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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 (57-66)
 밤중소리  01-27 | VIEW : 547



  (57)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누가복음 11 : 1 - 4)  


  서 론 :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다른 기도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는 다른 기도, 자기들이 아직까지 해 온 기도와는 좀 다른 체제의 기도를 듣고는 예수님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기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씀 드리면서 기도 가르쳐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믿음이 어린 초신 자들은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기도가 어떤 것인가?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1.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배경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동일치 아니하고 약간의 차이점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가르치신 기도는 산상보훈 중에 스스로 가르치신 기도요 누가복음의 경우는 때와 장소를 알 수 없는 그런 환경에서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의 이 기사가 마태복음에 있는 산상보훈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말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주어진 여러 환경 속에서 같은 교훈을 반복하실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경우는 서언 적인 기원으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지 간구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셋째 간구인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란 간구가 빠져 있으며 결론으로 나와 있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란 부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용에도 약간의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근본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2. 기도의 구분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들의 간청을 들으시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서 그 중요한 줄거리만을 간략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처음 시작하는 기도의 첫 마디를 “아버지여”란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기도는 대화이므로 대화하는 대상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들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실 뿐입니다. 그가 우리를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심으로 우리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2). 우리가 받은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 영은 우리들에게 양자의 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롬8:14-15).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관계는 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관계로 누구든지 이 같은 사랑의 관계를 끊을 자가 이 세상에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8:39). 우리는 이처럼 아들의 특권을 가지고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첫 번째의 간구로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란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라 일컫는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으로 있었을 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참람되게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었으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대적자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분을 안 후에는 그의 거룩하심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혈육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공경합니다. 그에 대한 공경은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3) 다음에 두 번째 간구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란 내용입니다.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간구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몇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땅위에 임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처소인 하나님의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우리의 영원한 처소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한결 같은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이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8:17). 이 나라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요(마25:34), 우리에게 주신 주의 나라요(눅22:29),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입니다(약2:5). 이 나라가 속히 우리에게 임하여 그 나라에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와 실질적인 안식의 생활을 누릴 일은 우리의 간구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 세 번째의 간구가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란 내용입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일용한 양식의 공급처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류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하며 간구치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재능이나 힘으로 우리의 양식을 취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취하는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해야 하며 그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5) 다음 네 번째의 간구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란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대가로 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자를 용서해 주는 일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죄의 용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요일4: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나타난 것처럼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한 믿음으로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6) 다음에 다섯 번째 간구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란 내용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란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12). 우리들이 당하는 시험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라고 했습니다(약1:14).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에서 시험이 옵니다(눅21:34). 부하려는 자들이 시험과 올무에 걸립니다(딤전6:9). 시험이 올 때 정욕에 떨어지게 됨으로 타락이 오고,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고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딤전6: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험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이를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이 시험에서 지켜 주시고 바로 인도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결론 : 이처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오늘 하나의 기도문으로 나와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의미 없이 외우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본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드릴 때 이 기도의 줄기와 내용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58) 구하는 자가 받는 기도

  (누가복음 11 : 5 - 10)  


  서 론 :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기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결코 주문 식의 기도문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체제를 가르쳐 주신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응답 받는 기도의 모범 답안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기도를 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1. 강청하는 기도

  예수님은 기도하는 자의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강청하는 간구를 통하여 응답 받은 한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 강청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여행 중에 한 벗이 찾아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강청하는 기도를 하므로 응답 받은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여행 중에 한 벗이 왔다고 했습니다. 벗이란 형제를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또 다른 비유 중에서 말씀하신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의 경우처럼 그 사람의 진정한 이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기도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를 위한 기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내 이웃에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는 교훈이 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 생활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강청하는 기도가 이웃을 위한 기도였었다는 점을 유의하여 우리도 내 이웃을 위해 강청하는 기도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가 응답 받을 때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나도 그 축복의 대열에 함께 서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2) 그런데 그 벗이 그에게 찾아간 시간은 밤중이었다고 했습니다. 밤중이란 언제나 우리들 인생이 당하는 어려운 시련과 고난의 기간을 의미해 줍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편119:55). 이 밤은 그가 당하고 있는 인생의 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 중에 이처럼 인생의 어려운 시련의 기간인 밤중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가 없는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밤중에 자기를 찾아온 형제를 괄시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도움을 주기를 원했지만 자신에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친구를 찾아가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밤중에 만난 여러분의 이웃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만약 도와줄 힘이 없다면 하나님께 강청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런 기도에도 응답이 있으며 그 형제와 함께 나도 축복을 받게 됩니다.

