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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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37-47)
 밤중소리  01-29 | VIEW : 2,058



  (37)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의 신분

  (로마서 6:1-2)


  서 론 : 바울의 구원교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바울의 논증에 있어서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 반론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의 이 같은 논증은 인간으로 죄를 더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그러면 율법이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인간에게 의도 줄 수 없고 정죄 할 수 도 없는 것이라면 그런 율법이야 없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6장과 7장에서 이 반론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8장에 들어가 보다 심오한 구원의 교리를 펼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은혜에 거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바울의 구원론은 마치 죄는 은혜의 방편인 것처럼 들려지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말하니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언제나 죄 가운데서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I) 이렇게 주장하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이론을 세웁니다.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 시나니”라고 하신 말씀은 경건치 아니한 자(죄인)에게 의를 주셨으니 우리가 죄악의 생활을 계속한다한들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구원파라고 하는 이단교파의 주장이 이들과 같은 주장입니다.

  (2) 이들의 주장은 우리의 의는 우리의 어떤 의로운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것이므로 우리가 짓는 죄와는 상판이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3) 또 한가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아니하니 죄를 범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닌가? 라는 주장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제기되는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를 범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으니 죄를 범하는 일에 대하여 오히려 더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 알고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율법을 초월한 자들이니 그리스도인들과 율법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율법은 무용지물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이 같은 반론들에 대하여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우리들이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이신청의의 구원교리를 설교하다보면 바울이 예상했던 이 같은 반론이 반드시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런 무리들에게 우리는 단연󰡒그럴 수 없느니라󰡓고 못을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죄는 사망 안에서만이 왕 노릇 하는 존재지 은혜 안에서는 발 부칠 곳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은혜는 죄 안에서 역사 하지만 죄와 손을 잡거나 죄와 공동보조를 취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죄인이 은혜 안에 들어서면 이미 그의 죄는 은혜 안에서 죽어버리고 은혜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의 종인 것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죄에 대하여 우리는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격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뜻하거나 성화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죄로 죽었다는 것과 의로 인하여 살았다는 이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영적인 신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이나 모든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죽었다고 말할 때 이 사실은 영적인 신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육은 무익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신분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신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법적인 선언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은 그 무엇으로도 취소할 수 없고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신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죄와 의에 대한 공동 운명을 말함인데 그리스도가 내 죄를 속죄해 주셨기 때문에 그와의 연합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의롭다하심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음으로 그와의 연합은 의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입각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6:11).

  결 론: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제시한 반론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악의적인 비방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분명한 신분을 알아서 그 신분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해야 활 것입니다.





  (38) 그리스도와의 연합

  (로마서 6:3-4)


  서 론 :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세례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세례란 말의 의미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세례입니다(마28:19). 두 번째는 성령 세례가 있습니다(행1:5). 다음 세 번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세례인데 바울은 이 로마서 6장에서 바로 이 세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바울은 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합한다고 말한 표현은 그 뜻이 물세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는 표가 아닙니다. 세례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인 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온전한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구원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습니다. 연합이란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현재의 자신의 신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날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한가지 사실 때문에 아담의 모든 소유가 내 것이 되었던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소유하신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요 그리스도인들의 칭의의 근거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체험적이거나 주관적인 판단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의 신분을 보아도 우리가 언제 아담의 죄에 동참했으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아담의 정죄를 함께 받아야 하는가? 에 대한 해답을 체험적으로 객관적으로 찾아 낼 도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일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일이 없습니다. 그와 함께 부활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체험적으로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 때문에 그가 하신 모든 것과 모든 일이, 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이 세례는 칭의 후의 인 침이나 상징이나 회개의 표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와 그리스도와의 전 인격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이처럼 전 인격적인 연합이 이루어진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하는 이 한가지 사실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칭의에 있어서 만약 다른 그 무엇을 요구하거나 다른 조건을 바란다면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연합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어떤 침례교인들은 이 같은 바울의 표현을 그들이 교리적으로 주장하는 침례와 연관시킵니다. 침례 시 사람이 물 속에 잠기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장사지내신 그리하여 무덤에 들어가신 일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합니다만 물 속에 침례로 잠기는 일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한 연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그런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이곳에서 물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칭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강조 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죽음 역시 기정사실화 된 것으로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함께 죽어야 한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함께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이나 그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칭의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지 성화의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닙
니다.

