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마가복음 11장 (67-72)
 밤중소리  01-26 | VIEW : 1,365

  (67) 호산나 !

  (마가복음 11 : 1 - 11)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부터 그의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절정에 이르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그의 인류 구속사적 모든 역사가 이 기간에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메시야 왕국의 왕으로서의 입성인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으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셨을 때에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 그곳에서 약 25km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안식일을 베다니에서 쉬시고 다음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벳바개와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마음 맞은 편으로 보내시면서 그 마을로 들어가서 “아직 나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러 끌고 오너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이미 마음에 작정하시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은 흥분의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나귀 새끼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가져오게 하시고 그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려는 자기들의 선생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입성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생각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은 자기들의 선지자가 메시야의 등장에 대하여 이미 예언한바 있기 때문에 더욱 흥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슥9:9). 이 같은 스가랴의 예언을 유대인들은 영광의 메시야가 나타나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2. 호산나

  이런 흥분은 비단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온 무리들과 예수님이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까지 딸려온 예루살렘 시민들도 제자들과 같은 생각으로 왕의 길을 예비하느라 주변이 떠들썩했습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는 찬양을 드높이 불렀습니다. “호산나”란 말의 히브리 뜻은 ‘호시아나’의 음역으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의미입니다. 이 호산나는 어려운 가운데서 구원자 메시야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호소요 간구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메시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들이 갈망했던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질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란 말은 왕으로 입성하시는 메시야에 대한 환영의 찬양입니다. 그들의 앞에는 자기들의 눈에 메시야로 비취는 예수님이 그들이 대망한 구원자인 줄 알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란 말입니다. 이 대목은 메사야 왕국의 도래를 바라는 유대인들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외쳤던 것입니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란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장차 올 다윗의 나라로 메시야 왕국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로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란 말은 이 같은 구원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찬양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은 그의 메시야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영광의 메시야로 나타나실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백마를 타시고 만 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슥14:4).

  ①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말합니다. 세상의 군왕은 준말을 타지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②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평화를 말합니다. 나귀는 전쟁에 필요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가 분명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도 예루살렘은 평온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들로 예수님을 따라 성전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환영하고 신이 나서 따라다녔던 무리들은 이제 지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 둘씩 예수님 주변에서 물러갔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 군중들은 얼마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발견 될 것이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고 조롱하는 무리들 중에서도 발견될 것입니다.





  (68) 무화과나무에 내린 저주

  (마가복음 11 : 12  - 14)

  서 론 : 예수님은 이튿날 베다니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길입니다. 이튿날은 수난 주간의 둘째 날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 날은 월요일에 해당되는 이른 아침입니다. 주님은 시장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잎사귀가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러나 기대하셨던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했는데 주님은 이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주님의 저주에는 여러 가지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1.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의미

  마가복음에 기록된 이 장면의 사건은 영적인 교훈의 의미와 연결짓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이 있습니다.

  (1)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닌데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으며 그 나무를 저주하셨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예수님이 멀리 잎이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 혹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하여 가까이 가 보셨습니다. 그러나 잎만 있을 뿐 기대하신 열매는 없으므로 그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말미를 보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일에 대하여 “이는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님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 이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알고 있지만 아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때가 아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참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으며 자기들의 메시야를 영접하므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주님의 열망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인 예수를 배척했고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2. 무화과나무에 내리신 저주

  14절에 나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보여주는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내리신 저주는 시장 끼를 채워줄 열매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시장 끼로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던 것처럼 기록된 것은 마가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그 나무에 열매가 없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그 저주하신 까닭을 영적으로 교훈하시려는 의도로 그 나무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2) 이 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는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은 마땅히 그 나라를 빼앗기고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이방인들이 오히려 그 나라를 상속받게 될 일에 대한 교훈으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대하여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희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1:20). 20절에서 예수님의 저주대로 이 무화과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랐다  고 했습니다. 이 교훈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린바 되어 주후 70년에 뿌리째 말라 뽑힌바 되어 그 후 2천년간이나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3) 성경은 뿌리째 마른 이 무화과나무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열매”의 시기가 온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종말에 되어질 모든 징조에 대한 말씀에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영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막13:28-29).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열매를 맺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날이 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시기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23:39). 바울도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들의 회복에 대한 비밀에 대하여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   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로 등장하여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시기는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이 영토 적으로 회복된 역사적 시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사11:11-12, 렘31:8, 암9:14-15, 겔38:8-9, 슥12:10-14, 행1:11, 롬11:25-27).