  (3) 예수님은 이 같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시기를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것이 없노라 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찌 이런 기도를 물리치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를 거절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보장에 대한 이유를 “비록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않을지라도 그의 강청함을 인하여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4) 강청이란 억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되지도 않는 문제를 가지고 떼를 쓰는 기도가 강청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가지고 떼거지 식의 기도를 한다고 응답해 주실 것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응답 받을 수 있는 강청기도는 먼저 사랑이 깃들여져 있어야 합니다. 내 형제, 내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 기도하는 그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할 기도를 말합니다. 강청한다는 말은 이런 기도를 하는 일에 멈추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기를 계속하면 반드시 응답 받을 것임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2. 구하는 자가 받는 기도

  예수님은 강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교훈으로 밤중에 찾아온 한 벗에 대한 경우를 비유로 들려주신 후 결론적으로 참으로 주옥처럼 귀한 황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일이 없이는 또한 받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든 주시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 통로가 우리의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든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라고 하신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로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케 하시려는 뜻에서입니다.

  (2)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찾는 이가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찾는다는 말도 계속성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만날 때까지 계속해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를 찾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잠8:17).

  (3) 마지막으로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은 두드리는 이에게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구하고 찾는 바른 자세를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 문은 구하면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분이 그 안에 계시는 문입니다. 주인이 없는 빈집의 문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본문의 분명한 뜻은 문을 두드리되 열릴 때까지 계속적으로 두드리는 자세를 말합니다. 문안에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두드리는 자의 태도는 매우 정중하고 겸손하며 간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계시는 분이 열어 주실 때까지 그 두드림을 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기도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자가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타난 사람처럼 이웃을 위해, 사랑에 입각한 기도, 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구하는 강청하는 기도를 원하십니다. 이 기도로 여러분의 생활에 항상 응답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59)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 : 11 - 13)  


  서 론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 응답 받는 기도의 비유로 여행 중에 밤중에 찾아 온 벗에 대한 강청하는 기도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이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신다고 하는 기도의 법칙을 말씀해 주시고 결론적으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해서 받아야 할 가장 긴요하고 중요한 기도의 내용이 성령을 받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 육신의 아버지의 경우와 영의 아버지의 경우

  예수님께서 무엇이나 주저하지 말고 구할 것에 대하여 세상의 아비의 경우와 하늘의 천부의 경우를 비교하시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이 세상의 혈연적인 가족관계입니다. 그곳에는 사랑이 있고 그 자식의 장래에 대한 선한 계획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압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의 작용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생선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전갈과 같은 해로운 것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하물며 란 말씀은 세상에 있는 우리들의 육신 적인 아버지의 경우도 이러하거든 이란 말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경우야 어떠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로 말씀하고 있어서 약간의 차이점을 들어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별 문제로 제기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리 적인 문제에 혼선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이 말씀이 성령을 받기를 위한 기도인지, 아니면 성령 충만함을 위한 기도인지 그 식별이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들려주신 그 말씀 그대로를 가지고 해석해야 할 줄로 압니다.

  (1) 먼저 우리는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 마음대로 생각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세상의 제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요4:10, 행2:38). 이 선물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성경에서는 구원과 성령과는 같은 맥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구원의 선물과 성령의 선물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성령을 받으므로 구원이 확정되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릅니다(롬8:9). 롬8:9에서 이르시기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그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이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는 문제는 구원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은 생명의 영이라고 부릅니다(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란 뜻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 곧 영생을 주시는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영생을 가지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거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4) 성령은 양자의 영, 아들의 영이라고 부릅니다(롬8:15, 갈4:6).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지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아들과 양자는 같은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들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 같은 일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요 법적인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된 표현으로 하나님의 인정받지 못한 호칭인 것입니다.

  (5)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부릅니다(요14:17, 16:13).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진리의 성령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진리에로의 인도하심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며 진리에서 벗어난 잘못된 이단에 미혹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성령의 위치와 사역으로 볼 때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3. 성령은 어떻게 받는가

  우리는 이 성령을 누구나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았는지, 그렇지 못한지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증거는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분별할 길이 없습니다. 영적인 방법으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영을 좇아 생각하고 살아가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는가? 아닌가의 여부를 알려면 내가 옛날 그대로의 죽은 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영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고 영적인 생활에 관심을 두고 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각이 전혀 없고 영적인 생활에 전혀 관심도 없고 영적 열매도 없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입니다. 성령은 강권적으로 나에게 열매를 맺도록 내 안에서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1) 만약에 여러분에게 이 같은 일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성령이 여러분 안에 안 계시는 증거입니다. 이런 분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을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교회 생활을 마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영생도 구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이런 분은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는다는 말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거나 영생을 얻기 위해 사모하며 기도하는 일도 같은 의미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3) 구원을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성령을 받기 이전에도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의 강한 역사를 받게 됩니다. 만약 이 같은 성령의 사전 사역이 우리에게 없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엔 성령의 감화를 받고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 받기 위해 사모하는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몇 가지 병행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행10:44). 회개를 해야 합니다(행2:38). 순종해야 합니다(행5:32).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행8:15-17, 눅11:11-13).

