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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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57-70)
 밤중소리  01-29 | VIEW : 1,834



  (57)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로마서 8:1-2)


  서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선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절은 바로 1절의 해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방이란 말은 죄와 사망의 법의 속박에서의 벗어남을 말하며 이 해방은 한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해방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

  구원은 단회적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구원은 영적이요 완전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우리의 환경이나 어떤 조건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이 아닐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불완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1)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고 하늘에서 성취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1:3,4).

  (2)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선악)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따라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지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롬9:10-12).

  (3) 우리의 구원은 우리 생애 전반적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구원에 어떤 조건이 필수적으로 따라야만 한다면 그런 구원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같은 막연하고 실현 가능성도 불확실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셨다면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역사는 분명히 실패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이건 그리스도 밖이건 의를 행할 자란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소식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이를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 구원이 우리에게 영원히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2. 정죄함이 없는 생애에서 오는 기쁨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기쁨과 감사의 원인이 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도 정죄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쁨 대신 언제나 불안이 깃들 것이며 감사대신에 회의 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I) 정죄함이 없는 생활로서만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화평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이 화평이란 다시는 깨어질 수 없는 영원한 화평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또 정죄함이 오는 일이 있게 된다면 이 화평은 그때까지 만의 제한적 화평이 될 것입니다.

  (2) 정죄함이 없는 생활만이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믿음이야말로 시험과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되며 구원을 의심하므로 더욱 깊은 죄악의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위기에서 자신을 건질 수 있습니다.

  (3) 정죄함이 없다는 믿음만이 죄의 속박에서의 해방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죄는 죄의 지배를 다시 받게되는 죄가 아니며 율법의 정죄를 받는 죄도 아닙니다.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의 죄이며 사랑에 관한 죄입니다. 우리는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하며 그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이지만, 죄의 종으로 되돌아가게 되거나 율법 아래로 다시 돌아가 정죄 함을 받는 것이 아님을 밝혀 줄 때, 우리는 믿음에 다시 굳건히 서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담대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을 정죄에서 영원히 해방시킨 일에 대하여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말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법이란 단어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과 대조적인 견지에서 이것을 성령의 법이란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롬7:23). 바울이 7:23절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법이란 인간의 지체 속에서 율법을 거역하고 우리로 죄 가운데로 사로 잡아가는 죄의 권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8:2절에 나와 있는 죄와 사망의 법이란 사망을 주는 죄의 법이란 뜻으로 곧 율법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해서 풀이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 법은 율법에 우선하고 율법을 초월하고 율법의 속박을 받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런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8) 하나님이 하신 율법의 일  

  (로마서 8:3-4)


  서 론 : 오늘 주신 로마서 8:3,4절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율법의 일을 하나님께서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 주신 이유에 대하여 그것은 우리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하심에 있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롬7:4절에 있는 말씀과 동일한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성경구절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죄에서 자유를 주시고 구원함을 주신 것은 이제 다시는 지난날에 얽매었던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하심에 있다고 하시는 뜻입니다.

  1.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3절 초두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이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를 우리가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하고 신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의를 주어야 할 율법이 우리의 연약함으로 오히려 우리를 정죄하는 구실을 하게된 것입니다(롬3:20, 갈2:16).

  (2) 율법이 그 선하고 신령한 뜻을 우리에게 이룰 수 없는 것은 율법에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함”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의롭고 선하지만 우리의 육체가 연약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체가 율법의 요구를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법이지만 우리의 육체가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말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우리가 이룰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은 하시나니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일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죄를 인하여 란 말은 우리의 육신의 연약한 원인을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죄로 인하여 율법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로 인하여 할 수 없는 것을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2)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같은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문제인데 하나님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죄인으로 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우리 죄인들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뜻입니다(요1:14, 빌2:6-8).

