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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59-66)
 밤중소리  01-26 | VIEW : 509

  (59) 그리스도인의 이혼문제

  (마가복음 10 : 1 - 12)

  서 론 : 옛부터 부부간의 이혼 문제는 사회적인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하며 결혼하면 서로간의 불화나 의견의 상충이나 성격적인 차이 등으로 이혼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 중에 이혼의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한평생을 평탄하게 살아가는 가정이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혼 문제는 우리들 인생이나 가정에 실감 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는 과연 부부의 결합이나 이혼 문제에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우리들의 가정을 이혼으로부터 지키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1. 바리새인들의 시험적인 질문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의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서도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이처럼 전례대로 말씀을 가르칠 때,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새인의 일당들이 예수님 주위에 둘러서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1) 바리새인의 질문은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이 같은 질문은 예수님께 대한 율법적인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율법적인 올무에 매이게 하여 그의 교훈을 무력화시키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시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끔 엉뚱한 질문으로 대답을 난처하게 하는 시험을 시도했는데 이 이혼 문제 역시 답변하기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의도하는 바는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과연 무슨 대답을 하실까? 그 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혼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은 도덕성이 결여된 분으로 인식시킬 수 있으며, ‘이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모세의 교훈에 모순되는 것으로 매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난처한 문제를 선정하여 질문 공세를 펴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자들로 답변하게 하심으로 교훈의 인상을 깊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시험에 요지는 바로 ‘모세의 이혼증서’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배우고 또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편견을 파헤쳐 율법이 말씀해 주고 있는 율법의 참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하락하였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인용한 모세의 허락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라고 한 신명기 24:1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2.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율법이 의미하는 정신과는 대단히 모순된 해석이었습니다.   (1) 예수님은 그들의 해석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으시고 이 같은 모세의 명령은 “너희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이한 답변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남성들의 아내에 대한 폭군적인 태도로 인하여 허락했다는 뜻입니다. 너희의 마음의 완악이란 아내를 지배하는 남성들의 우월적인 본성과 아내를 자기 소유로 인식하는 그릇된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남성들의 이기적인 횡포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어버리게 허락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기서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여자는 남자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임을 강조하신 말씀이며 인간의 혼인은 인격대 인격의 결합이지 남성이 위주가 되고 여자가 종속이 되는 불평등한 만남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이런 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결합입니다. 예수님의 이 결론적인 말씀에 예수님을 둘러서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만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집에서 이 문제를 다시 묻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위적인 이혼은 간음죄에 해당된다는 경종으로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란 말씀에서 시사해 주는 바와 같이 간음죄 외에는 아내나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셨습니다(마5:32).





  (60) 어린이와 하나님의 나라

  (마가복음 10 : 13 - 16)

  서 론 : 예수님 곁에는 많은 여인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드렸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자녀들이 주님의 손길로 안수를 받으므로 축복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어머니의 자연스런 마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를 제지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이때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분별없는 행동에 대해 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엄히 이르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어느 사회이건 어린이들에 대하여 성인들과 똑같은 입장에서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거나 용납해 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가까이 데리고 오는 것을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데려온 것은 만져주심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안수를 통한 축복은 유대인들에게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해 주었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했을 때도 손을 얹고 안수하여 축복해 주었습니다(창48:13-20). 그런데 이 일이 제자들에 의하여 제지를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아마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기 위해 너무나도 분주하고 피곤하신 주님을 어린아이들의 만져주심을 원하는 여인들의 몰지각한 일로 자기들의 선생님께 더욱 피곤함과 귀찮음을 주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2) 이 같은 제자들의 행동을 예수님은 분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마음으로 분개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분개는 제자들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인격적인 푸대접,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의 어린아이들을 무시한 것, 그리고 이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주님의 사랑의 대상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함에 대한 탄식이었을 것입니다.

  ①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선언은 어린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해 온 이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교회에 ‘어린이 주일학교’가 탄생한 일도 그 근원이 주님의 이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어린아이들도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라고 하는 선언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의 구원이 그 부모의 신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면 우리는 결코 어린아이들의 신앙생활을 경히 여기거나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② 다음에 주님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런 자’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란 뜻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리키신 말씀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신앙을 본받은 자’란 뜻이 되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본받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교훈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에 대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① 어린아이들은 그 마음에 순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는 있겠지만 어린아이들은 아직 장성하지 못한 나이에 있기 때문에 악에 물들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② 어린아이들은 생각이나 성격이 단순합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마음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쉽게 들어갑니다.

  ③ 어린아이들은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들 어린아이들처럼 순결하고 단순한 마음과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심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어린아이들도 주님의 잃은 양들입니다.