  결론 : 성령을 구하고 받는다고 어떤 증거를 얻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성령 받은 증거는 확실한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고전12:3). 영을 좇아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의 변화로 알게 됩니다(롬8:5-8).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고전2:10-12).






  (60) 분쟁과 사단의 나라

  (누가복음 11 : 14 - 20)  


  서 론 :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벙어리 귀신에 매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 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벙어리 귀신이란 귀신이 벙어리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벙어리가 되게 만든 귀신을 의미합니다. 귀신은 사람의 몸에 들어와서 혹은 벙어리로 혹은 소경으로 고통을 당하게도 하며, 이적을 행하는 일도 하고, 미혹하기도 하며, 가르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계16:14, 막9:25, 행16:16, 딤전4:1). 이 일로 인하여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형태의 무리는 그 하시는 권능을 기이히 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또 다른 한 형태의 무리는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1. 바알세불을 힘입었다는 주장

  예수님은 일단의 무리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저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신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1) 이들은 왜 예수님의 이 같은 권능의 행하심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까. 지금 이들 바리새인의 한 무리들은 친히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의 명령에 떨면서 쫓겨 나가는 일과 귀신에게 눌려 있었던 사람이 온전한 몸으로 고침 받은 사실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부인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이 같은 권능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 그들은 부득이 이 문제에 대한 어떤 결론을 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장로의 유전을 무시할 뿐 아니라 자칭 하나님이라 하여 참람한 말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이 같은 권능의 역사가 결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사단의 역사일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을 것입니다.  

  (2) 그래서 그들은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바알세불이란 무엇을 말하나? 이 어원은 구약 열왕기하 1:1,3,6절에 나옵니다. 이곳에서 바알세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신은 에그론의 신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하시아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부하를 에그론에 보내어 그들의 왕인 바알세붑에게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이 바알세붑이 신약에 와서 바알세불로 고쳐서 부르고 있습니다. 바알세불의 바알이란 말은 소유주, 주인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세불이란 말은 더러운 오물로 똥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신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모욕적인 말을 첨가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신약에 와서는 귀신의 왕이라고 불려졌고, 본문에서 예수님은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하시는 말씀 중에서 이 자를 사단과 결부시켰습니다. 귀신은 악령의 존재들이므로 그들의 왕이라면 사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이적 행하심을 부인하지는 못하고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하는 사단의 권능이라고 비방하면서 예수님을 정죄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시기와 미움에서 나온 고의적인 비방이었습니다.

  (3) 이들 중에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온 표적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입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하나님의 표적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어느덧 표적을 증거로 삼으려는 악한 습성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곳에 기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이 예수님께 구한 표적은 적어도 모세가 행한 것 같은 것을 구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고 하는 말에서 그들의 메시야된 표적을 구한 저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요6:31).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로서 온 수 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표적을 보였는데도 그들은 그 표적에 승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현상을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라고 진단하셨습니다.

  2. 바알세불의 분쟁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 같은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처럼 이르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1) 사단이 귀신을 쫓는 일은 하나의 분쟁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어쫓는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끼리의 농간이나 거짓된 사기 극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경우처럼 결정적인 대적의 상태와 내어쫓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만약 사단의 나라에서 생길 수 있다면 그 나라는 분쟁하는 나라가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사단의 나라는 스스로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도 엄한 조직을 가진 그들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규율이 엄하고 질서가 있으며 그럼으로 사단이 그의 부하인 귀신을 내어쫓는 일 같은 분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시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이 같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분쟁의 교훈에서 나라와 집에 비유하셨습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며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경우도 역시 이 원리가 적용된다고 결부시켜야 할 것입니다. 가정의 경우를 보아도 가정에 분쟁이 일어나면 그 가정은 무너져 버리게 됩니다. 교회 역시 분쟁이 잦은 교회는 무너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분쟁을 이기는 능력이 사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고 정죄 하셨습니다. 너희 아들들이란 바리새인 중에 속한 사람들로 아마 그 당시 그들 중에도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이나 그들의 경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가 매 일반이라면 그들의 자녀가 행하는 일에 대해서만은 어떤 근거로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들 너희 자녀들이 오히려 너희 말에 대한 심판자가 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일련의 반격적인 책망에 대꾸할 말이 없었습니다.

