게 되었고 눈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유혹한 말이 정말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눈은 악을 바라보는 일에 밝아졌습니다. 그 결과 심히 좋고 선한 모든 것에 대하여 정욕과 탐심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눈이 새롭게 열린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는 인류사회에 다음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들어냈습니다.

  (I)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그 결과 사망이 왔습니다. 사망이란 육신의 주검을 말합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에 따라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망의 선고는 그 즉시의 주검의 선고가 아닙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에 아담은 땅에서 삶의 제한된 지속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아담의 저주는 그 자손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검의 선언은 신약시대에 와서 영원한 주검인 영적인 주검까지 포함된 뜻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계20:14,15).

  결 론 : 이처럼 한 사람 아담의 죄는 전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선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아담은 최초의 죄인이 되었고 그 결과 죽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아담은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와 같은 죄인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그들도 역시 아담과 같은 죄인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죄에서 건지심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며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아담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31) 죄와 율법

  (로마서 5:13)


  서 론 :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죄가 율법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증거로 사망을 들 수 있습니다. 사망은 죄 값으로 온 것이기 때에 비록 죄가 율법으로 죄로 드러나 정죄 받기 이전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사망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은 죄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1. 율법이 있기 이전의 죄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기 전에도 이 세상에는 많은 인류들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건 죄가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가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죽음으로 아담과 함께 매장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자손들에게 그의 죄가 그대로 계속되어 내려왔습니다.

  (2) 다음에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거슬린 죄가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지혜로 우심 등 하나님의 이 같은 형상이 인간에게 어느 정도 심겨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이 창조하심을 받은 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 이 같은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졌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간의 타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타락은 안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의 인격가운데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지만 그 그림자는 그대로 살아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말합니다(롬2:14).

  (3) 아담에게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아래 서 있는 하와에게 뱀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유혹했습니다(창3:5). 그러나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 하와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는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사단의 악을 받아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의 밝아진다는 눈은 육신의 눈이었고 이 눈이 사단의 말처럼 밝아지자 그의 몸에 정욕과 탐심과 시기와 투기와 부끄러움이 들어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선악으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이제 선을 알고는 있었지만 행할 능력은 상실해 버렸습니다(롬7:23).

  2.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무엇인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지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I) 이것은 죄가 아니란 말이 아닙니다.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인정치 아니했다는 말인데 이것은 율법적인 정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2) 죄에 대한 어떤 형벌을 제정치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나타난 죄에 대한 보응과 형벌이 가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은 율법이 밝혀주고 있는 죄에 대한 응징입니다(마5:38).

  (3) 죄를 죄로 들어내지 아니하였을 뿐이란 뜻입니다. 율법의 가장 뚜렷한 사명 중에 하나는 죄를 죄로 들어내 놓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죄악이 관용 될 수록 그 마음의 율법인 양심이 더럽혀 가기 때문에 죄를 죄로 인정치 아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들에게 그들의 죄를 분명히 나타내기 위하여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영원히 지올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는 돌비에 죄를 죄로 들어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법을 새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죄는 영원히 숨길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한 정죄를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율법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죄와 깊은 관계에서인 것입니다.

  (1) 율법이 인간의 죄를 들어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그 죄를 시인치 않고 있으며 죄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존재한 후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죄의 대가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율법이 인간의 죄를 정죄합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무엇이 죄인가에 대하여 제시해 주며 또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결 론 : 율법은 인간의 죄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은 죄에 대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시게 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생명을 얻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활 것입니다.





  (32)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로마서 5:14)


  서 론 : 아담은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존재로 등장합니다. 아담은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왔고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의와 생명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표상이란 말은 보통 상징이란 말로 해석하지만 헬라어의 뜻은 ‘튀포스’로, 어떤 자국을 의미합니다.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 자국이 나타난 현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을 볼 때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함을 알게 됩니다.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두 존재는 얻어맞은 자국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를 바라볼 때 속죄의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사망이 왕 노릇한 모세 때까지의 세상

  지금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가? 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보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선언에서 죽는다고 하신 말씀은 아담이 먹었을 때 비록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산할 그의 자손들까지 포함시킨 언약으로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아담의 대표성을 깨달아 인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깨달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의 역사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고 하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반대적인 의미에서 아담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에 대한 응징으로 사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에도 죄로 인한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2)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그가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3) 아담의 주검은 하나님의 영생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엡2:1). 하나님은 이 처럼 소망이 없는 인간들에게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요5:24).
  (4) 우리가 여기서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담의 실패는 완전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게 된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의 실패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더욱 크신 사랑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담의 죄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하심이 죄인들에게 이처럼 나타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3.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우리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할 때 아담은 분명히 오실 자의 표상임을 알게 되는데 이 경우의 표상은 반대적인 의미에서의 상징인물로서의 표상인 것입니다.

