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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62-68)
 밤중소리  01-28 | VIEW : 479



  (62) 옥합을 깬 마리아

  (요한복음 12:1-8)


  서 론 :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얼마 전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곳이라 그를 대접하는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빈으로 하여 잔치하는 이 자리에서 마르다는 대접하는 일에 봉사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담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리아는 값비싼 나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주님의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흘러 내려오는 향유를 씻어냈다고 했습니다.

  1. 옥합을 씬 두 여인의 경우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인이 나드향이 든 옥합을 깨어 주님의 머리에 부어 드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4복음서에 다 나오기는 하지만 누가복음에 나온 여인의 경우는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드향이 든 옥합을 깬 여인은 마리아만이 아니라 다른 또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눅7:36-50),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은 한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에는 예수님을 초대한 목적이 없습니다. 집주인이 예수님에게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지극히 호의적인 대접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는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있는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는 기름을 부은 여인은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인”으로 나와 있으며 예수님을 이곳에서 처음 만난 여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인으로 죄인이라고 비췬 곳이 한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이 사건은 주님의 마음에 큰 위로와 기쁨을 드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 여인은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한 여인은 말할 수 없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2. 마리아의 옥합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에 부은 나드향은 티베트와 인도사이 히마리아 산맥의 고지에서 자라나는 회귀한 나무에서 짜낸 비싼 향유입니다.

  (1) 마리아가 옥합을 깬 것은 사람의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값진 것이 있다면 옥합에 든 나드향 밖에 없었습니다. 이 향유의 값은 무려 300 데나리온으로 이 돈은 노동자 임금이 300일분입니다. 마리아가 이것을 능히 송두리째 주님께 부어드릴 수 있었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그의 사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마리아가 옥합을 깬 것은 자기 헌신의 증거입니다. 물질과 마음은 서로 통용합니다. 마리아는 그의 사랑의 마음과 함께 자기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 중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렸습니다.

  (3) 마리아가 옥합을 깬 것은 은혜의 보답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갚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며 그 무엇을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아온 은혜, 구원을 받은 은혜, 자기 오라비의 생명을 살려주신 은혜, 이런 것들이 그의 마음을 뜨겁게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3. 옥합을 깬 사건의 여파

  마리아가 이처럼 주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즉시 제자들 간에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마리아에게 공격의 화살을 부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한 것입니다. 이 일로 마리아가 어찌할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사 할 날”이란 예수님이 죽으실 일에 대한 예언인데 예수님은 마리아가 그에게 나드향을 부은 일을 장사할 날을 위한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일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며 저를 기념하리라”(마26:6-13).

  결 론 : 마리아가 깬 옥합에서 순전한 나드향이 흘러 나왔으며 이 향은 온 방안에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영적인 교훈 두 가지를 든다면 ⓐ 하나는 옥합 속에 들어 있는 나드향은 바로 우리 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몸은 질그릇이요 그 속에 담겨진 주님은 보화이십니다(고후4:7). 우리의 옥합인 이 육의 사람을 깨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밖으로 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육신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다른 또 한 가지 교훈은 이 향내가 예수님이나 다른 제자들에게는 값진 향기로 맡아졌지만 멸망한 가룟 유다에게는 그러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것은 같은 복음이라도 구원 얻을 사람파 멸망 받을 사람들과는 풍기는 냄새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고후2:15-16).





  (63) 나사로 까닭에

  (요한복음 12:9-11)


  서 론 :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한 모형입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이 분명한 증거를 스스로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가 살아난 일로 인하여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사로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나사로 까닭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가 대제사장들의 무리에게까지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1. 죽은 증거를 가진 나사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두 가지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그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그의 다시 살아나심에 연합되는 일입니다(롬6:2-5).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어 이제 다시 소생할 길이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육체가 이미 썩어 냄새까지 풍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사로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1) 옛 사람이 죽는 다는 말은 율법에 대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율법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영생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요 정죄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하거나 율법적인 생활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2) 옛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이미 심판 받은 사실을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8:10).

