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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39 (너는 나를 좇으라)
 밤중소리  01-22 | VIEW : 596

                         (239)


                너는 나를 좇으라  
                      

   성경 본문 /  마태복음 8 : 18 - 22                                


  예수를 믿는 일은 곧 예수를 따르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면서도 핑계를 대는 두 사람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서기관의 경우인데 이 사람은 주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좇겠습니다’고 하는 의사표현으로 주님을 따를 자신의 결심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서기관에게 이상한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의 요구를 물리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항상 따르는 제자 중 한 사람으로부터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두 사람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1. 어느 서기관의 경우


  처음 등장한 사람이 서기관이라고 했습니다. 서기관이란 율법의 지도자로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선생입니다. 대개의 경우,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이며 이들은 예수님과의 상종을 금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섬겼으며 그를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1) 이 서기관이 예수님께 한 말이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겠습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 대단히 호의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뒤쫓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흠을 잡아 법적인 소송 거리를 찾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이 서기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마 그런 사명을 가지고 주님을 좇아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이적 행하심을 보면서 예수님이야 말로 정말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거나 존경받으실 만한 선지자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감격한 나머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는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요즘도 지난날에 예수를 핍박했던 많은 사람들이 어느 부흥회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는 이 서기관처럼 주님을 향하여 ‘주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좇겠나이다’는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 같은 마음의 결심을 내리고는 주님을 따를 것을 고백한 것입니까?

  ① 이 서기관은 곧 눈앞에 나타날 메사야 왕국을 소망하고 그 나라에서 누릴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단 이 서기관 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누가 큰 자인가란 문제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노중에서 서로 다투기까지 한 일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서기관은 예수를 따르는 일이 축복과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길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른 바리새인들로부터 약간의 핍박을 받는다고 해도 예수를 따르는 일이 현명한 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순수하고 순결해야 할 복음이 현세적인 축복 때문에 오염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이 현세적인 어떤 축복을 받는 일인 줄로 알고 교회에 나오는 경향이 대단히 많아졌습니다.

  장사꾼들은 예수를 믿으면 장사가 잘되어 돈 반석 위에 앉을 줄로 여기며 직장에 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지위가 높이 올라가고 출세할 줄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일은 세상이나 물질과 손을 잡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나와의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물질의 부요를 바라고 예수 믿는 일이 인생 성공의 방패인줄로 알고 예수를 믿어 왔다면 이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생명적인 연합이 될 수 없는 믿음으로 아직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앗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아서 말씀으로 인한 시험이 오거나 사나운 비바람이 불어오면 곧 무너지고 말 사람들입니다.

  ② 이 서기관이 주님을 따른 일은 잘한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에서 따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육신적인 생각이나 마음의 탐심을 성취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게 참된 행복을 선사하며 참된 축복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탐심은 멸망을 가져오는 것뿐이지 그런 것들이 우리의 생애에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경종해 주며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 남편은 사업가요 국회의원이며 매우 부요하고 행복한 가정의 주부가 집사직을 맡고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소망은 사회적 명사인 자기 남편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에게 복음이 들어가 예수를 믿고 같이 교회에 나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그 일을 제목으로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집사님은 목사님에게 찾아가 신앙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이런 여집사와의 상담을 통해서 그에게 들려준 결론은 ‘당신 남편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위해서라면 부인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행복을 회생할 수 있겠는가?’ 고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남편이 예수를 믿으려면 혹 댁의 남편의 사업이 실패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혹 국회의원직에서 떨어져 무명 인사가 될는지 모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댁의 남편을 구원으로 이끄신다면 부인은 그래도 남편의 영혼을 위해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  도 하시겠습니까? 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이 같은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이 부인 집사는 ‘아닙니다. 목사님,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서기관의 생각은 서기관으로 일하는 것보다는 주님을 따르는 일이 자기 인생의 큰 유익이란 생각으로 이처럼 자기는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서기관의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자기를 따르는 일은 영광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으로 서기관의 제의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서기관의 말에 동문서답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 말씀 안에 들어가 있는 깊은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10:37절 이하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정말로 가난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런 가난한 생애를 살아가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원래 부요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재물이 다 그분의 것입니다. 성경에도 예수님께서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분으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세상에 가난하게 오셨으므로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영생의 부요함, 천국의 말할 수 없는 부요함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가난한 몸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부요한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  다. 이 모든 것보다도 그가 이처럼 가난한 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길리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 분을 영접하여 그 분의 모든 부요하심을 소망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우리의 이 같은 부요는 이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돈이나 명예나 육신적인 부요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장래적인 소망의 부요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부요를 믿음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엔 언제나 기쁨과 감사가 따릅니다. 우리는 얼마 후에 주님과 함께 이 같은 모든 부요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의 보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요함으로 만족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부요의 소유는 현재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지내신 주님의 그 고난에 참예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롬8장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먼저 주님의 부요와 그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믿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축복은 인생의 최종적인 승리자에게 주시는 면류관임을 알고 그 면류관을 쓰기까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생애를 기뻐하면서 자기 인생의 길을 달려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서기관은 메시야 왕국의 영광은 바라보았지만 그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남을 대접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그들에게 오히려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의 생애를 끝마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세상에 소망을 주셨고 그 분은 하늘보다 더 높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기관과 같은 심정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이 시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주님을 따르는 여러분의 생애가 고달프고 어렵고 가난하고 힘겨워도 장차 예수님과 함께 누리실 그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시고 굳굳히 살아 나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어느 제자의 경우


