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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장 (73-79)
 밤중소리  01-26 | VIEW : 545

  (73)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마가복음 12 : 1  - 12)

  서 론 :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 그리스도가 만민의 구원의 주가 되게 하신 일은 하나님이 하신 기이한 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들의 회개를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종들을 다 죽이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보내신 그의 아들마저 죽일 일에 대한 유대인들의 패역성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 내시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집을 짓는 거대한 사역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시게 된 사실에 대한 예언적인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포도원 비유의 대략

  예수님의 이 포도원 비유는 그 역사적 배경을 이사야 5장에 두고 있습니다.

  (1) 이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1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포도원으로 가꾸시고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율법도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 가지 제사제도도 주셨습니다.

  (2) 2절에서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들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이 종은 보내신 일은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여 그들로부터 영적 열매를 거두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종의 외침에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고 하셨습니다.

  (3) 포도원의 주인은 큰 인내를 가지고 그들의 열매맺기를 기다리시며 그 후에도 여러 번 다른 종들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종들을 더욱 혹독하게 대접했습니다.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회개를 외치는 많은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의해 학대를 받았으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4) 주인은 최종적인 방안으로 더욱 큰사랑의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주인의 아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가리킴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이처럼 기대한 그 농부들은 이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조처한 것입니까?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고 하여 결국 그 아들을 잡아 죽여 포도원밖에 던졌다고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인 예수님은 이처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농부들로부터 이 같은 비참한 대접을 받으신 것입니다.

   2.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여기까지가 포도원을 가꾸어온 이스라엘의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1) 9절에서 포도원 주인의 진노의 선언이 내려집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리”고 선언했습니다. 이 같은 포도원 주인의 선언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포도원으로서의 사명을 버리시는 선언이시며 다른 한편 새로운 포도원으로서의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되는 놀라운 선언이십니다.

  이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농부들의 배신에 그 포도원 주인은 이 포도원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주인은 첫째로 농부들을 진멸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농부들의 진멸은 곧 이스라엘의 최후를 말합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예언처럼 이스라엘은 주후 70년경 로마의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의 파멸과 함께 온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으며 이 같은 일이 1948년까지 계속되다가 기적적인 독립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독립은 포도원의 재건이 아닙니다. 예언의 성취를 위한 일이며, 주 재림의 길을 열어놓은 일이며,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특별하신 배려이십니다.

  (2)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는 말씀은 포도원의 주인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특권은 살아지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포도원으로서의 하나님의 교회가 형성될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했습니다(롬11:18-19).

  결 론 :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이처럼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118:22-23절에 나온 말씀의 내용인데 이 말씀은 바로 이 비유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들에게 쓸모 없다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버린 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교회를 세우는 가장 요긴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74)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마가복음 12 : 13  - 17)

  서 론 :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듣고 그 비유가 자기들에 대한 책망인 것을 알게 된 이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심히 분개한 나머지 예수를 책잡으려는 더욱 간교한 책략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납세문제를 들고 말씀의 올무를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로마정부에 대한 납세문제에 있어서 반대입장에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한편 로마정부에 대한 납세문제에 관대했던 헤롯 당원들을 한 무리로 하여 예수님께 파견하여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끌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1. 로마정부에 대한 유대인들의 세금문제

  유대인들의 로마정부에 대한 납세문제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물러선 후 ‘코포니우스’가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 A.D 6년경부터 유대인들은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인두세로써 세금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1)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바로 이 유대인의 인두세였습니다. 인두세란 유대인 중 남자는 14세 - 65세, 여자는 12 - 65세까지 각기 한 데나리온씩을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말합니다. 로마정부는 이 같은 인두세 외에도 여러 가지 명목으로 세금으로 착취해 갔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을 죄인시하면서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이런 로마정부의 세금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헤롯당원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극과 극의 대결상태에 있었는데도 그들이 예수를 책잡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처럼 로마정부에 반기를 드는 반로마주의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헤롯당원들처럼 친 로마주의자도 아니었으므로 함께 매도하는 일에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가이사’란 그 당시 로마의 황제에게 부쳐진 일반적인 칭호였습니다. 로마의 최초의 황제 이름이 ‘가이사 아구스도’였는데 그 후 로마황제에 대한 칭호를 ‘가이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황제는 ‘디베료’였습니다(눅2:1).


  2.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한패가 되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하는 것이었습니다.