  (3) 또 옛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옛 사람과 그 행실을 벗어버리는 일을 말합니다. 성경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골3:9-10).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우리의 바른 신앙 생활을 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이 같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살아난 증거를 가진 나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롭게 살아날 때 새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연결된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난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처럼 우리도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아난 확실한 증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장래를 치른 후에는 찾아 올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이 나사로를 보려고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1) 우리가 새롭게 살아난다는 말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말합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실질적으로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2)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가졌다는 말은 의에 대하여 살아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전에는 우리들이 죄의 종이 되어 살아 왔으므로 의에 대하여 자유 했습니다. 그리고 의를 이룰 아무런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가진 후로는 의의 종이 되어 의의 지배를 받는 몸이 되었고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지난날에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과 연합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8).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이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요 영생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입니다(갈6:7-8).

  (4) 그리스도인들이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시119:105)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 힘과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 영생의 길, 천국에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주시는 길이요 그 말씀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결 론 :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일은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렸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롭게 살아났다면 우리의 생활은 우리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나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나보려고 찾아왔던 것처럼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면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습니다. 11절 말씀을 보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그의 새로운 삶을 통하여 예수를 전도했습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6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요한복음 12:12-19)


  서 론 :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에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입성은 스가랴 선지에 의하여 예언된 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이미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무리들로 붐벼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려고 성문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입으로 찬양을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들의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어느 개선장군에 못지 않은 장관이요 환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선장군보다 더 크고 위대한 승리의 영광을 안고 입성하셨지만 이것은 바로 그의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히브리말 ‘아니’는 곤고하다, 초라하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왕으로써 곤고를 겪으셨으며 가난하고 초라하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종의 자리로 낮추시기까지 겸손하셨습니다(빌2:6-10). 그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 지시기까지 겸손하셨습니다(고후8:9). 그는 원수의 무리를 위해서 간구하시기 까지 겸손하셨습니다(눅23:24).

  (2)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평화의 왕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원수를 무찌르는 칼을 가지고 입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눅2:14). 이사야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3)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에 대하여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이 같은 입성에 대하여 그 뜻을 잘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이 일이 스가랴가 예언 한 예언의 성취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2. 호산나를 외친 무리들

  예루살렘에 있었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마중 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면서 외쳐댔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시아나’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이 말은 ‘구원하소서’ ‘이제 구원하소서’ ‘우리들을 구원하소서’란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갈채 또는 찬양의 송영으로 사용되어 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친 것은 다만 유월절 행사 때문에 습관적으로 부른 찬송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를 이 찬송의 주인공으로 여기고 그를 맞이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재 그들의 조국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번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에 대한 희망에 부푼 소문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가 이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 흥분했습니다. 어느 누구인가의 업에서 ‘호산나’의 찬송이 나오자 그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 암송 시를 다 함께 합창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 같은 환영은 적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기대했든 정치적 메시야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빌라도의 재판에서 사영언도를 받고 골고다의 사형장에서 무력하게 죽어간 것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십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하심이 목적이셨다면 그 일이 그의 생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표적으로 자기를 믿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은 그가 행하시는 표적에 의해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무리들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표적 때문에 모인 무리들이었습니다.

  결 론 : 이 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치 혁명의 가치를 들고 입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선동하거나 이스라엘의 회복을 부르짖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 군중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으며 그가 과연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무리들은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대제사장의 선동을 받아 예수대신 바라바를 요구하고 예수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마27:20-24).





  (65) 한 알의 밀알

  (요한복음 12:20-26)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많은 군중들은 그의 입성으로 인하여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당장에 어떤 변화를 바라는 군중들에게 아무런 흥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실망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대하여 ‘호산나’를 외쳤던 그들의 기대가 일시에 무너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1. 한 알의 밀알이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은 그가 영광을 얻으실 때가 온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이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것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은 하늘에 올라가셔야 할 분이십니다(요6:62). 그런데 예수님이 이처럼 영광을 얻으시는 길은 그의 죽으심의 고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빌2:8-11).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의 고난만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오는 말할 수 없는 영광도 바라보셨습니다(히12:27).

