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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97-101)
 밤중소리  01-27 | VIEW : 685



  (97) 실족케 하는 자의 화

  (누가복음 17 : 1 - 4)  


  서 론 : 남을 실족케 하는 자의 죄가 얼마나 중한 것인가에 대하여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실족시킨다는 말은 도덕적인 죄의 문제 뿐 아니라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죄를 말합니다. 그 죄의 모양이 어떻든 사람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면 그 사람은 차라리 연자 멧돌을 그 목에 메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 만치 저주받은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1. 남을 실족케 하는 일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로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이 세상에서 없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있게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경종 하셨습니다.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하는 결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 같은 일은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악행을 권장함으로 실족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악된 행위를 권장함으로 그 사람으로 결국은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같은 죄악된 행위를 말의 유혹으로 하던 죄의 함정을 파놓음으로 하든 그 일로 그 사람으로 신앙 생활에서 떠나게 한다면 그런 일은 큰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 일은 아담으로 실족케 했습니다. 드릴라의 간교는 삼손을 실족케 했습니다.

  (2) 진리를 오도케 함으로 실족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을 바른 진리에서 돌이키게 하여 잘못된 진리로 오도케 한 자는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입니다. 진리를 오도케 하는 역사는 사단이 합니다. 이단을 전파하는 자들은 모두 이 사단의 하수인들입니다.

  (3) 경종하지 않음으로 실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사람에게 살길을 가르쳐 주지 않을 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겔 3장에서 “하나님께서 죽으리라고 한 죄인에 대하여 내가 그를 말로 깨우치거나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생명을 구원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여기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지 못함으로 그들로 실족케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2. 실족케 하는 일을 경계하는 방법

  주님은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실족케 하는 일을 경계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1)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경계하라고 하신 말씀은 다음 몇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① 권고하라는 말씀입니다. 마 18:15에서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그 사람을 찾아가 권고하라고 말씀했습니다.

  ②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형제의 생명이 그의 죄로 인하여 파멸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③ 그 죄가 악한 누룩처럼 교회에 퍼질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다음에 나도 그같은 죄에 물들지 않을까 스스로 조심하여 모든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2) 다음에 주님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죄라도 회개를 건너뛸 존재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죄라도 회개 없이는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의 사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 스스로가 용서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용서에는 먼저 하나님의 용서가 뒤따라야 합니다.

  회개하거든 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저 입술만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회개에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열매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라는 말씀은 다시 한 형제로서 회중에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고통을 싸매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의 죄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론 :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믿음에서 실족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혹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혹 회개한 내 형제에 대하여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남의 신앙을 붙들어 주며, 남의 허물을 가려 주며 사랑으로 권면하며 생명의 길로 이끄는 아름다운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98) 믿음을 더하소서

  (누가복음 17 : 5 - 10)  


  서 론 : 제자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연약함을 깊이 깨닫게되었으며 자기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실족케 하는 일과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문제를 들었을 때 자기들의 믿음으로서는 자신이 없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제히 주님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이 말에 두 가지 비유적인 예화를 들려주심으로 사람이 믿음을 더하는 비결이 어디 있는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는 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겨자씨 한 알의 비유를 드셨고, 순종하는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종의 경우를 들려주셨습니다.

  1. 믿음을 더하소서

  신앙 생활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전 생애에 걸친 믿음의 생활입니다. 자기에게는 믿음이 언제나 많은 줄로 알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언제나 제자들 모양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알고 주님을 향하여 나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는 간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겸손한 자세입니다. 특히 우리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될 때 우리에게 너무도 믿음이 적은 일에 대하여 스스로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믿음을 주시는 주님을 향하여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더 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들 제자들처럼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는 기도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2. 겨자씨의 믿음

  겨자씨로 비유된 믿음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마다 다른 각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어떻게 해석이 되든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신 뜻을 분명히 제시만 하면 다 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겨자씨의 믿음이란 곧 살아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씨는 작지만 그 씨는 살아 있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씨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신비적인 생명체입니다. 사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하면 능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2) 겨자씨는 생명이 있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생명은 새로운 것으로 탄생되기 때문에 그 안에는 폭발적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을 때 그 안에서 공급받게 됩니다.