  (1) 이 질문은 ‘하라’ 혹은 ‘하지 말라’고 대답할 수 없는 함정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이들의 질문에 대하여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다’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은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친 로마적인 정책을 선동하는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노리고 있는 책략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불가하다’는 대답을 하신다면 그때는 로마의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는 죄인으로 체포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헤롯당원들이 노리는 간교한 올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가 내놓은 시험의 미끼보다 더 온전하신 지혜로 이 함정에 도전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동전으로 만들었는데 데나리온 안팎에는 로마황제의 화상과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한 답변을 주셨는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데나리온에 적혀 있는 화상과 글은 분명히 가이사의 것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데나리온은 그 주인인 가이사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가이사가 통치하는 지역은 가이사의 명령을 따라 그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② 만약 예수님이 이 말씀만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바리새인들의 올무에 걸려 그들의 계속적인 공격을 받아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것은 가시아에게 바치라”고 하신 말씀과 함께 이 말씀보다 더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예수님의 대답 속에 들어가 있는 참 뜻은 무엇입니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가이사는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시는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되며,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않을 때 가이사에게 형벌을 받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가 자기의 것으로 사용할 때(신적 경배 행위) 그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가? 궁금히 여겼던 이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대답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뜻을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기 때문에 또다른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으로 책을 잡으려던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을 계기로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75) 부활한 자의 형체

  (마가복음 12 : 18  - 25)

  서 론 :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알고자하는 여러 가지 궁금한 일들이 이상한 방법으로 해석되어 우리에게 큰 깨달음과 기쁨을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한 몸을 입을 때 어떤 형체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많은 의문을 가져왔었는데 그 해답이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사두개인들의 가시 돋친 질문에 의해 시원스럽게 풀어졌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대단히 곤경한 처지에 몰아넣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1) 사도개인들이란 유대교의 한 분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에는 당시 세 개의 이름 있는 분파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전통적인 보수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편적으로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엣세네파가 있었고 이들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으며 더욱 부활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관을 허물어뜨리려는 악한 의도로 지혜를 짜내어 부활에 관한 괴이한 질문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께 모세의 글에 있는 이스라엘의 특수한 혼인제도를 예로 들어 부활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의 포문은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이란 말로 시작이 됩니다. 그들이 인용한 모세의 글은 신25:5-10절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혼인제도인데 이 같은 혼인제도를 확대해서 실질적인 사건도 아닌 것을 억지로 꾸며 예수님께 어려움을 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한 여자가 그의 남편이 후사 없이 죽었으므로 죽은 남편의 형제와 살게 되었는데 그도 후사가 없이 죽었고 결국은 일곱 형제들과 모두 함께 살다가 그래도 후사가 없이 모두 죽었는데 이 여자는 부활의 날에 일곱 형제들 중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탄의 간계에서 나온 기발한 질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생각에는 모세가 이 같은 율법을 주었으므로 부활을 인정했다고 보지 않은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이 같은 질문의 배후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해온 부활관이 반영되고 있는데 부활을 믿는 유대인들도 부활의 날에는 어느 정도 현세와 같은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2. 예수님이 밝히신 부활한 몸의 형체

  이 같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책망하시면서 신비스러운 부활한 몸에 대하여 성경적 진리를 밝혀주신 것입니다.

  (1)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성경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26-27절 말씀을 통해서 설명해 주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에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을 때 그들과 같은 오해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는 이 두 가지 요인, 성경을 모를 때와 하나님의 능력을 모를 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부활한 몸에 대하여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  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장가나 시집을 안 간다는 말씀은 그 몸이 신령체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한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신령한 몸은 마치 천사와 같은 상태의 몸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체에 대하여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5:42-44). 부활의 몸은 육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실제적인 영생의 몸입니다. 이 영생은 종국적으로 우리의 부활한 몸으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인류의 부활이 인류 역사의 맨 마지막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해 줍니다. 적어도 전 천년설을 따른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천년왕국이 지나기 이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전 성도들이 변화체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모두 부활한다면 천년왕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년왕국은 지상에 천년간 이루어지는 지상의 왕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천국을 옮겨 놓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성경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므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를 오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장차 우리의 몸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게 됩니다. 죽은 자들은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몸으로 영생을 누리는 새로운 생애를 천국에서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때는 천사들과 같은 몸으로(실제로는 더 영화로운 몸) 우리의 생애가 새롭게 전개될 것입니다. 이 같은 부활이 실질적으로 나의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만 주어진 크나큰 축복입니다.





  (76) 산 자의 하나님

  (마가복음 12 : 26  - 27)

  서 론 :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과 일곱 형제와의 결혼으로 인한 부활 때의 그 여인이 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던짐으로 자신을 시험한 사도개인들에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데서온 오해가 아니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 후의 세계에 대하여 천사와 같다고 하시는 영적 영화로운 몸임을 설명하신 후, 그들이 인용한 모세의 글을 인용하시어 그들에게 증거해 주셨습니다.