  (1)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자연의 원리입니다. 밀이 씨앗으로 심겨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밀이 심겨지는 일은 마치 그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이 썩고 온전히 회생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말씀은 하시고 즉시 그 해석을 가해 주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는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생명이라고 표현하신 생명은 인간의 육신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은 헬라어로 ‘프쉐’인데 이것은 혼으로써 자연적 생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신 생명은 ‘조에’로 이 생명은 주님께 받은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적인 생명을 버리시는 일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② 다른 하나의 뜻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참 생명을 얻는 생활 태도를 밝히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생활인데 이런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적인 생명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생활은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말합니다(롬6:11).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육신의 일을 벗어버리고 영을 쫓는 생활을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롬8:13-14).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은 지난날의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생활을 말합니다.

  2. 주님을 섬기는 자의 축복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들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앙생활의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말과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를 믿으면서 섬기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과연 믿음을 가진 사람일 것인가? 성경은 주를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롬12:11).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라”고 했습니다(히12:28).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롬14:18).

  (1) 예수님은 이들에게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요14:2). 이곳은 주님을 섬기는 모든 성도들을 거하게 하실 충분한 장소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염려 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거지로 살아 왔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진 나사로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인 중에 가장 미천하고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지만 주님을 섬기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도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주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사람이겠는가? 하나님께 귀히 여기심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성심을 다하여, 있는 정성을 다하여, 열심으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내 육신의 생명이 썩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며 하나님의 귀히 여기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밀이 땅에서 썩듯이 육신이 원하는 생활을 버리고 주님을 섬기는 생애를 보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6) “이 때를 면케 하옵소서”

  (요한복음 12:31-33)


  서 론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일을 앞에 두시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그가 지실 십자가에 대한 어려움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는 일은 연약한 사람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8).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거나 심히 답답하셨을 때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이 기도로 그는 골고다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1. 십자가를 지실 주님의 마음

  예수님은 그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시란 점에 있어서 우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셨습니다(히4:15). 예수님께는 우리와 같은 죄만 없으실 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5:2).

  (1) 주님은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실 일을 앞에 두시고 예수님의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갈등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앞으로 당하실 모든 고난에 대하여 낱낱이 알고 계신데서 나온 괴로움을 나타내신 표현입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민망하시다고 하셨습니다. 민망한 마음은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도망가고 한 명도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받으실 재판의 과정을 이미 아셨고 로마 군인들이 그에게 가할 모욕적인 학대를 이미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여섯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실 일, 그가 그 괴로움 중에서 아버지의 버리심을 받으신 일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 어찌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2) 예수님은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주님이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하신 이 때란 십자가를 지실 고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인간적인 갈등과 고민을 아버지께 솔직히 아뢴 기도였습니다.

  (3) 그러나 주님은 즉시 이처럼 그의 기도를 수정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자기 사명에 대한 확인입니다. 예수님께도 자기 사명의 수행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한 알의 밀알로서의 그의 사명을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의 결론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위대하심은 육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일입니다.

  2.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모두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기도에 하늘에서 아버지의 응답이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다”고 하신 말씀은 그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이미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은 이 땅에서 수도 없이 아버지의 영광을 들어내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업의 완성으로 얻으실 영광으로,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드린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내가 땅에서 들리면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복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될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완성되어 복음이 형성되었습니다.

  (2)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특히 그의 죽으심과 연결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 세상 심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임금이란 마귀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마귀로부터 사망의 권세를 빼앗았습니다. 마귀가 정죄의 수단으로 이용한 율법의 정죄에서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그의 교회에 미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그가 지실 십자가의 어려움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기쁘게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질 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롬8:17, 벧전4:13-16).





  (67) 이 인자는 누구냐?  

  (요한복음 12:37-43)


  서 론 : 예수님은 인자가 들려야 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들려야 한다는 말은 십자가 위에 달리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같은 말씀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나온 일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그런데 유대인들은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율법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인자는 누구냐”고 되물었던 것입니다.

  1. 율법의 그리스도를 찾는 유대인들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율법이 말해 주는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율법에서 가리켜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기다린 그리스도, 율법이 가리킨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가?

  (1) 모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나 같은 선지자”라고 예언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했습니다(신18:15).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오실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은 존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자로 알고 있었습니다(행1:6).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메시야된 증거를 하늘에서 만나를 머게 한 모세처럼 명백하게 보여줄 것을 요구했습니다(요6:30-31).