  이 같은 서기관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숙연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무리 중에 있었던 예수님의 어느 한 제자가 주님께 늙으신 부친의 장례를 염려하여 잠깐 주님을 따르는 일을 쉬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1) 그 제자의 말인즉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는 간청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제자에게는 연로하신 부친이 집에 계셨으므로 몸은 주님을 따르고 싶지만 마음은 늘 집에 계시는 부친 생각으로 꽉 차 있는 효자인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제자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몇 가지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결코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 소홀히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이 수도 없이 많이 있고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하신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을 주님 섬기는 일보다 더 소중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말씀이십니다. 우리들에게 부모님의 존재가 참으로 귀중하지만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을 섬긴다는 구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히 하는 것은 두 가지 일에 모두  실격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제자는 ‘나로 먼저 가서 자기 부친을 장사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님보다 먼저 자기 부친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부친의 노환을 간병할 만한 형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떠나 부친 곁에 있어야 할 만치 위급한 상황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는 나를 좇으라’는 말씀으로 이 제자의 간청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죽은 자를 죽은 자들에게 맡기란 말씀은 참 생명이 없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실상인즉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참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그들에게 맡겨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이요 예수를 전하는 일입니다. 이 제자는 일의 경중을 잘 몰랐거나 주님의 곁을 떠나려는 생각에서 부친의 장사를 핑계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그 제자에게 하신 이런 말씀은 우리의 모든 염려는 주님께 맡기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염려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염려는 실질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얼마나 방해 요소가 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제자의 경우, 나이가 많은 부친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일에 퍽이나 염려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 얼마나 많은 염려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염려는 쓸데없는 일 인줄 알면서 그리고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염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염려로 인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힘겨워 하는 이 염려를 처리하는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나옵니다. 벧전 5: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권고하신다는 말씀은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를 친히 돌보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염려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염려를 우리가 짊어질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맡기란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는 자기의 가장 큰 염려가 되는 부친의 장사 지내는 일을 자기가 짊어지면서 걱  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여러분의 신상의 일로 염려하신다면 결국은 이 제자 모양 주님의 일을 나중에 미루게 되고 우리들 평생에 주님을 위해 보람있는 삶을 지낼 수 있는 시간이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에게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염려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생애를 바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사랑하사 그의 범사에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 부친의 생명을 연장시 켜 주실 것이며 그 가정에 필요한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결론 : 자신의 영화 영달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려던 서기관이나 자기의 부친 때문에 예수님 곁을 떠나려고 한 한 제자의 경우나 모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기적인 태도는 예수를 믿는 진실한 성도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꾼들에게 들려주신 황금률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쟁기를 메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쟁기란 복음을 말합니다. 계속적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밭을 갈아야 합니다. 뒤란 세상을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뒤에 있지 않고 앞에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됩니다. 예수 믿는 일에 사업이 장애물이 될 수 없으며 부친을 섬기는 일로 주님의 일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뒷전에 놔두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일만이 우리의 당면 과제이며 이 일을 모든 일에 우선하여 먼저 하면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으시고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이 우리의 생애를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이 말씀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시고 우리들에게 지금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긴요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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