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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9-58)
 밤중소리  01-26 | VIEW : 560

  (49) 예수님의 변형

  (마가복음 9 : 1 - 3)

  서 론 : 성경에는 사람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1절에 있는 말씀도 그 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의 이해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문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얼마인가는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1.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그러면 이 같은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신중한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1)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실제로 그의 제자들이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직도 재림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2) 어떤 분은 이 경우의 해석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2절에 나온 말씀대로 이 말씀을 들은 후 엿새만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산에서 놀라운 광채의 몸으로 변형되셨는데 하늘에서 내려 온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말씀하는 광경이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바로 이때 제자들이 친히 본 변화산에서의 이 같은 광경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죽기 전”에 라고 그 시기를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하신 지 불과 엿새 후에 일어난 사건이란 점에서 시기적으로 너무 빠르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3) 다른 또 하나의 경우는 그 후 오랜 시일이 지나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의 경우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은 또한 그 후 온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의 형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란 말씀에서 아마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그곳에 있었던 제자 중 얼마는 이미 죽은 상태에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 강림 때는 가룟 유다만 제외하고 모든 제자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4) 마지막으로 한가지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받은 종말적 계시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후 95년경 복음을 위해 유배되었던 밧모섬에서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주 재림의 영광이 그것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서두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 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주 재림의 영광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 기쁨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간구를 드렸습니다.

  2. 변화산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

  예수님이 먼저 영화로운 몸으로 변형되사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후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의 변형은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변형이란 단어는 다른 형태로 변화되었다는 뜻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이 같은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하늘에서 내려 온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려면 그들보다 더 우위적인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엘리야와 모세가 내려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일은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살아 있는 몸으로 승천한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가 하늘로 올려 갔을 때 그의 몸은 물론 변화 받아야 했습니다. 모세는 몸은 세상에서 죽고 땅에 묻혔지만 영으로 하늘에 올라간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모세는 어떤 사람들의 견해처럼 영의 대기소라고 하는 낙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와 함께 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둘째로 엘리야나 모세가 똑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내려왔습니다. 우리들의 보기엔 같은 영광의 몸이지만 하늘에서 보기엔 엘리야의 몸이 모세의 몸보다 더욱 영화롭게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변화 받은 몸, 말하자면 신령체인 부활한 몸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이 같은 놀라운 광경을 바라본 사람은 예수님의 세 제자들이란 사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들 세 명의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웠습니다. 이들은 바른 신앙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높은 신앙 차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 론 :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을 남달리 사랑하면 이들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땅의 것에 얽매이고 신령한 은혜를 소홀히 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리석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신앙적인 단계를 높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다른 제자들이 볼 수 없었던 신령한 세계,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50)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마가복음 9 : 4 - 8)

  서 론 :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이 계시는 산에 나타난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이곳에는 없지만 눅9:31절에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였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세분의 대화는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그것은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자 이스라엘이 원하고 바라는 메시야의 예표 인물로 자기를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리야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의 대표자로 이 두 인물이 예수님이 계시는 산에 내려온 사실과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대화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의미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1. 베드로의 초막론

  갑작스럽게 이 같은 황홀한 광경을 바라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1) 아마 이들 두 명의 하나님의 전권 대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타났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환상이나 이상으로 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사건은 제자들의 육안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체험적이며 실질적인 사건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실제로 그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의 생명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 (영혼)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말하는 것처럼 영의 대기소에서 부활의 날까지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곧장 천국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거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똑같이 천국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천국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이들은 이미 육신의 옷을 벗고 신령한 생명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영이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신령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었으며, 엘리야는 그의 육신이 신령 체로 변화되어 부활한 몸과 동일한 신령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세 제자중 하나인 베드로가 이 광경을 바라보고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면서 흥분과 감격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당장에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 왕국이 실현될 줄로 알고 있는 터에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고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까지 동원되어 함께 대화하시니 흥분 할 만도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메시야관은 교회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들의 메시야가 오시면 그분에 의하여 곧장 이 땅에 그들의 왕국이 실현 될 줄로 알고 있었던 그런 메시야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지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초막 셋을 짓되”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높은 산인지라 날씨가 내우 쌀쌀했을 것입니다. 세 분이 밖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할 최선의 예우는 아마 그분들을 위해 초막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 예수만 보이더라

  이때 마침 하늘에서 구름이 그들에게 내려와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1)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그들에게 내려왔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곳에 나타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구름이 저희를 덮었을 때 그들 중에 있었던 모세와 엘리야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치고 구름에 덮여 하늘로 올려 갔습니다.

