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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장 (24-30)
 밤중소리  01-27 | VIEW : 656

  (24)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6 : 1 - 11)  


  서 론 : 율법에서 안식일에 대한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바리새인들로부터 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안식일에 대한 다른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손으로 밀 이삭을 비벼먹는 것을 바라본 바리새인들이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냐”고 항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건을 계기로 너무나도 값진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1. 이삭을 지른 일과 안식일의 시비

  바리새인들이 공격하는 공격의 목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이삭을 자른 일이나 그 이삭을 손으로 비빈 일이나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셨지만 이곳에서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지 아니하시고 이보다 더 큰 일도 때로는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윗의 경우를 예를 들어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경우를 예로 제시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논쟁을 잠재우려면 그들의 조상과 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다윗을 등장시켜야 하겠기에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 다닐 때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소년들과 함께 매우 시장하였으므로 아히멜렉에게 청하여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이 가지고 있었던 떡은 성전에 비치된 진설병으로 이 떡을 율법에 따라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떡을 심히 시장하여 죽게된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먹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처럼 예로 들어 말씀하신 다윗의 이 같은 행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무엇이라고 답변할 길이 없었습니다.

  2.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께서 이들 바리새인들에게 결론적으로 들려주신 말씀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놀라운 폭탄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1)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씀은 천지창조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사역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창2:1).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셨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주인이 아닌 존재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당사자란 뜻입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창2:3).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에 안식일의 규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그 예수님은 또한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3) 안식일의 주인이란 안식일을 지금도 주관하시고 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은 그 의미가 인간에게 주실 영원한 안식에 있었습니다. 이런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누릴 인류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이 안식일이 율법에 규정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장차 이루어질 참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히4:4-11).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의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참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의 안식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안식의 모습이며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주님의 부활의 날을 주의 날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이런 사건이 있은 후 또 다른 안식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오른손 마른 사람을 앞에 놓고 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기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을 지키는 일에 구약적인 안식일의 규례에 얽매어 율법적인 안식일을 지키려는 비 복음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오른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즉시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권능과 능력을 보고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이 녹아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의논했습니다. 완악한 마음은 회개도 거절하고 순종도 거절하고 성령의 감동도 거절합니다. 내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살피고 돌보아야 합니다.






  (25) 사도를 택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6 : 12 - 16)  


  서 론 : 예수님의 공생애 중 12사도를 택하신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복음사역의 주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중심으로 그의 공생애를 지내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일에, 확신을 주시는 일에,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그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의 많음보다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할 정예부대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들에 대한 제자 훈련은 과연 예상대로 적중하여 온 세계에 복음의 불을 지피는 일에 성공하실 수 있었습니다.

  1. 산으로 가사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12사도를 택하신 일은 공생애에 들어가신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입니다.

  (1) 예수님이 산으로 기도하시러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에서 그의 기도는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습관화된 그의 생활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눅22:39).

  (2)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는 무릎을 꿇는 기도였습니다(눅22:41). 예수님의 기도는 힘쓰고 애쓰는 기도였습니다(눅22:42). 이날 밤 예수님이 오래도록 기도하신 기도의 제목은 12사도를 택하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이토록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이유 중  하나는 가룟 유다로 말미암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2. 12명의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이미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기도하셨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사도라고 하는 막중한 직분을 수여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 처음에 사도로 지명 받은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몬에게 베드로라고 하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다시없는 영광의 이름입니다.