  1.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부활을 믿지 않고 있는 조상이며 자신들도 그 모세의 글에 의해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모세의 글에 나타난 모세의 증거를 통해서 공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 구절을 읽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의 증거로 인용하신 것입니까? 모세가 출애굽기를 썼을 당시에는 이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모두 육신적으로는 죽어 무덤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육신이 살아 있다는 뜻의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육신이 죽은 사실은 그들의 무덤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부활이 있다면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잠자는 것뿐입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보장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육신적으로 지금 잠을 자고 있을 뿐입니다.

  (2) 그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천국에서 하나님과 친히 교제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말은 영원히 죽음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영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이 죽는다고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명은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후5:8).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신약시대에 와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 혜택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그의 생명까지 땅에 묻힌 것이 아니라 몸을 떠나 주와 함께 하늘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여기서 ‘산 자’란 말은 생존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산 자의 하나님”이란 생존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1) 하나님께는 지금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도 살아 있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죽음이 없고 오직 영생과 부활만이 있습니다. 영생은 죽어도 그대로 계속되는 생명이요 부활은 이 영생의 생명이 새로운 형태의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견지에서는 모든 인류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고전15장에서 이처럼 증거해 줍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쳤습니다(고전15:54-55).

  (2) 우리는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제자들의 눈에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든 중 모압땅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바라보면서 죽은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병거에 둘러싸여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갔고 한 사람은 산몸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둘 다 변화산에 똑같이 영화로운 몸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하나님 앞에는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모세와 같은 몸이 아니라 예수님이나 엘리야 같은 보다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거나 부활한 몸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결 론 : 성경에는 어떤 한가지 문제에 대하여 한곳에서 자세하게 보여주지 아니합니다. 부활에 대한 비밀도 성경 여러 곳에 많이 깔려 있습니다. 부활문제는 특히 종말론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사람의 부활은 인류의 종말에 있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77)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것

  (마가복음 12 : 28  - 34)

  서 론 : 예수님을 곤경 속에 집어넣으려는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의도적인 질문은 흥미로운 질문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의도하는 바가 예수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이런 변론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이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서기관의 질문에 관한 답변에서 유대인들이 복잡하게 생각해 온 그 수많은 계명을 하나로 정리하시고 율법이 명시해 주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계명대로 지키는 것이 참 생명을 얻는 길 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근본정신은 오직 두 가지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두 가지 정신을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밝혀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란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주신 말씀 중 첫째로 구분시킨 말씀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나왔습니다.

  율법은 십계명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계명에 대하여 유대인들에게는 사람 몸의 지체 수에 해당하는 248개의 규정령과 1년의 날 수에 해당되는 365개의 금지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양의 규정령이나 금지령은 모두 십계명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밝히셨으며 이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고 계시며 그분이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2)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네 마음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마음이란 인간의 지, 정, 의를 포괄한 전 인격적인 표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인격적인 사랑을 원하십니다. 목숨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적당한 한계점을 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는 뜻으로 순교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2. 이웃에 대한 사랑

  다음 율법의 두 번째 계명인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이르는 계명은 그 내용이 사람들에게 대한 계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단정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율법에 무슨 조문이 들어있던 그 사람은 이미 율법을 다 이룬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적인 예화에서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당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인간들에게는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로 이런 사랑에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고 이웃과도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복수해야 마땅히 여기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므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고 이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로 하나  님을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회복이 인간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사람들만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같은 사랑의 회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서기관의 지혜로운 대답에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서기관은 외식하거나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의도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에서 한 것이며 또 예수님의 대답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내심으로 고무되면서 예수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사를 던졌던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십계명을 어떻게 알고 있으며 어떤 마음으로 지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율법적인 계명대로 지키는 생활로 우리의 신앙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로 계명적인 율법이 아니라 계명보다 우선하고 계명을 능가하는 사랑의 법을 이루어야 합니다.





  (78)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마가복음 12 : 35  - 40)

  서 론 :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관념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척하게 만들었고 이 같은 메시야관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인식되기 전에는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소망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시려고 어느 날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과 메시야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 함은 일반적인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육신적인 다윗의 자손으로만 해석하기 쉬운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1.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

  이 같은 메시야관은 메시야를 이스라엘만의 메시야로 한정시켜 왔으며 그 메시야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 만으로서의 존재로 인식시켜 왔습니다.

  (1) 예수님은 다윗이 쓴 시를 들어 다윗의 자손과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관계  를 인식시키시려고 시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성경은 서기관들이나 백성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시편110:1절에 나와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는 구절입니다.  

