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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46 (너도 이같이 하라)
 밤중소리  01-22 | VIEW : 470

                       ( 246 )


               너도 이같이 하라

  성경 본문 /  누가복음 10 : 25 - 37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중, 많은 무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교훈은 오늘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조차 인간의 선한 일에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고 묻는 한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같이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 어떤 율법사의 질문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보면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영생에 관한 것으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미 질문의 의도를 알고 계셨습니다.

  율법사는 바리새인의 무리들입니다. 이들 무리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끈질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으로부터 고소 거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연구하고는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하는 형식으로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이 율법사의 질문의 의도는 인간의 영생은 율법의 행위로만 얻을 수 있는데 예수님은 이 율법을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에 그 트집을 잡으려고 시험하려 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하시기에 앞서 먼저 그 율법사가 가지고 있는 영생관에 대하여 물으셨습니다. 이 같은 문답을 통해서 율법사의 질문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밝히시고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려는 의도에서 그리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교훈 하시고 복음의 비밀을 밝히신 말씀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적어도 율법사라면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었기 때문에 율법에 관한 질문이라면 자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대답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같은 율법사의 대답은 대단히 지혜로운 대답이요 또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들어 낸 대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대답에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반드시 지켜야 산다고 주신 계명입니다. 사람들이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명령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은 이 율법사는 자신의 대답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줄로 알고 자만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다시 한번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율법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이웃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고 물은 것입니다. 이 율법사의 물음에 대답하신 말씀이 저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는 줄거리가 되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데 15년 전 성지 순례 때 바로 성경에 있는 이 길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 본 일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좀 지나노라면 험준한 산길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살폈다는 주막도 나옵니다.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은 흥미롭기조차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산 길에서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강도는 아주 포악한 자로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거반 죽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었습니다. 마침 제사장 한 명이 그 길로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산 길가에 피를 흘린 채 쓸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릴 일이 바빴습니다. 돌보아 주고는 싶지만 안됐다는 식으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 후에 한 레위 사람이 그곳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레위인도 성전 제단에서 제사장을 도와 일해야 하기 때문에 못 본 채 예루살렘 쪽으로 급히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 후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더니 돌 볼 사람도 없이 그대로 놔두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로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자기 말에 태워 근처 주막으로 데려 갔습니다. 주막이란 지금의 여인숙 같은 곳으로 주막에 그 사람을 내려놓고는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강도 만난 그 사람을 잘 보살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다시 들를 터이니 그 때 경비가 더 들었다면 그 경비까지 부담하겠노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흥미롭게 듣고 있던 이 율법사에게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질문에 이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 되겠습니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사에게 이르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저나 여러분이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이 권위 있는 말씀에 맥을 못 추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습니다.

  (2)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에 담긴 뜻을 두 가지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자기 가족이나 형제나 같은 유대교 안에 있는 자기파에 속한 사람들로 생각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또 한 가지의 뜻은 사랑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율법사들이나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외식적인 행동인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사랑에 대해 잘 가르쳤지만 실제적인 행동 면에서는 사랑에 대하여 외면하는 생활을 해 왔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경우를 들어 들어내 보이신 것입니다.


  2.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의 비유 중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을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 다섯 명의 등장인물을 살펴보면서 주님이 이웃이라고 하신 사마리아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사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타난 인물이 이 율법사입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그런데 이들 율법사들은 그들의 인품이 교만하고 외식하는 자요 머리로만 알고 순종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율법사들에 대해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들이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고 나무라신 일이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애당초 예수님을 찾아온 동기부터 불순했던 것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이 모든 일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이 율법사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계명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은 이 율법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펼치면 그 내용은 훤히 알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몇 마디 안 들어도 벌써 그 설교의 결론까지 내립니다. 누가 질문하면 성경 말씀대로 대답도 잘하고 남을 가르치기도 잘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는 신앙적인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자기를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야 이런 설익은 교인이 한 명도 없지만 교회마다 이런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다가 왜 이런 교인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를 몇 십 년 믿어도 그 생활에 순종이 없이 머리와 입으로만 믿었기 때문에 끝내는 예수님 앞에 나타난 율법사처럼 된 것입니다.