  결 론 : 또한 이 말씀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자들과 오늘에는 교회의 외식주의자들에게 주시는 경종이 되겠습니다. 나무에 잎사귀가 많은 것은 겉모양의 꾸밈을 말합니다. 형식이요 외식적 생활입니다. 주님은 잎사귀를 보고 판단하심이 아니요 그 열매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백성만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69) 예수님의 성전 청결 작업

  (마가복음 11 : 15  - 18)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지 이틀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고난 주간의 이틀째 되는 날이 되겠습니다. 주님은 이 날도 어제와 같이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은 유대인들을 격분케 하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성전 청결 작업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의 공생애의 초기에도 이 일을 하셨습니다(요2:13-22). 이 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꾀하고 이 일을 시발점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갔습니다.


  1. 교회를 살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이처럼 성전 청결 작업을 하신 일은 우리들에게 교훈해 주시는 의미가 큰 것입니다.

  (1) 예수님은 교회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에 의해 건축되었고 불의한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에 의해 운영되어 왔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이곳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여러 가지로 더럽혀 있는 성전까지도 사랑하셔서 그곳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청결의 채찍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교회를 부지런히 살피시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계2:1절을 보면 주님은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지상의 모든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고 일곱 별은 그 교회에서 주님을 대신하여 주의 양 무리들을 양육하는 주의 사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일은 주님의 교회를 부지런히 살피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성전에서 바른 예배를 드리는가의 여부를 살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왔을 때 그들의 재물에 나타난 그들의 마음의 더러움과 추함을 보시고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이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사1:1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지 않고 그저 몸만 보이러 오는 형식적인 경배를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3) 주님은 성전에서 악을 행하는 여부를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사1:13-14). 절기 때마다 성전에 모여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도모하는 일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의 하는 일이었습니다.

  2. 성전 청결 작업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시기는 유월절을 몇 일 앞두고 있었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분비는 혼잡 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벌어져서는 안될 일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을 마지하기 위한 경건한 준비로 분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제물로 사용할 각가지 짐승들을 매매하는 자들, 외국에서 돌아와 성전세를 바치기 위해 돈을 바꾸려는 사람들과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 비둘기파는 자들로 붐볐는데 성전은 완전히 이들 장사치들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신성한 곳으로 이 같은 장사터전으로 허용될 수 없는 곳입니다. 감람산 주변에 외국에서 돌라온 나그네들을 위한 환전이나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매매하기 위해 서너 곳의 시장이 서 있었습니다. 이 시장에서의 수입의 일부는 산헤드린의 관할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런 장사에서 얻어지는 이익이 많은 것에 탐심을 품게 된 대제사장 가야바가 성전 뜰 안에 시장을 개설하도록 허락해 주므로 매매의 허가에서 오는 많은 이권과 이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은 더럽혀진 성전의 청결 작업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또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3) 예수님은 이처럼 분노의 청결 작업을 하시면서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결 론 : 이 광경을 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너무나도 놀랬으며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엄위하신 권위 앞에 감히 도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곡 비상회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의제는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하는 모의였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들에 의해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시게 될 계획이 착착 진행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70) 받은 줄로 믿는 기도의 능력

  (마가복음 11 : 20  - 24)

  서 론 : 복음서를 보면 한가지 사건은 그 한가지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다른 또 하나의 교훈을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경우도 이곳에서 기도의 능력과 연결되는 교훈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주님이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는 베드로가 아침의 일이 생각나 주님께 묻게 되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주님의 저주가 인간이 아닌 식물에까지 미친 사실에 놀라면서 신기한 듯 물은 것입니다.


  1.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되어진 일을 들으시고 기도의 권능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그대로 임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먼저 우리의 기도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후, 곧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자이십니다. 그 능력이 또한 믿는 자의 기도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 앞에 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능치 못하게 이루실 대상을 비유적으로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같은 일을 능히 행하실 수 있다고 믿는 자에게도 이루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기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이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기도는 아무 때나 되는 일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는 믿음”은 먼저 그 기도부터 자신의 정욕적인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표적을 맞추는 기도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른 또 한가지를 더 첨가하셨는데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의심이란 말의 원어적 의미는 ‘혼돈된 결정’ 또는 ‘사리 분별이 엇갈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구하는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구하지 못하는 상태의 마음가짐을 가리킵니다. 의심이 나쁜 것은 의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믿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음이 결여된 간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결정적인 승리

  주님은 결론적으로 기도의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1)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은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해도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는 즉각적인 응답의 기도와 미래 적인 응답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산을 초월하고 계시는 분이심으로 그 기도가 언제 응답되어도 하나님 편에서는 동일한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늦을 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늦은 것도 아니요 빠른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기도의 응답은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믿음으로 결과적으로 승리했습니다(롬4:18-21).