  (3)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양으로 보내셔야 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연약하여 이룰 수 없는 율법을 우리를 대신하여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율법의 일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4)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셔야 할 율법의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한가지는 아직까지 우리들이 범한 죄에 대한 충분한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그 일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는 그는 우리가 이룰 수 없었던 율법의 의를 온전히 이루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으로 연합시킴으로 그가 하신 일을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에게 죄를 정하사 이 일을 하셨습니다. 죄를 정하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죄를 그에게 넘기시어 십자가에서 죄 값을 받게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신 것은 “육신을 쫓지 않고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간혹 어떤 때에는 육신의 미혹을 받아 곁길로 빠질 때도 있지만 이런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참으로 놀라우신 일을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일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이제 율법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일은 율법보다 더 온전하시며 더 거룩하시며 더 의로우시며 더 신령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한 의와 생명은 온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일을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일은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59) 육신을 쫓는 자와 영을 쫓는 자  

  (로마서 8:5-8)


  서 론 : 우리는 지난 시간 우리 인간이 육신의 연약으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이룰 수 없었던 그 일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대신 이루어 주신 일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그의 육신에 정죄하사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시고 그가 온전히 이루신 율법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의를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의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해방이 되었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 육신을 쫓는 자

  우리는 5절에서 육신을 쫓는 자와 영을 쫓는 자란 말을 듣고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 말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중에 육신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영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표현한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육신을 쫓는 자란 육신을 따라 난 사람들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1)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육신적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의 일을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쫓는 육적 사람은 육적인 일이 아닌 것에 대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신령한 일은 영적으로라야 깨닫게 되며 이 일은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2:10-12).

  (2) 그러므로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만을 생각합니다. 자기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도, 자기 가족의 일에 있어서도, 학문적인 일이나 사업적인 일이나 국가적인 일이나 그 모든 매사에 그들은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중심에는 전혀 하나님께 대한 영적 감각이나 책임감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생활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각이라 하면 탐심이라든가 거짓말이라든가 간음이나 도적질 등 파렴치한 범죄, 반 율법적인 범죄 등으로 규정하기 쉬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상하고 품격 있는 인격자중에도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육신에 속한 사람, 육신을 쫓는 사람,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2. 영을 쫓는 자

  다음에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육신을 쫓는 경우와는 전혀 상반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쫓는 자와 영을 쫓는 자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보다 더 현격합니다. 육신을 쫓는 인간과 영을 쫓는 이 두 인간은 완전히 다른 인간입니다. 영을 쫓는 자란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에는 그들 중에 하나님의 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이후로는 그 영이 그의 인생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자기 생애를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의 움직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움직임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이처럼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일이란 곧 성령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의 생활 중에서 자신의 영적인 생명을 해롭게 하는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운 그 모든 것들을 알기를 사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깨닫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이 같은 영의 생각이 전혀 없다면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결 론 : 바울은 결론적으로 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 생각이 노벨상을 받을 만큼 인류에 공헌할만한 것이요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든 사람의 흠모를 받을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영으로 생각하는 모든 생각과 그의 열매는 생명의 결실을 가져오며 언제나 그 마음에 평안을 가져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생명의 결실과 참 평안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평안을 누리시는 생애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60) 내주 하시는 성령  

  (로마서 8:9-11)


  서 론 : 우리는 육신을 쫓는 사람과 영을 쫓는 사람의 차이에 있어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을 양분해서 어떤 사람은 아직 신앙이 어려서 육신을 쫓는 생활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장성하여 영을 쫓는 생활을 한다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 영을 쫓는 사람들이며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육신을 쫓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 와서 바울은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해 줌으로 그리스도인과 성령의 임재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

  바울은 9절 초두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경우에건 육신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1)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속해 있는 하나의 영역을 의미해주는 말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전에는 육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 왔고 그 육신은 언제나 죄의 지배아래 있었으며 율법의 정죄를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런 옛사람의 지배를 받는 영역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는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이 같은 성령의 지배나 인도하심이 없다면 그는 성령이 없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영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있다는 밀입니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이 함께 거하십니다. 바울은 고전6:19에서 우리의 몸에 대하여 이르기를 “너희 몸은 너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함께 계신다는 말은 잠시적인 정유가 아니라 영원한 거주를 의미합니다.

  2.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우리는 10절에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몸이라고 할 때 이 몸이란 보이는 육체적 몸과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양면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우리에게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면은 이 영혼이 사람의 목숨이나 이 세상의 생애에 필요한 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 함으로 그 영혼이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온 모든 일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범죄 함으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회복할 수 없는 자리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전적 타락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영혼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 영혼의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인간의 구원은 엄격히 말해서 두 가지 면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영혼의 구원으로 이 구원은 믿는 즉시 얻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내 죽은 영 안에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으면 누구나 영생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의 죽었던 생명을 살려 주시되 영원한 생명의 씨로 살려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세상 끝날까지의 보호와 위로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그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지만 (후패하여 장차 죽을 것을 의미함) 우리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온전한 구원이십니다. 온전한 구원에는 몸의 구속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 몸의 구속이 곧 부활입니다.