  결 론 :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에 대하여 이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타산적이요 기복적인 어른들의 신앙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어린아이들로부터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61) 한가지 부족한 것

  (마가복음 10 : 17 - 21)

  서 론 :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신원은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는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권세도 있는 청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마19:22, 눅18:18). 그가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꿇어앉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청년은 평소에 예수님을 존경하며 자신이 해결 받고자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생인줄로 믿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께 물은 말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란 영생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의 물음과 예수님의 대답에서 주님을 따르는 일에 걸림이 되는 하나의 커다란 장애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재물이란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경종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6:24).

  1. 영생을 갈망한 청년의 경우

  이 청년은 영생을 갈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생활 면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사모하는 그에게 영생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1) 그가 영생에 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일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이 청년이 안고 있는 고민은 비단 그에게만 있는 고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2) 이 청년의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사람들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청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영생 관은 이 청년의 경우와 같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생이 결코 인생들이 추구하는 선행에 있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그에게 나타내 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중에는 ‘선한 자’가 존재할 수 없고 선행으로 구원 얻을 자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불순종으로 타락한 이후, 이 선의 자리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왔으며 전부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선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5:16-21).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도 없고 의로운 이도 없습니다.  

  2. 한가지 부족한 때문에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그가 원하는 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이 교육에서 그는 “한가지 부족한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 한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자신이 선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선의 표준이 계명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에 이 청년은 자신 있게 “선생님이여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2)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기서 이 청년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신 그 부족한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부족한 한가지란 그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율법의 정신을 따라 지킨 것이 아니라 외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증거를 그에게 밝히 보여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이 청년의 이웃을 말합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결 론 : 이 청년은 자기의 부족한 것은 알았지만 그의 그 부족한 것을 채우지 위해 주님께 은혜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재물 때문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매우 가까웠지만 그 문턱에서 재물 때문에 실족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원하셨던 것은 재물의 포기가 아니라 선행으로는 절대로 영생에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는 아마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던가, 아니면 “주여 나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고 자신의 무지를 회개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더라면 그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근심하며 떠났다고 했습니다.





  (62) 부자와 천국

  (마가복음 10 : 23 - 27)

  서 론 :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에서 대단히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놀라고 또 심히 놀라워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충격적인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이 많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말씀과 그 말씀을 뒷받침해 주는 비유로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심으로 전혀 불가능하다고 표현하셨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부자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는 재물이 많은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도리를 묻게 된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해 주심으로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1) 이 한가지 부족한 것은 사실인즉 그가 영생을 얻을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구원은 율법적인 의나 어떤 선한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 곧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있습니다(요1:12-13). 그런데 이 청년에게는 율법적인 생활은 칭찬 받을만했어도 그것만으로는 영생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것이라면 이것은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부족한 조건이라고 보겠습니다. 그것이 그 청년의 그 많은 재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러면 네게 영생이 있으리란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막10:21). 그 청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말씀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교훈에 감명 받아서가 아니라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 대한 충격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충격은 한층 고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에서 그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고 서로 말하면서 심히 놀란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동향을 보시고 부연해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1)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할 수 없다는 말은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단정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돈과 영생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밝혀주신 바는 돈이 믿음을 가지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방해요인이 되는 것을 밝혀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① 사람은 모두 죄인들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 아무라도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그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사랑이요 은혜입니다. 돈이 많아도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돈이 없어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이 있는 자는 그 재물 때문에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6:24).

  ②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가시넝쿨로 만듭니다. 말씀이 그 마음에 들어가도 그 말씀이 마음에 자리잡고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마13:22).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대단히 고무적이요 소망적인 말씀입니다. 만약에 하나님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면 이 세상에 재물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다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탕자의 경우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탕자의 생애에 직접 개입하셔서 탕자도 집에 돌아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결 론 : 부자라도 그에게 구원을 베푸실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혹은 연단으로 혹은 그의 인생실패로 혹은 질병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자에 대한 전도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십니다(잠8:17-19).





  (63) 복음을 위한 보상

  (마가복음 10 : 28 - 31)

  서 론 : 세상적인 부요를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쉬울 것이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제자들은 심히 놀라면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있느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으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힘을 얻은 베드로는 자신들의 경우를 주님께 내 세우면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1. 주와 복음을 위해 희생한 자의 축복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같은 말을 들으시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자의 현세와 내세의 축복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1)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대상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재물에 관한 것이요 하나는 혈연에 관한 것입니다.