  (3) 겨자씨의 믿음은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씨가 심겨지면 밭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믿음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씨가 자라나지 않을 때 아무런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성장하지 못할 때 그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겨자씨의 믿음은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씨는 이미 죽어 있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이 겨자씨는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영접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성장하는 믿음을 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였을 것이란 말씀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라도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하시는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3. 순종의 믿음

  주님은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믿음을 갖기를 원하면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밭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과 그 주인집에서 종으로 일하는 사람을 등장시키셨습니다. 이 종은 마치 피로 값 주고 사심으로 당신의 종으로 삼으신 우리들의 경우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롬6:22). 종은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그것이 주인 앞에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분은 너무나도 값진 대가로 나를 사셨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어떤 일을 해 드려도 그 은혜를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 말뿐입니다. 이 말씀을 들려주신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겸손을 가르치시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심령으로 순종하고 겸손하면 우리의 믿음은 날로 성장하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결론 : 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그 분의 생명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믿음을 더 갖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믿음, 더 아름다운 믿음을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 믿음으로 주님을 위하여 좀더 보람있는 생애를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99)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 : 11 - 19)  


  서 론 : 열 명의 문둥이가 병 고침을 받은 후 한 명의 문둥병자만이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한 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아홉은 청함 받은 사람이요 한 사람은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아홉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요 그 중에 하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또한 이 사건은 구원을 얻는 자가 적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구원을 얻을 자는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의 은택을 받는 자는 많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심히 적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열 문둥병자의 출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한 동리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주님께 소리를 높여 간구했습니다. 이들의 출발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죽을병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둥병은 인간의 죄를 상징합니다. 죄는 저주스러운 존재요, 인생을 죽이는 병입니다. 사람이 이처럼 자신의 죄를 안다는 것은 이 병의 치료자이신 예수님을 찾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이 거울은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하고 우리로 예수를 만나는 길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찾은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자신들의 질병을 고침 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예수를 만난 그들은 소리를 높여 간구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다만 주님의 자비에 호소한 것입니다. 세리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는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죄인들은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일도 큰 축복이지만 그 예수님께 기도한 사실은 칭찬 받을 만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다만 주님의 자비에 호소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그들은 긍휼을 호소하여 간구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여 성안으로 달려간 것으로 보아 무슨 말씀이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경우는 그 몸이 온전히 문둥병에서 고침 받았을 때 그의 의학적인 확인을 위하여 찾아가는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실 문둥병이 고쳐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몸에서는 여전히 고름이 나옵니다. 손은 꼬부라졌습니다. 눈썹은 빠진 대로입니다. 그런 형편인데 가서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가서 보이라는 것입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이 말씀을 믿고 달려갔습니다.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의 몸은 아직 문둥병 그대로 있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성안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출발이 좋았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기도하고 응답 받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쁨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가 문제입니다.

  2. 감사를 잊은 아홉 문둥이

  그들은 기도는 했지만, 그리고 응답은 받았지만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엡1:3-6).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지 못한다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란 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생활을 못하면 그 한가지 사실만도 무서운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돌아와 감사하는 문둥이를 향하여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돌아오지 않은 아홉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은혜를 입었건만 감사하지 못하는 그들의 불 신앙을 탄식하시며 그들의 앞날을 염려해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 돌아온 문둥이는 놀라운 칭찬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은혜를 받기는 쉬워도 감사하기는 어려운 존재입니다. 감사에는 재물이 따르고 봉사가 따르고 충성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결론 : 그러나 우리는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일이야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00)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 17 : 20 - 25)  


  서 론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상충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많은 모순 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대망하는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임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사고는 제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이 왕으로 취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과연 그리스도이시라면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시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고 물은 것입니다.

  1.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주님은 물론 이런 그들의 물음의 저의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하나님의 나라 관념을 바로 잡아주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물음에 대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둘로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자기들이 그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현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현세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인자의 날에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왕국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눈에 보이게 임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크게 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심령 천국이요, 하나는 영원 천국입니다. 이 두 나라는 모두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를 지칭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닌 것처럼 눈에 보이는 어떤 장소를 가리킨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바라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주었습니다. 실망을 안겨주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은 예수님 입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고 하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는 반란 음모자로 고소할 수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 나라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씀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교훈은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분명하고 정확하게 제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에 이루어지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그리고 그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마음속에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을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하신 것은 먼저 성령의 임재 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계시는 곳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고, 하나님의 지배가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 말씀했습니다(고전3:16).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엄중하신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모든 이 나라 백성들은 이 말씀을 거역할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잘 순종하면 보상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처소로 옮겨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에 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3. 인자의 날