  결 론 : 우리의 이 몸은 아직은(부활 때까지) 죽어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죄는 이제 내 영혼은 건드리지 못하고 이 몸 안에서 나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죄가 내 몸 안에서 나를 사로잡아 왕 노릇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죄의 시도를 물리치고 싸워 이겨야합니다. 우리 안에는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이 성령을 쫓아 행하는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61) 그리스도인의 성화  

  (로마서 8:12-13)


  서 론 : 오늘 주신 로마서 8:12,13절 말씀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생활에 직접 부닥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인 것입니까? 이 같은 질문을 목회자들은 교인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세 가지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육신에 지는 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리고 세 번째 해답은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1. 빚진 자인 우리

  바울은 13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빚이란 죄의 빚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날 죄의 종으로 죄의 빚진 자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종들은 언제나 그 주인에게 빚진 자의 입장에서 종신토록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이전에는 바로 그런 생활을 해 왔었습니다. 이 빚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다 갚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무서운 이 빚을 예수님이 갚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죄에 대한 채무는 다 갚음이 되었습니다.

  (2) 그러므로 이 빚은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빚은 갚았지만 새로운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빚은 하나님의 은혜의 빚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피로 값 주고 당신의 소유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빚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롬6:22)

  2 육신에 지는 생활과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이기는 생활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께 빚진 우리는 육신에 빚진 자처럼 육신에 져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에 진다는 말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으로 곧 죄를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1) 죄는 아직 우리들의 죽을 몸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에서 해방되었고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들 몸 안에는 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무장 해제된 상태로 있으며 아무런 권능도 권세도 못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의 주인의 자리에서 떨어졌을 뿐 아니라 우리를 지배할 권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아직 영화로운 몸으로 구속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은 우리 몸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부활의 날까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무장해제 당한 채 바로 이 죽을 몸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우리의 영적 생명에는 손도 못 대지만 우리의 죽을 몸을 유혹하여 죄를 유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는 바로 이 육체에 자리잡고 우리의 몸을 죄로 유혹하는 남은 죄의 세력과 싸우는데 있습니다. 이 싸움이 그리스도인의 성화과정이며 그리스도인들의 당면한 믿음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인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그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역사하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면 안돼는 것입니다. 육신에 진다는 말은 육신의 소욕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3) 그런데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죄 값으로 말미암은 죽음으로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육신대로 산다는 말은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면 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육신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언제까지나 육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으로 중생치 못한 사람입니다. 육신대로 계속 살아간다는 말은 그에게 성령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실질적인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언제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중생치 못했을 때와 같은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죄와의 싸움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지 않고 순종하고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 말씀만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유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7:4). 이 열매란 그리스도인의 성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62) 양자의 영

  (로마서 8:14-15)


  서 론 : 성화와 영화는 다릅니다. 성화는 영화의 한 과정일 뿐 영화가 아닙니다. 성화는 그 과정이 쉽거나 단순치가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시야는 마땅히 우리의 영화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날을 소망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성화의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화나 영화나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는 이는 오직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 주셨고 성령이 내 안에서 주님의 새 계명을 이루어 주심으로 성화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오늘 주신 15절에서는 이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 말씀하였고 우리는 이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이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령께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진리란 무엇이냐? 이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17:17절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기록된 성경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성경만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입니다(딤후3:16,17). 성령은 언제나 우리들을 오직 성경 안에서만 가르치십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2)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이심에 대하여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 하나님의 우편에까지 높이십니다. 성령의 증거는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요1:1).

  (3)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만약 그것이 우연히 혹은 자동적으로 생겨났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알기 이전에는 왜 그런 일이 불가능했던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인 것입니다.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생활은 죄를 따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확실히 다릅니다.