  결 론 :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은 이처럼 죽으심과 장사 지내심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의 부활에도 연합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의 권능을 이기신 산 증거이며 죽음 전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한 종식의 선언이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고후5:17 ; 빌3:20 ; 엡2:6). 하나님께서 이처럼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성화의 과정이며 이 성화는 온전한 칭의의 토대 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39) 연합이 의미하는 뜻

  (로마서 6:5-7)


  서 론 : 바울은 6장에서 연합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연합은 우리로 그리스도안에 있게 만든 요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의와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왜 이곳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4절 마지막 절에서 이처럼 밝혀주고 있습니다. “…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의 연합의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이유는 이 진리 위에 우리의 믿음의 터를 세워야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과의 연합과 부활과의 연합

  바울은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한 ‘본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스’로 같게 만들어진 것이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참뜻을 타나내 줍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체험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건이며 지난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서 온 영적인 지식이지 실질적으로 우리가 체험한 사건은 아닙니다.

  (2) 그리스도와의 죽으심과의 연합은 죄에 대한 완전한 청산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모든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었음을 선포해 주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연합하여 죄에 죽은 우리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문제인 이상 영원히 해결되었고 청산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와의 부활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함께 살아났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살아 나셨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에 우리는 연합이 된 것입니다. 옛 생명이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나사로의 살아남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살아남은 옛 생명의 다시 살아남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은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은 부활이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죽음과 살아남은 옛사람이 죽었고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옛사람과는 완전히 두절된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아담 안의 나의 생명과 그리스도안의 나의 생명이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우리가 옮겨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

  바울은 6철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합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옛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란 그리스도안에 들어오기 이전 아담 안에 있었던 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옛사람은 우리의 죄악성, 도덕성, 타락성,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옛사람이란 옛날 내 안에 있었던 부패한 성품을 지적하는 표현인 것이 아니라 지난날 아담 안에서 살아 온 나라고 하는 전인격을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아담과 연합함으로 정죄 받은 인간, 지옥 갈 인간, 이런 내 인간의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나는 이제 옛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우리에게는 아직 옛사람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옛사람과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할 일은 우리의 옛사람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든 존재치 아니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이 옛사람인데 지금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에게 어떻게 옛사람이 나에게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까?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올 수 있다는 말인가?

  결 론 :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처리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해답은 6절 하반부에서 밝혀 줍니다.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곳에 나와 있는 죄의 몸이란 우리의 옛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 그리스도안에 거하게 되었지만 이 새 생명의 몸은 온전히 성화 된 몸이 아니라 아직도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몸,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몸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우리의 몸을 멸하여야 죄에게 속아 종노릇하는 일을 모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죽은 사람들이며 우리의 육체에는 비록 죄의 유혹을 받아 드리는 악한 요소들이 잠재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생명으로 연합된 사실을 깨달아 죄의 유혹을 받는 우리 몸의 욕구를 헛되게 하여 다시는 죄의 종노릇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강조점인 것입니다.





