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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93-96)
 밤중소리  01-27 | VIEW : 589



  (93) 불의한 청지기의 교훈

  (누가복음 16 : 1 - 13)  


  서 론 : 여기 있는 청지기의 비유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논리가 이상하게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근본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정확히 안다면 우리는 그것에 해석의 초점을 맞출 수 있으며, 논리의 전개는 어떻든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근본 사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으로 주셨기 때문에 까다롭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1. 세상 재물에 대한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총 결론은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집 하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말함과 동시에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소문이 들린 청지기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청지기의 경우에 그의 불의 함이 어디서 나왔는가에 대하여 밝혀주신 말씀이십니다. 한 주인 밑에서 일하는 청지기는 오직 그 주인만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주인을 더 섬기고 있었습니다. 다른 주인이란 재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청지기는 자기의 주인보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더 많았기 때문에 재물을 섬긴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가 돈을 사랑하자 주인을 섬기는 일에 차질이 생겨났습니다. 그는 주인을 속여 불의한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돈을 중히 여기고 주인을 경히 여긴 것입니다. 이 같은 비유는 우리가 재물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생활은 재물이 중심이 됨으로 돈을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2. 불의한 일이 드러났다

  청지기의 불의한 일이 드디어 드러났습니다. 불의한 일은 언제인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주인은 그 청지기에게 이제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그 직분을 빼앗고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해온 일에 대하여 장부 정리를 해서 사무 인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청지기는 한 지혜를 짜내어 직분을 빼앗긴 후에도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묘한 사무 처리를 구상한 것입니다. 이 같은 청지기의 지혜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재물을 사랑하는 자들의 간교와 거짓과 속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주인의 눈을 속이듯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을 속여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마땅히 드릴 감사도 빼먹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야할 십일조도 살짝 자기 것으로 제 주머니에 넣습니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는 칭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 청지기가 가지고 있었던 못된 지혜에 대한 일종의 역설적인 감탄사입니다. 이 같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 세대의 아들의 표본으로 등장한 청지기는 먼 장래 자기의 살길까지 생각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만약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위하여 지혜롭게 처신한다면 그에 대한 축복이 얼마나 크겠느냐고 하시는 역설적인 교훈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일어나는 일에만 큰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일에만 열중합니다. 당장에 어떤 열매를 맺는 일에만 흥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생활은 차라리 이 세대 사람들이 세상일을 위하여 지혜롭게 행하는 일에 대하여 본받을만하다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3.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처럼 말씀하신 주님은 지혜롭게 재물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친구란 말은 전도하여 그리스도인을 만들라는 말입니다. 왜 재물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재물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돈에 마음이 끌립니다. 돈을 소중히 여깁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결국 사람은 이 재물 때문에 신앙을 잃게 되고 재물 때문에 불의한 행실을 하게 되고, 이 돈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이란 불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의한 것으로 가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전도 사업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하여 열매를 맺는 일에 자기의 재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재물을 낭비하는 것이거나 무의미하게 쓰는 일이 아닙니다.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의 많은 열매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영생을 보증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하셨습니다(단12:3).

  4.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

  여기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란 말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일을 말한 것입니다. 어떤 부자 청년은 그의 불의한 재물 때문에 천국 문에 못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의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는 일에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거절한 것입니다. 가난한자를 주라는 말씀은 친구를 사귀라는 말입니다. 자기 재물로 전도 사업에 긴요히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일에도 충성할 수 없고 이 재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못한다면 곧 불의 하다면 다른 하나님의 일에도 불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으면 이란 말씀이 이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일도 맡기시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이란 말씀은 남의 것이란 재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재물은 남을 위하여 써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자기 재물을 남을 위하여 쓸 때 하나님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실상인즉 하나님이 우리의 것으로 언약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재물에 대하여 잘못 쓰면 우리는 우리의 것을 받을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언제나 문제의 핵심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씀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깨닫기를 바라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지금 재물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고 그 재물로 불의한 청지기처럼 처신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쓸 때 크나큰 축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가 재물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파직 당한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불행이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94) 율법시대와 은혜시대

  (누가복음 16 : 14 - 18)  


  서 론 : 바리새인들은 항상 예수님의 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로 주님을 책잡아 공박하고 예수님을 체포하는 하나의 고소거리를 삼으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돈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해독인가, 그리고 재물은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써야 복이 된다고 하는 말씀에 대하여 비웃은 것입니다. 바른 교훈을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아무리 이치에 합당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단에 속한 자들과 진리에 대하여 토론한다고 그들이 이단을 버리고 진리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주장하는 바가 비 성경 적인 것이라고 여겨졌다고 해서 마음을 돌이키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무가치하고 공허한 토론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1.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바른 진리를 거슬린 일은 바로 그들이 이처럼 돈을 사랑함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타락한 원인이 돈을 사랑하는 일에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좋아하면 영의 눈과 귀가 감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트집 잡고 공박했던 것은 그들이 돈을 사랑함으로 영적인 눈이 어둡고 귀가 먹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면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기 때문에 자기 입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요 자기 기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해 왔으며 주님의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었지만 돌이킬 줄 몰랐습니다. 다음에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병폐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자기의 결백이나 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중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은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선인과 악인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의 하다고 정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아지려는 그들의 교만을 꺾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 앉히실 것입니다.

