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요한복음 21장 (106-108)
 밤중소리  01-28 | VIEW : 598



  (106)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예수님  

  (요한복음 21:1-14)


  서 론 : 주님이 부활하신 후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났으나 제자들은 늘 고아와 같은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고 말하고는 그물을 가지고 디베랴 바다로 향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여 옛날의 직업인 어부의 자리로 되 돌라갈 심산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 역시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그의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1.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물고기 잡으러가노라”고 한말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사명자가 그 사명을 상실하면 세상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사명을 상실하는 것인가? 게으른 종입니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라고 했습니다(잠 18:9).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으라”고 말씀했습니다(롬12:11).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 부지런히 그 일을 해야 하며, 무엇이나 맡은 일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지도자가 타락하면 그 밑에 양 무리들이 함께 타락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할 때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은 어떤 태도를 가진 것인가?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습니다. 다른 사람을 주 앞으로 인도한 사람은 특히 신앙적인 바른 자세를 가지고 전도 받은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전도했으면 그를 바른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전도함을 받은 사람은 언제나 신앙적인 표본을 전도한 사람의 기준에 두는 것입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한 베드로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함께 고기 잡으러 가게된 것입니다.

  2. 고기를 잡으러 간 결과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게된 것은 그가 실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이 어데 계시는지? 그들의 마음은 공허했고 지난날에 가지고 있었던 소망이 살아져 버렸습니다. 주님을 잃으면 소망도 상실해 버립니다.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늘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이 아니면 주님을 잃어버린 생활, 실의에 빠지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면 이들이 베드로를 따라 디베랴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간 결과 어떤 일을 만나게 되었는가?

  (1) 고기률 잡으러 간 시점이 밤이었고 했습니다. 밤이란 인생이 맞는 어두움을 말합니다. 이 밤을 맞이한 인생은 고통과 환난을 겪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서 떠나시면, 우리는 이 인생의 밤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에 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밤에 다니면 실족하게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1:9). 세상은 어둡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이 빛을 따라 낮에 다니는 생애를 살아야 합니다.

  (2) 그들은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l5). 주님을 떠난 생활은 아무 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3).

  (3) 그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백성들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들이 비록 옛날 직업으로 되돌아갔지만 주님은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소망을 주시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어 보신 말씀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는 뜻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나아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없나이다”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떠난 생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명령을 따랐더니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혔다고 했습니다. 축복은 순종에서 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같은 실제적인 교훈을 통해서 순종에 따르는 축복을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기잡이에 지친 제자들올 부르시고 그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조반 먹기를 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의 양식을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밤중에 디베랴 바다로 물고기 잡으러 나온 사람들은 아닙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 새로운 순종의 생활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10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서 론 : 디베랴 바다는 베드로의 생애에 잊지 못할 곳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영원히 간직할 예수님과의 대화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나간 제자들을 찾아 세 번째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실의에 찬 채 자신들의 할 바를 알지 못한 그들은 시몬 베드로를 따라 바닷가에 갔으나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조반을 준비하시고 그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부르셨습니다. 조반 먹은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세 번째 주셨습니다.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그의 첫 번째 물으심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 자리에는 다른 여러 명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을 터인데 유독 베드로를 향하여 매우 난처한 질문을 똑같이 세 번씩이나 하셨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런 일은 베드로에 대한 특별하신 사랑과 그에게 주시고자 하신 목자로서의 사명을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보여 주고 있는 사랑이란 말이 헬라어 원어에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신 사랑은 ‘아가파오’고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질문은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신 사랑을 ‘아가파오’란 단어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내신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이처럼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한 율법사와의 대답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7).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신 사랑은 이런 사랑의 표준에서 “네가 나를 사량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은 주님이 물으신 아가파오의 사랑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한 사랑은 ‘필레오’란 단어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관계의 고상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친구로써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2) 예수님은 두 번째 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물으심에도 아가파오란 단어를 쓰셨습니다. 이곳에서 빠진 것은 “이 모든 사람들보다”란 말입니다. 베드로의 자신 없는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난 사랑은 아닐지라도 “너는 나를 아가파오하고 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물으심에 베드로는 이전과 똑같은 답변을 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이때에도 아가파오로서의 사랑에서가 아니라 필레오로서의 사랑을 지니고 있음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으심에서 사용하신 사랑이란 표현은 아가파오가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한 필레오란 단어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그러면 너는 나를 친구로서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같은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친구로서의 사랑도 주님께 갖지 못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2. 내 어린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이 사랑의 물으심은 또한 베드로에게 목자로서의 사명을 주시기 위한 사랑의 확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기의 양을 맡기시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량하느냐”고 물으신 후 베드로의 확인을 들으시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주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양떼들은 바로 주님의 양들입니다. 그가 피로 값 주고 사신 귀한 양들입니다. 이들을 먹이고 치는 목자들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양들에 대한 사랑은 먼저 그 주인이 되신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양이 예수님의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이 양을 사랑함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주님은 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 그의 양떼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을 아가파오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베드로처럼 필레오의 사랑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6:22).