  (40) 죄에서 벗어난 우리

  (로마서 6:6-7)


  서 론 :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새로운 탄생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엄연한 사실로 실질적이고 현실적임을 거듭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우리의 새로운 존재를 강조하는 이유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새로운 지침을 주장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1.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의 두 가지 결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옛사람”이란 말과 “죄의 몸”이란 말에 대한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옛사람이란 아담 안에서 있었던 나의 전부를 말합니다. 죄의 전체적인 지배를 받았던 나,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나, 이 같은 나의 전 인격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죄의 몸이란 그런 우리의 옛사람과는 판이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몸은 죄의 지배에서는 벗어났고 율법의 정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죄악성에서조차 벗어난 몸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 몸에는 그 옛날 옛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습성, 죄악성 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죄가 유혹하여 범죄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에는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옛사람의 습성이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 죄의 몸을 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옛사람이 죽은 것은 바로 이 같은 죄의 영향에서까지 벗어나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죄를 범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우리의 옛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으므로 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쉽게 죄의 영향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죽게 하신 것은  다시는 옛사람처럼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란 뜻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리가 멸해야 할 죄의 몸

  죄의 몸이 멸한다는 말을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말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들 옛사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죽은 우리의 옛사람이 또다시 죽어야한다는 말은 이상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1) 나의 옛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옛사람을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죽일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죄의 몸이란 이런 우리의 옛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을 정복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의 여부를 시험해 보시려고 얼마간의 가나안 족속을 남겨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로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영원한 의를 주셨지만 우리들 몸 안에 죄의 영향력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2) 우리의 죄는 내 안이 아니요 내 지체 속에 역사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라고 하는 나의 전인격은 죄에서 벗어난 몸이요 의롭다 하심을 선언 받은 온전한 몸입니다. 죄는 내 안에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죽을 우리의 몸 안에서 곧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만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의 지체는 우리의 생명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옛 나의 습성이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의 신앙적인 태도

  위와 같은 사도 바울의 논리에 의하여 거듭난 우리들에게도 옛사람에게 있었던 죄의 본성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따라 그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때 자기는 이제 죄의 종이 되었다, 나는 이제 죄인이 되었으니 구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냐?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냐? 이 같은 상념에 사로잡혀 낙심하고 타락하고 교회를 등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바른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바른 신앙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드릴 필요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지 못하고 죄의 종으로 다시금 죄에게 드린바 되었으니 이일이야말로 얼마나 한심스럽고 탄식할만한 일입니까?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저 버리는 생활을 했음을 뼈저리게 통회하는 회개가 마땅히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의의 종으로 돌이키는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하는 바는 죄의 종노릇했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죄의 유혹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죄의 종노릇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는 경종이 되는 것입니다.





  (41) 주님의 부활의 참 의미

  (로마서 6:8-10)


  서 론 :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철저하게 복음의 진수를 밝혀 주고 있는데 그는 복음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살아나심입니다(고전15:3-4). 바울은 이제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일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진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바울은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한 그 진리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기 위하여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사건을 재차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에 확실히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 주는 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입니다. 아담 안에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 죄의 체제 아래서 그 종으로 지배를 받아 온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살 줄 을 믿는다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합하여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연합한 자가 된다고 하는 이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입니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하는 표현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의 부활을 뜻하는 미래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광범위한 해석에는 그것도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 바울이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과는 계속된 생명이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살아 온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 생명은 이제 그 어느 곳에도 존재치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우리의 생명은 전혀 새로운 생명입니다. 아담에게 물려받은 생명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생명입니다. 무덤 안에 장사지낸 바 된 그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으로 죽은 나와 새 사람으로 살아난 나와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는 전혀 별개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전의 죄 가운데서 살아온 그 옛사람과는 상관이 없고 그리스도안의 새 생명가운데서 새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

  우리는 이제 9절에 있는 말씀에 접하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연결된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 국한된 사건만을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사건을 철저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의 죽음과 부활사건이 그리스도교의 전체적인 교리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시는 사건이 있기 전에 죽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는 죽기 이전의 삶이 있으셨습니다. 주검이전의 그리스도의 삶은 죄의 지배아래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죄는 없으셨지만 스스로 죄와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전혀 우리를 위해서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14,15).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으로 이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이제 다시 죽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죽으실 수 없습니다. 그는 죽음의 사역을 이미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으로 모든 문제를 다 이루었습니다.