  (2)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이 같은 영광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에서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으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참 메시야 이심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누구의 말을 들어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만을 들어야 합니다.

  (3) “이때 제자들이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다시 바라본 예수님은 변형된 황홀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야 자기들의 선생이 보통 분이 아니심을 알고 더욱 두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 론 : 제자들의 변화산에서의 이런 경험은 그들의 마음에 한평생 간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51) 먼저 온 엘래야는 누군가

  (마가복음 9 : 9 - 13)

  서 론 : 변화산에서 일어난 황홀한 사건은 이들 세 제자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요 또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왜 엘리야가 나타났을까? 그리고 그 엘리야는 말라기에 있는 엘리야의 예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점 등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 중에 엘리야의 사역을 이루는 한 명에 대하여 그가 엘리야이며 인류의 종말에 모세와 엘리야가 직접 하늘에서 내려와 예언을 하다가 순교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경계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1)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되셨던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시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고난의 메시야에 대한 계시는 이해하지 못하고 영광의 메시야의 출현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같은 처지에서 산에서 본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에 관한 사건을 소문낸다면 그야말로 이제 당장에 메시야 왕국이 임할 줄로 알고 소동이 날 것이기 때문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경계의 말씀을 들려주시게 된 것입니다.

  (2)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의논은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는 “인자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메시야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씀입니다. 메시야가 죽다는 말씀도 이상하거니와 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인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니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하게 된 것입니다.

  2. 엘리야는 누군가?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분명 메시야이 신데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씀을 하시는가? 이에 대하여 엘리야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1) 제자들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같은 질문이 제자들에게서 나오게 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한데 그러면 엘리야는 누구며, 만약 엘리야가 와서 이스라엘로 회개시켜 메시야를 영접하게 한다면 메시야가 왜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엘리야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에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말3:5-6). 말라기에 나타난 문장을 보면 마치 엘리야의 등장이 재림의 예수의 시기로 보는 듯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으로 보아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등장의 시기를 인류의 종말로 알고 있었으며 이 종말에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메시야의 등장에 앞서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회개시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① 이 예언은 주의 초림에 관한 예언이며 세례 요한의 등장과 주의 초림으로 이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의 이르기 전에”라고 한 말은 마지막 인류의 심판이 있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그의 아들을 보내실 것과 엘리야를 보내실 일에 대하여 예언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엘리야를 세례요한과 결부시켰습니다. (마17:13). 엘리야로 먼저 온 세례요한도 기록된 대로 사람들에게 임의로 대우받았으며 예수님 자신도 기록된 대로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셔야 했습니다.

  ② 우리는 이 엘리야의 등장해서 초림의 메시야의 경우가 아닌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란 말을 주 재림의 시기가 되는 인류의 종말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이 말라기의 예언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초림의 메시야의 경우에는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지적했다면 재림에 메시야의 경우에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재림의 경우는 세례요한과 같은 회개의 사명을 가지고 등장하는 또 다른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두 증인”들입니다. 두 증인은 종말에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습니다. 이 권세에 대하여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06일을 예언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11:3).

  결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 적인 깊은 지식을 전달해 주셨지만 그들에게는 깨달음이 부족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은 모세의 얼굴에 씌운 수건을 벗지 못하고 성경을 상고하기 때문에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52) 귀신의 존재

  (마가복음 9 : 14 - 22)

  서 론 : 변화산에서 일어났던 일은 이제 막이 내리고 새로운 사건으로 장면이 옮겨집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내려온 곳은 남은 제자들이 머물러 있었던 장소입니다. 산 아래에 남아 있었던 제자들은 무리에게 둘러싸여 서기관들과 변론하는 일, 귀신들린 아이로 인한 난처한 처지 중에서 쩔쩔매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때 선생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 온 무리는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제자들과 서기관들에 변론

  예수님의 눈에 비춰진 것은 제자들의 난감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적인 질문을 받고 있었으면서도 그 공격을 막아낼 답변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을 민망히 보시고 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의논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가 지금 그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내용을 설명하기를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고꾸라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2) 이 대답에 따르면 주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비의 아들을 고치지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변론이 벌어졌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그들의 변론을 추론해 본다면 제자들은 서기관들로부터 “너희가 무슨 권능으로 귀신을 내어쫓느냐” “너희 선생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냐” 는 등, 이런 안건을 가지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을 것이며 제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2. 귀신의 존재와 귀신의 사역

