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이메일 : bamjoongsori@bamjoongsori.org

 

  
로마서 7장 (48-56)
 밤중소리  01-29 | VIEW : 1,441


  (48) 율법의 기능

  (로마서 7:1-4)


  서 론 : 우리는 로마서 7장 해석에 있어 여러 가지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 당도하게 됩니다. 1-6절에는 율법과의 결혼관계, 7-12절에는 율법의 옹호, 13-25에는 율법으로 인한 탄식 어린 호소 등으로 이어 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을 기록한 목적은 율법의 기능과 그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데 있습니다. 바울이 7장에서 밝혀주려고 애쓴 일은 율법은 통한 칭의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그뿐 아니라 율법에 의한 성화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율법과 혼인관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설명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비유를 혼인관계에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1) “율법이 사람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이 율법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모든 일이 끝나버립니다.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는 권능이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들을 정죄하지는 못합니다. 죽음은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을 정죄치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롬6:2,4,6).

  (2) 바울은 이 원칙을 남편 있는 여인의 경우와 결부시킴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율법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며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은 자유로운 신분이 못됩니다. 남편은 그의 머리가 되어 있으며 그는 범사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할 입장에서 있기 때문입니다(엡5:23,24). 이것은 마치 모든 인간과 율법과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의 지배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리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남편의 지배아래 있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만 해당됩니다. 죽으면 남편의 법 아래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약 사람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면 그 사람은 그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이런 설명은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오해의 위험성을 분명히 밝혀 두려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죄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다시 율법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관계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려고 혼인관계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혼인관계

  바울은 4절에서 아직까지의 혼인관계의 비유에 대한 실체를 들어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첫 번째 것이 해소되어야 다음 일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과의 관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또 다른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음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면 율법과의 관계가 해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해소의 방법은 오직 죽음인 것입니다.

  (2) 우리가 율법과의 혼인관계가 해소된 것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함으로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신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율법의 정죄함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뿐이면 아무 것도 우리에게 올 것이 없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나셨습니다. 이 생명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생명이 아닙니다.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생명,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가 이처럼 살아나신 것은 우리에게 그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 같은 사역을 믿을 때 우리는 그 순간 율법과의 혼인 관계가 끊어지고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혼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율법이 아닌 새로운 남편과의 혼인관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왜 이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어주셨는가? 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혼인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당신의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남을 얻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이 열매를 원하시는 것입니다(요15:1,2 ; 눅13:6-9 ; 벧후1:8).






  (49) 구원의 목적

  (로마서 7:1-4)


  서 론 : 바울은 로마서 7장 초두에서 율법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폭군적인 남편과의 혼인관계로 비유하고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서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새로운 신랑을 남편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바울의 설명은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 함을 얻었으므로 다른 이에게 혼인을 해도 그 일은 결코 불법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이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은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바울의 변명

  바울은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에게 오해를 살만한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대적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바울의 해석을 ‘무 율법주의’ ‘반 율법주의’ ‘탈 율법주의’라고 매도했습니다.

  (1)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러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느냐는 반론이 제기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못박았습니다(롬3:20).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의 목적이 인간에게 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정죄에 있으며 이 정좌는 사람으로 죄를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 다른 또 하나의 악의적인 비방은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그리고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였으니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은 죄를 범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단호하게 그들의 주장을 부정합니다.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격하고 있습니다.

  (3) 바울의 이 같은 문제가 7장에 와서 혼인관계를 비유로 하여 강력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이유는 무 율법이나 폐 율법적인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은 율법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을 버렸다는 것은 양심을 버렸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율법이 없는 생활은 인간의 생활이 아니라 금수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1)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 합니다. 율법의 정죄는 죄 값을 요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되고 있습니다(롬6:23). 이 같은 사망의 선언은 율법의 정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율법의 정죄 함이 없는 것입니다(롬8:1).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이처럼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모든 죄인들을 지배합니다. 죄의 종들을 지배하는 역할을 율법이 합니다. 율법은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율법의 지배에서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명령과 그 지배아래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과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은 목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율법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아 죽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논증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롬8:3,4).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죄 가운데서 살아가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하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실인즉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을 위한 가장 위대한 열매란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받은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은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이 열매야말로 하나님을 위하여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갈5:22, 23). 이런 열매들은 율법아래에서의 열매보다 차원이 높은 율법을 온전히 이룰 새로운 계명의 열매인 것입니다.