  (2)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응답의 시기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실 가장 좋은 시기가 언제인가를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시기에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한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결 론 :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그 무한하신 능력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만 그렇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좁은 믿음으로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지 못하면 우리의 생애는 사탄의 공격으로 얼룩져 많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면 능력의 원천이 되신 그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아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71) 기도와 죄

  (마가복음 11 : 25)

  서 론 :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본 베드로로부터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고 한 말을 들으신 주님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기도의 능력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믿음의 기도를 드리려면 상대방의 혐의에 대한 용서가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여러 가지 방해요소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근원적인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방해를 받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과 연계시킨 것입니다.

  1. 죄와 용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먼저 선행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곧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올바른 처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이 죄에 대한 바른 처리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죄의 용서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만이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말씀에서 죄의 용서에는 양면성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마6:12).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이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생활 중에서 우리들의 죄만 처리되었다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바른 처리를 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죄까지도 처리되지 못한 상태로 있다는 사실을 경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일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더욱 상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8:22-35). 이런 주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과 매일 부닥치는 생활에서 서로 범하기 쉬운 죄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인 바른 지식을 가지고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에는 형제와 나와의 죄에 관한 문제가 많은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 본문에 나온 말씀을 보면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죄는 세상사람들의 죄와 분명히 한계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죄의 관념은 양심이나 율법적인 면에서의 죄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대요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만약에 용서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그 자체가 하나의 범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려면 우리 마음속에 죄악을 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1)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혐의라고 나와 있는 죄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된 혐의를 말합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거나 오해된 일, 어떤 언쟁이나 다툼에서 나온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혐의란 자신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우리는 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용서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일이지 근본적인 죄의 사유는 아닙니다. 죄의 사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2) 용서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생활은 우리에게 죄지은 자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4:8).

  여기서 주님이 말씀해 주시는 의도는 우리가 이처럼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그 혐의를 용서해 주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생활을 하면 우리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우리가 구하는 바의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용서의 확신은 바로 형제의 혐의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확실한 증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그 어떤 죄라도 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죄가 나를 정죄하고 그 죄가 나에게 부끄러움을 주고 그 죄가 나를 하나님 앞에 송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에 대한 혐의의 용서도 그 중에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먼저 용서하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72)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권세

  (마가복음 11 : 27  - 33)

  서 론 : 예수님께서 ‘호산나’를 외치는 찬송소리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나귀를 타시고 메시야로서 입성하신 일과 성전을 청결케 하시기 위해 입성하셨던 일과 본문에서 다시 세 번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날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시며 “기록된 바 내 집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다음날에도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성전에 나타나신 것을 본 그들은 이 좋은 기회에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거리를 만들려는 의도로 예수님을 향하여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고 따진 것입니다.

  1.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냐”는 그들의 질문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습니다.

  (1) 첫째는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당신에게 무슨 권세가 있기에 그같은 일을 행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질문은 물론 함정이 깔려 있는 질문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 채찍을 들고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며 신성한 성전을 강도의 굴혈 운운하는 언동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라 할지라도 감히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 일을 당신은 무슨 권세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자신이 이 같은 권세를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의 의도대로 예수의 입에서 그같은 말이 나왔다면 그 이유로 그들은 예수님을 산헤드린 법정에 세우고 주님을 죽이려던 그들의 음모를 성사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2) 다음에 두 번째는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권세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받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 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이 같은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대답할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에 만약 그같은 대답을 들을 경우, 그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는 죄명으로 고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입에서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빨리 듣기를 원했습니다.

  2.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질문의 저의를 아시고 이 질문에 담겨있는 함정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모함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간계에서 나온 모든 질문에 예수님은 지혜를 쓰셨습니다.

  (1) 이런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이상한 질문을 그들에게 던지셨습니다. 그 질문이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무르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예상외의 질문에 어리둥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을 미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이 자신들을 매도하며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란 표현으로 그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임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에 대하여 물으려고 찾아온 유대인들을 향하여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는 요한의 증거를 그들은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난감해 한 것은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자신들이 요한을 믿지 않고 요한의 세례를 거부한 일에 대하여 변명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만약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는 유대인들의 질타를 받을 것이 확실하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 서로 의논한 결과 가장 무난한 답을 모색해 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2) 예수님은 그들의 알지 못하노라는 대답을 들으시고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원래가 예수님으로부터 올바른 답변을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서 책을 잡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성사시키려는 악의적인 의도에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물론 이제 잠시후면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마지막을 마칠 것인가에 대하여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까지 실로 하실 일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로 그때가 이를 때까지 예수님은 그의 남은 사역에 충성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지도자이면서도 믿어야할 세례 요한을 배척하므로 회개의 기회를 상실해 버렸고 끝내는 그가 증거한 메시야까지 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여 주님의 채찍으로 내침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PREV :   마가복음 12장 (73-79) 밤중소리 
 NEXT :   마가복음 10장 (59-66)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