  성경에는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한 언급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의 근원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1) 악한 영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단입니다. 이 사단은 악한 영의 근원 자로 등장합니다. 이 사단은 뱀의 모습으로 에덴에 나타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뱀은 사단의 자기 표현의 수단에 불과할 뿐 뱀이 곧 사단은 아닙니다. 사단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적 존재인 인간을 미혹하기 위해서는 어떤 물질 형태의 생명체에 들어가 활동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단에게 이용당할 만한 타락한 피조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가장 간교하게 만들어진 뱀에게 들어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첫 번째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자에 대하여 계시록 12장에는 “한 큰 붉은 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인류의 종말에는 이 자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온 세상이 미혹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자는 하늘의 첫 번째 반역자로 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사14:12-15, 겔28:14-16).

  (2) 그런데 성경에는 악령의 존재에 대하여 사단에게만 국한시킨 것이 아닙니다. 악령, 귀신, 더러운 영, 미혹케 하는 영 등으로 불리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이에 대한 성경 적인 바른 규명이 있어야 합니다.

  ① 어떤 사람들은 이 귀신이 존재를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불신자의 영혼은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세상 영계에 머무르는데 그 사람들의 영혼이 이 귀신의 존재로 인간계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라고 말하면서 그 귀신을 쫓으신 것을 보고 벙어리 되고 귀먹은 사람이 죽은 귀신이 그 사람에게 들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귀신 쫓는 사람들이 이 같은 귀신론을 믿고 있습니다.   ③ 악령 들린 사람들의 증상을 보면 이들은 자기의 조상, 또는 다른 사람의 흉내내며 그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불가사의적인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악령 들린 자에게는 투시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라사인의 악령 들린 경우를 보면 생전에 한 번도 주님을 본 일이 없었는데도 예수님을 만나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악령 들린 자의 악령이 주님의 권능에 의하여 내어쫓기며 다른 짐승에게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3) 사단에 관한 성경의 증거는 사단의 허다한 무리들이 사단과 함께 존재하며 사단과 함께 활동한다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계12:7-9). 이들은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과 함께 세상을 미혹하는 사단의 사자들입니다.

  결 론 : 사단은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늘 보좌에서 가장 거룩하게 지으심을 받은 구릅 중에 하나였습니다(겔28:14, 계4:6). 그리고 사단의 사자들로 나오는 악령의 존재는 그의 휘하에서 그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내어쫓긴 타락한 천사의 무리들입니다. 이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을 때 그들의 거룩함은 사라져 버리고 가장 더럽고 추한 존재로 떨어져 버렸으며 이들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미혹하는 악령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53) 믿는 자의 능력

  (마가복음 9 : 21 - 24)

  서 론 :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불신의 현장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믿음이 없는 세대에 대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한탄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의 무리들도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것을 얻고 찾으려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에게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1.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란 말씀에서 예수님의 비분에 찬 탄식을 들을 수 있는데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는 말씀은 얼마 후에 예수님은 그들과 헤어질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얼마 후에 있을 예수님의 고난을 가리킨 말입니다.

  (1) 그 아이의 아비는 예수님께 매달려 애원했습니다. 지금 그 아비는 자기의 아들에게 들어간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그 아이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며 땅에 엎드려져 굴며 거품을 흘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어릴 때에 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고 대답하면서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간구 했습니다.

  ‘그러나’라고 하는 말에는 한 가닥의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2)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란 말은 그 아이의 아비의 주님께 대한 믿음의 정도를 나타낸 말입니다. 그 아비의 이 같은 말은 그가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의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다만 어쩌면 고칠 수 있다고 하는 한가닥 요행을 바라는 기대감으로 “그러나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는 간구를 드린 것입니다.

  2.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옵소서”라는 그 아비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먼저 그 아비의 불신에 대한 책망으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에서 지금 그들의 불신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나 하실 수 있거든” 도와달라는 그 아비의 말에 대하여 “왜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느냐”는 뜻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늘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앞에서 여러 가지 기사 이적을 목격하며 권위 있는 말씀도 들었지만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생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죽이라는 음모를 꾸미고 고소거리를 찾으려고 뒤를 쫓아다녔던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현실적인 메시야로 알고 그로부터 모세와 같은 권능과 하늘에서 내리는 떡을 원했습니다(요6:48-71).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할 고난의 메시야이신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의 믿음은 이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예수님은 아마도 이 선지자 중의 한 분으로 오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뒤이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권능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① 이 믿음은 먼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아들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② 이 믿음은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③ 이 믿음은 예수님이 비유하신 한 겨자씨처럼 살아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마17:20). 말씀은 하나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 속에 열매를 맺는 씨앗으로서의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④ 이 믿음은 의심치 않는 기도의 능력을 의미합니다(마21:21-22). 여기서 믿고 구하는 기도란 약속에 기초한 기도를 말합니다.

