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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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77-82)
 밤중소리  01-29 | VIEW : 2,605



  (77)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로마서 10:1-4)


  서 론 :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여겼습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고 했습니다(롬11:13).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늘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함께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백성이었고 아브라함을 한  조상으로 가졌으며 예수도 그들과 한 혈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그와 반면에 이방인들이 오히려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하여 바울의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신의 자리에서 하루 속히 깨어나 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바울로서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떨어진 이유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떨어진 일에 대하여 분명한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률 복종치 아니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하나님께 열심이 득심 했습니다. 실인즉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에서였습니다.

  (2) 그런데 그들의 이 열심이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과는 전혀 판이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창조주의 지식이요 영적 지식이요 사랑의 지식이요 구원의 지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은 육적인 지식이요 땅의 지식이요 정욕과 탐심과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일정한 지식을 정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그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그 섬김이 올바른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인줄로 잘못 알고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지식으로 이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율법에서 나온 열심으로 그들은 이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열심을 품어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증거하여 이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인간이 율법으로는 의를 얻기는 고사하고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분명히 하시고 율법 외의 하나님의 의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런데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지식을 그들은 버리고 율법을 따라 열심히 하나님을 섬김으로 의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4)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큰 허점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고 하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물론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의 표준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애써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2.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잘 밝혀준 논증입니다. 바울은 이 짧은 말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율법의 의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율법의 마침이란 율법의 폐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언제까지나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그 사람들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2) 이 같은 일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안에서 이룰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이런 의를 작만 하시고 이 의로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로 섭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받으신 저주는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써 그로 인하여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갈3:13).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로 율법도 이루어 놓으시고 우리의 죄의 속량도 이루어 놓으시므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완전히 갖추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하셨습니다(마22:1-4). 우리의 할 일은 이 일을 이루신 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믿음으로 이 선물을 은혜로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결 론 :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사람이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른 신앙생활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의 지식 갖기에 힘쓰는 성도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7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로마서 10:5-8)


  서 론 :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에 대하여 그 현격한 차이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그릇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함으로써 아무 공로 없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의를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의 조건은 인간적인 경험이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증거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차이는 행함과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1)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것을 지키는 자가 의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레18:4,5). 이스라엘의 오해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식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이스라엘에게 능히 의를 얻을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면 하나님의 의의 표준은 율법이외에 존재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이란 있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하여 오직 그것이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에 그 반대자들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면 그같은 사실을 누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냐?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같은 말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누가 그처럼 하늘에 올라가 확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삼으려고 한다면 그를 다시 이 세상에 모셔 오시게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기 위해서는 그를 모셔 내려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롤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부란 사망 혹은 무덤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확인하려면 음부에 내려가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에 바울은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려서 모든 사람에게 확인 시켜야 할 것이니 그같은 일이 합당하겠느냐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고 했습니다. 즉 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고 되 묻는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이처럼 말했습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확인하거나 음부에 내려가 그의 죽으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습니다.

  (1)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논증을 할 때에 그는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믿음의 말씀을 증거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함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신30:11-14).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으며 바다 건너편 멀리까지 찾아 갈 이유도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서 심히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에 있었고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2)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외는 우리에게 믿음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도, 그리고 음부에 내려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확인해도 그런 것이 믿음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말씀이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결 론 : 바울이 전파한 믿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고전1:21) 이 믿음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그 말씀으로 믿을 때 하나님의 의를 율법과는 상관없이 아무 공로 없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79) 구원에 이르는 믿음

  (로마서 10:9-11)


  서 론 :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가까이 있는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증거함에는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음부에 내려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확인인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믿음인데 그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도 음부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하였으니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1. 구원에 이르는 믿음