  (2) 여기서 버린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버린다는 말은 무조건 유기 한다거나 포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이냐? 가족이냐? 그리스도냐? 재물이냐? 의 선택에 있어서 어느 곳에 더 비중을 두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나 복음을 위해 부득불 집이나 전토를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선택하느냐, 복음을 선택하느냐에 있어서 가족보다 복음을 선택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3) 이런 그리스도중심의 생활은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의미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마6:24). 재물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을 저해하지 못합니다.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이것이 집이나 전토나 형제나 자매나 아비나 어미를 버린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자기가 희생한 재물이나 가족관계의 축복을 백 배나 더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절에서 ‘금세’란 말씀을 쓰심으로 이 같은 상급의 약속이 내세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통상적인 법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현세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현세에서 누리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내세의 상급으로 더욱 풍성하게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백 배라고 하신 표현은 숫자적인 의미의 백 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집이나 전토의 백 배란 말도 이론적으로 부적절하고 더욱이 형제나 자매나 부모의 백 배란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같은 보상의 약속은 하나님의 풍성하고 넘치는 축복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십니다.

  (5) 예수님은 축복에 대한 결론으로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세란 말은 오는 세상으로 우리의 생애가 이 땅에서 마친 후에 오는 새로운 세계, 곧 천국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복음이나 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의 최종적인 축복은 바로 ‘영생’입니다. 적어도 복음이나 주를 위해 이처럼 자신의 재물이나 자신의 가족을 버릴만한 희생적인 생활을 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의 상속자입니다.

  2.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예수님은 31절에서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1)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란 신앙의 열매를 나중에 맺은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포도원에 보내는 두 아들의 경우를 비유로 들려주시는 말씀 중,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21:31).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 맺는 자가 유업으로 받기 때문에 먼저 된 자라 할지라도 열매를 나중에 맺었다면 그는 결단코 먼저 된 자가 못되고 나중 된 자가 될 것입니다.

  (3)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늦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도 먼저 될 자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중 되고 먼저 된다고 하신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기를 희생하는 자들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신 후에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도 먼저 된 자들이라고 나중 된 자들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신 말씀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적인 연한으로 인정을 받거나 그것이 상급의 표준인 줄로 오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을 주님을 위해 바칠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64) 제자들이 요구하는 영광

  (마가복음 10 : 32 - 40)

  서 론 : 예수님은 그의 발길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예루살렘 행은 그가 받으실 고난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언어행동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어떤 결의에 찬 듯한 인상을 보이셨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인상을 받지 못했던 제자들이나 수다한 무리들은 예수님의 그같은 모습에서 놀라움과 어떤 두려움마저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놀라고 좇는 무리들은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이 밝히신 고난의 의미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그의 열 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자기가 당하실 일을 일러 주셨다고 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란 말씀으로 시작하신 주님의 고난의 말씀은 33절과 34절에서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1)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운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과 시기관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이방인인 로마인에게 넘겨줄 것임을 가리킨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처럼 로마인인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 그의 최종적인 재판에 의해 산헤드린에서 죽이기로 결안한 그들의 결안대로 십자가에서 죽이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을 넘겨받은 로마군병들에 의해 수모를 당하시는 주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부활이야말로 고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새로운 소망을 주시는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된 사건입니다.

  (2) 예수님은 이처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처럼 자세히 말씀해 주셨건만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로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 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는 메시야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광의 메시야인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그들은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야 왕국이 지금 당장에 이루어질 줄로 알고 있었으며 그때 자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 나라에서 누릴 영광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2. 요한과 야고보가 소망한 영광

  예수님이 열심히 들려주신 고난과 부활의 교훈은 깨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조차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 일에 관심을 갖는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이루질 것으로 알고 마음이 조급해졌고 흥분하기조차 했습니다.

  (1) 그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밝히고 있는 간구란 무엇입니까?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 같은 요구에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간구는 바른 간구가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간구하는 야고보 형제의 기도는 잘못된 메시야 관에서 나온 정욕적인 기도였기 때문에 자기들의 구하는 바를 자기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례란 이 역시 잔과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실 혹독한 모든 고난을 통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대답은 사실인즉 주님이 말씀하신 “잔과 세례”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심결에 대답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내용을 알건 모르건 장차 그들은 주님을 위해 이 같은 “잔과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야보고는 헤롯에 의해 사도들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므로 주님의 “잔과 세례”에 동참한 것입니다(행12:2). 그리고 요한은 순교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순교자의 생애를 보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던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누릴 영광의 자리를 이 땅위에서 이루러질 메시야 왕국에서가 아니라 하늘의 보좌에서의 영광과 연결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장차 주를 위한 큰 고난의 동참자로 하늘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좌우 편에 앉는 상급은 이미 그 자리를 주시기로 예비된 자를 위한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누구든지 가장 충성스러운 그리스도도의 제자가 그 자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65) 인자가 온 목적

  (마가복음 10 : 41 - 45)

  서 론 :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간구는 당장에 제자들 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에는 선생님이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에서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에서 높은 벼슬자리를 설계하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야고보와 요한의 특출한 행동에 그들은 시기하는 마음으로 분히 가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으며 인자의 오신 목적에 대하여 다시 한번 밝혀 주셨습니다.