  (4)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하시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일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로 이루어집니다. 복음이 전파됨으로 이 땅위에는 그의 많은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입니다. 사단의 나라에서조차 분쟁이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분쟁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터전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일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분쟁의 세력은 진리를 대적하는 사단입니다. 진리에 굳게 서서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견고히 세워 나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61) 빈집의 위험

  (누가복음 11 : 20 - 26)  


  서 론 :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와 유대인의 하나님 나라와는 완전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의 나타남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백성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곧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며 복음의 확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그의 사역으로 인한 복음의 확장에 그 의미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1. 강한 자의 무장

  예수님은 21절 이하에서 강한 자의 무장과 더 강한 자로 인한 무장해제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지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고 있는가에 대한 해석이며 그 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킨다고 하신 말씀은 사단이 그의 나라를 견고히 지키는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단은 인류를 그의 나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하여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진자는 이기는 자의 종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후2:19). 죄에게 진 아담은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한 자로써 우리 인간을 종으로 삼아 자신의 무장으로 그의 소유를 지키는 그의 무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 사단은 그의 나라를 지키는 일에 율법이라고 하는 무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원래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의 표준으로 주신 것인데 의를 이루지 못하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사단은 이 율법으로 인간을 꼼짝못하게 얽어 매놓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정죄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주면서도 죄에 이끌어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3) 그뿐 아니라 사단은 사망이라고 하는 최대의 공포의 무기를 가지고 그의 소유물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망이란 원래가 죄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죄인들은 이곳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23). 이 사망의 권세야말로 마귀가 휘두르는 강한 무기 중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것입니다(히2:14-15).

  2. 강한 자의 무장 해제

  이처럼 사단이 강한 자로서의 완벽한 무장을 하고 인간을 지배하고 지키고 있지만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그 무장을 해제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더 강한 자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이르신 말씀이며 지금 그 더 강한 자의 나타나심으로 이 세상 임금으로 있는 사단의 지역을 침범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더 강한 자로 비유된 것은 그는 죄를 이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세상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원래가 죄의 종의 신분이 아니십니다. 그 이유는 그는 아담의 혈육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으로 태어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1:14).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단 한번도 죄를 범하신 일이 없으십니다(요3:5). 그리고 그 분은 죄 가운데 놓여 있는 인간의 죄를 사유하심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고(갈1:4),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제물이 되셨고(히 10:12), 그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벧전2:24).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 속박 받고 있는 죄인들을 해방시키심으로 더 강한 자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2) 사단이 율법이란 무기로 인간들을 정죄해 온 이 율법의 권능도 예수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율법이 죄가 없으신 예수를 정죄할 수 없었고 강한 자의 권능으로 죄에서 해방시킨 그의 백성들을 정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롬8: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율법의 권능의 범위는 점점 축소되어 갑니다. 복음으로 전파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율법이 정죄하는 지역을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3) 사단이 큰 권세로 무자비하게 휘두른 사망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권세가 꺾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망은 사단의 만능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새로운 권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곳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히2:14-15). 이제 사단은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김으로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기고 저의 재물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4)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강한 자에 의해 쫓겨나간 귀신이 다시 그 집에 찾아 들어 올 수 있다는 경종을 하심으로 사단의 간교와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성을 경계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간 것은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권세가 그에게 나타나 죄와 율법과 사망의 권세로 지배해 온 사단의 권세가 내어쫓긴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가 다시 옛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로 인한 끊임없는 사단의 유혹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에 대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벧전5:7-8). 그러면 쫓겨나간 집에 다시 들어온다고 하신 빈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옛 주인이 내쫓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의 생활에 소홀할 때 이 옛 주인이 엿보게 되며 다시 들어와 나를 사로잡으려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12).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채워 그 말씀의 능력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일에 게을리 할 때 사단은 다시 죄의 종으로 삼으려 넘보는 것입니다.