  (3)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닮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사망을 이긴 증거입니다. 새롭게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 다시는 사망의 권세가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율법을 이루신 일을 증거 해 줍니다. 그는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율법은 정죄에 있고 정죄는 곧 죽음인데 그리스도는 이 같은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죄와는 상관이 없는 새로운 생명, 의로우심으로 살아 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전혀 우리를 위하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의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4:25).

  결 론 : 바울은 왜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보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확실해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오는 진리가 분명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42) 승리적인 생활의 방법

  (로마서 6:10-11)


  서 론 : 바울은 11절에서 “너회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직까지 바울이 그토록 간절히 증거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결론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아직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자의 그 연합의 효과에 대하여 증거 했던 것입니다.

  1.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

  바울이 10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살으심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 같은 모든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1절에서 “이와 같이”라고 표현된 말에서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 “여길지어다”의 여기라는 말은 어떤 가정적인 말에 동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로기조마이’로 원래가 ‘로고스’에서 유래된 말로 세다, 계산하다의 뜻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계산된 말씀으로 그대로 믿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마쳐집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는다면 그 연합이 우리의 신분에 미친 사건 그 자체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것이요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을 대하여 하신 것 같이, 너희 자신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여기라는 말은 믿으라는 말로써 체험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체험이 수반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전부입니다. 믿음에 육신적인 체험이 따라야 한다면 이미 그것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3)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체험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 해답이 불가능해 집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하는데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체험은 바로 우리의 체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그 때 그 몸을 그대로 소유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체험적으로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나를 위한 죽으심이기 때문에 나의 죽음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줄로 여기고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죄를 끊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죄가 내 안에서 죽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나는 이제 아담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아 온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죄는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나에게 명령하거나 지배할 권능을 상실했으며 나는 완전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죄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다음에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끝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은 이전 옛사람의 연장이 아니십니다. 이전 죄 아래로 들어오셨던 육신의 옛사람은 죽으시고 장사되심으로 끝장이 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실 수 없는 것은 이미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나셨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어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었으며 죄의 종도 아니요 죄의 지배를 받아야 할 신분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은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야 하는 영역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신분을 의미하는 말이며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밝혀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살아가고 계시는 삶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롬6:2). 이 같은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삶의 방향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은 죄와 접촉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종으로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죄의 영향은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과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검이 나를 주장치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주검은 육신의 잠입니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같이 영원히 살아있으며 잠자는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43) 성결 생활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로마서 6:12-14)


  서 론 : 사도 바울은 11절까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신분에 관한 교리적인 논술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진리에 입각한 교리적인 지식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근본적인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는 언제나 지식에 머물러 있을 뿐 그것이 우리의 생활을 성결케 하거나 성화 시키지 못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지고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을 12절에서부터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죽을 몸에서 왕 노릇 하려는 죄

  바울은 11절에서 12절을 잇는 말씀의 연결에 있어서 “그러므로”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12절로부터는 자신이 논술한 교리적인 지식의 바탕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생활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 징검다리 격으로 “그러므로”란 말을 중간에 걸쳐놓은 것입니다.

  (1)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 죽을 몸에 죄로 다시는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너희 죽을 몸”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2) “죽을 몸”이란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죽을 몸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죽을 몸이란 우리의 육신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우리의 육신은 불가불 죽을 몸입니다. 우리의 참 생명은 지금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있습니다(엡2:6). 그리고 우리의 이 육신(몸)도 장차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그 영화로운 몸으로 연합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탄식함으로 그 날을 기다립니다(롬8:23). 그러나 그날까지는 우리의 육체는 후패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이 육신은 죽을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부활의 영광을 위한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몸”이란 이름이 부쳐진 것입니다.

