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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 (42-48)
 밤중소리  01-26 | VIEW : 536

  (4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마가복음 8 : 1 - 10)

  서 론 : 주님의 공생애 중 주님 곁에는 항상 큰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물론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순결한 목적으로만 따라 다닌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를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믿음으로 따른 무리는 언제나 심히 적었습니다. 세상적인 기복, 육신의 질병, 당장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큰 관심을 가지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그같은 목적의 기대를 얻을 수 없으면 아주 쉽게 그 곁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고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1. 내가 불쌍히 여기노라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기를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말할 수 없는 긍휼을 의미합니다.

  (1)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그 심정은 그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이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8).

  (2)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 곁에 있는 수다한 무리들은 주님과 함께 머문 기간이 이미 사흘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흘간 굶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흘이 지나매 먹을 것이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식생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식생활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취해야 할 양식입니다. 이 일에 어려움을 겪으면 사람이 기진 하기도 하고 어려운 고통도 당하게 되는데 주님은 우리의 이 같은 처지를 낱낱이 살피시고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마6:31-32).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르밧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엘리야를 그곳에 보내시어 극한 가뭄 중에서 그 가족들을 먹이시므로 그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인류의 종말에도 그의 백성들에게 극한 가뭄과 식량난의 어려움 속에서 먹을 양식과 마실 음료에 대하여 염려 없도록 약속해 주셨습니다(계6:6, 7:15-17).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일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이처럼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그같은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는 일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잠19:17).

  2.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문제만 제기하고 해결의 방도가 없다면 그런 대상에게는 아무 것도 바랄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문제가 있는 곳에 반드시 그 해결 자로 나타나시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1) 제자들은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기진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어리둥절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문제의 해결을 자기들에게 하라는 말씀인줄 알고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2)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쉬 잊어버립니다. 제자들처럼 이전에 베푸셨던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잊어버리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의뢰가 살아지게 됩니다.

  (3) 주님은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사 축복하시고 4천명의 무리들에게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에는 그 축복을 감사할 수 있는 제물을  바칠 것을 명하십니다. 사르밧 과부의 경우에도 그러했습니다. 한 선지자의 아내의 경우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님께 드릴 제물을 남겨야 합니다. 극한 가난 중에도 한 가난한 과부는 그의 생활비 전부를 주님께 드릴 제물로 남겨두었었습니다. 주님께는 무엇인가 축복을 해 주실만한 봉헌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만 옆에 모시고 있는 생활을 한다면 늘 나를 돌보시는 목자의 입장에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돌보십니다. 내게 양식이 없을 때에 내가 기진 할까 걱정해 주시고 내 몸이 병으로 쇠약할 때에도 몸의 고통을 긍휼히 여기사 베데스다 연못가로 36년 된 병자를 찾아오신 것처럼 나를 찾아오시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하므로 주님이 늘 내 곁에 머무시도록 그와 함께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43) 표적을 보이지 아니하신 예수

  (마가복음 8 : 11 - 13)

  서 론 :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흠을 잡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그가 행하시는 이적 등에 문제될 만한 요소만 발견되면 힐난하면서 대들었습니다. 이날도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제기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예수께 힐난했다고 했습니다. 힐난이란 공격적인 논쟁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인줄 알고 따르는 무리들을 예수의 미혹에서 건지려는 그들 나름대로의 의도로 시험했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1. 하늘로서 오는 표적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선지자나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교훈도 정통적인 바리새인들이 따르는 장로들의 유전과 달랐으며 무엇보다 안식일을 자기들의 율례대로 지키지 아니했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는 자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에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들이 이 불법적인 무명청년을 마치 메시야인양 추앙하면서 따르는 것을 볼 때 참기 어려웠습니다.

  (1)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신 표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문둥이를 고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까지 보이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인 이 사람의 행한 것 보다 더 많으랴”고 말하고 있었습니다(요7:31). 이처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많은 표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어떤  표적을 바란 것입니까? “하늘로서 온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메시야된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험입니다.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마치 예수님이 공생애 초두에 40일간 금식하신 후,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던 시험과 동일한 시험입니다.

  (2)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그의 많은 표적을 보고 그같은 이적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린 결론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이적을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미혹하지 말고 어떤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 힐문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표적을 행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모세와 같은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이 그들의 주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2. 너희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의 요구를 들으시면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의 탄식은 진리를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그들의 완악한 마음에 마음속으로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끼고 있는 상태를 의미해 줍니다. 주님의 탄식은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에 대한 탄식입니다.

