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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08 (호산나로 입성하신 평화의 왕)
 밤중소리  01-20 | VIEW : 859
                        (208)


       호산나로 입성하신 평화의 왕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1 : 1 - 11              


  4월에 들어서면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지고 곧 부활주일을 맞는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 한 주간은 고난 주간으로 지내며 8일에 맞는 둘째 주일은 부활 주일이 됩니다. 물론 이 같은 행사는 교회에서 임의로 정한 절기요 행사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종려 주일이란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 중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날은 유대인들이 명절로 지키는 유월절이 매우 가까운 시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그의 백성들의 죄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셨기 때문에 그 시기도 어린양을 잡는 유월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양을 잡아 피를 흘린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는 일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일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완성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시기는 반드시 유월절 절기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월절이 다가오자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여리고를 거쳐 베다니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이르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벳가게라고 하는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타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그들의 겉옷을 길가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무리가 소리 높여 노래를 했습니다. 그 노래가 호산나라고 하는 구원의 찬양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날에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았다 하여 오늘날 우리는 이 날을 ‘종려 주일’이라고 부르며 이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1.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가에도 호산나란 가사가 있지만 이 호산나란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예루살렘 입구에서 맞이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하면서 그들의 구원을 외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심을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중에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숨겨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초림의 메시야와 재림의 메시야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에 대해서도 비밀에 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을 구분하지 않고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내고 다윗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야가 큰 영광의 왕권을 가진 권위 있는 모습으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날 줄로 알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나사렛 땅 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그 신분이 드러나 있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으셔야 할 고난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야가 받아야 할 고난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슥9:9절에는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언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나귀를 타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스가랴서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이심을 밝히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 두 명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며 아직 사람이 타 본 일이 없는 나귀 새끼의 매어 있는 것을 풀어 오라고 하시면서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므로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스가랴서의 예언을 성취케 하신 것입니다.