  (3)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이 죽을 몸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옛사람과 구분되기는 하지만 죽을 몸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처럼 소망이 없는 몸이 아닙니다. 이 죽을 몸은 분명히 옛사람과 구분된 전혀 별개의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옛사람의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본능이 그대로 있는데 이 본능이 죄의 유혹을 받아 죄의 지배아래 놓여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의 죽을 몸만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의 생명이나 우리의 인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결된 생활을 이루기 위해 남아 있는 중요한 과제인 것입니다.

  2.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죄가 왕 노릇 한다는 말은 “죽을 몸”에 국한된 말입니다. 죄는 우리를 지배하거나 우리의 인격이나 생명을 지배하는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와 죄와의 주종 관계는 이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완전히 끊어져 없어졌습니다.

  (1)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죽을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의 몸에서 왕 노릇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죽을 몸이 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응당 자기를 지배해야할 의와 은혜의 생명의 역사를 스스로 거역하고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이미 관계가 영원히 끊어져 버린 죄를 다시 이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로 이 같은 죄로 우리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몸의 사욕을 순종치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했습니다 죄가 그리스도들을 유혹하는 무기는 몸의 사욕입니다. 몸의 사욕이란 인간의 선한 본능을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 육신의 뜻대로 쓰려는 욕심입니다. 죄는 그리스도인의 욕심을 그 유혹의 미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같은 죽을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모든 권세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이길 수 있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애를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치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죄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입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나는 이제 죄의 지배권밖에 있습니다. 죄는 이제는 나의 주인으로 나를 종처럼 부려먹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죄는 나의 죽을 몸 안에 있는 본능에 의한 각종 욕구를 사욕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나의 이 죽을 몸이 죽기까지 끊임없이 유혹하므로 나를 그의 종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죄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44)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

  (로마서 6:12-14)


  서 론 :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살았다는 사실을 여러 번 들어 왔습니다. 죄로 멸망 받을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우리는 또한 그를 살리신 하나님의 생명이 나를 살려, 나는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수차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을 몸”이 존재하고 있으며 죄의 세력은 이 죽을 몸 안에서 우리의 육신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사욕을 쫓아 유혹하는 이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할 사람들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성화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결된 생활이나 성화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식 위에 자신의 생활 지침을 세워 자신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성결한 생활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야 합니다.

  (1) 성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성화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의로움과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성화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의 몸으로 변화 받을 때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모든 것이 믿음으로 되니 죄를 이길 줄로 믿고 성결된 생활을 이룰 줄로 믿고 그 믿음 안에 있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에 서 있어도 우리의 사욕을 따라 유혹하는 죄의 권능은 우리의 죽을 몸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2) 성화는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생활입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하는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생활을 권면해 주는 말씀들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투쟁을 의미하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은 하나의 투쟁입니다. 이 투쟁이야말로 바울이 말한 “믿음의 선한 싸움” 입니다(딤전6:12, 딤후4:7).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기나긴 인생의 전 과정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전 생애의 투쟁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동기

  우리는 왜 성결된 생활을 하므로 성화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의 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생활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로 만든 악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죄 가운데 거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살겠느냐”고 반박했습니다(롬6:1,2).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죄 가운데서 더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버리고 오히려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생활은 순종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순종으로 아담에게 언약하셨습니다(창2:16,17).

  3.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실제적인 방법

  우리는 바울의 권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 나타내야 할 성결 생활의 방법을 찾아보게 됩니다.

  (1)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죄가 다시 우리 몸에서 왕 노릇해서는 안됩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죄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 와서 왕 노릇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고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들 스스로가 죄를 우리들 폼에 불러 드려 왕 노릇할 수 있도록 나의 죽을 몸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의 몸엔 인간이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본능적인 제반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선용하면 버릴 것이 없으며 선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몸의 사욕을 위해 쓰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몸의 사욕을 따라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병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불의를 위해 사용할 때는 불의의 병기가 되어 우리의 몸이 죄에게 드려지는 바가 되고, 의를 위해 사용될 때는 의의 병기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적인 위치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는 것,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어야 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45) 순종과 소유권

  (로마서 6:15-16)


  서 론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몸을 다시는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13). 그 이유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고 강조합니다(14). 법 아래 있는 신분과 은혜아래 있는 신분과는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있습니다.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속한 사람이요 은혜아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1. 그런즉 어찌 하리요

  바울이 14절에서 밝힌 말씀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어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날카로운 항변입니다.