  결론 : 만약 소제되고 수리된 집안에 주인이 안보일 때 그의 영적인 위기가 닥쳐오는데 이 기회를 포착한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올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는 생활, 성령 안에서의 순종의 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62) 참으로 복이 있는 자

  (누가복음 11 : 27 - 28)  


  서 론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인파들이 들끓었습니다. 그 무리 중에는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11장에서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은 둘러선 무리들에게 큰 감동을 준 모양입니다. 그 중에서 한 여인이 큰 소리로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고 소리쳤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같은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에게 복이 있다고 한 말입니다. 참으로 이 여자의 외침처럼 마리아야말로 만대에 복이 있는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복은 마리아 자신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고 했습니다(눅1:48).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이란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이십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죽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단절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죄로 죽게 된 인간을 불쌍히 보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을 불쌍히 보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셔서 대화를 모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

  이 같은 하나님의 계시는 무언중에 만물 가운데 표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자연계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자연의 신비스러움을 관찰할 때 그 창조의 오묘하심에 감탄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롬1:20). 그러나 이 계시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들려주시기에 이르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계시”라고 부릅니다. 이 계시만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특별계시로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그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 1장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1:1). 하나님은 그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감동을 주신 선지자들로 그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려 오셨고, 그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의 아들로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이 땅위에서 하신 모든 그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권위를 가지실 뿐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처럼 나타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그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뜻하며 성경에는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셔야 할 모든 말씀을 이처럼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모두 나타내셨기 때문에 다른 말씀으로 전하실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완성된 우리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또 다른 계시로 주시는 경우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옛날에는 유명한 철학자들 밑에 많은 문하생들이 몰려 왔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로부터 지혜로운 말을 듣고 무엇인가 인생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런데 바로 지혜 자이시며 명철 자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을 듣는 일이야말로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으려면 영이 살아야 하고 생명이 소성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고전12:12). 주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마13:16).

  (2) 말씀을 받는 마음이 좋은 밭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는 마음에 따라 그 결과에 놀라운 차이점을 드러내 놓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 간직하는 장소가 마음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정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심령만이 말씀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씨앗이 마음에 심겨져 결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돌밭은 말씀으로 인한 시험 중에 넘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가시떨기 밭은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결실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30배 60배로 100배로 결실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듣고 깨닫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 복이 있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말씀을 듣는 자는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벌써 그 사람에게 영적 생명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 말씀 안에서 살게 되고 그 말씀의 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약속을 말씀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의 언약이 말씀에 나타난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을 때 누구에게나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여러 가지 종류의 복을 찾지만 진실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얻는 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우리 인생의 참 평안과 형통도 이 길로부터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않고 이 말씀의 가치를 인정치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약속하신 축복의 대열에서 영원히 제외되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63) 예수님과 요나의 표적

  (누가복음 11 : 27 - 32)  


  서 론 : 예수님에게는 메시아로서의 공인 장이 두 가지가 있으십니다. 하나는 그의 말씀입니다. 그의 말씀은 곧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해 주는 움직일 수 없는 공인 장이 됩니다. 다른 또 하나의 공인 장은 그의 권능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권능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시는 권능을 수 없이 보아 온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향하여 표적을 보여 달라고 도전해 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정죄 하시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 주지 아니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너희에게 메시아된 표적을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12:39절 말씀을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세대는 악한 세대였습니다. 그들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메시아된 표적을 나타내 보라고 유혹하고 강권했습니다. 그러면 이들 유대인들이 보고 싶어한 메시아된 표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모세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고 했습니다(요6:30-31). 말하자면 그들은 모세처럼 좀 엄청나고 모든 유대인들이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그런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표적의 증거는 악한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입니다.

  (2) 인류의 종말에도 이처럼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종말에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따르지 않고 표적을 따른다고 경종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미혹의 영으로 미혹하는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살후2:12). 이 같은 거짓 표적은 종말에 등장할 거짓 선지자에 의하여 그 최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이자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고 우상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우상의 입으로 말을 하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계13:13-15).

  (3)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시는 완벽한 표적을 여러 가지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5:36-39절에 걸쳐서 증거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메시야로서의 확증 적인 증거를 여러 가지로 증거 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요한의 증거를 들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메시아를 증거 하는 사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에서 활약한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활동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증거란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중에 너무나도 엄청난 기적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태내신 일,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 열 명의 문둥병 자를 고치시고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들을 고쳐서 눈을 뜨게 하신 일등 기록된 표적만도 놀라운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들이 상고하는 성경도 나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는 줄로 알고 성경을 상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해 주는 하나님의 증거임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2. 요나의 표적과 예수님의 증거

  예수님은 이처럼 패역한 그들을 향하여 이상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요나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시는 표적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신 명령에 불복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니느웨 성과는 정반대 방향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이 요나로 인하여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요나는 풍랑을 초래케 한 장본인으로 제비에 뽑혀 바다가운데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로 인하여 그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이 물고기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낸 후 물고기 배에서 토해냄을 받아 니느웨 성에 들어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고기뱃속에 들어가 죽은 자와 같이 사흘간 있다가 다시 살아 나온 사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2) 이 같은 요나의 사건은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대한 하나의 대표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참으로 오묘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과 징조와 표적을 그리스도에게 맞추어 지도록 계획하시고 간섭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그가 당한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되신 유일하신 표적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 사건이며 이 사건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요 이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고전14:3-4).

