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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20 (나사로 까닭에)
 밤중소리  01-21 | VIEW : 541
                              
                         (220)


                  나사로 까닭에




   성경 본문 /  요한복음 12 : 1 - 11                    


  예수님이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에서 약 오리 가량 거리가 떨어져 있는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유월절이란 유대인들의 고유한 명절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난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민족적 절기입니다. 이 날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을 잡고 그 고기를 먹는 것으로 지내는데 이 같은 일은 애굽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시고 그 고기를 먹게 하심으로 장자를 죽이는 재앙에서 건져내신 일에 대한 기념 행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은 어린양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상징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로 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월절에 고난을 받으셔야 하셨으므로 유월절 엿새 전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엿새 전임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그 시기에 예수님이 나사로와 그의 형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는 베다니에 이르신 것입니다.


  1. 주님을 위한 잔치


  이 베다니에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가끔 복음 전도에 피곤하신 예수님을 모시어 대접하는 삼남 매가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들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이 날도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배설하는 중에 방안에는 예수님과 나사로를 중심하여 화제가 만발하였고 밖에서는 봉사 잘 하기로 이름난 마르다와 그를 돕는 여러 여인네들이 음식을 작만 하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1) 이 때 삼형제 중 가장 나이 어린 마리아가 주님이 앉아 계신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녀는 방에 들어서자 지극히 값진 향유가 든 호리병을 깨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이 향유는 돈으로 환산하면 3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데 한 데나리온이 한사람 몫의 하루 임금으로 계산 할 때 요즘 시세로 약 6,7백 만원이나 나가는 값진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특히 가룟 유다는 비난까지 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비난하는 유다의 불만을 나무라시면서 예수님은 이 일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두게 하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이처럼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운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 잔치에 유대인의 큰 무리가 찾아 왔습니다. 이 잔치는 예수님을 위해 베푸신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이곳에 오면 예수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베다니에 예수를 찾아온 또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사로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일로 유대인 사회에 이미 유명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9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나사로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과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그런 시기였으며 그들은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나사로까지 죽여야 한다고 모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0절에서 이르기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11절에 나오는 말씀을 주제로 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 나사로의 죽음이 주는 교훈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나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려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계셨을 때 일입니다. 나사로가 갑자기 병들어 죽었다는 전갈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계시던 곳에 이틀간이나 더 유하심으로 지체하셨는데 나사로는 바로 이 시기에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이미 사흘이 지난 후였으므로 무덤에 장사를 지냈고 그 집안에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곡하는 무리들로 붐볐습니다.

  (1) 나사로의 죽음은 소망이 없는 인생의 종말을 보여 줍니다. 누구에게나 그의 생의 종말이 옵니다. 그리고 그 종말이 죽음으로 오기 때문에 죽음이야말로 인생의 마지막이요 끝입니다. 그 이상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사로의 몸은 죽은지 나흘이 지나 썩었다고 했습니다.

  (2)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죽음이 주는 교훈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 때 이 죽음에 대한 경종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창2:16절과 1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년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인간의 육신의 생명이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육적 생명의 죽음만 선언하셨지 영적 생명에 관한 선언은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까? 네가 정년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의 육체가 죽는다는 선언으로 이 선언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닙니다. 인간의 죽음은 아담의 죄 값으로 온 것이긴 하지만 죄값에 대한 심판은 아닙니다. 심판은 그 주음 후에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9:27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번 죽는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일이기 때문에 누구나 인생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심판에서 지옥과 천국의 갈림길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선행도 아니오 도덕적 생활도 아니며 인격적인 판단에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기준에 대하여 주님은 이처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여기서 말씀하신 심판은 분명 인간의 육신적인 죽음을 가리킨 것이 아니오 죽은 후에 우리의 생명에 관한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곧 인간의 영혼입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짐승과는 달리 영적 생명 곧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육적 생명과 전혀 별개의 생명입니다. 창2: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짐승들의 창조를 보면 창2:19절에서 이르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을 지으시고’라고 했습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다면 그 후에 하나님께서 유독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생명을 이 때 인간에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냥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는 다른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다른 것이 있었다면 인간을 흙으로 만드실 때 인간에게는 다른 짐승보다 우월하고 탁월한 지적, 양심적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코에 생기를 받기 이전에 인간의 모습과 본성을 창조하시는 일에 다른 짐승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리 만치 고도의 조직력, 두뇌의 고도의 발달, 고도의 도덕성, 하나님의 법을 인간의 마음속에 새기셨는데 이것을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적 생활이라든가 문명의 발달이라든지 인간 특유의 양심의 작용은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짐승들보다 우월한 인간 본래의 창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육체에 속한 것으로 흙으로 만들어진 요소들이기 때문에 죽으면 그 시로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흙으로만 만들어졌다면 죽는 것으로 인생의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며 죽음 이후의 다른 세계도 존재할 수 없으며 부활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흙으로 만든 그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코에 불어넣은 하나님의 생기인 영적 생명,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같은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을 이렇게 들려주셨습니다. 마10: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와 영혼은 구분되어 있습니다.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존재로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만 마지막 날, 영적 생명과 결합하는 부활이 있을 때 새로운 형태로 살아나지만 그 때 부활하는 생명은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영적 생명체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아니했을 때와 범죄한 후에 어떻게 달라진 것입니까? 범죄하기 이전에는 생령의 상태로 살아갔습니다. 생령의 상태란 육신이 온전히 영적 생명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에는 죄의 종이 되어 육체가 인간의 영적 생명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 왔을 때에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벗은 것을 보고 부끄러워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처럼 영이 그를 지배하는 생활에서 죄가 그의 육체를 통해서 그를 지배하는 생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결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의 영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되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대신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상태를 영적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은 죽지 않았지만 그 영이 자신의 기능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 사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생각을 갖지 아니하며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높은 도덕적 수준이나 인간만이 소유하도록 창조하신 특유한 양심이나 고도로 발달된 두뇌 조직으로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고 학문이 발달하고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흙으로 만드신 인간 본연의 모습이지 영적 생명에서 나온 것들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그들 속에 영혼은 존재하고 있지만 그 활동은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영적 생명이 그들의 생활을 주관하거나 그 영적 생명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능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같은 자신들의 육신의 죽음 후에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으며 살다가 죽은 후에 육체는 죽어 무덤에서 사라지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지옥으로 가라는 선언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구원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인간에게 나타난 구원의 역사