  (1) 하나는 은혜아래 있고 죄가 주관치 못한다고 하니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다고 하니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하는 일은 그 아무 누구도 정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는 기존의 도덕적인 인간의 생활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라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2) 다른 하나는 율법적인 제약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생겨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사람이 한번 구원받았으면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니(종국적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니) 그 후에 그에게 일어 나는 모든 일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율법의 정죄나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없이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현재적인 신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자신의 확고한 신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인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이기고 물리철 수 있다고 하는 분명한 자기 신분을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현재적인 생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신분이란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지식과 믿음의 터 위에서 자신의 삶을 이룩할 때 그리스도안에서의 승리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2. 죄를 지으리요?

  바울은 이 같은 두 가지 면에서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란 말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여기서 먼저 죄를 지으리요 라고 한 바울의 말의 참 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어떤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말씀이 덜어 있습니다(요일3:8, 9).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는다는 말은, 죄를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지었을 때와 자신이 지은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오지 않고 그 자리에 안주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 같은 행위의 이유가 자신들이 은혜아래 있으니 괜찮다는 뜻이 함유되어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죄를 지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분명 아니지만 그 법을 버린 사람인 것이 아니라 법을 온전히 이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서 그 율법을 이루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저주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그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적인 생활을 버려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일은 율법을 버리려 함이 아니요 율법을 이루려 함임을 알아야 합니다(마5:17, 18). 이 같은 사실은 어느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마22:34-40). 예수님은 율법을 두 계명으로 나누셨는데 첫째 되는 계명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결 론 :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 안에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빌 1:6). 만약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면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같은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은혜아래 있는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죄의 종 아래 그대로 있는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46)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6:17-21)


  서 론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에 대하여 이 같은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모르고서는 구원에 이룰 수도 없고 의의 열매를 맺는 생활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의의 종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적인 교리의 설명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1. 죄의 종이었을 때의 지체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로마 교인들의 건강에 관한 언급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이 아직도 죄에 의하여 지배되고 잘못 인도를 받고 있는 육신의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육신은 얼마 전까지 죄를 행하기에 아주 숙달했던 몸입니다. 의를 행한 경험이 전혀 없으며 의를 행하기에 전혀 익숙지 못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진리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전에 우리의 지체는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렀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19절에서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너희 지체란 말은 한 사람의 지식, 재능, 성품뿐 아니라 그의 제반 활동력전부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이 지체를 가지고 불법과 부정에 드려 왔습니다. 드렸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이유는 그때 우리의 몸은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종의 입장에서 죄에게 드리는 생활을 해온 까닭입니다.

  우리의 지체는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될 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죄에게 팔린 몸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모든 것을 죄에게 드리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거룩해야 할 몸이 부정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고 헌신해야 할 우리의 몸이 향락의 도구가 되었으며, 의로운 성품이 죄악의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지체를 이처럼 죄의 종의 도구로 전적으로 드리는 생활을 하므로 불법에 이르렀었다고 사도 바울이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2) 바울은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란 말은 이전에서 새로운 상태로 돌아온 의의 종으로서의 우리의 신분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전과는 그 위치가 분명히 달라진 상태요, 이전의 죄의 종의 생활에서 의의 종의 생활로 방향 전환된 지금 우리의 새로운 위치를 말해 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우리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우리의 신분은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제란 말은 의의 종이 된 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개성의 근본적인 변화가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격의 근원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말도 아닙니다. 급한 성격의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느릿해져야 한다거나 다혈질적인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근본적으로 변화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른 것이냐? 드리는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죄에 도려졌던 것이 이제는 의에게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지체들이) 죄의 종이 되기 이전의 선한 본성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문장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해석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깨닫는 일에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아낌없이 쓰여져야 합니다. 우리의 말의 재능이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인격이 온전히 의의 병기로 바뀌어지는 일입니다.