  (50)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

  (로마서 7:5-6)


  서 론 :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육신에 있었을 때와 율법에서 벗어났을 때의 생활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있을 때’에란 그 시기는 우리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 곧 아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아니했을 때의 시기, 중생 이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때는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하는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얽매였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지난날 거듭나지 못했을 때처럼 의문의 묵은 것으로가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육신에 있었을 때의 생활

  우리가 지난날 육신에 있었을 때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우리 지체 중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역사 했던 하나의 놀라운 세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1) 육신에 있을 따란 죄의 정욕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을 때를 의미합니 다.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서 권능을 가지고 무섭게 역사하는 죄의 정욕을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이 우리들 마음속에 죄의 정욕을 심어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의 마음속에 죄라든가 정욕을 심어 주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범죄한 우리 인간의 마음속은 온통 불의와 탐욕과 정욕과 음란으로 들어 차 있음을 말합니다(롬1:28-31 ; 마15:19,20). 그런데 이것들이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발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나타나자 그 율법을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은 잠자는 우리 마음속의 죄를 깨웠습니다. 그 죄로 우리 가운데서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 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롬 5:20). 더 한다는 말은 율법으로 말이 암아 우리 안에 존재했던 죄가 밖으로 자꾸 드러나는 상태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의 세력은 율법의 권능보다 더 강합니다. 강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의 종으로 죄에게 팔린 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3:11).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롬3:20). 그리고 율법은 믿음의 의를 보여줍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롬3:21).

  (3) 이처럼 우리가 육체에 있었을 때에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했다고 했습니다. 사망을 위한 열매란 인간의 모든 열매를 말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롬1:21).

  2.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 거듭난 사람,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얽매였던 것이란 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얽매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얽매였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 죄로 인한 죽음이기 때문에 곧 우리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일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죄에 얽매임에서 풀려났으며 해방된 것입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정죄를 내립니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이제 그 죄를 정죄하는 율법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2)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은 새로운 생활입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난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율법의 영역 안에서의 생활이 아닙니다. 새로운 영역 안에서의 생활을 의미해 주는데 이 영역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생활입니다.

  (3) 의문의 묵은 것은 이제 쓸모 없어졌습니다. 의문의 묵은 것이란 글로 쓴 율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같은 율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시 그 법 아래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제 단순히 율법적인 의를 이루려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한 삶입니다. 이 같은 삶의 자세가 죄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서 벗어난 우리의 진실된 삶의 자세임을 알고 이 목적을 위하여 삶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51) 율법이 죄냐?  

  (로마서 7:7)


  서 론 : 바울은 로마서에 와서 같은 내용에 대한 반복법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로마서 강해에 좀 서먹한 것은 같은 내용의 반복 구절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 중복되는 반복적인 설교를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강조점에 가서는 바울처럼 반복적인 설교를 대담하게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드디어 이곳 에 와서 “율법이 죄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1. 율법이 죄냐?

  아직까지 바울은 율법을 매도하는 듯 하는 논법으로 율법을 바라보도록 했습니 다. 바울의 이 같은 교리적인 설명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로는 분명히 율법을 인간의 죄를 유발하고 조장하는 죄의 요소인 것으로 오해하기가 이루게 했는데 이곳에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자기자신을 향해서도 분명한 어조로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은 사람을 거룩하게 못합니다. 그리고 율법이 인간사회에 개입됨으로 우리들에게 온 것은 거룩이나 의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죄를 더 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결코 죄는 아닌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마음에 품고 있는 것,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을 향하여 그것은 죄라고 정죄하기 때문에 마치 율법이 죄를 만들어낸 것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율법 때문에 우리 속에 숨겨져 있던 죄가 죄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죄일 수가 없습니다.

  (2) 사람이 자신의 죄의 진상은 어떤 방법으로도 모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미  양심마저 병들어 있기 때문에 죄를 죄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지적을 통해서 우리의 행위가 죄인 사실을 알게 되었니다.