  결 론 : 예수님께서 하신 이 놀라운 말씀은 비록 그 아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이처럼 우리에게 금과옥조 같은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을 개발해야 합니다.





  (54) 믿음이 없음을 도우소서

  (마가복음 9 : 23 - 29)

  서 론 : 귀신 들린 아이에 대한 문제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비가 예수님을 향하여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외치자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같은 말씀을 들은 그 아비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를 질러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1. 내가 믿나이다.

  그 아이의 아비는 처음에는 “내가 믿나이다”는 말로 대답하더니 곧 이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도움의 간청을 드렸습니다.

  (1) 이 아이의 아비가 처음에 한 “내가 믿나이다”는 말은 주님의 그 말씀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아이의 아비에게 하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그 아이의 아비에게 믿음이 적어서 아들의 병을 못 고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첫째로는 예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권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권능을 믿는 자에게도 이런 권능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이 아이의 아비가 “내가 믿나이다”고 외친 것은 자신에게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그 말씀을 믿는다는 뜻으로 “내가 믿나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2) 다음에 그 아비는 또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애처로운 호소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호소한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는 말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아비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믿나이다”고 대답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에게 그 같은 믿음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자기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하는 간구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0: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믿음의 씨앗입니다. 이 씨앗을 좋은 밭(회개한 심령)에 뿌려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 아이의 아비는 이 같은 능력 있는 믿음을 가질 만한 말씀을 들은 일이 없으며 열매를 맺으므로 믿음을 소유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믿음을 갈망한 나머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구하게 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아비를 불쌍히 보시고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보시고 그에게 들어가 있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한 경련을 일으킨 후, 나갔다고 했습니다.

  2. 제자들의 질문

  이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어느 한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었던 제자들이 주님께 종용이 물었습니다.

  (1)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들이 경험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12 제자를 부르사 둘씩 짝을 지어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막6:7).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했습니다(막6:12-13). 그러면 왜 그들이 이 아이에게 들어가 있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는 일에 한결같이 실패한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아본다면 귀신을 쫓는 권세나 병 고치는 권세는 언제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의하여 전도대를 구성하여 복음을 전할 때 이 같은 권능을 받은 것인데 그들은 언제나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권능을 필요에 따라 회수하시기도 하며 자신들이 잘못 간수하므로 상실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이 실패한 원인에 대하여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해답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 없이 지난날에 소유하고 있었던 권능만으로 내쫓으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날의 권능을 계속 소유할 만한 기도의 계속적인 생활도 못했습니다. 계속적인 기도 없이 계속적인 권능의 행사란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권능만을 믿고 그 권능을 계속적으로 소유하게 하는 기도생활에는 나태했습니다.   결 론 : 이 아이의 아비의 신앙적인 자세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란 간구는 그런 성숙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호소입니다. 아마도 그 후 그는 이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아이의 아비처럼 연약한 것을 알고 무조건 권능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만한 마음을 가리지 말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하는 겸손하므로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성숙한 기도의 생활, 열매맺는 순종의 생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55) 깨닫지 못한 이유

  (마가복음 9 : 30 - 32)

  서 론 :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비의 아들을 고쳐주신 후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새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알리고자 아니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현세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수행하셔야 할 메시야적 사역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1. 깨닫지 못한 이유

  주님의 제자들은 그토록 오랜 기간 주님을 따르며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하시는 행적을 친히 보고 자신들도 복음을 전하면서 권능을 행했지만 그들은 참 구속의 도리에 대하여 캄캄했습니다.