  신앙은 믿음과 화합이 되어야 산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히 4장에서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는 경종이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적인 지식이 많아도 믿음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교인의 신앙 상태를 젖이나 먹고 밥을 못 먹는 사람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히 5:13절에서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실제 생활에 적응시켜 경험해야 살아 있는 말씀이 되며 말씀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율법사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듣기만 하고 순종이 없는 사람처럼 젖이나 먹는 자가 되지 말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생활을 통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다음에 이 비유에는 강도가 등장합니다. 이 강도는 물건만 빼앗아 가는 그런 보통 강도가 아닙니다. 돈을 빼앗고도 무엇이 부족해서인지 옷을 벗기고 때리기까지 하여 거반 죽게 만들어 놓은 질이 나쁜 강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강도는 누구를 말합니까? 요 10: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강도는 양들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생명의 강도입니다. 마 7:15절에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 같은 이리떼 같은 강도들이 많이 일어나 세상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할 줄 모르면 이 강도의 피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서운 생명의 강도가 앞으로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 앞에 나타날 것임을 성경은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강도의 이름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이 적그리스도는 계시록 6장에서 청황색 말을 탄자로 나타납니다. 이 자의 이름이 사망으로 나오고 그 뒤에 음부가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 강도를 따르는 자는 모두 음부에 들어간다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강도는 평화의 왕을 가장하고 인류 역사의 맨 마지막 시기에 나옵니다. 이 자는 열 뿔인 열 나라를 통합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왕으로 등장합니다. 이 자가 세상에 머리를 내미는 놀라운 사건이 있습니다. 이 자가 어떤 사건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이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 자가 세계의 강대국과 더불어 한 이레의 언약을 맺게 됩니다. 이 언약 기간을 7년 환난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짐승이라고 불리는 이 적그리스도는 사탄으로부터 신적 권능과 능력을 받아 마흔 두 달 동안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데 모든 사람들로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이 자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고 음녀 교회가 등장하여 세상 사람에게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영적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강도떼 들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예언의 말씀에 눈을 떠서 우리의 생명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3) 다음에 이 비유에는 강도를 만난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리고는 영적으로 멸망의 도시입니다. 여리고는 옛날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온 여호수아에 의해 무너져 버린 후, 다시는 이곳에 성읍을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받은 고장입니다. 이 여리고는 그리스도인들이 찾아가면 안 될 곳으로 상징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을 바라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하늘에 있는 우리의 본향 집을 찾아갈 사람들입니다. 결코 여리고로 내려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은 잃어버리고 앞에 있는 소망을 위해 전진해야 할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의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핍박 중에도 고난 중에도 환난 중에도 인내로 견디고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지 여리고로 내려가면 자기 생명까지 빼앗기는 무서운 강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자기 일만 알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자기 주변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자기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고 본 채 만 채입니다. 주를 위한 일이건 성도들을 위한 일이건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되는 일이면 외면하고 모른 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입으로는 주여 주여를 부르지만 행동으로는 주님과 떠나 있는 죽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5) 다음에 이 비유에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행한 일을 보이시기 위해 많은 엑스트라를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모든 정성을 다하여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므로 우리들이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이웃에 대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 사마리아 사람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사마리아 사람처럼 헌신하고 봉사하며 수고와 물질을 아끼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에서도 감사하며 즐거움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을 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천시 받고 관심밖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들 보다 오히려 세상에서 천시 받는 사람들 중에 주님의 인정을 받는 진실한 성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교회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율법사 같은 형식적이요 외식적인 사람들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시여 주의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이런 사람을 일꾼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내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 중에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굶주리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환난 중에서 고통을 받는 분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25장에서 이웃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라고 말씀하신 그 대상에 대하여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는 모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흰 보좌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상급을 위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이웃에 베푼 사랑에 대하여 심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를 향하여 ‘너도 가서 이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베푸는 모든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은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일도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우리의 손에 무엇인가 가졌을 때에 내 이웃에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마리아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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