  (2)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신 표적은 설교나 하고 병자나 고치는 것으로 군중들을 미혹하지 말고 메시야여든 메시야를 증거 할 만한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주어 그것으로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신 말씀은 지금 우리의 이 세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패역한 세대에는 말씀으로 전파되는 진리가 배척을 당하고 오직 표적이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표적을 구하는 믿음의 세대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팽배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이를수록 이 같은 상황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유혹의 영을 보내시어 그들의 표적으로 유혹하시어 심판하시겠다고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살전2:9-12).

  (3) 표적은 결코 믿음의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표적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롬10:17). 말씀은 믿음의 씨앗이며 생명의 씨앗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1:23).

  결 론 : 예수님은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시리라”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으로 믿기를 구하거나 표적으로 예수의 메시야된 증거를 구하려는 자들에게 결코 표적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표적으로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님을 탄식시킵니다. 오직 말씀을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믿음입니다.  





  (44)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마가복음 8 : 14 - 21)

  서 론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그 제자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육적인 사고방식으로 판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시기에 앞서 영적으로 자세히 풀이해 들려주시므로 그들로 영적인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선상에서 제자들에게 한가지 교훈을 들려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이 영적인 경계가 제자들에게는 떡으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고 말하면서 주님께 드릴 떡이 없는 일에 대하여 근심했습니다.

  1. 주님이 말씀하신 누룩

  누룩이란 떡을 만드는 일에 필수적인 물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일찍부터 밀가루를 누룩으로 발효시켜 빵을 만들어 그것으로 그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온 사람들입니다.

  (1)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떡과 연결시킨 이유는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란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엉뚱하게 전개하게 됩니다.

  (2) 제자들은 방금 전에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고 약 4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의 남은 조각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남은 일곱 광주리의 남은 조각을 가져오지 못하고 들에 두고 온 사실에 대하여 근심했습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행동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3) 예수님은 그들의 둔한 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떡이 없으므로 의논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영적인 무지를 탄식하시면서 바른 이해에 이르도록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누룩이 떡이 아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떡으로 염려하는 그들의 생활자체에 대하여 실증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문답법으로 지난 일에 대하여 기억시키고 스스로 해답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5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열 둘이니이다”고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물으셨습니다. “떡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일곱이로소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 조로 되물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물으심은 제자들로 좀더 깊은 영적인 통찰력을 가져야한다는 교훈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2. 주님의 책망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책망하셨습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둔하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이 없는 것은 마음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의 마음이 둔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마음을 베는 것으로 회개를 뜻합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생활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의 생활이 곧 영적인 생활로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생활입니다(롬8:14).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빠릅니다. 회개가 없는 심령에는 온갖 죄악이 가득 들어차 있으므로 영적인 감각이 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떡에 대한 주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분명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떡이란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양식에 대한 염려는 그것이 적든 많든 사람의 마음을 영적으로 둔하게 만들고 어둡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산상보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교훈을 말합니다. 누룩이란 떡을 팽창시키고 썩히고 부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누룩의 비유는 영적으로 사람에게 해를 주는 교훈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출12:15, 레2:11, 고전5:6).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주로 장로의 유전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누룩으로 번지게 하여 그들의 구원의 길을 막아 버렸고 그들의 참 메시야를 거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같은 누룩이 그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번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들의 누룩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도 우리들의 영적인 생명의 치명타를 가하는 악한 누룩들이 많이 번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4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복음 8 : 22 - 32)

  서 론 : 예수님이 벳새다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후 침을 뱉어 그의 눈에 바르시며 안수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치병과정은 다른 곳에 나오는 경우와 약간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수를 두 번 해 주신 일이라든가 눈을 단번에 밝히 보이게 아니하시고 단계적으로 보이게 하신 일 등은 그의 치병의 능력이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특이하신 방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어느 날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의 일입니다. 들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에 대하여 물으시고 또 제자들 자신에게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1.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일은 제자들에게 보다 확실한 메시야관을 심어 주시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1) 예수님은 먼저 세상 사람들 곧 유대인들에 대한 메시야관에 대하여 알려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모습을 세 가지로 말씀 드렸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얼마 전에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받은 세례 요한으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생각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이미 예수님은 공생애에 들어가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셨을 때입니다. 아마 이런 견해는 예수님의 명성이나 그의 행하시는 여러 가지 기적 등이 그때로부터 더욱 많이 퍼진데서 나온 일종의 과장된 유언비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또 다른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엘리야라고 부른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엘리야라고 지칭하는 인물은 장차 여호와의 두려운 날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엘리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신 말씀에 나타난 엘리야를 의미합니다(말4:5).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도 이 엘리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에 대하여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셨습니다(마11:9-10). 유대인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바로 말라기로 예언된 선지자 엘리야인 줄로 믿었던 모양입니다.

