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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27 (주님이 기억하시는 사람)
 밤중소리  01-21 | VIEW : 1,125

                              
                         (227)


            주님이 기억하시는 사람


   성경 본문 /  요한복음 1 : 47 - 49                            


  우리 인생들에게는 기억이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기억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에 사람에게 기억이 없다면 그의 삶은 무미건조할 것이며 살아가는 재미나 의미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기억 중에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머리에 남는 일은 그 사람의 생애를 보람있고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슬픈 기억이나 끔찍한 기억들은 그의 인생을 어둡게 만듭니다. 나쁜 기억 때문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기억 때문에 정신 분열증에 걸려 한평생 불행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우리는 좋은 기억, 흐뭇한 기억, 행복한 기억 등을 많이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은 좋은 기억 속에 여러분의 생애가 항상 흐뭇하고 행복한 삶을 누려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주님의 기억에 대하여 한번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하여 많은 기억을 간직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주님의 머리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 기억을 간직하고 계실 뿐 아니라 그 기억을 따라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도 하고 우리의 생애에 행복을 선사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러면 누가 과연 주님의 기억에 남으며 주님이 기억해 두시는 사람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므로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의 이제부터의 생애가 주님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그런 생활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나다나엘을 기억하신 예수님


  오늘 본문에는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신 그 다음날 갈릴리로 가시는 노중에서 빌립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빌립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고 빌립은 예수님을 좇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빌립은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실을 알리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사실을 알려주려고 벳새다에 살고 있는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메시야 곧 구세주란 의미를 나타낸 말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이방인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 왔기 때문에 이런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을 건져 줄 수 있는 그들의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그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일러 준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애국적인 청년이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돈독하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빌립의 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그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란 빌립의 말을 듣고는 실망했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나다나엘의 이 말은 그리스도가 태어날 출생지는 성경에 ‘베들레헴’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나사렛 땅에서 태어난 예수를 어떻게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야에 관한 연구를 많이 했기 때문에 메시야 출생에 관한 선지자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신 후, 부모님의 고향인 나사렛 땅에서 자라나셨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라고 불려진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출생의 전모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나다나엘은 메시야가 어찌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에서 태어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든 것입니다.

  그 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권장하고는 소매를 잡아끌어 예수님 앞으로 데려 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끌려 자기에게로 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고는 놀랬습니다. 생면부지인 예수님이 이미 자신에 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놀란 나머지 ‘선생님 어찌 나를 아시나이까’고 물은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다나엘을 향하여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갔을 때에,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앉아서 기도했던 그 장소와 예수님이 계셨던 그 장소와는 먼 거리였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자기와 함께 예수님께로 지금 오는 길이기 때문에 빌립이 예수님께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나다나엘의 놀램은 컸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그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같은 나다나엘의 고백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비슷하지만 베드로보다 훨씬 이전에, 예수님을 한번 뵙고 그 말씀을 한번 듣는 것만으로 한 신앙 고백이었으므로 나다나엘의 믿음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통하여 당신에게로 데려 오기도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의 이름을 기억해 두셨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주님의 칭찬을 받은 일이 무엇입니까?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칭찬은 나다나엘의 인간성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실한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지금 이 세상은 거짓과 사기와 힁령과 기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진실을 찾는 사람도 없고 진실한 마음을 믿어 줄 사람도 없습니다. 진실을 알아주고 진실한 사람을 귀하게 존중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을 알아주십니다. 진실한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진실한 회개를 원하십니다. 진실한 일꾼을 찾으십니다. 진실한 사람을 인정해 주십니다. 진실한 사람을 기억해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그것이 사랑이건 회개건 교제건 헌신이건 헌금이건 무엇이건 진실에 그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시51편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은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진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진실이 없는 모든 일은 통하지도 않고 결국은 무너져 버립니다. 진실이 없다면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진실이 없다면 거짓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가장 기뻐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을 꼭 기억해 두십니다.


  2. 세 사람의 경우


  하나님은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나타내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세 사람, 사르밧 과부의 경우와 백부장의 경우, 그리고 가난한 과부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는가에 대해서 알아보는 가운데 우리들도 그들과 같은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한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신뢰하여 그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그런 사람 중 하나로 사르밧 과부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한창 가뭄이 극심할 때입니다. 이 가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가증한 우상숭배로 패역의 길을 걸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었습니다.