(1) 예수님은 그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문제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상대하실 때는 고난과 부활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자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오랜 기간 영적으로 버림받는 상태에 놓여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래도록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그들로 충분한 회개의 기간을 주셨지만 그들은 끝까지 거역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패역한 길을 걸었습니다. 이 같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등장은 그들의 심판의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그들은 그들이 의지하는 율법에 걸려 넘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주체로 오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정죄의 표준이요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을 따랐습니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가르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영적인 개념을 전혀 생각에 두지 않고 현세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이 이루실 구원 사역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일이요 더욱이 자기들이 하는 일이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죽으실 일과 다시 사실 일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님의 죽으심이나 부활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은 너무나도 당연했으며 그들은 오직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만 하면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세아 선지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고 탄식한 일이 있습니다(호4:6).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같은 진리의 지식을 버리고 현실적인 영광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거치는 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핵심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그들의 이 같은 신앙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2. 주님의 가르치심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그가 당하실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제자들도 끝내 이해하는 일에 실패했지만 그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자 이 모든 가르침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믿음을 가지고 복음에 큰 일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듣던지 아니 듣던지 이 말씀을 전해야 하며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그 사람의 영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처럼 나타납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같은 주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깨닫지 못 했을 뿐 아니라 “묻기도 무서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질문을 무서워한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며 너무나도 의외의 말로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질문을 삼가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예루살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만이 우리에게 참 소망을 줍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영광과 축복을 바라고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선한 싸움에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고난과 그의 부활에 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에 경주 장을 달려가야 합니다.





  (56) 누가 큰 자냐

  (마가복음 9 : 33 - 37)

  서 론 : 누가 크냐는 문제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당면문제였습니다. 선생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터인데(메시아 왕국) 눈앞에 다가온 그 나라에서의 자신들의 지위에 관심을 갖는 일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길을 거닐면서도 주님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기들끼리 “누가 크냐”에 대한 문제를 안건으로 쟁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노중에서 쟁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으심을 통해서 예수님은 겸손이 무엇이며 자신을 낮추는 일이 무엇인지, 그런 생활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1. 첫째가 되고자하는 자의 자세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에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 세상에서 첫째가 되고자하는 자는 땅엣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골3:2). 땅에서 첫째가 되고자하는 생각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다른 이에게 봉사하고 사회에 헌신하고 인류사회에 유익한 일꾼이 되기 위한 생각에서도 아니요 남을 지배하고 남의 머리가 되어 그들에게 존경을 받는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 같은 인간의 생각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2)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역설적인 논법을 발견하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의도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는 일이 나쁘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첫째가 되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① 첫째가 되고자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하신 끝이란 말씀은 ‘맨 끝’이런 뜻으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눅17:10). 뭇 사람의 끝이 되는 일은 겸손에서 열매를 내게 됩니다. 위선적이 아니라 진실한 겸손이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존경해 주는 일입니다.

  ② 첫째가 되려면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남에게 섬김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려 왔다”고 하셨는데 그의 위대한 섬기심은 인류의 지도자의 면모를 보이셨습니다. 남을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첫째가 되는 사회는 독재자의 경우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는 일은 정말로 첫째 되는 영광에 상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과 연결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고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여기서 우리는 어린아이를 안으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안으셨을까요? ‘뭇 사람에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한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신 주님의 모습은 아주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자를 섬기시는 진실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는 사람은 이처럼 모든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는 형제들에게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못나고 소외된 형제들을 사랑해 주고 그런 사람들의 친구로써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2) 주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에 대한 놀라운 상급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둘 말씀은 ‘내 이름으로’란 대목입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그 같은 생활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만약에 우리가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으로 하면 그같은 우리의 일은 주님을 그처럼 공궤한 일로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최후의 심판대인 흰 보좌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주님의 선고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주님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마25:34-40).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주의 이름으로 뭇 형제를 섬기는 자가 되고 주 이름으로 뭇 사람의 끝이 되어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 나라의 커다란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57) 주님께 속한 자의 특권

  (마가복음 9 : 38 - 42)

  서 론 : 주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무리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청중이 맞아들이고 존중하며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같은 일이야말로 주님을 영접한 것과 똑같은 크나큰 축복이란 사실을 강조하신 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란 이름 때문에 그에게 비록 사소한 대접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같은 일은 결과적으로 주님을 대접한 일이기 때문에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귀신을 내쫓은 사람에 대한 논란

  요한이 주님께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일에 대해 보고하면서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 ‘그 어떤 사람’은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일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에게는 제자들보다 훌륭한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모르셨을까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은 그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나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경우 그 여인이 믿음으로 뒤에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을 때 혈루 근원이 곧 말라 고침을 받았는데 이때 주님께서는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셨다”고 했습니다(막5:30).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같은 일을 금하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배반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의 이름으로 하는 일을 금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 전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는데 이 사람은 주님이 인정해 준 사람들이었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4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대단한 고무가 되며 또한 주님을 믿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사랑의 헌신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이 되는가에 대한 분명한 약속입니다.

