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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17-21)
 밤중소리  01-25 | VIEW : 560

  (17)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고찰

  (마가복음 3:1-12)

  서 론 :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지켜온 안식일에 대한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지키고 있는 안식일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안식일 문제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이런 방식으로 지켰기 때문에 주님의 신랄한 공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둔갑시켜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15:4-9).

  1.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은 바리새인들의 주장이요 사실인즉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 자로써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신 분입니다.

  (1) 예수님을 송사 하려고 기회를 엿본 유대인들이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송사 하려는 의도에서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가의 여부를 살펴본 것입니다. 엿본다는 말은 망을 본다고 하는 ‘테레오’에서 나온 말로 자세히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그 율법적인 사항을 지키는 일로 의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실 때 그 안식일을 지키는 여러 가지 규례를 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20:10). 여기서 말씀하신 일은 ㉮ 밭을 갈거나 거두는 일 ㉯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 ㉰ 나무를 하는 일 ㉱ 집에서 짐을 내는 일 ㉲ 오락을 구하는 일 등에 대한 규례만 있을 뿐, 선한 일, 병자를 고치는 일 등에 대한 규제는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안식일에 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일은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로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12).

  (3)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말하고, 악을 행하는 일이란 안식일을 사람의 계명을 따라 지키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3)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변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도 모순이 없는 합당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아시고 근심하셨습니다. 완악하다는 말은 ‘포로시스’로 돌같이 굳어 있다고 하는 ‘프로오’에서 유래된 말로 그 뜻은 맹목적이요 무분별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돌같이 굳어 있는 상태로 이성을 잃고 있었으며 올바른 지식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깨어지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도 녹아지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심판만이 그들이 받을 보응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완악한 마음을 보시고 근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4)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네 손을 내 밀라고 하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의 손이 앞으로 내 밀어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명하신 말씀대로 그 손이 내 밀어진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능력 있는 말씀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손 마른 사람은 그의 손을 내 밀었습니다. 그의 손이 회복된 것입니다.

  2.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고찰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고 율법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율법을 이룬 사람들이요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율법에 있는 안식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장래 일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2:16-17).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의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한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실체가 아닙니다. 다만 그림자였을 뿐입니다. 그림자는 그 실체가 나타나면 살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 실체는 바로 천국의 안식입니다(히4:9).

  이런 일은 예수님의 부활로써 그 그림자가 거치고 실체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안식일은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닙니다. 십계명이 우리의 영원한 도덕률이라고들 하지만 여기서 제 4계명인 안식일은 제외되던가 아니면 그림자로만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의 날 혹은 주일은 안식일을 대체한 날이 아닙니다. 율법의 안식일이 완성된 날로 천국 시민이 누려야 할 정말로 안식할 날입니다. 우리는 율법적인 규례나 방법으로 이 날을 지킬 사람들이 아닙니다. 율법적인 안식일은 영원히 살아졌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실 때 안식일까지 이루신 사실을 알고 안식일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고 우리에게 안식의 실체로 주신 ‘주의 날’을 주님을 섬기며 기뻐하며 참 안식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날로 살아야 합니다.





  (18) 열 두 제자의 부르심

  (마가복음 3:13-19)

  서 론 :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기 전에도 여러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 활동과 나중에 이 땅에 복음의 사도들로 세우기 위해 특별한 사명자로 열 두 명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이처럼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제자들로 그들에게는 사도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부쳐졌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도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부르실 당시부터 이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1.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심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산이라고 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자신이 제자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제자를 부르신 것은 바로 주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 마음에 원하는 자들을 그의 일군으로 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일군 된 사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주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이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들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6:44, 65).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3) 이들은 창세 전에 이미 부르심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43:1).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부르심은 지명하여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2.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에 대하여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은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했습니다(15),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생활은 버리고 부르신 주님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족에 얽매인 사람이나 세상일에 미련을 가진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눅9:57-62).

  (2)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도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 각종 권세를 주십니다. 특별히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는 놀라운 권능을 주시므로 그들의 사도적인 직임을 권위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3. 부르심을 입은 열 두 명의 제자들

  예수님은 산에 함께 오른 사람 중 열 두 명을 지명하여 그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1) 시몬 : 시몬은 어부 출신으로 요한의 아들이며 안드레와 형제지간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그에게 베드로란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2) 야고보 :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로 그도 역시 어부 출신입니다. 야고보는 특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요한과  한 형제입니다. 이 야고보는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로 등장합니다(행12:2).