  바울은 9절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한 중요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기에 있는 이 말씀 뿐 아니라 바울의 서신 중에 나타나 있는 모든 구원 교리에 대한 진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로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에 대하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12:7).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사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 천국의 문제 등이 오직 믿음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바울은 간략하면서도 그 모든 믿음의 참 진리를 이곳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 우리의 입으로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시인이 전제조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주되심의 진실한 고백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란 표현은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므로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고 하는 주란 말은 하나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어 있는 일도 그들이 예수의 주되심을 인정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믿음의 원인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말은 예수의 속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다시 살아나심을 믿으려면 그가 주되심의 사실을 믿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관한 더 깊은 지식을 가지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또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고전2:12). 믿음은 그 발생원인이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만 그 말씀이 심겨져서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곳은 마음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섬겨진 믿음은 그의 입으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2. 마음의 믿음과 입의 시인

  바울은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1) 믿음의 지식을 간직하고 저장하는 곳은 마음입니다. 말씀의 씨가 마음의 밭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마13:19). 그리스도의 의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벙어리가 되어 그 입을 통하여 말로 시인할 수 없다고 해도 그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그 믿음은 그의 구원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2) 사람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사람은 그 신앙을 입으로 반드시 시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세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이 전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1절 이후에 전파하는 신앙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사람은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합니다. 다른 또 한가지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일을 말합니다. 지난날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일을 거부하므로 써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 론 :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이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80)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예수님

  (로마서 10:11-13)


  서 론 :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원리에 대하여 구약적인 근거를 이곳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지극히 보편성을 띄고 있으니 인종의 차별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이방인과 유대인들과의 사이에 간격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이 같은 장벽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를 율법의 속박과 저주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율법을 받았으나 그 율법의 정죄로 망하는 유대인들이나 율법 없이 망하는 이방인이나 차별을 두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1.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로마서 9:33에서도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이사야 28:16에 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1)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율법이나 양심 앞에서의 자책을 말합니다. 모든 죄인은 율법의 정죄 앞에서 그 부끄러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방인이라도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기록해 두신 마음의 율법, 곧 양심이 있습니다. 죄인들은 이 양심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 앞에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정죄 의식에서 해방되어 지유함과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의가 내 것이 되며 그의 피로 나의 죄를 사유하셨기 때문입니다.

  (2)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주의 재림 때 그 앞에서의 입장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홈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벧후3:14).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 같은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심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화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5-17).

  (3)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백보화 심판대에서 왼편에 둔 염소들에게 이같이 선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이 주님의 선언은 믿지 아니한 자들의 영원한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같은 믿음의 축복은 결코 어느 한정된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1)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한 주이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만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어 그들의 주가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2)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엡3:8). 그의 은혜의 선물도 풍성하십니다(엡3:7).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셨습니다(엡3:19). 그러면 그가 부르신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하시는 그 부요는 무엇입니까? 그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화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화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3:21). 다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그에게 부요하십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이 생명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요일5:12).

  바울은 이처럼 증거 한 후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구원의 보편성에 대하여 이처럼 증거 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입니다. 유대인에게 국한된 특권이 아닙니다. 헬라인들에게 주어진 특권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신앙의 시인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이미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 마음에 믿는 주의 이름을 그의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의 고백을 말합니다.

  결 론 : 우리 예수님은 모든 것에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두 사람에게 능히 영생도 구원도 하늘의 영광도 천국도 누리 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구원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귀하고 은혜로운 일입니까? 그 은혜에 참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1) 믿음과 구원

  (로마서 10:14-17)


  서 론 : 오늘 봉독해 드린 14-17철까지의 말씀은 13절에서 밝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대한 영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4철에서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설명을 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실인즉 구약에 있는 요엘2:32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요엘은 2장에서 주의 재림을 전후한 인류의 종말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날에 즉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 날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란 말씀을 들려 주신데 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은 복음의 요체입니다. 주의 이름이란 곧 예수의 이름인데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입의 시인이기 때문에 훌륭한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롬10:9-10).