  헬라어로 베드로의 이름은 ‘페트로수’로 이 ‘페트로스’는 바위란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바위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이것은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교회의 한 구성원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름과는 달리 변덕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고백했지만 얼마안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주님을 죽기까지 부인하지 않을 것이란 그의 고백이 얼마안가 주님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   다. 자기 발을 씻길 수 없다고 했다가도 금방 손과 머리까지 씻겨달라고 말했습니다.    (2) 다음에 사도의 이름에 오른 제자는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이 안드레는 베드로를 주님께로 인도한 제자였습니다(요1:41-42). 한 사람의 전도가 이처럼 중요한 결실을 거둘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다음에 택함 받은 사도는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 두 제자는 형제들로 예수님은 이들에게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선천적인 격렬한 성격 때문에 받은 이름입니다. 야고보는 12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의 영광을 누린 사람입니다(행12:2). 그런데 반면에 요한은 지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사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4) 다음에 빌립입니다. 빌립은 벳새다 출신으로 베드로와 안드레와 동향인입니다. 이 사람은 나다나엘을 만나 전도하여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5) 그 다음 순서가 바돌로매입니다. 이 이름은 돌매의 아들이란 뜻인데 이 제자는 나다나엘이란 견해가 지배적입니다(요1:41, 21:2).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한 그 사람입니다.

  (6) 다음에 마태입니다. 이 사람은 세리로 예수님이 세관을 지나실 때 세관에 앉아 있는 그를 보시고 부르신 제자로 그는 이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눅5:28). 그의 세리 직에 썼던 이름은 레위입니다.

  (7) 다음에 도마입니다. 도마란 이름은 우리에게 의심이 많은 제자로 연상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이라도 도마의 처지에 있었다면 그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한편 헌신적인 뜨거운 면도 있었습니다(요11:16). 철저하게 캐묻는 그의 성품은 그에게 좋은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8)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택정 받았습니다. 이 제자를 작은 야고보라고도 부릅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9) 셀롯이라고 하는 시몬이 선택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가나안인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10) 야고보의 아들 유다도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유다의 이름이 다른 복음서에는 ‘다대오’로 불려집니다(요6:70-71).

  결 론 : 다음에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나옵니다. “예수를 배반한 자” “배반자”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 등입니다. 그는 끝내 마귀의 도구로 사용된 인물입니다. 유다는 은혜를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그는 탐심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결국 버림을 받았습니다.






  (26) 복이 있는 자  

  (누가복음 6 : 17 - 23)  


  서 론 : 누가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을 간략히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은 마태가 마태복음에서 기록한 내용보다 간략하고 순서 면에서도 달라져 있는 곳도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사건이 천편일률적인 문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께서는 기록한 사람의 성품이나 학식이나 타고난 문장력까지 주장하여 그 뜻을 전하게 하셨는데 다만 성령이 원하시는 뜻대로 쓰게 하셨습니다. 마태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나타내셨고 누가의 경우 역시 누가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1. 예수님 주변에 몰려 온 허다한 무리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게우신 후, 산에서 평지로 내려오셨을 때 허다한 무리들과 많은 백성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1) 이들은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는 무리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따른 목적이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병을 고치려는 의도에서 따랐고 하나는 예수의 말씀도 들으려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말씀을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이상 값진 보화가 없는 것입니다.

  (2)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무리들 중에는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다 고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큰 혼잡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이처럼 몰려든 것은 주님의 몸을 만지면 그 몸에서 신기한 능력이 나와 모든 사람의 병을 낫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복이 있는 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론은 언제나 신선하고 지혜롭고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고 했습니다.

  (1)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란 말의 뜻입니다. 여기서 복이라고 하신 말씀은 ‘마카리오스’로 이 말의 뜻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종교적인 의미의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거나 체험할 사람들이 그의 삶 중에서 누리는 기쁨과 만족을 뜻합니다. 반면에 세상적인 복에 대한 헬라어는 ‘유다이몬’으로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사람들의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가난이란 말도 영적인 말로 풀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질적 가난이 복이라고 말씀하고 계심이 아닙니다(잠30:9). 영적 가난과 이 가난을 통해서 받을 영적 부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이란 마음의 가난으로 세상의 정욕과 탐심을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벗어난 마음을 말합니다.