  (3) 세 번째로 예수님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생각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오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종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이나 그의 교훈 등은 과연 그를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길 만 했습니다.

  (4) 그러면 여기서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않고 이처럼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잘못된 메시야 사상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머리에 그리고 상상한 메시야는 예루살렘에서 침략자를 물리적으로 물리치고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는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메시야는 고난을 당하실 분이 아니라 권능을 가지고 그들 중에 오셔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 대하여 물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인즉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듣기 위해 같은 방법으로 물었던 것입니다.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물음에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다른 복음서에는 약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원래가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2) 그러나 제자들 역시 유대인들에 전통적인 메시야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다른 유대인들과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관에 대하여 다른 점이 있었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여기지 않고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 하나로 여긴데 비하여 그들은 메시야로 인정했었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역시 메시야가 할 일에 대한 사역에 대해서는 다른 유대인들이나 인식이 같았습니다.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메시야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결 론 : 올바른 신앙은 먼저 올바른 메시야관부터 정립되어야 합니다. 바른 메시야관이야 말로 믿음의 뿌리요 신앙고백의 첫 걸음입니다. 모든 이단이 바로 이 메시야에 대한 신앙고백의 잘못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영적 체험 신앙을 통해서 확고한 메시야관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때부터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46)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가복음 8 : 31 - 34)

  서 론 : 주님은 베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고 하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매우 흐뭇해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 일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아직은 자신을 유대인들 앞에 메시야로 공개할 시기가 아니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결국 장로들과 대제시장과 서기관들의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게 되었는데 이때 이 말씀을 곁에서 들었던 베드로는 재빨리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1.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고 하는 주님에 대한 고백은 완벽한 신앙고백은 아닙니다. 주님의 그리스도란 면에서만 바른 고백이었을 뿐,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는 엉뚱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을 심어주시기 위해 이시야의 예언을 들려주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르들과 대제시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같은 메시야의 사역은 메시야가 받을 고난과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메시야의 참된 사역은 유대인들이 대망 했던 것처럼 영광의 주로 오셔서 이 땅위에 그의 왕국을 건설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이사야로 예언하신 고난에 메시야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사53:1-6).

  (2) 이때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무엇을 간했다는 표현은 이곳에 나오지 않았지만 마태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16:22).

  (3)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칭찬은 고사하고 대단히 격한 꾸지람을 내리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는 말씀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이라고 부른 것은 베드로가 바로 사단이나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간언이 왜 사단의 일이냐?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일은 그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메시야의 사역이 없이는 인류의 구원도 없고 장차 나타날 메시야 왕국의 실현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 앞에서 사단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이 같은 간언을 하게 된 것입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는 말씀이 그 해답이 되겠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인류의 구원이나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추후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이 그들의 급선무였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유도 이 같은 사람의 생각에 있었으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도 이런 생각에서였습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책망은 제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그런 사단의 소리는 다시는 하지 말라는 명령이시며 그 같은 간언은 메시야를 넘어지게 하는 일이 되므로 내 앞에서 떠나가라는 뜻입니다.

  (2) 이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불러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이 말씀을 이 시기에 하시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처럼 그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라고 표현하신 신분은 육신 적인 신분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 육신 적인 생각 때문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짊어질 자기 인생의 고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특히 이 같은 고난은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그에게 부닥치는 시련을 의미해 줍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내가 져야합니다. 이 십자가를 벗어버리고는 주님을 쫓을 수 없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의 메시야적인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메시야만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영광의 생활 많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주님을 생각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장차 나타날 그날에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47) 목숨을 얻는 일과 잃는 일

  (마가복음 8 : 35 - 37)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제 35절 이하의 말씀은, 이 말씀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해 주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명예나 물질이나 인간적인 처세를 중요시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자신들의 육신 적인 생명보다는 덜 중요하며 그리고 사람들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참 생명에는 비길 수 없다는 뜻으로 교훈 해 주신 것입니다.

  1.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는 생명

  예수님이 하신 이곳의 말씀은 문장 적으로는 역설의 극치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한번 그 뜻을 깊이 음미해볼 만한 말씀입니다.