  (2)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위를 이은 영원한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예언하는데 이곳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는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시는 자”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사11:1-4).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한다거나 십자가를 져야 한다거나 하는 일은 그들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가랴의 글에 있는 메시야의 예언이 바로 이 같은 큰 권능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인줄로 믿었으며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올 이런 그리스도로 영접했던 것입니다(슥9:9).

  이처럼 예수를 그 대망의 그리스도인줄로 믿고 환영을 했는데 그들 앞에 서신 예수님은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고 하시니 그러면 이 인자란 도대체 누구냐고 따져 물은 것입니다.

  (3)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야말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믿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고 물었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저 없이 미가서에 있는 말씀을 찾아 왕에게 그의 태어나실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미5:2). 이 말씀에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는 영광의 왕으로 이스라엘을 실제로 다스릴 왕으로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4)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을 다스리는 목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겔34:24). 이런 까닭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런 메시야로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권능의 말씀으로 무리들을 가르치시므로 그를 메시야로 믿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성 입성을 환영한 일은 바로 이런 뜻에서였는데 그리스도라고 자기들이 환영한 예수로부터 들림 받아야 하리니,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하느니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릴 사람이 그들의 메시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태도는 돌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인자는 누구냐” 왜 성경과 다르냐?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예수를 배척할 태세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2.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기대에 어긋난 것을 안 그들은 예수께 호감을 갖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낯을 피하여 숨으셔야 하시리 만치 형세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많은 표적도 그들에게는 믿음의 근거가 되지 못했습니다.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의 속죄에 대한 믿음에 있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난 주님의 표적으로는 그들에게 이 같은 믿음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주의 팔이 분명히 그들에게 나타났건만 그러나 그들은 그 들은 바를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외식으로 섬기며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며 사랑과 공의를 버리고 있는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이미 돌같이 단단히 굳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분명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요한 사도는 이사야의 예언을 벌어 증거한 것입니다.

  결 론  :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외식으로 섬기며 순종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고 그 눈올 소경 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저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를 씻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며 눈이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68) 아들과 아버지

  (요한복음 12:44-50)


  서 론 :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논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의 신앙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란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같은 사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요10:30).

  1. 아들과 아버지와의 영적인 관계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틀과 아버지와의 영적인 바른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1) 아들과 아버지는 원래가 한 본체이십니다. 한 본체란 한 몸을 의미합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각기의 인격을 지니고 계십니다. 아들로서의 인격, 아버지로서의 인격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인격의 분립은 하나님의 본체의 분립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체는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이 본체는 영원히 하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한 본체 안에 아들의 인격과 아버지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이 계시며 이 세분의 인격이 오직 한 하나님의 본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아들과 아버지는 그 근원이 똑 같으십니다. 한 본체의 존재가 나누일 수는 없으며 그 기원도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고 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존재의 근원을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1-2). 이 삼위 하나님은 다 똑같은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 삼위로 이루어져 계시는 한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심이 똑같으시고, 그 영광이 똑같으시고, 그 하시는 일도 똑같으십니다.

  (3) 예수님이 아들로 불리심을 받은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나심에서 부쳐진 이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그는 인자의 모습을 지니게 되셨고 이로써 그는 아들로 불려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에 아들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에 오실 수 있었으며 자기의 뜻이자 아버지의 뜻인 대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니라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체이시기 때문에 그가 세상에서 나타내신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가 세상에 나타내신 그의 모습은 곧 아버지의 모습이십니다.

  (1) 예수님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한 본체를 이루신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언제나 “우리”안에서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자신의 모습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요1:14).

  (3)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믿는 것으로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은 그 아들이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가 거역하여 저버린 하나님, 우리가 범죄 함으로 우리와 원수가 된 하나님, 바로 그 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또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셨습니다.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족하겠나이다”고 말하는 빌립에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셨습니다(요14:8-9).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심으로 그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은 그의 말씀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나타내시기 때문에 그 말씀이 곧 빛이십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오직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죄인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 심판은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의 표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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