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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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71-76)
 밤중소리  01-29 | VIEW : 2,998



  (71)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

  (로마서 9:1-5)


  서 론 : 바울은 아직까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란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기독교 대 교리를 갈파했습니다. 이 교리는 또한 8장에서 내주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를 정죄 할 다른 아무런 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애에서 체험되고 맛보는 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에게도 근심과 고통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근심과 마음의 고통

  바울은 아직까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법칙”을 증거 해 왔습니다. 그러나 9장에 와서 바울은 갑자기 그의 마음에 있는 괴로움을 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총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에게는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바울은 심히 안타까울 뿐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 큰 근심이 되고 마음에 그치지 아니하는 고통이 되고 있었습니다.

(1) 이것은 바울의 자기 동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과 구원의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왜 유대인들이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빠지게 되는가에 대하여 안타까웠고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2) 바울은 이방인들까지 참여하게 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하나님의 선민으로 인정되어온 유대인들이 누락된 사실에 대하여 시기하는 마음이 불일듯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도 유대인이란 혈연적인 영유로 인해서 그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2.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 원한 바울의 심정

  바울은 자신의 이 같은 고통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심도 있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란 말은 그들이 구원을 얻는 일이라면 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기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을 얻는 일이라면 자신이 차라리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같은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바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롬8:38,39).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다만 그의 거짓이 없는 진실과 그가 참으로 원하는 간절함의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은 버림받음에 대하여 심히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슬퍼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권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그의 혈통이 뚜렷합니다. 한 조상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번성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의하여 특별한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메시야의 언약을 받았으며 몇 가지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2) “저희는 양자 됨의 축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특별한 신분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셨습니다(출4:22).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라”고 하셨습니다(출19:5).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호11:1).

  (3) 그들에게는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영광이란 그들의 신분적인 영광과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같은 영광은 일직이 아무 민족에게도 주신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대인들에게 뿐이었습니다.

  (4) 그들에게는 언약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있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그리고 그 수많은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언약은 모두 이스라엘에게 유효한 것들이며 그들은 마땅히 그 언약을 믿고 그 언약을 따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했습니다.

  (5) 그들에게는 또 예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 민족이란 오직 이스라엘뿐입니다.

  (6) 그들에게는 약속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약속은 엄청나게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스스로 폐기해 버렸습니다.

  (7)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나셨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의 첫 조상이요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조상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족장들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고 그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육신적으로 보면 저들과 함께 유대인으로 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 말로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결 론: 이 같은 경로로 보건대 유대인들이야말로 이 세계 인류 중 가장 복된 민족이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구원의 은총에서 제외될 리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안타까워했고 큰 근심과 마음의 고통으로 괴로워했습니다.





  (72) 약속의 자녀

  (로마서 9:6-8)


  서 론 : 바울이 논증한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면 이스라엘의 선택과 우위성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가슴이 아픈 나머지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한 바울은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냐”는 의문의 제기입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여졌고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된 것이 아니냐?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파헤쳐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원의 섭리, 곧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폐하여지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

  4,5절에서 바울이 증거한 이스라엘의 특권이 그들의 불 신앙으로 상실되어 버렸다해도 그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주장했습니다.

  (1)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곧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선민으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유대인들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자녀를 얻기 위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육신으로 태어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인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 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고 하셨습니다(요8:39,40).

  (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얼굴에 수건을 쓴 채 얽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후3:14-16). 그리스도를 배격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마음이 회개치 못한 완고한 마음 때문에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을 쓴 채 읽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있는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로 돌아서면 그 수건이 벗겨져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2. 씨로 여기심을 받는 약속의 자녀

  바울은 이곳에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아브라함의 씨에게 적용시켰습니다.

  (1)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청할 것임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해석입니다{창21:12).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브라함에게는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전혀 무관한 아들이었습니다.

  (2)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삭으로부터 태어난 육적 이스라엘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이스라엘은 다 이삭의 씨로부터 태어난 혈통적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자녀란 영적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예정된 참 이스라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그를 부르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삭으로 약속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만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3) 이스라엘에게는 물론 바울이 지적한대로 이방인보다 우월한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그들의 특권이 결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보증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타난 율법으로 인하여 교만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소경이 되어 참 지식에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 같은 놀라운 특권 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이야말로 참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로 여기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스스로 그같은 영광스러운 일을 걷어차 버렸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증거처럼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견고해진 것입니다.