  (2)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린 자란 심히 배가 곺은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 나타난 복 역시 ‘마카리오스’로 영적인 복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와 주린 자는 일맥 상통하는 말 같지만 가난이란 소극적인 반면에 주림은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배고픔을 당한 사람은 배를 채우기 위해 먹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죄에 부른 상태에서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배부름은 그 결국이 사망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부터는 죄를 버렸습니다. 그 주린 인생 안에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의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는 뜨거운 열망입니다. 이처럼 의에 주린 자의 복으로 주님은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는 자란 애통하는 자를 말합니다. 운다는 말은 애곡 또는 통곡함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죄에 대한 회개로 자신의 마음을 찢는 괴로움을 말합니다(욜2:13). 이들에게는 웃을 수 있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죄의 은총이나 마음의 평안은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생애에 어려움이 있어도 그런 생활이야말로 복이 있는 생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자를 인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인하여 란 말은 때문 에란 뜻입니다. 인자로 인하여, 예수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벧전4:15).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이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신 일인데 이 일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롬8:17).

  결 론 : 주를 위해 받는 고난,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란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받는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늘에서 받을 우리의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27) 화 있을 자들  

  (누가복음 6 : 24 - 26)  


  서 론 : 예수님은 먼저 복이 있는 자가 누군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다음에 이와 반대적인 입장엣 화 있을 자에 대해 경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받는 자”에 대한 복에 대해 말씀하신 후, 이제 그와는 정 반대로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 받는 자”에 대한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받을 자의 자격은 모두 영적인 뜻을 의미하고 있는 반면에 화 있을 자의 자격은 모두 현실적인 그들의 생활을 반영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1. 부요한 자가 받을 화

  부자가 받을 화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복은 위로를 받는 것인데 그 위로란 곧 하나님의 나라의 소유를 말합니다. 그러나 부요한 자는 위로를 이미 받았기 때문에 다른 위로가 돌아갈 수 없습니다.

  (1) 부요하다는 말은 물질적 풍요를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재물의 축적이나 물질적 풍요에 대하여 많은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막10:24-25).

  (2) 물질이 풍요한 자가 화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한 부자의 경우를 비유로 들려주신 일이 있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부요에 대하여 기뻐하고 자만하며 찬양했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인색했습니다(눅12:16-21).

  (3) 예수님은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화라고 선언하신 저주는 헬라어로 ‘우아이’란 말로 ‘오 슬프다’란 절망적인 탄식이 되겠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돌아갈 이 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날마다 연락하며 호화롭게 지낸 한 부자의 죽음에 대하여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22-25).

  2. 배부른 자가 받을 화

  예수님은 배부른 자가 받을 화로써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1) 배부르다는 말은 자기 생애의 만족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생애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노아나 롯의 때의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들은 홍수가 나서 멸망할 때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마24:37-38). 그리스도인들도 이처럼 세상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할 때 배부른 자가 받을 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들이 받을 화에 대하여 “너희가 주리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주린다는 말은 심히 배고픈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환난의 날에 이 같은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3. 웃는 자와 칭찬 받는 자가 받을 화

  (1) 웃는 자란 세상의 환락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웃음은 자기 인생의 기쁨을 말하는데 이들은 그 기쁨을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나 사랑하는 생활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취미나 풍습이나 죄악된 생활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인생을 성령으로 심지 않고 육신으로 심는 자들입니다(갈6:8). 이들은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며 그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에 그들의 앞날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2) 이들은 애통하며 우는 화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애통은 슬퍼하는 모습이며 운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슬퍼하는 애곡의 모습입니다. 이 같은 화는 그들이 최종적으로 받을 그들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 같은 애통함과 슬픔을 당할 것입니다(계6:15-17).

