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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장 (97-100)
 밤중소리  01-30 | VIEW : 461



  (97)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태도

  (로마서 14:1-4)


  서 론 : 한 교회의 지체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 중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믿음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믿음을 소유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연약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들의 신앙적인 충돌이 빈번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상생활에 부닥치는 음식문제는 심각한 대립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음식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

  우리들이 그리스도밖에 있었을 때에는 음식에 대하여 자유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교회생활에 들어가면서부터 문제점이 제기된 것입니다.

  (1) 구약에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엄격한 구별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정결한 음식의 표준은 육지에 있는 짐승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으로 제한되었고, 물에 있는 물고기 중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으로 규제되었습니다. 그 외에 것들은 가증한 것으로, 이런 것을 먹으면 그 사람은 부정하여 질 것이라고 정죄 했습니다.

  (2) 다음에 문제로 제기된 것이 우상의 제물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로마교회에서 먹는 자와 먹지 아니하는 자의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음식은 우상의 제물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 문제된 것은 그 당시 로마를 비롯한 이방인의 도시들은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그런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섬겼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이런 종교적 관습에 따라 그 지역사람들은 음식으로 먹을 짐승을 잡으면 먼저 황제의 신 앞에 제물로 드렸다가 시장에 내다 팔아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장에서 고기를 사 먹는 사람들은 우상 앞에 드려졌던 물건을 사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양심에 걸려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고 또 어떤 이들은 우상의 제물은 아무 것도 아니니 먹어도 상관이 없다는 믿음으로 시장에서 사 먹었습니다. 이것이 논쟁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일은 바울이 이 로마서를 썼을 때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서의 내용도 몰랐고 예수님이 하신 여러 가지 교훈적인 말씀도 아직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에 ‘믿음이 연약한 자’와 ‘의심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2.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으라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쾌한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아직까지 율법적인 생활을 해 온 유대인의 경우, 그들의 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율법적인 생활에서 탈피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 문제에 율법에 얽매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음식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두 거룩해 졌습니다. 부정한 음식이 그들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2) 믿음이 연약한 자란 신앙의 양심을 구약적 지식에 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어느 한가지 틀 속에서 오래 있다보면 그 생활습성이 하나의 선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습관이 우리의 양심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될 때 신앙양심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먹는다는 문제는 그들의 신앙적 양심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 이론에 선뜻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물론 맹목적인 믿음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말씀의 근거에 의하여 가진 믿음이라야 참 믿음인 것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있는 율법에 대한 엄청난 도전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과 그 복음적인 뜻을 깨달을 때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모든 식물은 다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막7:18).

  (4)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판단이란 말은 정죄란 말과 같은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믿음으로 무엇이나 먹는 자는 양심의 거리낌으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올 업신여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에 대하여 구약적 계명을 가지고 판단하기 쉬운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판단이 죄가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남의 하인이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먹고 마시는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10:31). 우리들의 생의 목표가 이처럼 뚜렷합니다. 먹는 일로 내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판단하거나 거쳐 넘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랑으로 내 형제 앞에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98) 그리스도인의 날과 절기

  (로마서 14:5-9)


  서 론 : 초대 교회시대에 있어서 먹는 문제와 절기를 지키는 문제는 교리적 논쟁의 중심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하여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교리적인 혼선을 빚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신약적인 교훈이 필요로 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근거로 이 문제를 이곳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의 증거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먹는 일과 날을 지키는 문제는 어떤 법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각기 신앙적 양심에 비추어 자기 마음에 확정할 문제라고 밝혔습니다.

  1. 교회에서의 날과 절기

  교회의 초기에는 아직 계시의 미비로 자연히 구약적인 교훈이 강력히 머리를 쳐들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도 이 같은 풍조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하는 논쟁은 하나님의 교회에서의 율법적인 적용문제가 심각했음을 말해 줍니다(행15:1-5). 바울은 이 날과 절기 문제에 대하여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지니리”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바울이 말한 ‘이날과 저 날’은 그 당시 교회에서 지켜오고 있는 여러 날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유대교에 몸담아 온 유대교인들은 좀처럼 율법적인 안식일의 관념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2) 날 중에 큰 문제로 부각된 날은 바로 안식일입니다. 지금도 이 안식일을 고수하는 교파에서는 안식일은 신약이나 구약의 시대적 차별을 초월한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이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율법에서 나온 것이며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십계명은 그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도덕적 규례가 아닙니다. 그 중에 안식일은 율법에 속한 절기에 관한 문제이므로 이 규례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잘 지켰지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실질적 자격요건인 순종에 불합격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실격자가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참 안식의 뜻을 이처럼 명백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이 말씀은 복음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임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히4:1-11).

  2.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이런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적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만약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지키려 할 때 율법적인 저주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구약전체에 있는 안식일에 대한 조항을 지켜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만약 그것들을 지키지 못할 때는 율법의 저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안식의 성취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장차 우리의 온전한 안식의 소망인 것입니다. 주님의 완성된 안식, 우리의 안식의 실현이 될 부활을 소망하면서 주의 부활의 날을 우리는 ‘주의 날’로 정하고 이 날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적인 절기문제 역시 동일한 각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에서 민족적인 절기로 지켜 온 삼대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를 보아도 이 절기가 단순히 구약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안식일 문제나 절기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최선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인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주님께서 “이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를 위하여’란 말씀의 뜻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드리는 생활을 위하여”란 의미입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죽은 자에게 주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그의 살아나심은 산 자의 주가 되시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복된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99)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

  (로마서 14:10-18)


  서 론 :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생활은 어떤 규범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양심적 판단에 따를 것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날이나 절기나 먹는 문제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음을 바울은 조심스럽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권면은 탈 율법적인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날이나 절기나 음식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을 결코 속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밝혀 줌으로 절기 문제나 음식문제는 판단을 받을 만한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심판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를 이루고 있는 형제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엄한 경종을 받고 있습니다.