  2. 시대의 구분

  주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16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전 역사를 둘로 구분하신 창조주의 선언이십니다. 율법시대는 요한의 때까지로 끝났고 그후부터는 은혜시대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시대, 선지자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습니다. 이제 후로는 복음이 전파되는 은혜의 시대로 접어들어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시대란 무엇입니까?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신 시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으로 다스리는 시대, 율법적인 의가 인정된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의의 표준을 율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율법적인 시대는 이제 마감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 후부터는 어떤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은혜 시대를 말합니다. 은혜 시대란 믿음으로 의를 얻는 시대를 말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시대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시대입니다.
  율법이 지나갔다고 하여 율법 그 자체가 살아진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온전해 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 시대가 지나갔다고 하여 율법 그 자체가 없어 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언제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온전한 의의 표준입니다. 하나님은 이 표준에 의하여 공의로우신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이 의무는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복음이 이 의를 완전히 이루기 때문에 복음으로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에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율법의 계명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사람이 은혜 시대에 들어가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아주 의미 있게 표현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율법시대에서 은혜시대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들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은혜시대로 들어가는 방법은 바로 복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니면 절대로 은혜시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까지나 율법시대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의를 얻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요10장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 우리는 복음으로 은혜시대로 침입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시다.






  (95) 부자와 나사로

  (누가복음 16 : 19 - 31)  


  서 론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여러 가지로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종으로 들려주셨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부자의 결국을 보여주심으로 경고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부자는 율법적인 의의 표본이요, 나사로는 복음으로 의를 얻는 표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셋째는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을 주시려는 데 교훈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1. 부자와 나사로

  이 비유에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부자와 거지인 나사로입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의 생활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섬겨온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부자가 기도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말한 것은 그가 생존시에 하나님을 섬겨온 사실을 말해줍니다. 아버지란 말은 이 같은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경우도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사실은 그가 천국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거지가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거지 나사로가 들어간 하나님 나라는 바로 복음으로 침입하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깨우치시려는 바는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을 부자에 비유하셨고, 거지 나사로를 자신들이 마치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들이나 세리나 죄인들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2. 부자와 나사로의 생활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생활이 정 반대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자의 생활을 보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 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부자에 대하여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는 생존시에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가지고 오직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이루는 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재물을 모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서 가난한 이웃에 대하여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곤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 부자의 생활은 마치 한해에 많은 풍작을 거둔 어리석은 부자가 계획한 생활을 말해줍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서 높임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이들은 바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의 생활상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줄로 알았고 율법을 잘 지키며 자기들이 가장 의로운 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그들의 갚음은 바로 그들의 죽음의 문이 열릴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셨습니다(히9:27). 시 73편에 나오는 주인공을 보면 그는 악인이면서도 그의 생존시에 호화로운 인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국은 파멸이었습니다(시73:1-26).

  그러면 거지 나사로의 경우를 보자. 거지 나사로는 그의 생활상이 가장 비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받는 사회적인 학대, 이웃의 모멸을 상징합니다. 사회적인 모든 경제 체제는 권력층인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음으로 그들의 눈에 개처럼 보여지는 죄인들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로 배불리려 하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나사로가 받은 고난은 주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고난은 비단 삶의 고난만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고난을 말합니다. 이런 고난에 대한 기록은 많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0-12). 나사로의 생활이 비통한 것은 죄로 말미암은 통회하는 심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생활이 재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3. 두 사람의 죽음에서 온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인생의 종국적인 행복이 이 땅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망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 소망의 실현만이 인생의 최대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들의 행과 불행은 그들의 육신이 죽었을 때 마침내 드러납니다.

  나사로 거지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들어갔다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음부는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는 영적인 장소를 말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의 결국, 율법에서 의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외식으로 해온 사람들의 결국(말로만 ‘주여’를 찾는 무리)이 어떠하다는 것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두 사람의 경우를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시116:15).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잠14:32).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나니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하셨습니다(계14:13).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았을 때 행한 보응은 죽은 후에 이처럼 받는 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신 것입니다.