  (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의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서도 형제로서 대접은 고사하고 냉대한 일에 대한 책망 겸, 주님을 섬기는 형제들에 대하여 주의 이름으로 잘 섬겨야 할 일에 대한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하여”란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들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루고 있는 형제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사람에게 형제의 사랑으로 선대한다면 이 사실을 우리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대접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급이란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며 소중히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물 한 그릇’이란 대접의 한계가 나옵니다. 물 한 그릇은 어느 곳에서나 구할 수 있는 값싼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이란 너무나도 갈급하고 시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대접은 생각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생활은 멀리 우리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상급은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선행에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에도 이같이 놀라운 상급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고무적인 일입니까?

  (2) 주님은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좀 전에 예수 이름으로 대접하는 경우와는 정 반대적인 입장에서 하신 경종입니다.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미천하고 어리석고 존재 가치가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만약 그를 실족시키는 경우에는 이처럼 두려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실족케 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또는 ‘죄를 짓게 한다’ ‘배반하게 한다’의 의미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결 론 : 연자 맷돌은 그 사람의 무거운 죄를 말합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 죄 값으로 받을 하나님의 형벌로써 지옥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에게 대접하는 우리의 적은 헌신이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고,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지극히 미미한 형제라 할지라도 그를 실족시키는 일을 하면 무서운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이 엄중한 경계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거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8) 죄에 대한 투쟁

  (마가복음 9 : 43 - 50)

  서 론 : 예수님은 우리가 범하는 죄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지옥과 인간의 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죄로 말미암아 들어가야 할 지옥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언급과 그 지옥의 두려운 심판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심각성과 두려움을 실감케 하고 있습니다.
  
  1. 지옥과 범죄의 두려움

  예수님은 42절에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후, 본문에 와서 범죄하는 자들이 받을 지옥의 심판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인간의 범죄 도구로 ‘손과 발과 눈’이란 신체기관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 기관은 분명히 우리 인간들의 범죄도구로 씌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 기관은 우리의 마음과 연결된 것들이며 우리의 영혼과 상관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지적하신 찍어버리라 빼어버리라는 말씀은 범죄한 그 손과 발과 눈의 절단이나 빼어냄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자세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찍는다는 표현은 다시는 범죄치 않도록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회개란 말은 그 죄에 대한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히는 일입니다(요일1:9). 여기서 자백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동반되는데 하나는 그 죄에 대한 마음을 찢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다른 또 한가지는 이제 자백한 죄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육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일흔 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발이나 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같은 뜻의 표현입니다. 비록 우리가 절뚝발이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영생에 들어갈 때에는 그 발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에 들어갈 때나 지옥에 들어갈 때나 우리 신체적인 조건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① 먼저 우리는 내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다는 사실에 대한 뜨거운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난날의 우리의 죄로 족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롬7:4).

  ②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알고 죄와 결별해야 합니다(롬6:11).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는 분명히 죽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하면서 죄 앞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2. 지옥의 두려움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께서 범죄자가 최종적으로 갈 곳으로 명시된 지옥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듣게 됩니다.

  (1) 43절에서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서 지옥에 해당되는 ‘게헨나’란 낱말은 ‘힌놈의 골짜기’해서 유래된 말입니다(느11:30, 왕하23:10, 렘7:23). 이름의 유래는 그렇지만 힌놈의 골짜기를 가리켜 지옥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지옥은 장소 적이요 실질적인 처소로 하나님께 범죄한 사탄과 그 무리들과 그 세력을 따른 모든 인류들의 영원한 심판 장소로 명시되어 있습니다(계14:10, 19:20, 20:15. 마25:41).

  (2) 우리는 이 말씀을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론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곳에 나타난 표현만으로 성경의 전체적인 해석을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진리를 밝혀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을 경종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처리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그 죄 값으로 지옥에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죄에 대한 심각성을 들려주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올바른 생활을 찾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본문의 결론으로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구절은 대단히 난해한 구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결론적인 말씀은 지옥 형벌의 두려움을 언급하면서 그곳에서의 형벌의 모양으로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내용으로 수용되기 때문에 그런 방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불 속에 소금을 넣으면 그 소금이 몹시 튑니다. 이것은 마치 지옥에서 당하는 괴로움이 불 가운데서 소금이 튀듯 하는 괴로움일 것이라고 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50절의 소금의 비유는 예수님이 지옥의 형벌의 두려움으로 인용하신 소금의 유용 도에 대하여 교훈해 주신 비유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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