  (1) 아담은 첫 아담이요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 되십니다(고전15:45) 첫 아담은 죄를 범한 사람이요, 그리스도는 이 첫 아담이 범한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2) 아담은 산영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살려 주신 영이 되었습니다(고전15:45). 아담이 범죄 함으로 자신의 산영이 죽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의 영까지 죽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려 주시는 영으로 오셨는데 이처럼 아담으로 인해 영을 살려 주는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3) 아담은 육이 있는 자지만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로 오셨습니다(고전15:46). 인간의 육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후패할 요소가 있으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이시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자는 다 그의 형상을 본 받아 신령한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4) 아담은 땅에서 났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셨습니다(고전15:47). 아담이 땅에서 났기 때문에 땅에서 난 모든 인류는 흙에 속한 아담을 닮게 되어 한결같이 죄인이요 사망아래 있지만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자이심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아담은 첫 사람이요 그리스도는 둘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15:47). 첫 사람 아담은 실패하므로 죽었으며 그의 자손들도 다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는 둘째 사람으로 새로운 인류의 표상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첫 사람 아담의 죄나 사망과는 상관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의 죄의 빚을 다 갚았고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33)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풍성한 은혜

  (로마서 5:15-16)


  서 론 : 로마서 5장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표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사회에 범죄를 가져 온 대표자로 나타나 그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그와 대조적으로 인류사회에 의를 가져와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공급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변증하고 있습니다.

  1.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은 선물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을 선물이란 말로 표현하지는 아니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아담이 준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죄의 기원은 사단을 그 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었고 아담에게도 죄의 품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사단이 등장하면서부터 사단의 유혹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뱀을 그의 활동의 발판으로 하여 하와를 유혹하였고 아담과 하와는 이 사단의 유혹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러나 그 불순종의 결과적인 책임은 아담에게 있었습니다. 아담은 사단이 동장하기까지는 불순종에 대하여 생각해 본 바조차 없었습니다. 선하기 만한 아담과 하와에게 불순종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명령은 이미 사단의 유혹을 바라보시고 하신 말씀이셨던 것입니다(창2:17). 아담의 참 순종은 사단의 유혹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아담의 불순종은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것일지라도 결과적으로 책임은 아담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3) 불순종을 택한 아담은 죄에 팔린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아담에게 있어서 선은 하나의 환상이 되었고 죄의 세력이 아담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죄에 팔린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4) 이 같은 아담의 신분은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계약하셨고 아담에게 선언하셨지만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세우심을 받은 존재였기 때문에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아담과 같은 동일한 운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14절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말씀하므로 허상인 아담은 물러가고 이제 실체이신 오실 자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고 의와 생명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하셨기 때문에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바라보시고 이미 그 죄를 소멸하고 의를 주실 뿐 아니라 참 생명까지도 주실 수 있는 놀라운 섭리가 서 계셨던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바울은 탄성을 쳤습니다(롬11:33).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주 선하신 뜻에 의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그 결과는 아름답고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했습니다(사55:3). 이같은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입니다. 아담의 언약은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생명대신에 죄와 사망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은 죄를 사유하고 사망을 승리하며 의와 생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했습니다. 이 선물은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입니다. 많은 사람이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의와 생명입니다.

  (6) 넘쳤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은혜라고 하셨습니다(엡3:8).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위에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린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 풍성함이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풍성한 은혜가 강처럼 넘칩니다. 넘쳤다는 말은 넉넉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넉넉합니다.