  4. 부자의 호소

  불꽃 중에서 고통을 견딜 길이 없는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가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이 부자는 일찍이 회개할 수 없었던 자신을 저주했을 것입니다. 30절 말씀에 회개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오직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하다못해 나사로의 손끝에 물을 찍어 입술에 바르게 해달라는 요구마저 거절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끝장납니다. 지옥에까지 뻗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자기 집안에 살아 있는 식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 자기가 고통받고 있는 음부로 오기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전도하여 자기 식구들, 이웃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부자와 같은 원통함이 천국에 가서까지 있을 것입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살려 자기 집으로 보내면 그들 식구들은 회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간구를 물리치셨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의 기도까지 들어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적이나 기적을 보인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하여 스스로 물어 보고 바른 신앙으로 소망의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96)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

  (누가복음 16 : 22 - 25)  


  서 론 :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이냐의 문제는 옛날부터 사람들의 입에 흥미 있게 오르내렸습니다. 성경에도 이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구약 시대의 많은 사람들도 죽었을 때 음부에 내려간다는 개념을 가졌음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러던 것이 신약성경에 와서 사람이 죽어서 갈 영적 처소가 음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곳이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한 성경에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각기 다른 모습을 띠고 나타나 있습니까? 이 문제를 우리는 잘 이해하고 깨달아 구약의 견해와 신약의 견해를 잘 이해해야 진리를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음부

  음부란 히브리어로는 ‘스올’이라고 말하고 헬라어로는 ἁδης(하데스)라고 합니다.

  구약적인 견해를 보면 ‘하데스’에 대하여는 주로 무덤이라는 말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구약에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 후에 될 일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뚜렷한 계시를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히게 되며 그것으로 우선 일시적으로 사람의 운명이 마쳐지는 것으로 알아왔습니다.

  물론 많은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일로서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냥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마르다에게 이르시기를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했습니다(요11:24). 다윗은 시 6:5에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도 사람의 죽음은 곧 음부에 내려가는 것이며 그 음부는 기억됨이나 하나님을 찬양함이 없는 적막한 곳으로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도 죽은 자가 들어갈 곳은 음부인데 그곳은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곳으로 알고 있었습니다(전9:10). 그저 덤덤하고 답답하고 적막한 무덤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처럼 기록되었다고 사람의 죽음이 정말로 그런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기록은 성경을 기록한 그 사람들의 마음에 품고 있거나 알고 있는 상태를 성령의 감동으로 거짓 없이 그토록 기록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죽음에 대한 소망의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 116:15에서 성령으로 감동하심을 받은 어떤 시인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잠 14:32에는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비록 그 계시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의인이 죽으면 무감각상태이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무덤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신약의 명시

  그런데 이 같은 음부의 관념이나 사람이 죽은 이후의 상태에 대한 계시가 뚜렷하게 나타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이 문제는 우리 주님의 증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눅 16장에서 음부가 어떤 곳임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밝혀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무덤도 아니요, 적막하거나 기억됨이 없거나 아무 감각이나 생각이 없는 곳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의인이 죽어서 가 있는 곳도 있으며 그곳은 또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주님이 이같이 밝히신 일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에 대한 소망이요, 심판 받는 자들에 대한 경종이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계시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뚜렷하고 명백하게 계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시대와 역사가 변천됨에 따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좀더 확실하게 나타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메시야의 언약에 대한 계시도 창세기에 나와 있는 계시와 그 후 선지자들을 통해서 좀더 명확하게 밝히신 계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마태복음 첫 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밝히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의 혈통과 여자의 후손에 대한 명백한 계시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1) 주님이 밝히신 음부, 하데스란 죽은 모든 영혼이 다 함께 갈 곳이 아님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 부자만이 들어갔고 나사로는 그곳에 들어가지 아니했음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데스란 곳은 악한 영이 들어가 머물고 있는 고통받는 곳입니다. 악한 영이란 부자 같은 사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거역한 인생들의 영혼을 가리킵니다. 음부에서 당하는 고통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에 들어간 사람은 절대로 이곳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기회가 영영히 사라진 곳임을 밝히셨습니다.

  (2) 아브라함의 품에 대해선, 나사로가 들어간 곳은 음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이곳의 상태를 나사로가 위로 받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음부와 동일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가 멀 뿐 아니라 큰 구렁이 끼여 있어 왕래가 불가능한 곳임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밝히신 곳은 어디를 말합니까? 주님은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이 낙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낙원에 올라가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고후12:4). 그리고 바울은 이 낙원을 사모하면서 내가 차라리 그곳에 가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원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계 6:9-11절 말씀을 보면 순교자의 영혼들이 이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는데 그 이유는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악인이 들어가 고통받는 음부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의인이 들어갈 낙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깨닫고 죽음 후에도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지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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