  주님은 제자들에게 때가 되면 나타날 인자의 날에 대하여 부연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자의 날이란 주님의 재림의 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주 재림에 대하여 제자들은 매우 궁금했습니다. 주님은 이날에 되어질 일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간략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날을 전후하여 세상에는 많은 미혹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가 도처에 나타나 자기를 가리켜 ‘주’라고 말하겠지만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재림 주라고 말하는 자들의 말에 미혹되어 그들은 좇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그같은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번개가 하늘아래 이편에서 저편까지 비췸같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도 그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 재림의 모습을 한마디로 나타내신 표현입니다.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임할 것이란 말씀이오 주님은 그의 날에 도처에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임하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계 19장에서 예언해 주신 말씀대로 열려진 하늘로 백마를 타고 하늘에 군대와 더불어 아마겟돈에 임하시는데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며 그것으로 만국을 치시며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속에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바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되 미혹을 받지 말고 하늘에서 번개 빛처럼 비취임 같이 임하시는 주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일은 오직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값진 선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01) 인자의 때

  (누가복음 17 : 26 - 37)  


  서 론 : 주님은 주 재림의 날을 인자의 때란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주님은 인자의 때를 설명하심에 노아의 때와 롯의 때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자의 때도 이러하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기에 사회에 팽배하는 죄악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 대하여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롯의 때에 대해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인자의 때에 대해서는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18:5). 이런 말씀으로 비춰 보아 주 재림의 시기는 이 세상이 과학적으로나 지식적으로는 발전하는 문명 사회를 이룰지 모르나 도덕적으로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는 그 죄악상이 심히 관용한 상태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노아 때와 롯의 때의 사회상

  그러면 노아의 때는 어떠했는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의 경종을 듣고 세상에 나아가 부지런히 경종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사람들은 이 경종을 전혀 무시하고 세상 관습에 젖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생활을 해오다 물의 심판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해왔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는 생활은 죄악 중에도 가장 무서운 죄악입니다. 두 번째는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종을 무시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판에 앞서 반드시 선지자나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예고해 주시는 것입니다(암3:7). 그러나 이 파수꾼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롯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롯이 긴박한 사항을 외쳐댔지만 그의 사위들마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인자의 날에도 그러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주 재림의 시기의 이 사회상 역시 모든 사람의 생활이 하나님을 떠난 물질주의, 세속주의가 이 땅 위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을 무시함으로 주의 재림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는 것입니다(벧후3:3-5).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2. 롯의 처를 생각하라

  주님은 인자의 날인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거나 밭에 있을 때 뒤로 돌이키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하여 롯의 처의 경우를 들어 경종 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마 24장에 있는 말씀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고 하셨습니다. 지붕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나 뒤로 돌이키지 말라는 말씀은 산으로 도망하는 일에 신속히 하라는데 있습니다.

  롯의 처가 소돔에서 도망하는 일에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된 것입니다. 인자의 날에 유대 땅에 사는 사람들은 산으로 신속히 도망하는 일에 있어서 집안에 있는 재물 때문에 지체하면 노아의 때의 사람들처럼, 롯의 때의 사람들처럼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입니다. 슥 14장에는 주 재림의 인자의 날에 대하여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산골짜기로 도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슥14:1-5). 이곳으로 도망하는 일에 세상 재물에 얽매이지 말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유대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데려감을 당한 자와 버려둠을 당한 자

  31절에서 말씀하신 도망하는 일에 대한 것은 유대인들에 관한 것으로 그들이 환난을 피하여 궁극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요, 33~35의 말씀은 온 세계적으로 이날에 구원받을 백성과 버림받을 백성에 관한 예언입니다. 인자의 날에는 노아나 롯처럼 하나님의 심판 중에서 구원받을 백성들이 있는 반면에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방법으로 구원해 주시는가? 이에 대하여 데려감을 당한다는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 시에 있을 모든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휴거를 말하는 것입니다(살전4:16-18).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불신가운데 처해 있게 됨으로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회개한 후에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민족적으로 받게 되며 최종적인 구원인 공중 휴거에 교회와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이날에는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적 그리스도의 역사가 강한 시기이므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릴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을 두려워하여 적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는 자들은 그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면 이같은 일이 어디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들려주셨습니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보이느니라”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정확한 뜻을 나타낼 수 있는 해석 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짝이 될만한 성경구절이 계 19:17~18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잔치가 벌어지는 이 잔치는 주님의 재림으로 온 세상이 그의 심판의 칼날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시체를 먹이로 하여 몰려든 새들의 잔치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비추어 해석할 때 인자의 때에 심판을 내릴 곳은 전 세계적이며 어느 곳이든 심판이 미칠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외면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말고 노아처럼 롯처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지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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