  (3) 요한 :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이며 그의 불같은 성격으로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4) 안드레 :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 그의 직업 역시 어부입니다. 이 안드레가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5) 빌립 :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며 나다나엘을 찾아가 메시야를 소개하고 주님께 인도했습니다(요1:45). 그는 주님께 아버지를 보여주면 족하겠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6) 바돌로매 : 이 바돌로매는 나다나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요1:45, 49, 21:2).    (7) 마태 : 마태는 레위하고도 하며 세리 출신으로 세관에서 공무를 보던 중,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랐던 사람입니다.

  (8) 도마 : 도마는 디두모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므로 의심 많은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합니다(요11:16).

  (9) 야고보 : 이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로 작은 야고보라고 불려집니다.

  (10) 다대오 : 이 다대오는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려졌습니다(요14:22).

  (11) 시몬 : 가나안인 시몬이란 말로 나와 있으며 그가 가나안 인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헤롯 당원이었습니다(눅6:15).

  (12) 유다 : 이자가 가룟 유다로 이 자에 대하여 “이는 예수를 판자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이 자기의 원하는 자들, 열 둘을 부르셨으나 그 원하는 자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가룟 유다를 부르시는 일이 주님께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부르셨습니다.




  (19) 귀신을 쫓으신 일과 바알세불

  (마가복음 3:20-27)

  서 론 :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이 욕하고 핍박받는 대상이 되셨습니다(마5:11-12). 혹은 친족들에게까지 미쳤다고 하는 소문이 들려 가족이 동원되어 예수님을 찾아오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방을 듣기까지 하셨습니다.

  1. 분주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공생애는 어찌나 바쁘신 지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시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20). 예수님은 이처럼 식사하실 겨를조차 없는 중에도 그의 전도사업을 쉬지 않고 말씀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습관을 따라 산에 으르시어 밤새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항상 많은 무리들이 따랐지만 그들이 주님의 위로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의 친족들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치 못하고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했습니다(요7:5). 하루는 주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들어 데려가려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건만 그가 세상에서 받으신 대우는 죄인에 대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2.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하는 서기관들의 모함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열 두 제자를 세우시고 어느 집엔가 들어가셨을 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1) 바알세불이란 귀신의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알세불이란 말은 ‘똥’ 또는 ‘오물의 주’란 뜻으로 이것은 랍비식 낱말에서 온 표현입니다. 바알은 주란 뜻이고 세불은 오물이란 의미로 주님을 모욕하는 가장 심한 말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에 지폈다고 했습니다. 지폈다는 말은 소유하다 또는 잉태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바알세불에게 붙잡혔다, 그가 귀신을 쫓는 능력은 그의 안에 들어가 있는 바알세불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모함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사단이 사단을 쫓아 낼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알세불을 사단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도 사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란 대적자란 뜻입니다. 이런 이름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단의 역사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귀신이란 말은 ‘다이모니온’으로 악령과 같은 뜻으로 해석됩니다. 혹 어떤 사람은 귀신을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말하나 이 같은 사상은 고대 헬라 철학자들로부터 나온 잘못된 사상입니다.

  사단은 그 휘하에 많은 타락한 영물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는 편재하지 못하기 때문에(만물 가운데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 영적인 존재들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에 의해 부림을 당하는 존재가 귀신들이며 이를 부리는 사단을 가리켜 귀신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오직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며 역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그의 하나님 대적은 그가 마지막 심판으로 지옥에 들어가지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계20:20).

  사단의 능력은 하늘에 있는 천사장 미가엘과 싸울 수 있을 만치 대단합니다. 악령 중에 감히 이 사단에게 도전할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사단을 내어쫓는 일이나 대적해서 싸우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4)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분쟁에 대한 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며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24-26). 사단의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의 날까지 존속될 수 있는 것은 사단의 권위와 한가지 목적 앞에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분쟁과 가정의 분쟁은 사단의 분쟁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인 예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화평’하는 나라는 흥하고 복을 받습니다. 화평하는 가정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이같은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 강한 자(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일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신 역사는 죄를 소멸하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신 자가 나타나 강한 자를 내어쫓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강한 자로부터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고 생명을 찾아주시며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분을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은 사단의 권세에서 놓임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하신 자유에 이를 수 있습니다.