  2. 탐심과 죄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죄와 연결시켜 설명함에 있어서 특별히 ‘탐심’과 연결시키고 있는 일은 매우 주목할만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1) 탐심이란 말은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있는 강한 욕망을 말합니다. 이 같은 인간의 탐심이 죄라고 정죄한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인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탐심의 지배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한평생 탐심에 젖어서 그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 상상력, 풍부한 공상 등 이런 것 등이 어찌 죄가 될 것인가? 고 되묻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느 사회이든 실정법 상으로 마음의 상상이나 생각은 자유입니다. 그런 것을 책하고 벌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런 일이 무서운 죄인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도 육체로 짓는 다른 범죄와 똑같은 죄다”라고 정죄한 것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4) 이 탐심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유대인들은 이 열 번째 계명을 중요시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수록된 내용이 다른 계명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질하지 아니했으면 8계명을 범하지 않은 줄로 여기게 되었고 몸으로 간음하지 아니하면 간음죄와는 거리가 먼 줄로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 탐심에 관한 계명이야말로 전 계명의 중심이 되는 계명인 것입니다. 다른 계명을 다 지킨다고 할지라도 탐심에 관계된 이 계명을 범하면 그 역시 다른 모든 죄에 대한 정죄를 받게 된다고 하는 계명의 참 뜻을 알아야 했는데 유대인들은 율법은 지킨다고 하면서도 이 탐심만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밝혀주시고 계명의 참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8). 이것이 율법이 가르치는 참 뜻입니다.

  (5) 이 탐심은 죄의 뿌리요 근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 탐심으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그 무서운 죄를 보여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바로 이 탐심에서 파생되는 가지들입니다. 가지만을 아무리 쳐 대도 그 뿌리가 튼튼한 이상 인간의 죄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아무리 선한 인간이 되어 보려고 노력해도 마음속에서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이 탐심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으로는 홈이 없는 자라고 자랑하면서도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탐심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죄의 욕망 때문입니다.

  결 론 : 우리에게 반드시 구주가 필요한 이유가 인간들이 벗어버릴 길이 없고 씻을 길이 없는 탐심 때문입니다. 이 죄를 밝혀 보여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 보다 율법에서 이 탐심의 죄를 발견했었던들 그들은 그들에게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탐심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롬12:2).





  (52) 계명으로 드러난 죄의 권세  

  (로마서 7:8-9)


  서 론 : 죄는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미화시키고 자기를 정당화시키는 일에 간교하며 매우 익숙합니다. 죄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탐심 때문입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 인간의 본래의 죄악의 본성인 탐심과 손을 잡는데 숙달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탐심은 죄의 속삭임에 쉽게 미혹을 당하고 양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이 오게 되자 그 계명이 이 같은 무서운 죄의 정체와 권세를 들어냈습니다. 바울의 탄식 어린 호소인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한 말이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1. 계명으로 각양 탐심을 일으키는 죄

  바울은 말하기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죄는 하나의 세력입니다. 죄의 시초는 에덴에서 마귀로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왔습니다. 그후 이 죄는 인간의 육체 안에서 인간의 탐심을 휘어잡고 우리로 죄로 이끄는 한 큰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23절에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한 말에서 죄를 마음속에 실존하고 있는 죄의 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죄는 율법의 명령도 거역하는 세력입니다. 죄는 율법의 두려움을 잘 압니다. 자기를 정죄하는 권세가 율법에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율법에 굴복하여 순종치 아니합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할 때 죄는 해도 된다고 우리를 기만합니다. 죄는 율법까지라도 정면 도전하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3) 죄는 기회를 타서 역사 합니다. 죄는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그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단 그 기회가 주어지면 여지없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죄가 다윗을 공격하여 살인죄와 간음죄를 범하게 만들었을 때, 우리아의 아내가 벗은 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바라보는 그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죄는 자신이 역사할 기회를 포착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든 간교와 위장과 권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2.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바울은 “이는 법이 없으면 죽은 것임이니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죽었다’는 말은 죄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치 죽은 것 같다고 한 말입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일은 실상인즉 그 죄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1)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죄를 보여 주었습니다. 양심이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건 안 주건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정좌하시기 때문에 율법이 이 세상에 없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했다”고 하셨습니다(창6:5).

  (2) 율법이 들어 온 후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죄인가를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우리 안에 숨겨 있는 죄의 정체를 여지없이 들어내 놓았습니다. 계명의 사명은 죄를 이길 권능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들어내고 그 죄를 정죄하는 사명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그 계명을 따르고자 하지만 육신이 약하여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양심까지 지배하고 있는 죄의 세력이 우리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세력 밑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갈2:16).