  결 론 :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에 이름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이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은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정죄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많은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은사는 모든 사람으로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사는 인류의 범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34) 한 사람 아담의 죄와 한 분 그리스도의 의

  (로마서 5:17)


  서 론 :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말씀은 죄와 의의 전가에 대한기독교 교리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우리에게 오게 된 사망과 생명의 역사에 대한 교리적인 진리를 횃불처럼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망이 왜 이 세상에 오게 되었으며 그 사망이 우들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그리고 생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왔으며 이 생명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 대하여 영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한 사람으로 인한 범죄와 사망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사망과 생명, 죄와 의에 대하여 매우 대조적으로 비교하면서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교리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특별히 이 “한 사람”에 대하여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범죄라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아닙니다. 18절에서 인간의 범죄에 대해서도 “한 범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사망이나 인간의 정죄나 인간의 죄인 된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같은 논리는 비록 아담의 자손 중에 선하고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 역시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사망과 정죄와 죄인 됨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 준말입니다.

  (2) 우리는 아담 안에서 무조건 죄인이 되었고 정죄를 받았고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세우신 언약은 그를 대표자로 한 그의 모든 자손에게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이처럼 자기 자손들의 법적 대리인의 자격까지 겸해서 언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 때문에 모든 인류는 무조건 아담의 범죄에 동참자가 되었고 아담의 사망에 동참자가 된 것입니다.

  (3) 사망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왕 노릇하였다는 말의 왕은 ‘바실류오’로 통치권이나 지배권을 의미합니다. 사망이 우리를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인류 중에 누가 이 사망의 통치에서 벗어날 자가 있는 것인가? 사망은 완전한 권세로 인간을 지배하므로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생명

  그런데 인간들이 전혀 예견치 아니한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아닌 다른 한 사람이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1) 이 사람은 아담과 다른 사람입니다. 첫째로 아담의 혈통에 속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담의 자손은 남녀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녀의 결합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4). 이 분은 하나님의 생명 곧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2) 이 분은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넘치다의 ‘페릿세이아’란 말은 과다하다, 여분이 있다. 더욱 이란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의의 선물은 이처럼 우리에게 과다하도록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안에서 왕 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3) 이 선물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사람”과 “한 분”에 대하여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범죄와 정죄와 사망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이와 똑같이 의와 생명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이곳에는 다른 요소란 전혀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이 선물을 받을 사람은 아담의 자손이 아닙니다. 아담의 혈통적인 자손은 그 아담 한사람 때문에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이 같은 범죄한 자, 정죄 받은 자, 사망이 왕 노릇하는 자들이 어떻게 의와 은혜의 넘치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 선물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은 아담처럼 육의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을 태어나게 하시는 방법이 영적이십니다. 이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탄생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2,13 ; 요5:13).

  (4) 이들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경우는 사망이 우리 가운데서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은혜의 선물을 받은 경우는 그것을 받는 자들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이전에 아담이 가졌던 의는 자신이 소유한 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의는 사단의 공격에 넘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의는 우리의 것이나 아담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의는 우리에게 다시는 정죄나 사망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것입니다.






  (35)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

  (로마서 5:18-19)


  서 론 : 바울이 로마서에서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확신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구원의 확신을 모든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지시켜 주기 위하여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에 대하여 비교해 나가고 있습니다. 로마서 5, 6, 7장안에 있는 진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 대한 확실한 구원에 대한 증거입니다. 5:15부터 17절까지의 논술을 보면 아담 안에서의 신분과 그리스도안에서의 신분의 분명한 차이를 증거해 주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아담으로 말미암운 죄와 사망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보여 주시는 18, 19 절 말씀은 이같 은 바울의 논증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1. 한 사람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가 행하신 의의 한 행동

  우리에게 있어서 아담이 무엇을 했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가 지금 당하고 있는 죄와 사망은 오직 이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의 정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가운데 한 사람의 의인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인류가 아담의 영향을 받아 죄를 범하기 쉬운 위험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인가? 이 세상에 존재해 있었던 죄에 물들기 쉬운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인가?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어떤 해답을 주고 있는가? “아담 한 사람 때문”이라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행하는 선이나 의로움을 바라보고 그것에 어떤 가치를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자기를 바라보려면 아담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신뢰나 불의 때문에서가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정죄 하심을 받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담 안에서 이미 죄에 팔린 몸이 되었습니다(롬7:14). 나는 이미 아담 안에서 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롬5:12). 이런 나의 신분은 영원히 변해 질 수 없는 신분입니다.