  1. 크고자 하는 자의 자세

  예수님은 제자들 간에 서로 크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잘못된 영광을 바로잡기 위해 세상 권세 자들이 누리는 영광과 비교하시면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이 같은 역설적인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크고자 하는 자란 두 가지 뜻이 담겨진 말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을 바라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땅히 남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말씀을 더 강조하시기 위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겸손과 낮아짐과 희생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란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은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자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 사람”이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 자들은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모두 이 같은 의미에서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참 영광을 누리려면 섬기는 일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2. 인자의 온 것은 섬기려 함이라

  다음에 예수님은 인자의 오신 목적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

  (1)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생이요, 또한 장차 나타날 메시야 왕국의 왕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제자들의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의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한평생 섬기심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이처럼 섬기심의 생애를 사신 일은 그가 하늘보다 더 높아지실 수 있는 자격을 갖추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생활로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섬기심의 절정은 그의 대속의 죽으심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최상의 도달점은 그 사람의 위한 죽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하셔야 할 메시야의 사명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으로 섬기심을 받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특히 유념해야 할 일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고 하신 점입니다. 많은 사람이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구속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그의 백성들만이 이 같은 구속의 대상이 되며 그 효과가 미치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말은 먼저 자격이 분명해야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철저하게 그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같은 예수님의 섬기심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땅에서 우리의 생애동안에 주님의 섬기심과 종의 본을 본받고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66)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

  (마가복음 10 : 46 - 52)

  서 론 : 성경에는 여러 사람의 여러 가지 믿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중에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의 믿음은 가히 칭찬 받을만한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끊임없이 부르짖는 믿음, 주변의 핍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끝내 주님을 만나는 믿음, 오직 한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목적을 관철한 믿음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불신의 오늘의 우리 시대에 가히 본 받을만한 믿음이라고 보겠습니다.

  1. 바디매오의 간구

  예수님과 그 일행이 여리고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24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m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무려 1km나 되는 높이의 경사길이 계속되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힘겨운 언덕길이었습니다.

  (1) 바디매오는 여리고에 살고 있는 거지로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신분에 대해 소경 거지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여리고에서 나가실 그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바디매오는 벌써부터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많은 병자를 고쳤다는 말도 들었고 그는 또한 병자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말씀으로 치료해 주신다는 소문도 듣고 있었습니다. 바디매오의 귀가 번쩍 열렸습니다. 그를 만나면 자기의 소경된 눈을 고침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습니다. 소경인 바디매오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그에게 들리게 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이러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처럼 부르짖은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야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디매오의 간절한 간구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호소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를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3) 바디매오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한번의 기도로 응답을 받을 줄로 여기면 안됩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도 밤낮 부르짖어야 합니다(눅18:1-8). 바디매오의 간구는 즉시 방해에 부딪쳤습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향하여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그의 간구를 제지했습니다. 기도하면 그 기도를 방해하는 각가지 요소들이 작용합니다. 바디매오가 방해꾼들의 제지에 굴복하여 기도하는 일을 포기해 버렸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2. 예수님의 응답

  바디매오의 두 번째 간구에 시끄러운 군중 속에서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셨던 예수님의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머물러 스셨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의 발걸음을 머물러 서게 한 일은 모세가 홍해를 가른 기적보다도, 여호수아가 궁창의 해와 달을 멈추게 한 기적보다도 다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의 기도가 그같은 이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오직 소경 거지인 바디매오 뿐입니다. 예수님은 왜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에게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2) 바디매오는 주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겉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바디매오가 걸치고 있었던 그 옷은 그의 옛 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께 나가는 생활은 세상에서 걸쳐 입었던 추한 옷을 벗어 던지고 이제 새 사람의 새 옷을 입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이처럼 선언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의 눈이 뜨임 받은 주님의 기적은 바로 바디매오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그에게 영적 구원을 이루게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다음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기도로 자신의 죄인 됨과 무익함을 아뢰고 주님의 자비에 호소한 기도였습니다. 비디매오는 그의 눈이 밝게 뜨임 받아 이제 이후의 그의 생애는 오직 주님을 위한 새로운 생활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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