  (3)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의 생애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언제나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의견에 접근하며 그들을 따라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이런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했습니다(갈1:10).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면 거짓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 중심으로 예언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방법을 버리고 사람의 방법을 따라가야 하며 사람들의 생각이나 여론을 의식하여 담대한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이 같은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많은 사람의 참 생명을 죽였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화도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계2);10).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생각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따를 때는 그에 대한 응분의 화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생활을 버리고 육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8) 온전한 사랑  

  (누가복음 6 : 27 - 35)  


  서 론 :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 나타내야할 사랑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에 비해 얼마나 미미하고 부족한 것인가에 대해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진실한 고백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표준

  예수님이 27-28절에서 하신 말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여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선언이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표준으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이 표준에 근거하여 결실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1) 이 말씀은 사랑의 폭탄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한계선을 훨씬 뛰어넘은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유대인들이 그들의 생활에 적용해온 도덕률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은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뒤집어 엎어놓는 듯한 충격을 주고도 남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그 누구로부터도 이런 교훈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2)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원수란 미움과 증오의 대상을 말합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예수님이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8-10).

  (3)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미세오’로 증오하는 대상, 몹시 싫어하는 상대에 대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선을 잘 대해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4)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퍼붓는 다른 사람의 저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자기에게 미칠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잠26:2). 반면에 자기를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해 주면 결과적으로 그 축복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2. 사랑의 실천

  이처럼 사랑의 표준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29절부터 그 사랑의 실천에 대해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여기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수용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볼일입니다. 한편쪽 뺨을 맞은 사람이 다른 쪽 뺨도 또 때려달라고 그 뺨을 내미는 일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의 난센스에 불과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경우조차 그렇다고 반증하고 있습니다(요18:22-23).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함께 폭력으로 대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와 똑같은 경우로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 역시 겉옷을 빼앗는 자란 강도를 말합니다. 빼앗기를 원하는 자를 대항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신 말씀은 자기가 마땅히 주어야 할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웃의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품꾼들에게 그 삯을 주어야 합니다. 내가 내 이웃에게 주는 일이 사랑입니다.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라”고 말씀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 때 결코 어떤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3)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이 자기에게 대접한 것처럼 대접하란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받기 원하는 그 자세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입니다. 이 자세가 사랑의 최상의 자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이웃을 대한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율법의 완성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이 베풀 사랑과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이곳에서 구별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역시 이런 사랑은 가지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고 빌려주는 일이라면 세상의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금전의 대여관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어떤 보상이나 되돌림을 바라고 가난한 자에게 빌려주거나 도와주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35절에서 결론적으로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29) 그리스도인의 자비  

  (누가복음 6 : 36 - 42)  


  서 론 :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을 가리켜 “너희 아버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아들과 아버지로 말씀하신 것은 유전적이고 가족적인 관계에서 교훈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유전적인 요소로 볼 때 인간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닮아갑니다. 우리는 육적인 유전은 아니지만 성령을 주심으로 그 아버지의 영의 역사로 아버지를 닮아갈 수 있는 요건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감화하고 능력으로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품 중에도 우리가 닮아가야 할 성품이 주님은 “자비”라고 하셨습니다.

  1.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사랑에 대한 결론으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야할 자비에 대하여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하시면서 교훈 하셨습니다.

  (1)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비판이란 자비와 관계된 것으로 나와 상대방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죄나 다툼에 관한 문제를 말합니다. 이 말은 악의적인 뜻에서 나온 비판을 말합니다. 이 비판은 교회에서 교리에 의하거나 징계로 인한 어떤 조치를 내리는 비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2)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죄란 최종적인 판결, 선고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나 허물에 대해 경솔하게 스스로 판결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흠을 의도적으로 성급하게 내리는 최종적인 판단을 말합니다. 이런 정죄는 과오를 범하기 쉬운 것입니다.