  3.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란 계명만 알고 있었지 그 계명이 주신 하나님의 참뜻을 모르고 있었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서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외형적으로 지키는 생활을 해 오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의 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참 뜻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율법의 창시자이시기 때문),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을 지키는 생활은 율법의 참뜻을 망각한 외식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 바울은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자기는 죽었다고 했습니다. 계명이 이르렀다고 한 말은 그 계명의 참 뜻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결 론 : 바울이 여기서 내가 살았다고 한 말은 율법의 참 의미를 몰랐을 때의  형편을 말합니다. 사실 바울 역시 개종하기 전에는 자신이 계명으로 죽어 있는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그 계명의 참 뜻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직능을 깨닫게 되었을 때 죽어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53) 생명과 계명  

  (로마서 7:10-13)


  서 론 : 바울은 10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도다”고 깊은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인간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사망에 이르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7장에 “나”라고 등장하는 인물은 율법에 대한 참뜻을 깨달은 이후에 그 율법과 생명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모순을 발견하면서 갈등과 번민을 나타냅니다.

  I. 도리어 사망을 주게 된 계명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과 계명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근원적으로는 한가지입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이 주신 전체적인 광의의 법을 말하는 것이요 계명이란 그것을 세분한 구체적인 조항으로 이것을 십계명으로 말합니다.

  (1)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란 그 계명이 인간에게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그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 이유는 계명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레18:4-5, 신6:25, 눅10:25-28).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거슬리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들에게 만약 너희가 율법을 지킨다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뜻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율법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요 율법자체도 하나님의 이 같은 약속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은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계명이 우리를 왜 사망에 이르게 하였는가? 이 에 대한 설명은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일은 세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계명이 오게 되자 인간의 죄가 그 계명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나라고 하는 인간은 육신이 연약하여 그 계명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계명은 결국 나로 더욱 죄인 되게 만들었습니다. 다음 셋째로 그 결과 계명은 나에게 생명은 고사하고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나를 죽이는 죄

   사단은 언제나 자신을 광명한 빛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죄가 우리를 속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I) 죄는 나로 하여금 행동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것은 괜찮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처럼 마음으로 범하는 죄에 대하여 제 10계명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죄가 어느 기회를 엿보아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죄의 모습은 인간에게 매력을 줍니다. 그 매력의 충동으로 우리들로 그 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3) 죄는 이것을 해도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속입니다. 하와에게 들려 준 뱀의 말이 그러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창3:4).

  (4) 죄는 그것을 범하게 한 다음에는 그 사람에게 절망감을 안겨 줍니다. ‘이제 너는 틀렸다’고 말합니다. ‘구원도 천국도 다 틀렸다’고 낙심케 합니다.

  (5) 죄는 우리에게 한번쯤이면 아무 상관이 없으니 한번하고 그만 두면 된다고 속입니다. 이때 인간은 죄의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는 이성을 상실해 버리고 그 함정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이와 같은 속성을 깨닫고 죄를 멀리하고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3. 죄와 사망을 선사한 것이 과연 율법인가?

  이런 면으로 볼 때 계명은 결코 악한 것도 불의한 것도 아닙니다. 율법이야말로 거룩합니다. 죄인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온 율법에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명이야말로 의롭습니다. 지키는 자에게 의를 주는 하나님의 의의 표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절대 선합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에게 선한 판결을 내려 줄 수가 없을 뿐입니다.

  (1)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이처럼 선한 것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해답은 바울 스스로가 간단히 내리고 있는데 ‘그럴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망이 오게 된 것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한 율법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이전에도 죄가 우리 인간에게 있었고 이 죄로 이미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죄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6:12).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지만 그 옛사람의 습성은 아직 우리의 죽을 몸(육신)에 남아 있습니다. 이 세력은 주인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를 속여서 지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 힘을 우리의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물리쳐야합니다.





  (54) 육신에 속한 자  

  (로마서 7:14-20)


  서 론 : 로마서 7장에서 우리를 당황케 하고 그 바른 해석에 골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7장에 등장시키고 있는 대상 인물이 누구이냐는 것입니다. 특히 14절부터 ‘나는’ 혹은 ‘내가’ 또는 ‘나의’ ‘내게’란 말이 31번이나 등장하는데 이처럼 나라고 지칭하는 주인공이 과연 누구이며 그 사람이 어떤 경우에 서서 나라고 하는 자신을 밝히고 있느냐는 문제인 것입니다. (1) 중생치 못한 사람의 경우를 다루고 있는 것인가? (2) 중생한 사람의 경우인가? (3) 중생은 행했지만 초기 신앙생활 단계에 있는 사람의 경우인가? (4) 바울 자신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가?