  이 가뭄의 기근을 피하여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는 사르밧에 살고 있는 한 과부의 집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 과부는 엘리야가 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과부에게 물 한 먹음과 한 조각의 떡을 가져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과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들려 준 것입니다. 이 과부는 엘리야가 전한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떡 한 개를 구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리라고 마음먹었던 생각을 바꾸어 그 떡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가뭄이 지나는 기간동안 통의 가루가 다 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기적의 생활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들려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그 과부를 기억하셔서 이 같은 축복을 가믐이 다 물러갈 때까지 내려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따라 살아가고 자기 판단에 의해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하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신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삶의 태도여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가장 귀히 여기시고 그 사람을 반드시 기억하시어 사르밧 과부처럼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 가운데서 건지시는 기적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생활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의 생활에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어려움을 당할 때 통곡해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며 호소해도 듣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잠1:24-28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     ).

  사르밧 과부처럼 아무리 어려움에 처하고 고난 중에서 어떻게 할 바를 몰라도 하나님의 종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그 말씀을 따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시어 그런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2) 마8장 초두에 보면 자기 집 하인의 중풍병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나와 간구하는 백부장의 아름다운 믿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간구를 들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아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낫겠나이다’고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경우를 당할 때가 또한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 때 여러분은 무엇을 붙잡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인생이 의지할 지팡이로 붙잡으셔야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말씀으로 명령하시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줄로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의지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의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 사람에게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림의 떡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떡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므로 우리에게 그림의 떡으로밖에 아무 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 참으로 많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약속을 그림의 떡으로 여겨 평생 그림의 떡만 쳐다보다가 한번도 그 떡을 받아먹지 못하고 자기 생애를 마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은 가장 귀한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이 희한한 기사이적으로 급속하게 자기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해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권능은 그처럼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그 의지하는 말씀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의지하는 생활을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 믿음은 헛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그의 기적을 나타내시고 구원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르고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말씀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버리지 마시고 그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꼭 기억하시고 말씀대로 응답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눅21장을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연보궤 앞에 앉으셨습니다. 연보궤란 지금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입구에 세워 놓은 험금통과 비슷한 것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올 때 그곳에 하나님께 봉헌할 헌금을 넣었습니다. 지금처럼 봉투가 있어서 봉지에 담아 넣은 것이 아니라 돈을 손에 집어들고 줄에 서서 기다리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그 연보궤 안에 집어넣었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손에 들고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보잘것없는 한 여인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가난한 과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단지 두 렙돈의 동전을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아마 남에게 보이기에 부끄러워 손안에 꼭 쥐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연보궤에 넣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의 헌금을 기억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헌금은 다만 두 렙돈 뿐이었지만 그 돈은 그 여인의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처럼 칭찬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부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어떤 헌금이건 자기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헌금은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시는 축복의 씨앗입니다.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둔다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헌금을 기억해 주셔서 내가 심는 헌금의 씨앗대로 30배로, 60배로, 100배로 거두게 하신다면 이에서 더 감사 할 것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 때 그 당시만 아니라 오늘 우리 신생교회 예배 시간에도 연보궤 옆에 우리 주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그 헌금 액수도 일일이 기억하시고 헌금한 우리의 형편과 처지도 살피십니다. 여러분은 예배 시간, 교회에 들어오실 때 연보궤 앞에서 여러분의 헌금을 바라보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고 그 분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헌금을 드리도록 하십시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을 기억하시고 칭찬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헌금도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우리는 말3:16절에서 놀랄만한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의 대화를 들으시고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말3: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우리는 필요에 의해 성도들간의 교재를 위해 모임을 갖게 됩니다. 구역예배의 경우도 그렇고 어느 가정의 행사가 있을 때에도 모임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우리 주님도 그 자리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대화할 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분명히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의 말을 기억하시어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 비치된 기념책에 기록해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그 한 마디의 파장은 굉장히 큰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 주님이 들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에 기념책에 까지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마지막 날에 그 말에 대한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경종 하셨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 한마디는 하나님 앞에서 상급으로 보상을 받기도 하고 징계로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하나님을 높이는 말,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는 말을 하면 그 같은 우리의 말을 꼭 기억하셔서 기념책에 기록하시고 그에 상응한 보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님은 두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 나도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모이는 그곳에 우리 주님은 부지런히 찾아가셔서 누가 하나님을 높이며 우리의 신앙에 유익한 말을 하는가를 살피시고 그것을 기억해 두시는 것입니다. 누가 만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모함하고 비방한다면 그리고 형제들 가운데 누구를 모함하거나 중상한다면 그 말이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그대로 기록되어 심판날에 심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우리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 모든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 앞에 하나의 씨앗을 심는 생활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내일 우리들 앞에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하나님이 기억하실 수 있는 행실로 여러분의 생활을 이루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행실을 분명히 기억해 두셨다가 필요할 때 우리에게 보상해 주시며 하늘의 상급으로 보다 아름다운 면류관으로 씌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이처럼 주님이 기억하시는 성도의 생활을 이룰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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