  1. 믿음의 과정

  14-I5절에는 주를 입으로 시인하기까지의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1)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이 마음에 심겨져 있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지 못한 입의 시인은 구원이 따를 수 없습니다. 그같은 시인은 거짓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2)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믿음은 그 마음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라고 말씀하시므로 밭인 사람의 마음속에 씨가 뿌려져야 말씀의 열매가 맺어지는데 그 씨란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히신 것입니다(마13:18-23. 눅8:11-15).

  (3)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들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밭에 씨를 뿌리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의 말씀을 들려주는 전파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그 전파를 통하여 듣게 되며 그 들음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믿음을 통해서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4)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다면 그 전파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교훈이요 인간의 종교일 따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선지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선지자중에 단 한 명의 예외자도 없습니다.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복음을 전할 우리에게 이처럼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여기서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전파 자로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5)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했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난하 주에 기록된 대로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움직이는 발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온 천하에 다니며 전하라고 명령을 받은 주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꾼은 그 주인의 명령을 제대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이스라엘의 불 신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저희란 이스라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석이 18절 이하에 나오는데 이스라엘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불 신앙에 빠진 것이 아니라 순종치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경우를 비추어 믿음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17).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이란 곧 말씀에 대한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순종이 따르지 아니하면 믿음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단단한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나 돌이 많은 밭에 떨어진 씨앗이나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은 결실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라고 하는 단단한 길가와 같은 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복음에 순종할 수 가 없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들음이란 곧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복음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철학적인 지식이나 인간의 지혜나 경험에서 고안해 낸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복음인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보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발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로 사용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82)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이스라엘

  (로마서 10:18-21)


  서 론 :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은 버림받음은, 바울이 설명하기 어려운 난제 중에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의 뿌리는 바로 유대인들에게 박고 있습니다.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도 유대인의 혈통에서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이 복음은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로부터 여러 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았고 복음을 배척했습니다.

  1.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의 불신은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냐고 바울은 반문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성경의 증거를 인용하여 명쾌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시19:4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고 증거 했습니다.

  (1) 복음은 은밀한 곳에서 남몰래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다는 말씀은 장차 전파될 복음의 범위가 어느 한곳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것임을 의미해 줍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이방인들에게만 전파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이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신 활동무대는 유대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동안에 온 유대 땅을 두루 다니시면서 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2) 이 복음은 유대인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발단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루살렘이 복음전파의 근원지를 이루었고 복음전도의 총사령부 격인 예루살렘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행1:8, 2:1-4). 그리고 이 복음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 되었습니다.

  2. 그러면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바울은 여기서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고 묻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 복음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느냐는 뜻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아니했다면 그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곳에서 신명기에 나타난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 같은 신명기에 예언된 말씀을 이곳에서 인용한 것입니까?

  (1)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아니한 것은 그들이 깨달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신한 그들의 죄 값으로 인한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마지막 노래로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의 생활이 부요하고 윤택할 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길 것을 예언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돌아갈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에게 돌아 갈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이 예언대로 돌아 올 것이 그들의 머리 위에 돌아온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알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고의적으로 애써 거역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메시야가 태어난 사실을 알고서도 찾아가지 아니했습니다(마2:2-6).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도 들었고 그의 놀라운 이적도 수 없이 보았습니다(요10:37,38). 빌라도 마저도 유대인들이 송사 하는 예수님의 고소내용올 무혐의로 단정하고 무죄 석방하려 했음에도 그들은 없는 죄명을 무고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완악 했음으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그들이 믿고 구원받아야 할 복음을 이방인들로 믿게 하심으로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하신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이사야의 담대한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사야65:1에서 인용한 예언입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바 되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찾은바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복음으로 부르셨고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4) 그렇다고 이스라엘에게 가만히 계셨던 것은 아닙니다.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순종치 아니하고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루종일 그의 손을 벌리셨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인내를 멸시하여 끝까지 거역함으로 결국은 복음의 은총에서 낙오자가 되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지금도 복음은 온 땅에 퍼져가고 있으며 땅 끝까지 전파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지 못함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핑계치 못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온 세계에 퍼지게 하라는 명령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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