  (1)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제 목숨이란 육체적인 생명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제 목숨이란 단어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나 마음,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는 ‘프뉴마’가 아니라 육체적 생명 혹은 현재 누리고 있는 땅의 생명을 뜻하는 ‘프쉬케’를 말합니다. ‘푸쉬케’란 오직 이 땅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기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조에’나 ‘프뉴마’와는 당연히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 목숨을 구원한다는 말은 자신의 육신 적 생활을 위주로 살아가는 생애를 말합니다. 또 여기서 밝혀주는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생활은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이루고자 하는 생애를 말합니다. 육신의 사람이 잘 되려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모두 자신의 정욕을 위한 생활입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의 정욕을 위한 생애를 보내는 한, 그의 모든 노력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2) 잃을 것이라고 한 말씀은 참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잃을 것이라고 하신 생명은 ‘프쉬케’가 아니라 ‘조에’를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육체적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인즉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시대의 사람들이 바로 이 같은 생애를 살다가 멸망을 당했다고 경종 하셨습니다(눅17:26-29). 이들의 생활은 온전히 ‘프쉬케’에만 목표를 두었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생활에 열심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잃는다고 하신 대상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의 기업을 말합니다. 이 땅위에서 누리려는 영화로운 자신의 생애는 결과적으로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의 기업의 상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는 생명

  예수님의 역설적인 설명은 그 반대 입장에서도 적용 시키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제 목숨이라고 하는 이 ‘프쉬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원한 삶의 가치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구원받을 생명은 ‘프쉬케’가 아니라 ‘조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역설적인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육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생애를 살아야 할 것을 권면 하는 말씀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프쉬케’를 희생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양심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 사회에서 칭송 듣는 정의적인 일도 아닙니다. 이 같은 일이 아무리 고상하고 세상에서 높이 평가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프쉬케’에 속한 것이지 ‘조에’에 속한 일이 아닙니다. 오지 “나와 복음”을 위한 희생만이 영원한 생명을 이루는 가치를 가집니다.

  (2) 여기서 제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자기 희생을 뜻합니다. 잃는다는 말을 순교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순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죽는다고 한 그의 고백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날마다 자신의 ‘프쉬케’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프쉬케’의 생애를 보내면서 반면에 ‘조에’를 위한 생애를 동시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조에’를 위한 생애는 오직 ‘프쉬케’의 희생에서만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천사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온 천하를 얻는 육신의 최대의 영광을 얻는다고 해도 만일 자신의 육신의 생명을 잃으면 그 같은 영광이 무엇에 소용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적의 생명과 대체할 대상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처럼 필요한 생명을 가치 없는 이 세상일에 사용하므로 그 생명을 잃어버리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8)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가복음 8 : 38)

  서 론 : 예수님은 이 시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세대는 어느 역사적인 한 시점을 가리킨 말씀이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적인 과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인류의 총결산은 그 값을 치르게 될 날이 오게 되는데 그 날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오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날에 인류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바로 그날을 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1.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예수님은 이 세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타고 정죄 하셨습니다.

  (1)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생활에서 하나님을 내쫓았습니다. 죄의 종의 자리로 스스로 타락하였고 죄의 길을 택하였으며 정욕과 탐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의 마음을 타락한 그대로 방임해 두신다고 하셨습니다(롬1:28-32). 성경에는 이 세대를 비유하기를 소돔, 애굽, 바벨론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계11:8).

  (2)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특히 종말에 살아가는 인류 사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대하여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은 노아 시대의 인류의 생활상이 음란하고 죄 많은 시대였기 때문입니다(마24:37-39).

  여기서 음란하다는 말은 인간 사회의 타락한 성도덕과 아울러 영적 음란을 의미합니다. 성도덕의 타락은 언제나 영적 진리의 타락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음란은 그 가운데서 빠져 나올 수 있지만 영적 음란은 좀처럼 돌이킬 수 없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등장한 음녀 이세벨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길을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계2:21). 진리를 버리고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도 회개하지 못하고 결국은 배도 자로 주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3)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표현은 이 세상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없었다는 뜻입니다.

  2.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35절에 있는 말씀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잃는 제 목숨이란 육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육신은 영적인 생명을 추구하는 일에 헌신할 때 고귀한 것이지 그의 육적인 생활에 만족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갈 때는 가장 추한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자신의 참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일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성결된 생활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의 구성원 속에 숨어 있기를 원합니다. 이 같은 생활은 결국 사람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인하는 중대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결코 주의 이름을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서두에 있는 2,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기는 자”가 될 것을 권고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를 파수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 가운데 믿음으로 굳게 서서 그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죄악을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의 물결에 휩싸여 탁류에 떠내려가는 나약한 성도
가 아니라 영으로 육의 사람을 죽이며 지배하는 생활로 육의 사람을 이기는 영적 생활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생활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사모하며 순종하는 생활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결 론 : 모든 결론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올 때”  결판나는 것입니다. 이날은 주님의 재림의 날을 의미하면서 또 한편 마지막 인류의 심판 장소인 흰 보좌 심판대 앞에서의 심판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흰 보좌 심판대는 그 중간에 천년 동안의 천년 왕국의 기간이 개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마지막 심판의 시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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