  (3) 예수님은 이처럼 표적을 구하기를 좋아하며 불신 적인 악한 세대에 대하여 정죄 하시면서 심판 때에 남방여왕이 이 세대를 정죄 할 것이며,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남방여왕은 솔로몬 왕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하여 땅 끝 먼 곳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이 말씀은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고 그 말씀을 거역한 세대는 마땅히 남방여왕에 의해 정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니느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요나의 전도를 통하여 회개함으로써 하늘에서 내릴 불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요나 같은 선지자의 전도에도 이처럼 회개해서 구원을 받은 이방인들이 있거늘 하물며 요나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 하늘의 메시지를 전해도 이를 거역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들 패역한 무리들은 마땅히 그 당시 니느웨 사람들에 의해 심판 날에 정죄를 당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솔로몬이나 요나와 같은 왕이나 선지자와는 비교조차 하실 수 없는 높고 높으신 존재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그 말씀을 거역하고 그 복음을 거역하고 그 권능의 증거를 거역하고 다른 표적을 보여 주어야 믿겠다고 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패역한 무리들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결론 : 지금 우리는 패역하기 이를 데 없는 악한 세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세대 사람들이 구하는 표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증거를 찾고 소망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생의 말씀을 뒤로 던지고 표적이나 따르고 이적이나 쫓아다니는 믿음은 패역한 세대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 사람이 구하는 표적을 구하지 말고 말씀의 표적을 굳게 잡고 소망으로 전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64) 몸의 등불인 눈

  (누가복음 11 : 33 - 36)  


  서 론 : 사람의 눈은 그 사람의 마음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눈에 비췬 대로 마음에 영상 됩니다. 우리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렌즈는 그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렌즈에 물건이 나타난 그대로 필름에 영상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도 그 사람의 등불로 비유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방을 비취는 등불과 사람의 마음을 비취는 눈과 비교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온 몸을 비췰 것을 교훈해 주셨습니다. 등불의 광선이 너희를 비출 때와 같이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1. 몸의 등불인 눈

  예수님은 등불과 사람의 눈을 비유적으로 비교하시면서 영적인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등불을 방안에 켜 두는 이유를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동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까?

  (1) 이 눈은 우리의 육적 눈을 가리킨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육신의 눈의 기능은 몸을 밝게 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어둡게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9:39). 보는 자들이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눈은 두 가지 모두 함께 뜰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을 바라보는 육신의 눈도 뜨고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의 눈도 뜰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가지가 뜨여지면 다른 한가지는 감겨진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이 열려 세상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소경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눈이 소경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감겨진 사람, 다시 말하자면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눈을 열어 신령한 세계를 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은 그의 마음과 몸 전체를 어둡게 합니다.

  (2) 예수님이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눈은 신령한 영적인 눈을 말합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성한 눈은 곧 마음의 눈, 신령한 눈, 영적인 눈을 말합니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은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 몸이 성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죄를 떠난 생활, 순종의 열매를 맺는 생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생활을 말해줍니다.

  (3) 이 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등불처럼 빛을 비추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어 그 눈을 어둠에서 빛을 발산하게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시119:105).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눈을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눈을 밝히지 못한 사람은 실인즉 소경 된 사람들이요 이들의 몸은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4) 이 눈은 자기의 죄를 바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등불이 비추어야 그 빛을 따라 사물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 빛이 우리의 몸에 비췰 때 우리는 우리 몸 속에 숨겨 있었던 온갖 더럽고 추한 죄악이 노출되어 그 죄악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눈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안에 죄가 존재하고 그 죄가 자기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죄의 지배로 자기가 죄의 종의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눈이 밝아졌을 때 이처럼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딤전1:15).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비추어 자기들은 의롭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눈이 어두웠던 그들은 자기들 몸 안에 있었던 죄를 찾아 낼 수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는 눈은 빛이 없기 때문에 자기 속에 죄가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이 눈은 또한 성령으로 열어 주시는 눈입니다. 성령의 감동이나 성령의 사역은 우리들에게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고전2:12).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시는 성령은 우리로 신령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십니다.