  (1)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는 새로운 생애를 발견하고 그 길을 가기를 원하고 그 길을 가는 일을 기뻐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기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이 좀 미약해도 이런 생명의 싹이 분명히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며 우리의 신앙이 좀더 장성하면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기를 사모합니다. 이전에는 성경을 전혀 가까이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귀하고 그 말씀을 배우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3)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 때 마음의 큰 고통을 받게되고 근심에 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7:10).

  3. 양자의 영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15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고 있는 아바 아버지란 말의 아바란 말은 아람어로 아버지란 뜻으로 ‘아버지 아버지’란 말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이중적인 중복표현으로 아버지를 정답게 부르는 그 당시의 하나의 표현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같은 표현을 쓰셨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양자의 영이란 곧 성령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사역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 하시는 사역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부쳐지고 있습니다. 혹은 보혜사, 진리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이곳에서는 양자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자란 법적으로 아들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2) 이 양자의 영이 우리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외쳐 탤 수 있는 것은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 같은 호칭으로 부르짖을 수 없습니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는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된 일에 대해 이 시간 감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3) 후사의 영광과 고난

  (로마서 8:16-18)


  서 론 :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서술이며 내주 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사역에 대하여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15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면 그는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자녀라면 후사의 자격자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후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후사란 말은 대를 잇는 자란 뜻인데 원문에는 ‘클레로노모스’로 나오며 이 말은 상속자란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재산상속권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후사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뿐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사들이나 다른 하늘의 영적인 피조물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후사들을 위한 봉사자에 불과합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1:14).

  (2) 천국의 모든 생활과 모든 구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계21:3).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새 예루살렘은 성곽의 문이 열둘이요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양의 12사도의 이름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이 그 성의 영원한 거주자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3) 이처럼 천국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 예비하시고 약속하심으로 이 같은 일이 곧 하나님의 후사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을 자의 자격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했습니다(갈3:29).

  (2) 하나님은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하나님의 후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후  사의 자격을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1) 왜냐하면 하나님의 후사는 한 분, 예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2). 이 아들이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위한 많은 아들을 아버지께로 이끄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히2:10).

  (2)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일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장사까지 지냈습니다(롬6:4).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되었습니다(롬6:5). 이 같은 사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연합이란 말은 몸이 하나가 된 상태로 영원한 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받아야 할 고난

  하나님의 후사는 정말로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소유한 하나님의 후사들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본향이 아니라 나그네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나그네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없다고 하는 말은 비 성경적입니다. 성경에서는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겠다는 말씀은 있으나 고난을 유월 해 주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빌1:29).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쫓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딤후1:8).

  결 론 : 하나님은 우리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양육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으로 온전케 하시고 징계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64)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영광

  (로마서 8:18-23)


  서 론 :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는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영광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영광스러운 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 것입니다. 함께 한 후사란 말은 우리들이 그 일을 위하여 무엇을 함께 했다는 뜻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된 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8절부터 23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탄식이 나오면서 그러나 이 같은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

  18절에서 이르시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현재의 고난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세계는 고난이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곳에는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고 썩음이나 쇠함이나 죽음이나 탄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고난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오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2)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지내야 하는 세계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3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중에는 탄식이 없는 생활로 한 생애를 살아갈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장차 나타날 무한한 영광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이 세상의 모든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된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안식이 계속되는 세상입니다(계21:3,4).

  우리 그리스도들에게는 이 같은 영광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일이 곧 하나님의 후사인데 이 영광에 대한 소망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탄식이나 고난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이 있는 사람마다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현재와 장차의 세계는 밀접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의 세계가 이 세상만으로 끝난다면 우리의 생애는 가장 비참한 생애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5:19).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에게 예비 된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를 물려받는 일이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일입니다.

  2. 피조물들의 탄식과 기다림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탄식에 대하여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치고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함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이들로 이처럼 탄식하며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영광을 누리는 그런 시기가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회복은 곧 만물의 회복이 따를 것이기 때문에 그날에는 모든 피조물들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도 그들과 함께 탄식하는 존재로써 다른 피조물들의 탄식함도 능히 깨닫게 된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양자 될 것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그 속에 포함시켜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15절에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양자로서의 완전한 신분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후사로서의 지위에 오르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양자 된다는 말은 곧 몸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몸의 구속이란 이 땅에서 지금 탄식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육신적인 몸의 완전한 구원으로 곧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영광의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영광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탄식이나 고난 중에도 인내로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현재의 고난은 그 고난이 어떤 것이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65)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

  (로마서 8:24-25)


  서 론 : 바울은 아직까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무한한 영광에 대한 일을 논증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영광, 장차 나타날 그 영광에 대한 아름다움,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그 같은 영광의 날이 오기를 탄식하며 기다림은 물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의 몸의 구속의 날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바로 이 날에 이루어지며 그 약속이 성취되는 그날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안다”고 했습니다(갈2:16).