  (20) 성령을 훼방하는 죄

  (마가복음 3:28-30)

  서 론 : 성경에는 죄에 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을 수 있다고 밝혀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무슨 죄이며 이 죄에 대하여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1. 사하심을 얻을 수 있는 죄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밝히신 “사람의 모든 죄”란 율법을 범한 죄를 가리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밝혀 놓으신 하나님의 규약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편에서 완전하신 것이기 때문에 죄로 타락한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법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자신의 의를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구원의 사역)를 지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도, 바울이 개심하기 전 주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잔해한 일도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죄까지도 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한다는 말은 ‘아피에미’로 탕감한다, 용서한다, 취소한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하신다는 말은 아무런 대가 없이 무조건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죄는 우리의 생애에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죄악입니다. 이런 죄가 사하심을 얻는다는 말은 성령의 활동에 제한을 주는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셔서 그들로 회개케 하십니다. 이런 근거에서 주님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 성령을 훼방하는 죄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사하심을 얻을 수 없는 죄’도 있다고 하는 심히 두려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대단히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그들이 성령을 훼방했다는 근거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더러운 귀신이 한 일로 돌려보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은 곧 성령의 역사로, 이 같은 사실을 훼방하는 일은 곧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시기한 서기관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으며 예수님은 이런 비방을 듣고 나실 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 서기관들은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비방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훼방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행하시는 권능이 하나님의 영의 역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 중에 흠을 잡을만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되었으나 주님에 의해 눈을 뜨게 된 청년까지도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을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는 질문에 분명한 어조로 “선지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요9:30-33). 그 당시 외식적으로 나마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생활을 해 온 그들이 더러운 귀신의 역사와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3) 이같은 훼방은 악의에 가득찬 훼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 행하심을 이 같은 그들의 음모대로 악의에 찬 말로 훼방하였을 뿐 아니라 트집을 잡아 정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4) 이것은 성령의 분노를 살만한 훼방이었습니다. 이 같은 죄는 ‘신성모독’ 그 이상 가는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알면서도 양심을 누르고 고의적으로 악의에 찬 비방을 일삼으며 율법의 흠을 잡으려고 하였으니 이런 일이야말로 성령을 대적한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 훼방죄는 아무나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멸망 받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 죄는 복음의 원수들이나 저지를 수 있는 죄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하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행7:15).

  이들이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죄를 회개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성령의 감동하심을 스스로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성령 훼방죄’는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의 일반적인 죄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은 죄입니다. 멸망 받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이 같은 무서운 죄의 시작은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의 강퍅에서 나옵니다”(히3:7-8).




  (21)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관계

  (마가복음 3:31-35)

  서 론 : 예수님은 어떤 사건에 부닥칠 때마다 그 사건을 발판으로 놀라운 교훈을 주시곤 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많은 무리들에게 둘러 쌓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실 때에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하는 전갈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전갈을 들으시자 곧 이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가족관계를 이루는 새로운 교훈으로 확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외형적인 가족관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교훈에서 이런 육신적인 가족간계 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새로운 가족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1. 예수를 밖에서 부른 모친과 동생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왜 예수를 찾으려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매우 궁금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1) 이 문제의 해답은 21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때에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는 모함이 사방에 번졌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시고 능력을 행하시며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을 내쫓아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하여 그 소문이 번져 나간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예수님의 친속들에게 “예수가 미쳤다”는 말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같은 좋지 않은 풍문에 휘말려 있는 예수를 붙들려고 나선 것입니다. ‘붙들다’라고 하는 말은 ‘크라테오’로 이 말은 체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쳤다고 하는 말에서 그들의 출동은 결코 호의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31절에서 “때에”라고 하는 말은 어떤 말의 계속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때에”란 말의 헬라어는 ‘운’으로 이 말의 뜻은 그래서, 따라서, 그러므로 라고 해석됩니다. 21절에 나타난 사건은 아직 결말이 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들려고 나오고 있는 계속적인 상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31절과 21절은 한 사건의 계속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음처럼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려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래서(때에 = 그러므로, 따라서)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 . . ’

  (3) 친속들이 찾아 온 목적을 여러 가지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좋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많은 군중들 틈에서 시달림을 당하며 그에다 ‘미쳤다’고 하는 소문까지 들리는 예수님께 잠시 동안의 휴식을 갖게 하려는데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이 같은 풍문이 과연 듣는 대로인가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경해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친속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의심하고 절제시키기 위해 붙들려고 온 것이란 견해입니다. 주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에 불신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요7:5).

  2. 주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참 뜻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 .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하는 무리들의 전갈을 들으시고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예수님은 밖에 나가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말씀을 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족은 혈육의 차원을 넘어 신앙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온 모친이나 동생이나 누이들도 그의 가족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혈연적인 친속관계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친과 동생과 누이들 외에도 친속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이들에게 얽매어 살아가는 일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관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란 하나님의 보내신 그의 아들을 믿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주님의 가족이라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를 자기 동생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일은 이런 뜻에서입니다.

  (3) 이 말씀은 우리의 가정이 혈연적인 관계에서 보다 신앙적인 관계에서 가족관계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는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장차 천국에서는 천상의 가족으로 합쳐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 .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천상의 가족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서 이 같은 참된 가정을 이루고 우리들 자신의 가정에서도 모든 가족들이 이 같은 신령한 관계에 기초를 둔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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