  2. 나쁜 눈

  34절에서 말씀해 주시기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고 말합니다.

  (1) 하와의 눈이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뱀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습니다. 오히려 뱀의 말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하지만 사단의 말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사단은 어두움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멀리하고 오히려 사단의 말에 미혹 받으면 우리의 눈은 당장에 빛을 잃게 되어 우리 몸을 어둡게 할 것입니다.

  (2) 발람의 눈이 그러했습니다. 발람은 자기 직분을 잊고 발락 왕의 물질적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우리 마음의 탐심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탐심으로 어두워진 눈은 온 몸을 어둡게 하여 결국 발람의 길을 걷게 되며 발람의 결국처럼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아간의 눈이 그러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 성에 들어갔을 때, 그 성에서 약탈한 물건 중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여 바쳐야 할 금 덩어리와 은 덩어리와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을 몰래 땅에 묻어 숨겨 둔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참패케 되었으며, 이 일이 밝혀지자 아간과 온 가족들과 그들의 소유인 짐승에 이르기까지 다 돌로 쳐죽이게 하고 불사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물질에 빠지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되고 그런 결과 아간처럼 그 결국이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들을 살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후13:5). 빛이 없으면 회개 생활을 못합니다. 회개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몸이 어둡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소경도 눈을 떠야 합니다. 몸이 어두운 사람은 영적 사랑도 시들어 버려 미지근하게 변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한 감각이 예민치 못하여 죄를 범해도 그 마음에 성령의 탄식이 없다면 이 사람은 이미 그 몸의 구석구석이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속히 회개하여 그 몸에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들 몸에 결코 어두움이 깔려 있어서는 안됩니다. 등불의 광선이 사면에 비췸같이 밝은 빛이 온 몸에 비취게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밝은 눈으로 온 몸을 살펴서 죄를 끄집어내고 흠과 점이 없도록 항상 빛으로 꽉꽉 채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을 밝게 보는 눈을 감고 심령한 눈을 열 수 있도록 힘쓰는 생활이 필요함을 깨닫고 이 빛을 소유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65)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화

  (누가복음 11 : 37 - 44)  


  서 론 : 예수님은 어느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고 그 집에 들어가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시장하셨고 그를 초청한 바리새인은 나그네를 대접하려는 심정이 아니라면 아마 그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자기 집에 초청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윽고 방에 음식상이 들어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아니하시고 음식을 대하셨습니다. 이 일이 그 방안의 분위기를 흐려 놓았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이 바리새인은 주님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음식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인의 외식 적인 신앙을 몹시 책망하셨는데 그 책망이 화의 선언으로 나왔습니다.

  1.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따라 정결의 예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집에 돌아와서는 반드시 물을 몸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들기 전에도 물론 손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씻지 아니한 손으로는 음식을 먹지 아니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이 같은 생활이 하나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같은 정결케 하는 의식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음식을 드시려고 하는 것을 본 이 바리새인이 이상히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생활양식에 구애를 받으시면서 살아가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완전한 의를 이루셔서 우리로 그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장로의 유전은 율법이 아닌 사람의 법으로,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인위적인 법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유전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범하여 정죄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을 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의 항의를 받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불만을 토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15:1-6).

  (1) 예수님은 자기를 초청한 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너희는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너희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잔과 대접의 겉이란 그들이 깨끗이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외형적인 겉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정결케 하는 예식은 원래가 잔과 대접을 물로 씻는 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사람에게 적용시켜 물로 씻으면 사람도 정결케 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잔과 대접은 물로 씻으므로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겉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속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겉은 이처럼 물로 세척하여 깨끗하게 보이고, 정결케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의 정결은 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15:11-20). 바리새인들의 속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셨으니 이런 것들이야말로 물로 씻을 수 없는 더러움입니다. 탐욕이란 말은 원어로 해석하면 많다는 말과 가진다는 말의 합성어가 됩니다. 욕심이 한이 없어서 오직 가지기만을 욕심 내는 마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안에 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탐욕과 악독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죄 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이란 바로 그들이 소유하고 두 손으로 꽉 붙들고 있는 돈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나 이웃에게 대단히 인색했습니다. 돈 많은 부자 청년의 경우도 그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고민한 나머지 주님을 포기하고 세상 길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물질을 비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탐욕과 악독이 사라지고 깨끗해 질 것입니다.