  이미 500여 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 마을에는 주님이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나귀 새끼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왕으로 죽으셔야 했음으로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일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재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말씀을 정죄하여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재판 석에서 ‘네가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꺼리심이 없이 ‘네가 말한 대로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 형틀에도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란 죄패가 달려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세상의 군왕들이 타는 준수한 백마를 타신 것이 아닙니다.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도 언제인가는 하늘의 백마를 타고 그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을 쓰시고 입에서 이한 검을 내 뿜으시면서 아마겟돈으로 내려오실 날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날 나귀 새
끼를 타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온유와 겸손하신 평화의 왕으로 영접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는 십자가도 필요 없었고 대속의 피 흘리심도 바라는바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위를 이어 받아 영광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의 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워 줄 수 있는 메시야를 기대하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당도하시게 되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었던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호산나’로 그를 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예수님이 자신들이 이처럼 바라든 메시야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자 어제까지 왕으로 찬양했던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빌라도에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 댔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도 호산나의 의미가 많이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 복을 내려주시는 그 예수를 환영합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외치면 고개를 돌립니다. 겸손한 예수, 가난한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영광의 예수를 바라보면서 누가 높아지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교계 지도자들조차 제가끔 잘났다고 싸움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생교회 성도는 우리를 가난에서 해방시켜 주고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는 호산나가 아니라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지옥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우리 마음에 입성하시는 그 분을 맞이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교회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의 모습을 가지고 호산나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특히 그의 백성들을 사랑으로 통치하십니다. 인류의 역사가 있어 온 이래 이 땅위에는 수많은 왕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쇠하기도 했지만 과연 어느 시대의 어떤 왕이 가장 오랜 시간 인류를 다스렸으며 많은 인류들에게 참 자유와 평화를 준 것입니까? 중국의 진시 왕입니까? 몽고의 칭기즈 칸입니까? 헬라의 알렉산더 왕입니까? 그들은 얼마간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왕의 자리에 군림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 파묻혀 버렸고 지금은 그들의 이름만이 남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사랑으로 오늘에도 우리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세의 영웅인 나포레온이 그의 말년에 ‘세인크 헤레나’섬에 유배되었을 때에 탄식하면서 남긴 한 마디 유명한 말을 기억합니다. ‘나는 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직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왕이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정복함에는 오직 사랑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을 언제나 어느 경우에나 사랑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그의 다스리심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그의 성품 자체가 사랑으로 가득 찬, 분이시므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일이 다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어머니가 사랑하는 그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는 심정 이상으로 우리 주님은 그의 사랑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사랑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4) 다음에 예수님은 자비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동안 많은 눈물을 흘리신 분입니다. 그는 인간이 당하는 괴로움과 간고와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4:15절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고 슬퍼하시면서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왕이신 예수님은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품음 같이 그의 자녀를 품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어도 하나님은 ‘나는 너희가 죄악 중에 죽는 것을 원치 아니하고 죄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원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깊은 죄악 중에 빠졌어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인내하시면서 당장에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그 죄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날개 아래 모으려 하신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일곱 번씩 이른 번이 넘는 그 많은 우리의 죄를 바라 보시면서도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품에 안으려는 암탉의 심정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적이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맞고자 더욱더욱 패역하느냐’고 깊이 탄식하시면서 정말로 죄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실 때, 우리가 아파도 그 채찍은 한없는 사랑의 채찍임을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12:6절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맞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채찍은 우리를 죄 값으로 지옥에 보내시려고 내리심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천국을 주시고 하늘의 상급을 주시고 우리들 가정의 평안을 주시려는 사랑의 손길에서 나온 채찍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탄식하신 것처럼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고 하시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채찍 속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당신을 잡으려는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마치 강도를 잡는 것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다가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하며 입을 맞추었을 때, 그의 간교한 마음과 그 더러운 입술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온유하신 음성으로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 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비참한 운명을 슬퍼하시면서 마음으로 연민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의 높은 언덕 위에 십자가에 못 박혀 하늘 높이 매달리셨을 때도, 당신의 아픔은 잊어버리시고 오히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저들의 비참한 운명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때 아마도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괴롭고 답답하고 슬픔으로 눈물을 흘릴 때, 우리 주님도 나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며 함께 울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환난을 만났을 때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큰 문젯거리로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돌이키고 오라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순종치 않으심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십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이 땅에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실 모든 축복을 준비하시고 우리들로 다만 그 말씀에 순종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의 말씀만 따르면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물 창고 문을 여사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내가 네게 복을 내려 주겠다’고 거듭거듭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면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즐겨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을 스스로 거부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호산나의 왕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우리들 마음의 성전에 입성하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옷을 벗고 종려가지를 깔고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시려 오시는 주님, 내 마음속에 드시옵소서,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이 고난의 왕은 십자가를 통해서 만왕의 왕의 높은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음 주, 부활주일을 맞으면서, 만왕의 왕이 되시며, 의의 왕이 되시며, 평강의 왕이 되시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하신 왕을 우리 생애의 가장 귀중한 곳인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모시고 있는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죄와 불순종과 세속적인 우리의 생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 밖으로 내 좇아내신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 5장에는 우리의 마음 문을 간절히 두드리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이처럼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구나.’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마음으로 깨닫고 속히 우리의 마음 문을 그 분께 열어 드리면 그  는 내게로 들어오셔서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는 새로운 생애를 살아갈 것입니다. 마음 문을 여는 방법은 십자가로 성소의 휘장이 찢겨져 새로운 길이 열려진 것처럼 그 분의 십자가로 우리의 마음을 찢어 그 길로 예수님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찢읍시다. 죄와 세상 풍조와 육신의 생각과 정욕과 탐심으로 얼룩진 내 마음을 회개하심으로 찢으시기 바랍니다. 호산나로 오시는 평화의 왕은 이처럼 회개로 찢겨진 내 심령 속에 들어오셔서 내 생애를 새롭게 열어 주십니다. 내 마음에 평안을 안겨 주십니다. 내 마음에 새로운 기쁨을 주십니다. 내 마음에 영원히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의를 주십니다. 내 마음에 삶의 참 보람을 주십니다.

  나는 이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렐루야 !

  결론 : 저 유명한 아프리카의 개척 선교사 리빙스턴이 아무도 없는 깊은 정글 속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죽었습니다. 그의 유품 중에 일기장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그가 죽기 몇 일전 주님께 대한 한 짤막한 기도문이 씌어 있었습니다. ‘내 예수, 내 왕, 내 생명, 내 전부이시여, 나는 다시 오늘 나의 전체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우리의 왕이시라면 우리는 우리의 왕이신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종려 주일을 맞는 우리의 마음에 지난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던 그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지배하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우리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분을 영접하는 복된 이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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