  결 론 : 이스라엘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우월하고 아름다운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특권의 뜻을 잘 이해하고 선용했었다면 그들이 결코 버림 바 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버림받았고 이방인인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것이 아니라 더욱 굳게 세워진 것입니다.





  (73)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로마서 9:9-13)


  서 론 :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진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의 논증을 통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씨를 통하여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약속해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삭이 약속의 씨로 약속 받은 일과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적인 문제를 깊숙이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 이삭의 경우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씨로 약속된 자녀이기 때문이란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에게는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이스마엘이 있었고 사라가 죽은 후 후처인 그두라로부터 낳은 아들들이 여섯이나 되었습니다(창25:1,2). 이들은 혈연적으로는 의당히 아브라함의 씨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첩의 아들이거나 서자였던 관계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는 오직 이삭만이 하나님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씨를 이미 창세 전에 생명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인간의 방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들의 몸이 노쇠하고 경수가 그치고 아브라함이 죽은 자처럼 되었을 때 이삭을 주심으로 이삭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의 씨인 것을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삭처럼 약속의 씨로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났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태어난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씨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들로 불려집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3:28,29).

  2. 야곱의 경우

  하나님의 이 같은 약속의 씨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야곱과 에서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약속의 씨인 이삭의 경우에도 그 쌍둥이 아들들 가운데 하나는 약속의 씨요 하나는 버림받은 아들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2)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은 인간의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에 결정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이나 악으로 표준삼은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놓은 것입니다. 이같이 행하시는 모든 근거는 무엇인가?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교리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라는 문제입니다. 이삭은 분명히 선택받은 약속의 씨이지만 이스마엘은 분명히 버림받은 유기자인 것입니다. 야곱은 선택받은 백성이지만 에서는 버림받은 불택자인 것입니다. 선택이란 말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가운데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은총을 받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유기자란 이 같은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떨어져 버림받을 사람들을 말합니다.

  결 론: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비밀에 속한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그 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타락은 불가피했다는 것과 그 타락이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크나큰 복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왜 하나님이 어떤 인간을 타락 상태에 그대로 두기로 작정하셨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이것도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감사할 것은 우리는 유기자가 아니요 선택자가 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영원히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74)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로마서 9:14-18)


  서 론 : 이삭과 야곱의 선택에 관한 바울의 증거는 유대인들에게 몇 가지 의문을 던져 주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가 인간의 구원이 전혀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인 자신들의 유익이 무엇이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선이나 악에 기준을 두지 않는 것이라면 결국 이같이 행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불의 하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1.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한 문제는 지금도 신학자들간의 열띤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바탕으로 성경을 교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라고 하는 책이며 이 책에서 주장되고 있는 성경의 핵심적인 교리가 ‘하나님의 예정’으로 오늘날 전 세계 장로교회의 교리가 되어오고 있습니다. 이 교리가 곧 ‘칼빈주의’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이에 반하는 교리로써 ‘알미니안주의’라고 하는 인간자유 의지의 구원론이 등장한 것입니다.

  (1)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릴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견해는 결국 하나님을 불의 하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전개하는 그의 논증에서 인간의 선택과 유기와 같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 문제는 그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출애굽기 33:19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다”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2) 바울은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원하는 자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44).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유의지는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인간은 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이이며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완전히 두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한 것은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덕적인 선이나 죄를 벗어버리기 위한 고행이나 생명을 얻기 위한 선행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같은 일은 자기가 행한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지 인간의 달음박질하는 애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2. 바로에게 보이신 경우

  바울은 애굽 왕 바로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인간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대하여 논증했습니다.

  (1) 바로란 인물은 우연히 애굽에 태어나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왕의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란 인물은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유기 된 자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의 권능을 만방에 전파하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애굽 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바로를 이 일을 위하여 세웠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신 사건을 가리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단 한가지 재앙만으로도 바로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보내시게 하실 수 있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다 내리시기까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으로 그 재앙을 다 받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섭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는데 그 섭리란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하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3) 그때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 이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당시의 사건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4) 바울은 결론적으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로의 강퍅함이 자신의 자유의지와 결단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권한을 우리 인간들이 침해할 수 없고 또 침해당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시되 하늘에 예비된 모든 신령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다고 하는 이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서도 한 한 평생 감사하고, 한 평생 그 은혜를 찬미해도 부족하다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5) 선택과 유기에 대한 권한

  (로마서 9:19-29)


  서 론 :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예상된 반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가지로 예상되기도 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반격해 오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런 자들에게 결론적으로 한 말은 이 모든 일은 그 일을 당하는 인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란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적 결론입니다.