  2. 공의와 사랑을 버린 바리새인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가증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신랄하게 공격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라고 하신 화란 말은 “오, 슬프도다”는 의미로 그들이 이 같은 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임할 비극적인 종말을 슬퍼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의 외식 적인 신앙은 집 뜰 앞에 심은 운향이나 채소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드림으로 철저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그들의 생활과 마음에서 공의를 버렸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남에게 보이려는 그들의 신앙은 공의도 사랑도 버렸으며 다만 눈에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외형적인 십일조 생활만큼은 철저하게 계속해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드린 헌물이나 십일조도 그 실인즉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홀히 여기는 가증한 방법을 써 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말1:8).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의미심장하신 말씀을 곁들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지적하신 이것도 행하라고 하신 “이것”이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저것”이란 그들이 철저하게 행한다고 하는 십일조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화를 내리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에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평토장한 무덤 같다고 하셨습니다. 평토장한 무덤은 눈에 잘 띄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아름답게 꾸밉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더럽고 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겉으로는 외식으로 꾸미기 때문에 그 겉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속에 있는 이 더러운 탐욕과 악독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외식 적인 신앙생활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악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함을 보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66) 율법사에 대한 책망

  (누가복음 11 : 45 - 54)  


  서 론 :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을 하실 때 그곳에 있었던 한 율법사가 주님을 향하여 항의를 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율법사란 바리새인들 중, 한 무리들입니다. 서기관들이나 율법사들은 다 바리새파에 속한 무리들이기 때문에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실 때 그렇게 되면 율법사인 자기들까지 그런 책망을 듣는 것이 되니 그같은 일은 자신들에 대한 인격적인 모욕이라고 분히 여겼던 것입니다. 율법사란 서기관들과 쌍벽을 이루는 율법에 전문적인 지식인들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 상당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의 항의를 들으신 예수님은 이제 율법사들을 향하여 공격의 화살을 돌리신 것입니다.

  1. 남에게만 짐을 지우게 하고 자신은 안 지는 지도자들

  율법은 무거운 인생의 짐입니다. 율법이 인생의 짐이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으려고 힘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사람이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의롭게 될 수 없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니 그것이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의 짐에 매어 허덕이다가 결국 그 율법의 정죄를 받아 멸망 받는 인생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생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또 무엇이 부족한지 수백 가지에 달하는 장로들의 유전을 율법의 혹으로 붙여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짐을 그 백성들에게는 지우지만 자신들은 한 손가락도 이 짐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남은 가르치되 자신들은 배울 줄을 몰랐습니다. 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강요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외식 적인 행동과 그들의 생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하나님의 종들이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자기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순종을 강요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열매를 맺어 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사에게 내리신 주님의 책망을 똑같이 듣게 될 것입니다.

  2.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무리들

  율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율법의 모든 지식을 그들이 독점하고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지식으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지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들에게 그 지식이 무익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일에 대하여 성경 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곳으로 찾아가지는 아니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천국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유대교에서 출교 했을 뿐 아니라 정죄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으로 참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하는 백성들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왜 믿음이 없었습니까? 율법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행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행하므로 의롭다함을 얻는데 율법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율법대로 살려고 그 율법을 행해도 결과적으로는 율법을 범하게 되며 죄인의 비참한 모습으로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3:20).

  바울은 율법으로 의를 얻고자 힘썼으나 그가 얻으려는 의는 얻지 못하고 죄를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이처럼 애처롭게 부르짖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면 왜 바울은 율법을 좋아하고 그 법대로 살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죄를 깨닫는 일인 것입니다.

  3.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도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시고 그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습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다고 하신 것입니다(47-48).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주님은 그 조상들이 바로 너희들의 조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그리고 너희는 그 위에 그 무덤의 수효를 더 쌓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란 지난날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죽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적은 수효의 선지자들을 죽였지만 지금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위치에서 그들이 걸어온 길을 답습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잘못된 교훈과 율법의 횡포로 자기 백성들을 사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으니 그들의 이런 일이야말로 무덤 위에 무덤을 더 쌓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쌓는 일은 죽이는 일보다 더 회생의 수효가 많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이 남을 잘못 가르치는 일은 많은 영혼을 죽이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절정에 달하여 급기야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와 그의 증인들까지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위해 최후의 의인으로 보내신 그들의 메시야를 그들의 손으로 죽였으니 그 죄에 대한 보응은 어느 세대 사람들보다 크며 그들은 그 죄를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백성들의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는 일은 중요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진 자들입니다. 여기서 지식의 열쇠라고 표현하신 말은 백성들에게 가르칠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에게 이런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식을 올바로 활용하지 못하므로 자신들도 의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까지 그 길을 막았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주이신 예수를 비방, 정죄 하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출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자기 조상들보다 더 중한 죄를 짓고 있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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