  2.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고 명렁하고 있습니다.

  드리란 말은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결 생활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1) 자동적으로 드려진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우리들의 지체가 힘 드림이 없이 자동적으로 의의 종으로 드려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해도 애씀이 없이, 아무런 힘도 드림이 없이 의로운 생활을 하거나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의 입장에서 주인을 향하여 주인의 요구에 따르는 일을 말합니다. 죄의 종에 있었을 때에 죄에게 드렸던 것처럼 의의 종이 되었으니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던 주인의 요구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야 할 의무와 책임이 의의 종에게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이 의의 열매를 맺는 생활은 믿음으로 얻은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생활에서 이루어야 할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아직 연약하므로 의의 종으로 합당한 생활을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이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의를 행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종들  처럼 순종하고 드려져야 합니다.






  (47) 죄의 삯과 하나님의 은사

  (로마서 6:20-23)


  서 론 : 우리는 로마서 6장에서 많은 진리를 배웠습니다. 주로 죄의 종과 의의 종에 대한 교리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죄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러던 것이 의의 종의 신분으로 바뀐 사실에 대하여 자세하게 배웠습니다. 종이란 완전한 노예의 신분을 가리킵니다. 노예의 이동은 매매의 수단으로 됩니다. 하나님이 충분한 대가를 치르시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물인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전은 완전한 것입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소유권의 이전입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종에서 의를 종의 자리로 옮기게 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1. 죄의 종이 되었을 때의 열매

  바울은 우리로 다시 죄의 종이 되었을 때의 상황을 돌이켜 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1)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 죄의 종으로 있었을 그때에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다는 말은 노예가 아닌 상태를 의미해 줍니다. 의의 종이 되기 이전임으로 의에 대해서는 노예상태가 아니라 온전한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의의 종이 아닌 신분이었기 때문에 의에 순종해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었습니다. 의에 속박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죄가 그를 폭군처럼 지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2)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열매란 성결에 대한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죄의 종들이 맺는 육신의 열매에 대하여 이처럼 열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갈5:19-12).

  (3)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제란 말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라고 한 말은 죄의 종의 자리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의의 종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 죄의 종으로 있었던 그 때를 회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즐거움으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그같은 육체의 일을 행했지만 이제는 그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면서 지난날의 일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아직도 그런 일을 계속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죄의 종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 사람입니다.

  2. 하나님께 종이 되었을 때의 열매

  바울은 22절에서 다시 이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이 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1)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다시는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죄의 종의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다른 영역으로 지역적으로 옮겨졌을 뿐 아니라 우리의 지배자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노예는 팔려 가면 장소도 주인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들은 이 주인에게서 다른 주인에게로 팔려가며 팔려간 그 주인의 소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죄의 종에게서 하나님의 종으로 팔려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이 죽을 몸에서 이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힘써야 하며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입니다.

  (2) 우리는 이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의 열매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결 생활은 세상사람들의 도덕적인 기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열매는 성결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따른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이란 그리스도인들의 종국적인 목표점입니다. 우리는 이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영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생의 실제적인 실현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에 이루어집니다.

  결 론 : 바울은 본문의 말미에서 “죄의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값이란 말은 일한 임금의 배당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배급, 배당을 말합니다. 죄의 종으로 죄를 위해서 노예로 일한 사람은 응당 그 임금을 배당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배당의 규정은 율법이 정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이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임금은 값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은사 곧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 대가는 놀랍게도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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