  1. 누가 그 뜻을 대적하리요?

  바울의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논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매도하는 무기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1) 그 첫째 반론이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 하실 수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자의대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하실 자를 강퍅케 하신다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을진대, 그리고 만약 강퍅케 한자의 경우라도 그 사람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어찌 자신이 강퍅케 하신 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2) 그 두 번째 반론이 “누가 그 뜻을 대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권자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에 대해 이미 그처럼 예정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예정을 대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피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강퍅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2. 토기장이의 권한

  바울은 이 같은 반론에 대하여 다른 변론을 사용치 아니하고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돌리는 날카로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 바울은 그 첫째 대답으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뇨”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공격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사용한 힐문이란 말은 잘못을 꾸짖으면서 질문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울은 네가 뒤기에 ‘감히’ 란 말을 썼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힐문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일은 나를 지으신 창조주의 임의적인 권한인 것입니다.

  (2) 바울은 그 두 번째 대답으로 토기장이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한 줌의 진흙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한줌의 흙 중에서 얼마인가를 가지고 귀히 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남은 흙으로 이전 것과는 전혀 상반된 천하고 값싼 그릇을 만들어 냈습니다. 토기장이는 그 그릇을 손에 들고 만족했습니다. 이런 경우 그 그릇이 이 토기장이에게 왜 당신은 둘 다 귀한 그릇을 만들지 아니했소? 하고 항의할 수 있을 것인가?

  3.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바울은 토기장이의 경우를 예로 든 후 ‘천히 쓸 그릇’과 ‘귀히 쓸 그릇’을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연결시켜 논증했습니다.

  (1) 진노의 그릇은 바로 왕의 경우를 말합니다. 바로는 분명히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에게 그 진노의 심판을 오래 참으시고 속히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바로에게는 하나의 관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2)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이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릇에 대하여 영광 받기로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한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들이 받을 무한한 영광의 부요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토기장이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단독적인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이 문제는 각 사람들에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며 관용을 베푸시나 그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가운데서 멸망 받을 것입니다.

  결 론 : 이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믿는 우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리란 범위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선택을 받아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입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감사하면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76) 행위에 의지한 이스라엘

  (로마서 9:30-33)


  서 론 :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들인 육적 이스라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씨인 영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고민은 자기 동족 때문에 극치에 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들이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율법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1. 이방인들이 얻은 의

  바울은 30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의를 얻는 일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누누이 증거하고 있으며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감히 힐문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있어서 그 결론을 믿음과 행위에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1)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의를 쫓지 아니했다는 말은 율법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의 의를 전혀 알지 못했고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생각은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이스라엘에게 과연 율법의 의가 주어졌는가?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2:12). 이 말씀에 따르면 이방인은 율법 없이 망하게 되어 있고 이스라엘은 율법 때문에 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20).

  (2) 의를 좋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은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래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율법이나 양심이나 그 무엇으로도 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므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율법의 의, 그 보다 더 온전한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아 우리가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쉽사리 이 같은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이 믿음으로 의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롭다하심을 받은 첫 번째 사람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의 의는 무엇으로 얻은 것입니까? 아직 그때는 율법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행위로서는 의를 얻을 수 없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4:2,3). 이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후사 곧 언약의 씨라는 사실을 의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했습니다(롬4:23,24).

  2.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이유

  바울은 이방인이 의를 얻고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일에 대하여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고 했습니다.

  (I) 그들이 실족한 첫째 원인이 믿음에 의지하지 아니한데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의의 소재가 율법에만 있다고 확신한 나머지 믿음을 배척했습니다. 율법은 행위가 따르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처럼 율법의 관습에 젖어온 이스라엘은 행위가 개입되지 않고 다만 믿음으로 의를 얻는 일에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판단에 ‘대단히 잘못된 이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유대인들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의지했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의는 행위로 나타난 의여야 함으로 그들은 의를 얻으려고 그들의 행위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면 행위에 의지한 그들의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죄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의를 얻으려고 했고 끝까지 복음을 배척했기 때문에 의에서 떨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3) 그들은 결국 부딪칠 돌에 부딪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시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표적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은 애석하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의를 버리고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힘써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부딪칠 돌에 부딪치고만 것입니다.

  결 론 : 율법은 결코 이스라엘에게 의를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로 의의 기준을 삼으시고 그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의를 주시기로 애초부터 섭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견고히 잡아 우리의 의를 확실히 하여 구원의 증거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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