  (1) 우리가 받은 구원은 소망 안에서 받은 것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영생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영생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나는데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의미해 주는 것으로 이것은 장래의 일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의미해 주는 것으로, 이 생명 역시 우리의 몸을 떠나야 그 영화를 누리는 시간적 제약아래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생명의 향유 역시 미래에 속한 것으로 이것 또한 우리의 소망 안에 있지만 우리가 받은 영적인 구원은 확실합니다.

  (2)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은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해 주는 바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증거로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나타날 소망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위에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히12:2).

  2. 구원의 삼중 성

  우리의 구원이 이처럼 미래에 속한 소망 적이긴 하지만 이 구원에는 과거, 현재, 미래에 구원 등 삼중 적으로 나뉠 수 있는 것입니다.

  (1) 우리의 구원은 분명히 과거에 속해 있습니다. 과거에 속해 있다는 말은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요일5:13). 이 같은 구원에 관한 표현은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과거에 속한 일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예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처럼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변함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으며 변질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요6:38,39).

  (2) 다음에 우리의 구원은 현재에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 2:12).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미 지난날에 확실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소망의 날까지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 언제나 우리의 현재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했습니다(24절). 물론 소망이란 장래에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소망으로 기다림으로 얻은 구원이란 어떤 구원인가? 23절에서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이란 우리의 구원의 완성으로 몸의 구속 곧 부활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세상에서 고난도 받습니다. 불같은 시련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이 같은 고난으로 말미암은 탄식은 그 탄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믿는 우리는 이 모든 시련과 환난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66) 성령의 탄식과 간구

  (로마서 8:26-27)


  서 론 :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영이십니다.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로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라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6-18). 예수님은 이곳에서 성령과 보혜사와 자신과를 연결시켜 말씀해 주셨으며 그가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우리로 고와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성령의 탄식과 간구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있지만 연약에 싸여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 우리 몸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1)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적인 연약 뿐 아니라 영적인 연약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연약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영적인 연약에 싸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2) 이 같은 우리의 연약함에 성령이 탄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탄식은 우리의 탄식과 다릅니다. 우리의 탄식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괴로움에서 나온 것이지만 성령의 탄식은 우리의 이 같은 괴로움에 동정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의 탄식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며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죄악된 행실을 안타까이 여기시며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의 부족과 마땅히 간구할 바를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탄식하십니다. 우리를 위한 성령의 사역은 바로 이 탄식이 그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볼 때 우리의 기도에 성령의 어떤 도우심을 주신다는 뜻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친히 간구 해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친히’란 말은 ‘아우토 토프뉴마’로 성령자신이란 의미로 성령이 나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 죄악 중에 방황할 때에도 이 성령의 탄식 어린 간구로 우리의 마음에 회개하고자 하는 감동을 받아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에도 우리는 전혀 그런 사고의 발생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의 탄식 어린 기도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위험한 일들이 수다히 많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는 성령

  우리는 27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 하시는 성령의 간구를 바라보게 됩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와 성령은 한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을 아시고 하나님은 또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2)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간구 하심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 하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성령의 생각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간구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령의 사역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지정소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롬8:34). 성령께서는 우리들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 해 주시는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바른 기도생활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따라 그의 뜻을 잘 살펴서 기도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인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 같은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의 연약함을 인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간구 하시는 그 기도를 내가 영감으로 들으면서 성령의 그 탄식을 내가 안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결 론 : 우리는 성령의 이처럼 놀라운 사역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엡4:30).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처럼 성령의 탄식 어린 기도를 마음 아프게 여기면서 성령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67)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로마서 8:28)



  서 론 :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은 성도들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짤막한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예정과 성도들의 견인과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데 이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생애를 지배받으며 이 모든 결과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극히 선한 결실을 맺게 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또 이루어질 것인데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힘이 바로 성령의 사역임을 말씀해 줍니다.