  인간의 구원은 이처럼 죽어 있는 우리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영속에 들어가 죽어 있는 우리의 영적 생명을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내는 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며 그 성령께서 내 영혼을 소성 시키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중생입니다. 이 일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면 왜 죽느냐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영원히 살리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영적 생명 곧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지 결코 우리의 육체의 영생을 위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선언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한편 우리의 육체의 죽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크게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는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8절에서 이처럼 외쳤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육신의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육신의 죽음은 장차 부활의 씨앗이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소망은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육신이 죽어 장사되어 썩은 후에 마지막 부활의 나팔 소리에 깨어날 때 부활의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소망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죽음에 도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14:32절 말씀에서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우리의 부활이 장차 이루어질 소망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영적 생명은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이 죽었을 때 그 육체는 땅에서 부활의 날까지 잠을 자지만 우리의 영적 생명은 살아 있는 우리의 이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축복된 천국 생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비록 영적 존재들이지만 그들의 삶이 온전하고 완전한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영적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천사들과 같은 몸으로 분명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몸은 부활의 날에 다시 영화로운 몸으로 살아나 우리의 생명은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옷으로 덧입을 것입니다.


  3. 나사로 까닭에


  죽음과 부활에 관한 설명이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나사로는 죽음에서 살아난 후, 사람들로부터 기이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가 죽기 이전에는 나사로의 존재가 돋보이지 아니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가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난 후, 그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이히 여겨졌습니다. 이전에 베다니에서 살아갔던 나사로는 죽고 새로운 모습의 나사로로 거듭났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은 나사로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기이히 여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아내로부터, 자기 남편으로부터, 자기 가족으로부터 이전의 아내, 이전의 남편, 이전의 아빠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모습으로 기이히 여김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지배했던 죄에서 풀려났으며 죽어 있었던 영혼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그 일이 나사로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베다니에 몰려든 것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만 나사로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사로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바로 나의 새로운 변화로 말미암아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나를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의 가늠자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나사로를 보았을 때, ‘아, 예수는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분이구나,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분이구나, 예수가 나사로를 살려 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일이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이처럼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로 예수님께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여러분의 이웃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그 비취는 모습에 따라 여러분을 바라보는 그 사람들은 그 여러분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 나오는 우리의 모습이 옛사람, 죄의 지배를 받은 사람은 죽었고 죽었던 영적 생명은 살아났는데도 아무런 변화를 보일 수 없다면 이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외쳐 보았자 교회란 별볼 일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 것이 아닙니까?

  나사로는 입을 열어 그리스도를 증거 하지는 아니했지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전도인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나사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감탄했으며 나사로의 얼굴을 보았을 때, 예수를 믿으려는 뜨거운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나사로를 만난 사람들은 나사로부터 예수님의 능력을 바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사로를 보니 나도 예수를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생겨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같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 주시는 말씀 11절 말씀을 큰소리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할렐루야 !
  
  결론 : 여러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지난날의 나사로가 아닙니다. 그의 생애는 자기를 살려내신 그 분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베다니에 이른 제사장의 무리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음모했지만 나사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곁에서 다시 살아난 자신의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갈2: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나사로 까닭에, 라고 기록된 말씀을 다시 한번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함으로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게 한 것처럼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믿지 않는 남편이 여러분의 친척이 여러분의 이웃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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