  (1) 판단한다는 말은 율법적인 정죄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이처럼 경종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니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고 했습니다(약4:11). 이 일이 죄가 된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도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는 그같은 죄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밝힌 하나님의 심판대란 ‘흰 보좌 심판’을 말합니다. 이 심판은 천년왕국이 지난 후 하늘의 보화 앞에서 베풀어주는 심판을 가리킵니다. 이때 하늘의 보좌 앞에 벌어지는 심판대는 두 가지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하나는 불신자들의 심판입니다. 이들이 받을 심판은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조금도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계20:12).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상급 심판도 아울러 전개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하고 있는 우리란 불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분명히 믿음을 가지고 이처럼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고후5:8-10). 그리스도인들의 상급을 위한 책은 행위책이 아니라 생명책입니다(계2:12). 이 책을 선지자 말라기는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이라고 했습니다(말3:16).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고 하신 것은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이 ‘기념 책’에 기록되어 조금도 가감됨이 없이 상급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5:58). 예수님이 냉수 한 그릇의 상도 앓지 않으리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마 10:42).

  (3) “그 날에는 모든 무릎이 내게 끓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무릎이란 주님 앞에서 심판 받는 모든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 앞에서는 인간세상에서 누렸던 권세도 영광도 학식도 재물도 마치 썩은 짚만도 못할 것입니다. 이때 모든 인류는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 혀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2. 바울의 확신

  바울은 여기서 계시로 받은 믿음에 대한 확신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속된 것이란 ‘부정한 것’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모든 식물은 스스로 부정한 것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어떤 식물에 대하여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성별된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것으로 이 같은 하나님의 구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거룩함과 부정함이 새롭게 성별 되었으므로 율법적인 구별이 무효화된 것입니다.

  (2) 그럼에도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부정한 식물을 대할 때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식물이 속되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식물이 그에게는 부정한 식물이 되기 때문에 먹으면 스스로 정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형제들에게 이 같은 진리를 잘 가르치므로 ‘스스로 부정한 식물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야하며 억지로나 양심에 가책을 받게 하면서 그 식물을 먹게 해서는 안됩니다.

  결 론 :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중요한 일 일수 없습니다.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은 우리의 육신적인 생활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필요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중요한 일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는 일입니다.






  (100) 화평과 덕을 세우는 생활

  (로마서 14:19-23)


  서 론 : 바울은 식물에 대한 논쟁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형제들의 신앙에 손상을 주므로 이런 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일이 합당치 않다는 사실에 대하여 누누이 설명하고 거듭 거듭 경종 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로마교회에 있어서 식물에 관한 문제가 얼마나 절박한 일이었나를 잘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생활은 날이나 절기나 먹는 일에 대한 논쟁이나 이로 인한 분쟁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모든 일에 있어서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결여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훌륭한 교리가 있고 완벽한 규범이 있다고 해도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화평의 일이란 사랑에서 나온 이해와 용서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의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1:20).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지난날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롬3:25,26).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이해와 용서를 의미합니다.

  (2) 다음에 바울은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덕이란 마음과 행실이 겸손한 인격의 나타남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의한다면 ‘옳고, 착하고, 아름답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나 행실’이 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열매는 바로 이 덕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 덕의 결실로 과실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남의 판단을 받지 않도록 자기 행실에 조심합니다. 남에게 판단을 받는 일은 덕의 부족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덕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판단을 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처신을 하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그의 인격이 그리스도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성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바울은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경종 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화평의 일이 아닙니다. 덕을 세우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출발 단계는 언제나 믿음이 연약하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사랑으로 품고 이해하고 용납해 주어야 할 화평의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2. 거리끼게 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화평을 기하고 덕을 세우려면 “네 형제로 거리끼게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거리끼게 하는 일이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1) 바울의 교회생활이 이런 생활이었습니다. 바울은 큰 믿음을 소유한 사도요, 주님으로부터 많은 계시를 받은 사람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쫓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해 모든 일에 스스로 절제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바울은 식물에 대하여 자유 했지만 그러나 그의 생활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생활을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화평과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2)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는 그 뿌리가 믿음에 내려져 있어야 합니다. 바른 믿음의 판단에서 나온 결과여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을 책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믿음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마음의 맑은 유리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의 양심의 증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양심이 책망을 듣거나 후회치 아니합니다.

  (3) “믿음으로 쫓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표준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이 없는 생각, 믿음이 없는 행동은 모두 죄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쫓지 못하는 이유는 의심이 그 사람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에 대한 일도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의심하고 먹는다는 말은 양심의 정죄의 소리를 듣고도 그 일을 행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한번 정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특별히 날이나 절기나 식물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리에서 다른 이의 이해와 용서를 받는 대상의 사람인가? 아니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생활을 이루어 나간다면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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