  1.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합력히여 선을 이루신다고 약속 하셨기 때문입니다.

  (1) 여기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우리’란 대상은 어느 정도 믿음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배를 받아 온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우리가 알거니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말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애를 통해서 한결같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2) 다음에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범주에 들어갈 사람은‘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란 과거에 속한 것이거나 현재에 속한 것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인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어떤 형편에 있었던지, 지금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던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이 문제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남게 되느냐? 이에 대하여 바울은 증거하기를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들어가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그의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을 백성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미 창세 전에 구별해 놓으셨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 예정교리는 불신자들이나 예정에 없는 사람들을 매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감사를 위해 주신 진리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를 주시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효과 있는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계만방에 나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듣는 자 중에 오직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들만이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만을 그의 자녀들로 삼으셨습니다.

  2.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

  이처럼 예정을 입은 택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그들의 생애에 오는 그 어떤 사건일지라도 그 일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일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사건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 그의 백성의 반열에 들어오기까지의 그의 생애를 주장하신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아 아닐 수 없습니다.

  (2) 모든 일이 합력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징계까지도 포함된다는 뜻입니다.󰡒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히12: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징계의 결과가 언제나 선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3) 모든 일이 합력 한다는 말은 우리의 잘못된 범죄까지도 포함됩니다. 물론 모든 죄는 악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죄는 자기 생애에 말할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하게 되고 불행과 파탄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는 그저 죄로 끝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로 인하여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결과적으로 회개를 이루어 그들의 생애에 무한한 축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결  론 :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신 ‘선’이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참으로 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복으로 복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엡1:3).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기업을 차지하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는데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68) 효과 있는 부르심

  (로마서 8:29-30)


  서 론 : 우리는 28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이 이루어지는 자”는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결과적인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결과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9절과 30절에 와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미리 아신 자로 미리 정하셨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정하셨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미리 아신 자들로 이루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전혀 모르고 있으시다가 그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그때 비로소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여기서 아신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장래에 예수를 믿을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을 예정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가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들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예정은 이처럼 미리 아신 자들로 정하셨습니다. 이 아심과 정하심은 거이 동시적일 수 도 있습니다. 정하셨다는 말은 예정의 확정을 말합니다. 이 같은 예정은 그 시기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엡1:4,5).

  (3)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 세우는 알미니안 주의에 조심해야 합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화란 신학자인 ‘알미니우스’(1560-1609)에 의해 주장된 교리인데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예견된 믿음에 의해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들의 자유의지로 믿을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이 같은 일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4) 우리가 다른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보편 구원론이라고 하는 ‘만인 구원 설’입니다. 이 설은 하나님의 사랑이란 미명아래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이 같은 구원 설을 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오리겐’(254년에 사망)인데 그는 영원한 형벌의 개념을 거부하고 악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마귀까지 얼마간의 지옥의 고통을 받은 후에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2.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 같은 예정의 뜻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아들의 형상이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는 그 참 아들이 한 분이시지만 그 아들로 많은 아들을 삼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우리로 당신의 아들로 삼기 위해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입니다.

  (2) 아들의 형상이란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로 삼으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엡1:3).

  3. 효과 있는 부르심

  30절에 와서 바울은 하나님의 효과 있는 부르심에 대하여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I) 하나님은 이처럼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을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목자의 음성으로 들려주십니다. 이 음성은 주의 복음으로 온 세계에 펼쳐집니다. 이 음성을 듣고 그의 양들이 목자를 따르게 됩니다.

  (3) 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야말로 효과 있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에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포함됩니다. 효과 있는 부르심에는 한 명의 누락자나 탈락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6:37).

  결 론 : 이 같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나온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영원히 버려진바 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바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그의 자녀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영화로운 신분이며, 그 몸은 또한 장차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사는 약속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69) 택함 받은 자의 특권

  (로마서 8:31-34)


  서 론 : 사도 바울은 31절로부터 마지막 39절에 이르기까지 로마서 8장의 마무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여러 가지 특권적인 위치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하여 논증했습니다.“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소망” “성도를 위한 성령의 간구” 그리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 “예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등을 서술했습니다. 바울은 31절에서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이 모든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우리는 더 이상 할말을 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겉으로 보기엔 대적자가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육신의 생각이 우리의 대적 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 받으려고 하는 생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정욕과 탐심을 불일듯 일으키는 육신의 생각이 우리의 영적 생활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육신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요 영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승리를 안겨주십니다(롬8:9).