  1. 로마서 7장을 바로 해석하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에 대하여 진술했습니다. 그리고 6장에 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의로운 생활에 대하여 논증합니다. 그리고 7장에 와서 바울은 율법의 직능에 대하여 자세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은 율법이 무엇이냐? 하는 율법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는 이치를 선명하게 진술하기 위하여 율법 속에서 율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사람이지만 그런 가운데서 율법의 직능과 죄의 권세와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나는 어찌해야 구원을 얻을 것인가’ 심히 목말라 애타하는 한 사람을 “나”라고 하는 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7장에서 바울이 중생한 사람의 영적인 생활이나 중생치 못한 사람의 육신적인 생활을 진술하려는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역할을 밝히 보여 주려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린 몸

  바울은 14절에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자탄하고 있습니다. 죄 아래 팔렸다고 한 진술은 죄의 종이란 뜻입니다. “나”라고 한 이 사람은 율법에서 의가 아니라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자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율법은 곧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구실을 하게 될 것입니다.

  (1) 바울은 14절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의 영적 역할을 말해 줍니다. 율법은 지키기만 하면 생명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 한 율법사에게 대답하신 말씀에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녹10:28). 율법은 그것을 행하면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배격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기 등장하고 있는 이 “나”의 탄식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에 이를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2) 바울은 15절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자탄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원하는 것은 율법의 신령한 요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나”라고 등장시킨 사람은 율법의 선함을 진정으로 인정하지만 그래도 죄 아래 팔린 죄인의 몸으로는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7장에서 말하는 바울은 모두 “나”란 가상 인물을 대변해 주는 입장에서 논술하고 있는 것이지 “나”나 “내”가 결코 바울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바울은 16절에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라고 말하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는 그 율법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몸”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한다면 나를 정죄하는 그 율법이야말로 선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논법입니다.

  (4) 바울은 17절에서 놀라운 말을 들려주고 있는데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논증은 육신적으로 행하는 죄는, 내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그런 논리가 아닙니다. 죄 아래 팔려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율법의 선을 이룰 수 없고 율법이 미워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결과적으로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바울은 18절에서 “내” 육신에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라고 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끊임없이 율법이 선하고 자신은 그 율법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탄식하기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6) 바울은 20절에서 다시 결론적으로 17절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자신의 고백인 것이 아니라 율법의 선한 것을 깨달은 “나”라고 하는 사람이 아직도 율법아래서 그 율법을 이루기 위해 죄와 더불어 싸우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처지를 대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결론에 와서 다시 한번 7장을 기록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 7장은 중생치 못한 사람의 고민을 말하거나 중생한 사람이 죄와 더불어 싸우는 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아닙니다. 율법의 신성함과 선함을 증거 하려는데 있으며 그러나 그것이 그 본래의 뜻인 의나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더 큰 죄의 권세 때문임을 밝혀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55) 육신에 속한 자의 탄식  

  (로마서 7:21-25)


  서 론 : 바울은 7장의 결론에 이르게 되면서 마음의 법으로서의 율법과 지체 속의 법으로서의 죄와의 대결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언제나 지체 속에서 역사하는 죄의 법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7장의 결론에서 강조하려는 교리적 교훈은 사람이 중생하지 않고는 비록 율법의 선함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깨닫고 그 율법을 이루고자 힘쓴다고 해도 결코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으며 사망가운데서 헤어날 수 없으며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이 깨달은 한 법

  “나”는 율법에 도전해 오는 자기 안의 한 세력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나”는 이 같은 세력이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의 인격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바라보면서 깊은 탄식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말하고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1) 바울은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를 내세웠습니다. 바울이 “나”라고 내 세운 이 대상자는 율법이 거룩한 줄 아는 사람입니다(12절). 그리고 율법이 신령한 줄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14절) 율법의 선한 것도 안다고 했습니다(16절). 바울은 여기서 중생한 사람의 심리적인 갈등을 갈파하려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한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율법과 죄와의 관계를 갈파하고 있으며 이로서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케 하시고 죄의 종의 멍에를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밝히려고 하고 있습니다.

  (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다른 법이 그것과 싸우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나”에게 있는 이 같은 속 사람이 아닌 다른 자가 자기의 지체 속에서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고 있는 다른 법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법은 자신의 마음의 법과 싸워서 그 마음의 법을 내 생활에 이루지 못하게 하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나”를 사로잡아 죄의 법 아래로 이끌어 오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드디어 “나”는 이 같은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죄의 종의 상태를 바라보고 탄식하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폼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외친 것입니다.