  (3)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란 사유함을 뜻합니다. 어떤 형제가 자기에게 해를 가했거나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사유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상대방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란 조만 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기회가 있습니다. 이런 기회는 하나님이 주시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기회를 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하여 자비하시고 관대하십니다. 우리에게 수다한 죄가 있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은 그 죄를 정죄하시기 보다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1:9).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그를 저주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 형제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7:3-4). 용서란 그 형제를 다시 형제의 자리에 맞이하는 일이기 때문에 회개가 없을 때 우리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 주되 그 죄가 교회의 쓴 뿌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그 죄가 자신을 더럽히는 쑥물이 되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라고 하신 말씀은 가난한 자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들에 대한 도움에 대하여 자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빠른 길입니다. 주는 자에 대한 보상에 대하여 예수님은 “후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주리라”고 하셨습니다.

  2.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라

  우리가 영적 소경이 되면 다른 사람까지 잘못된 길로 빠뜨리게 하고 말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을 선생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영적인 소경이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선생으로 비유하시고 우리로 그 제자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 주님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온전케 된다면 주님과 같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와 같이 되기를 끊임없이 힘쓴다면 우리도 주님과 같은 영광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8:17, 계3:21).

  결 론 : 예수님은 들보와 티의 비유로 형제를 비판하거나 정죄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티는 적은 먼지에 불과하지만 들보는 대들보를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들보를 볼 수 있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30) 나무와 열매  

  (누가복음 6 : 43 - 49)  


  서 론 : 나무와 열매는 서로간 어쩔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나무이든 그 나무는 반드시 그 나무의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변화를 가져 올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인간은 죄인들인데 이 죄인들이 맺을 수 있는 열매란 사람이란 사실입니다. 다른 또 하나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면 그 사람의 나무에서 맺을 수 있는 열매란 사망이나 죄악의 열매인 것이 아니라 생명과 의의 열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1. 나무는 그 열매로 아나니

  나무를 열매로 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나무란 어떤 경우이든 열매를 속일 수 없는데서 나온 말입니다.

  (1) 이 말씀이 교훈해 주는 바는 둘이 다 병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나나내신 열매가 좋다면 그 나무이신 예수님의 근원도 좋다고 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택하셨기 때문에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가 가시나무였고 찔레나무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은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무로 만드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롬7:4).

  2. 열매의 근원 되는 인간의 마음

  열매는 물론 겉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맺는 근원지는 겉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좋은 땅에서만이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60배, 혹 30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3:8).머움애 쌓은 선이란 심령의 변화를 말하며 이 심령은 곧 좋은 땅을 가리킵니다. 심령의 변화는 새로운 생명이 그 마음에 들어왔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습니다. 말씀이 밭으로 표현된 심령 속에 떨어졌을 때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깨달음이 있어야 좋은 열매, 곧 말씀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2)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선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맺는 열매는 보이는 것과는 달리 늘 하나님 앞에 악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시고 화를 선언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마음의 악을 외식으로 선하게 꾸미려 했지만 불꽃같으신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3.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

  예수님은 겉으로 표현되는 믿음과 그들의 열매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섬기면서 그의 행실로는 불순종하는 일이 우리 주님 앞에 얼마나 가증한 일인가에 대하여 경종하셨습니다.

  (1) 입으로 주여주여 하는 자에 대하여 그들의 신앙이 결국은 무너질 것임을 경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 입으로 주여주여 한다고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입으로 주여주여를 외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의 차이에 대하여 그 결과의 엄청남을 하나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집은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힐 때라도 능히 요동치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지은 집 같아서 탁류가 부딪힐 때 그 집의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는 큰물이나 탁류로 비유된 환난이나 시험의 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의 참 믿음이 나타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큰물이나 탁류에 넘어지는 신앙, 그 탁류와 함께 흘러 내려가는 신앙은 그 마음에 쌓은 선이 없기 때문이며 그의 생애에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오직 순종의 믿음만이 승리합니다. 순종하는 믿음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언제인가 무서운 불같은 환난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때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역사가 옵니다. 이때 믿음으로 순종하는 성도들만이 흰옷을 입고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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