  (3) 바울은 이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행동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하여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담이 범한 죄와 그에게 내려진 정죄와 사망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이 강조를 반복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같은 적용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에도 미친다는 사실을 증거 하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그의 혈통적인 자손들에게 미친 영향은 결정적입니다. 이와 똑같은 원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의 행동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하려는 요점은 한쪽이 확실하다면 다른 한쪽도 그와 똑같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아 사마에 이르게 되었다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같은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 로마서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과 한 사람의 순종하심

  바울은 이곳에서 같은 논리지만 순종과 불순종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은 아담의 불순종을 말하고 한 사람의 순종하심은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을 말합니다. 에덴에서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아담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게 했습니다. 내가 죄인된 것은 나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오게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순종은 어떻게 하여 우리에게 의를 주게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명령은 무엇인가? 그의 목숨을 죄인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골2:6-10).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깊은 영적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정죄 하심을 받아 사망에 이르렀다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로움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일은 얼마나 당연한 일이며, 아담의 불순종이 사망을 가져왔다면 그리스도의 순종은 보다 더 풍성한 의로움과 생명을 줄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바로 이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설명해 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이 놀랍고 엄청난 축복을 지금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36) 죄와 은혜

  (로마서 5:20-21)


  서 론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일에 있어서 바울은 5:12절부터 계속해서 독특한 방법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은 현격한 대립 점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극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결과적으로 의와 은혜의 승리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1. 율법이 가입한 이유

  바울의 율법론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반론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 중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 바울이 말하는 율법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의 논리에 있어서 바울의 주장은 율법무용론이 아닌가하는 이론이 제기된 것입니다. 그 이유로 바울은 율법이 사람에게 의를 줄 수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인) 정죄 할 수도 없다고 하니 그러면 율법은 무용지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언뜻 이 말씀이 가리키는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처럼 생각됩니다. 가입했다는 말은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 가입은 뒤따라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따라 들어온 것인가? 율법이 가입했다는 것은 율법이 죄를 따라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죄나 은혜처럼 그 자체가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따라 들어 온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 가입하였다는 말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뜻입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13). 여기서 우리는 율법과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 엄연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란 존재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이미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입니다.

  (3)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넘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하다는 말은 ‘플레오나조’로 풍성하다란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죄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가 있었으면서도 죄가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들어오자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죄가 일시에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숨겨졌던 죄가 폭로되었습니다. 이 같은 죄는 인간사회에 풍성할 정도로 넘치게 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이 세상이 죄악 세상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죄가 인간세상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율법으로 의를 얻거나 죄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왕 노릇하고 있으므로 더욱 깊은 죄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2. 넘치는 은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범법함이 없었기 때문에, 죄는 있었지만 그 죄가 죄로 인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개입하므로 율법에 의하여 죄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자 인간의 죄가 이 세상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의인이 하나도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1) 그러나 하나님은 그 율법과 함께 은혜를 개입시키신 것입니다. 율법을 개입시키신 일은 오직 은혜를 개입시키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요 방편에 불과하셨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의를 주실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으로 인간의 죄를 정죄 하심으로 죄의 모습과 그 정죄의 두려움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와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은혜는 죄보다 더욱 넘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넘쳤다는 말은 죄를 삼켰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죄를 덮어 그 위에 넘친 상태를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그 이유와 증거는 죄는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는 흥미로운 비교이기는 하지만 사실인즉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상대인 것입니다. 아담은 땅의 생명을 가진 자요,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을 가진 자이시며, 아담은 피조물이요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아담은 범죄자요 그리스도는 속죄자이시며, 아담은 산영이요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고전15:45).

  결 론 : 율법은 죄를 행하면서도 죄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정죄의 사슬에 메이게 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죄 값인 사망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절망 속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율법과 함께 은혜의 선물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불순종에서 나온 죄의 권세를 능히 이기고 정복할 수 있으므로 죄의 세력보다 더욱 넘쳤습니다. 이것은 마치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처럼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게 된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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