  (108) 베드로의 남은 생애  

  (요한복음 21:18-25)


  서 론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세 번째의 물음을 통하여 베드로는 그의 마음이 깨여졌습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였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혈기와 교만에 대한 부끄러움으로써 이때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에는 강했지만 지금은 약해졌습니다. 영적으로 강해지려면 육적으로 약해져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전에 육에 강했을 때에는 자신과 신념에 꽉 갔었지만 실제로 영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넘어졌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강하게 무장된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새로운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1. 주님의 어린양을 치는 목자의 자세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그의 양 무리에 대한 부탁의 말씀은 오늘날 목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명령이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처럼 세 번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어떤 사명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해답은 헬라어로 나타난 뜻을 살펴 볼 때 명백해 집니다. “먹이라”고 하신 말씀은 ‘보스코’로 먹이다, 치다, 치게 하다의 뜻입니다. 또 “치라”고 하신 말씀은 ‘포이마이노’로 기르는 목자 또는 목자 노릇을 하라는 뜻으로 이 말의 어원은 양을 치는 사람, 목자에게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베드로에게 맡겨 주신 주님의 사명은 예수님의 양 무리들을 맡아 기르는 목자로서의 사명인 것입니다.

  (1) 목자는 지혜롭고 충성된 종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계속적으로 부탁하신 일은 그 사명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목자장 되시는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의 양 무리들을 다스리는 사명을 받은 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2) 목자는 청지기의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 주인의 뜻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경우를 비유로 들으시면서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악한 종에 대하여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선언을 내리셨습니다(눅16:1-10).

  (3) 목자는 달란트의 사명을 받은 종들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장사하여 많은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시는 달란트를 받은 세 명의 종의 경우는 분명히 목자들에게 주시는 경종으로 보여 집니다. 세 명중 두 명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써 칭찬을 들었고,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들었습니다(마25:26-30).

  2. 띠 띠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종말에 일어날 생애에 대해 의미심장한 예언을 들려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띠를 띤다는 말은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로 이같은 자세는 일하는 종의 자세를 의미해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대로 베드로는 아직까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습니다. 이것은 자기 인생의 계획을 자신이 세우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계획에 따라 복음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 늙어서 그의 생애를 마치는 일만큼은 자신의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이(핍박자)들에 의해 좌우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팔을 벌린다”고 하신 것은 장차 그의 주검이 십자가에서 순교해야 할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보겠습니다.

  3. 네게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언 듯 듣기에 주님이 지금 향하시는 그 길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들려지지만 그 후에 다시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그의 생애를 주님을 따라 가는 생애여야 한다고 하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또 다른 제자(요한)가 자기와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사실에 대하여 평소에 그 제자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 온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신 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나 뜻을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고 이 일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쓰시기도 하시며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쓰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모두 다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치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다른 이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결 론 :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다만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주님을 위한 일군으로 사용해 주신데 대한 고마움과 감격으로 우리의 생애가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들려주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의 고난의 짐을 지고 주님을 따르는 생애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NEXT :   요한복음 20장 (102-105)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