  (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곤고란 말은 실의 속에서 전혀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어쩌다가 이따금 이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간단없이 이 같은 일만이 연속적으로 계속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생애를 걸쳐서 이런 질곡 속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이 계속 율법을 따르는 생활을 한다면 이 상태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2)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망 안에 갇혀 있는 절망적인 자기를 건져낼 자가 없다는 호소입니다. 이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구속 자인 그리스도를 발견치 못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이 같은 사람을 등장시켜 율법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려는데 이 글의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바울은 이 같은 사람의 처지에서 자신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에게 승리를 안겨다주신 그리스도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점은 바울의 이 외침은 문장의 연결 부문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다음에 나타나 있는 말이 다시 구원받을 길 없는 탄식 조로 되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죄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하면서도 죄의 종으로 어쩔 수 없는 패배적인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그의 탄식에, 자신이 경험한 율법과 좌에서의 승리를 외쳐댄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외쳐댄 것입니다.

  (5) 바울은 육신에 속하여 율법과 죄악의 사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결론적인 처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중생한 후의 그의 생활태도나 그의 생애를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의 노예아래에 있는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이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이제 매우 어렵고 심각한 로마서 7장의 막이 내려지고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바울의 로마서 7장에서의 이런 논증은 바울이 율법과 죄의 권능을 비교하면서 그것이 인간에게 역사하는 면을 보여 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도한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서만이 이 같은 결박에서 풀어지고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56)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8:1)


  서 론 : 우리는 이제 로마서 8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7:18절 이하에서 한사람의 절망적인 탄식을 들으면서 죄의 세력아래에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헤어 날 길이 없는 그 사람의 비참한 운명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운명인 사실을 깨닫게 되어 우리의 마음이 어두웠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8장에 들어서면서 이 같은 어둠이 일시에 개이고 밝은 생명의 약동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8장을 배우면서 깨닫게 되겠지만 8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를 위한 성령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장이 아닙니다. 율법의 정죄와 죄악의 권세에서 이기게 하신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 5, 6, 7장과의 연결관계

  우리는 8장 서두에 등장하고 있는 “그러므로”란 말은 7:25절에서 이어지는 문장의 연결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7장의 결론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이 전혀 없는 한 절망적인 사람의 탄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8장 서두에 나오는 “그러므로”란 말은 이 사람의 경우를 계속적으로 논술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I) 로마서 6장과 7장은 5장과 8장 사이에 들어 있는 삽입 장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한사람 아담으로부터 온 범죄와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에 대하여 놀랍게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복음의 증거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공격을 예상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유대인들의 오해를 해소하기 위하여 6장과 7장을 다루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7장에서 율법은 선하고 신령하고 의롭다고 유대인들의 율법 관을 시인해 주면서 그러나 인간의 지체 안에 있는 죄의 권세가 이 거룩하고 선한 율법의 요구를 묵살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기고 나로 하여금 더욱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기 때문에 선한 율법으로도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줄 수 없다는 탄식을 토로함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율법의 무력함을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장에서 8장으로 이어나가는데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에게 걸림이 되는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명쾌히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2) 그러기 때문에 “그러므로”란 말은 5장 끝에서부터 8:1절로 이어져야 할 문맥의 연속이 되는 것입니다. 5:12절에서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논증하고 6장과 7장에서 죄와 율법에 대한 오해 될 부분을 해소하고 다시 5장의 마지막 부분이 이어지면서 “그러므로”라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우리는 1절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는 선언을 듣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은 복음의 핵심과 특성을 나타낸 말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종교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는 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죄를 범했을 때는 마치 이 특권이 살아져서 그리스도 밖으로 버림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것은 영원한 옮김이 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건 그 사람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1)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이 너무나도 놀랍고 엄청난 선언이기 때문에 이 선언에 토를 부칩니다.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를 회개했을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주장이나 해석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정죄함을 받았다가 그 정죄에서 풀려나는 생활을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2) 이 정죄에서의 해방은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초월한 전 생애에 해당되는 선언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의 시발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 그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승리의 시점인 하나님 앞에 가서 설 때까지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범하는 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안에 들어 온 사람도 죄를 짓습니다(요일1:8).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죄는 이미 율법에 대한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죄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죄는 세상사람의 죄와 구별됩니다. 율법적인 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과 인격적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죄를 범했을 때 결코 정죄감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배반한 자신을 바라보고 슬퍼하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사랑과 인격적인 관계를 생각하고 율법아래 있는 사람보다 더욱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PREV :   로마서 8장 (57-70) 밤중소리 
 NEXT :   로마서 6장 (37-47)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