  (2) 이 시편의 내용 중 두 분이 같은 ‘주’의 이름으로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두 분은 분명히 같은 인물이 아니시며 그 중에 한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란 대화의 내용이 전개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주께서”라고 표현된 주와 “내 주께”라고 표현된 주는 두 분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성부되신 하나님이 성자되신 예수님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을 예언적으로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예언적 대화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과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초림의 메시야적 사역을 마치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께서 ‘네 원수’라고 지칭된 사단과 그 일단의 무리들을 심판하시게 되는데 그때까지 앉아 계시다가 그가 심판주로 내려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게 됩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절정에 이르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므로 다윗의 혈통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다만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그와 정혼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시편의 다윗이 글이 바로 그것을 증거해 주고 있으며 예수님은 이 글을 인용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뿐 아니라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며 그뿐 아니라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섭리하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그의 시작은 끝이 없고 그의 마침도 끝이 없는 그런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주되신 그리스도께” 말씀하신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주”라고 부른 분이 어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느냐는 최종적인 결론에 그 자리에 있었던 서기관들은 입을 봉했고 백성들은 그의 기이하신 교훈과 가르침에 놀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서기관의 외식과 그들이 받을 판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성경을 잘못 가르침으로 이스라엘로 참 메시야를 배척하게 만들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생활을 삼가라고 교훈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서기관들의 행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또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시장은 많은 사람이 모이며 왕래하는 곳입니다. 서기관들은 보통 랍비란 이름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왔으므로 시장거리에 나가면 이 같은 존경의 인사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회당의 상좌를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잔칫집에 가면 상석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이처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면서 모든 사람들 위에 군임하여 존경과 영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삼가라고 경계하셨습니다.

  (2) 이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들 서기관들은 율법적으로 불쌍히 여기며 도와 주어야할 과부의 가산을 오히려 삼키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헌납하도록 위협을 주는 행동으로 그 이익을 그들이 취해온 것입니다.

  결 론 : 백성들에게 성경을 잘못 가르침으로 실족하게 하며 외식하는 생활로 영광을 취하는 서기관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대로 바로 가르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79)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가복음 12 : 41  - 44)

  서 론 : 하나님의 나라와 헌금에 대한 관계를 아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헌금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우리가 봉헌하는 헌금에 반영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과부는 헌금을 통해서 그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에 대하여 주님의 놀라운 칭찬을 들었습니다.

  1. 헌금을 살피시는 예수님

  4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연보궤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살피셨습니다. 이 연보궤가 놓여 있던 자리는 여인들의 뜰로 연보궤는 바로 이 뜰을 구분하는 벽을 따라 일렬로 놓여져 있습니다. 인 연보궤는 나팔처럼 생긴 모양의 놋쇠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곳을 지나시다가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 연보궤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한참동안 유심히 살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같은 태도로 보아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의 헌금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 그 헌금에 대하여 낱낱이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헌금의 사용처에 대하여 언급하심이 없이 단지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실을 주시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연보궤에 헌금하는 이 돈은 물론 성전의 운영비, 구제비 등으로 사용되는 돈입니다. 그러나 이 돈을 주관하는 자는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과연 이 헌금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했느냐는 문제는 크게 의문시 될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성전을 잘못 운영하고 있으니 헌금을 내지 말라고 하시거나 그 헌금을 그들이 불법하게 사용할 것임으로 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내는 헌금은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하든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 물입니다. 그 헌금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잘못 사용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망하실 일이지 헌금한 성도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예수님이 연보궤에 헌금하는 장면을 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친히 보신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연보궤에 헌금하는 무리들을 낱낱이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그 헌금뿐 아니라 헌금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과부에 대한 주님의 칭찬

  예수님은 한참 동안 헌금하는 장면을 보신 후,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칭찬해 주셨습니다. 연보궤에 돈을 넣은 사람은 이 과부만이 아닙니다.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는 부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는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은 왜 부자들의 많은 헌금에 대하여 칭찬하지 아니하시고 이 가난한 과부의 매우 작은 헌금에 대하여 칭찬하신 것입니까? 44절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희는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는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3) 부요한 자들은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는 판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부자는 그 헌금이 아니더라도 생활에 궁색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구차한, 다시 말하면 가난하기 그지없는 여인입니다. 그에게 가지고 있는 재산이란 두 렙돈의 동전뿐입니다. 그 돈이 아니면 이 과부와 혹 있을지 모를 그의 자녀들의 그날의 생활은 막연한 것입니다.

  가난한 중에, 구차한 중에 바치는 헌금이야말로 하나님께 값진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헌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부자라면 부자로써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헌금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 형편이 가난하다면 이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처럼 자신의 힘에 넘치도록 헌금한다면 우리 주님은 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결 론 : 헌금에는 놀라운 축복이 뒤따릅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은 것을 거두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고후9:6). 그리고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9:10).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바는 우리로 이 과부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헌금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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