  (2) 죄가 우리의 대적 자로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 죄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 죄는 우리를 사망가운데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롬6:14). 죄는 다만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죄는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서 점점 쇠패하여지며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율법이라고 하는 존재가 우리를 간섭하려고 우리를 넘나보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율법적인 의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범죄 했을 때 우리를 여지없이 정죄합니다. 이 대적자의 모습은 엄위하고 두렵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의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이 율법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전히 판정패했습니다. 그리스도의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4) 우리의 대적 자로써 우리에게 엄위한 모습으로 닥아오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자가 바로 사단입니다. 사단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로써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우리는 이미 그같은 권세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이 우리 안에 있고 성령의 권능이 우리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에 사단의 모든 권세는 그 하나도 우리에게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다음에 두 번째로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아들은 바로 아버지와 한 본체를 이루어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요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을 우리를 위해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아버지 시라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그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 곧 영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하나님의 후사로 약속하신 하늘나라의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육신 적인 생활에 관한 일까지라도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시고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6:32,33).

  3. 누가 택하신 지를 송사 하리요

  33절에 있는 송사와 정죄는 같은 맥이요 같은 뜻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아무라도 이 세상에서는 그리고 하늘 위에 있는 존재나 하늘 아래 있는 존재나 그 어떤 존재라도 감히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송사 하거나 정죄 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송사 하거나 정죄하지 못할 이유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와 특권은 전부 그 근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간구는 그의 대제사장 직분을 의미해 주고 있기 때문에 큰 의의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가 지금도 하늘의 지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면 송사 하거나 정죄 할 자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이 귀한 것들을 우라는 어디 가서 무엇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셨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감격을 마음에 뜨겁게 간직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70) 끊을 수 없는 사랑

  (로마서 8:35-39)

  
  서 론 : 우리는 오늘 본문 로마서 8:35-39절에서 바울의 놀랍고 위대한 논증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논증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뜨거운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단정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구원교리에 있어서의 결론입니다.

  1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성경전체의 결론입니다.
  (1)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누가 끊겠느냐? 했습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희생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4:10).

  (2) 이 사랑은 이미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씀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창세 전부터 가지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무슨 악이나 선을 행하기 이전에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나를 그의 백성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입니다.

  2. 무엇이 끊겠느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후 모든 인간적인 사랑을 끊을만한 악 조건들을 나열해 놓았습니다.

  (1) 바울은 첫째로 “환난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람이 환난을 만날 때 과연 그 사람의 참 인품을 알만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기 스승이 환난을 만났을 때 모두 도망쳤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환난을 만났을 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고 하셨습니다(마13:21). 그러나 이 환난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2) “곤고냐”고 물었습니다. 곤고란 우리의 생애 중에 질병 또는 정신적 번민, 갈등, 어려움으로 말미암은 괴로움을 뜻합니다. 사람이 이 곤고한 밤을 만났을 때 앞이 캄캄합니다. 사람의 위로도 거절합니다. 그러나 이 곤고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3) “핍박이냐”고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핍박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1,12).

  (4) “기근이냐”고 물었습니다. 기근은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기근일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5) “적신이냐”고 물었습니다. 적신이란 벌거벗은 몸을 말합니다. 이 같은 표현은 모든 자신의 소유가 다 없어지고 단지 자신의 육신만 남아 있는 상태의 표현입니다. 지난날의 욥이 그러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또 여러 가지 재앙을 만나 비록 우리의 처지가 적신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6) “위험이냐 칼이냐”고 물었습니다. 위험이란 공포나 협박, 칼이란 순교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때마다 위험을 무릅썼다고 했습니다(고전15:30). 믿음의 선진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히11:35). 이런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존재로 몇 가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사망이란 인생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으로 이 권세를 가진 자는 사단입니다. 생명이란 우리가 소유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천사들이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입니다. 그들까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권세 있는 자나 피조물을 전부 예로 들었습니다. 그들이 결코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넘어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 주심으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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