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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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밤중소리  03-02 | VIEW : 5,890


  ≈ 8 ≈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본문 : 로마서 1 : 16 - 17)

  서 론  :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이유로써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증거하고 결론적으로 이 같은 성경적인 근거는 기록된 말씀에 있음을 증거 했습니다. 바울의 성경적인 증거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하는 의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이신 득의”사상이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철저한 복음 사상이며, 또 이 사상이야말로 성경전체에 넘쳐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상입니다.

  1.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나온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의가 오직 믿음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복음에서 나오는 의를 설명함에 있어 하박국을 통해 주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박국서에는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합2:5).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빌3:9).

  (1) 이 말씀의 근원은 아브라함이 받은 의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롬4:3). 원래 의는 율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생존할 당시에는 율법이 존재치 아니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고 하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그의 믿음에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이란 무엇이었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아들 이삭에 관한 약속에서 출발합니다(롬4:18-22).

  (2)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반열이 유다 지파에서가 아니라 멜기세댁으로부터 나온 사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로 앞서 가진 예수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6:20). 이 말씀은 예수님은 율법을 따라 된 대제사장이 아니시라 이미 율법이 있기 이전에 대제사장으로도 있었든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된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존재하기 이전 아브라함이 받은 의에 근거한 것인데 아브라함의 의란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된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갈3:6,7).

  (3)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의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얻을 의는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롬4:23,24).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받으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믿음이며 이 믿음을 가진 자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셨습니다(갈 3:29).

  2.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타내 주고 있는 의인이란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의인이란 율법적인 의의 소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면 성경이 말하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도덕적인 관념에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믿음의 관점에서 부르는 명칭이므로 이 점을 혼돈하면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말씀의 몇 가지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말씀의 뜻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산다는 말은 생명을 얻는 다는 뜻입니다. 의란 곧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자만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고 말씀했습니다(엡2:8).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내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5:24). 율법에서는 구원의 약속이 없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행함으로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나 율법은 인간에게 저주만 줄뿐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한 사람도 존재치 않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믿음의 의를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 말씀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율법으로나 육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아온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믿음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아들 이삭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히11:8, 17-19). 기생 라합도 믿음으로 정탐꾼을 숨겨 둠으로 생명을 건졌다고 했습니다(히11:31). 베드로도 믿음으로 그물을 내릴 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눅5:4,5). 이처럼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4:4).

  (3) 이 말씀은 의인은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롬8:24,25).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그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으로 살아갔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1:9, 10).

  결 론 :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의인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처럼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들의 죄의 속제 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은 믿음에서 나온 의인 것입니다. 우리의 이 믿음은 곧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를 얻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 9 ≈             핑계 할 수 없는 인간의 죄


  (본문 : 로마서 1 : 18 - 23)

  서 론  : 성경에서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부터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자기는 어머니 배에 잉태함으로부터 죄인이며 죄악 중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시5:15). 성경은 인간의 죄의 기원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에서 하나의 신앙고백서로 사용하는 웨스트 민스터 고백 6장에서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는 사단의 간교와 시험에  져서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이 같은 아담의 범죄는 인류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죄악에 빠트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서는 이 죄에서 온 결과에 대하여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저희가 본래 가졌던 의  는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가졌던 교제는 끊어졌으며 그 결과로 저희는 죄에서 죽었고 또 저희의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이 전부 더러워졌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인간의 상태를 전적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전적 타락이란 다시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은 이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1. 하늘로 쫓아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진노는 하늘로조차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들에 대하여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란 타락한 인간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죄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2).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진노의 심판을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1) 과거에 이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내리신 홍수심판이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창6:5-7).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그런 진노에 속한 심판입니다(창19장).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 애굽에 대한 심판도 그런 심판 중에 하나입니다(출6장-12장).

  (2) 하나님의 진노는 이 땅위에 내리는 최종적인 심판으로 내려집니다. 이에 대하여 계시록 16장에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진노가 최종적인 일곱째 대접심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계16:17-20).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이 일곱 번째 대접으로 마쳐집니다.

  2. 핑계할 수 없는 인간의 죄

  그러면 아담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인간들은 왜 이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는 것인가? 21절에 그 해답이 이처럼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인간이 타락하여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막중한 죄는 바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는 죄인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말씀은 “하나님을 안다”고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죄인들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밝히시기를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이신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만드신 만물의 오묘하심과 그의 위대하신 섭리와 만물 자체 안에 숨겨진 놀라운 신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핑계할 수 없다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말은 ‘독사조’로 찬양한다,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찬양과 존경이 없거나 결여된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 다음에 말씀하고 있는 두 번째 죄는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가 없는 생활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번진 죄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을 죄인 것입니다. 감사치 아니한다는 말은 전혀 감사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말은 ‘유카리스티아’로 좋은 은혜, 좋은 선물을 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좋은 은혜, 좋은 선물로 말미암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는 기쁨과 축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은 마땅히 이 감사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할 죄로 우상숭배의 죄를 들고 있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 같은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외면하는데서 온 것입니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했습니다. 죄는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지혜 있다고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나 금수나 버러지 형상으로 바꿈으로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버리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이나 금수나 버러지 행상으로 바꾸는 일은 하나님께 대한 말할 수 없는 고의적인 모욕이며,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처럼 하나님이 진노를 받을 무서운 죄인들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새로운 인생 길을 걷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 10 ≈         하나님께서 버리신 인간의 마음


  (본문 : 로마서 1 : 24 - 32)

  서 론  : 그 당시 로마는 인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타락한 인간의 모든 죄악의 전시장이기도 했습니다. 로마황제를 신의 아들로 섬기는 황제숭배와인간의 죄악에서 나오는 모든 죄악상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었고 특히 우상숭배의 결과에서 나온 역리적인 성생활의 범죄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이 같은 죄악상에 대하여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내어쫓았습니다.

  1. 내어 버려 두신 하나님

  로마서 1장에서는 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를 다루고 있는데 인간들의 죄의 근원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싫어하는 마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죄악상태에 내어 버려 두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내어 버려 두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포기를 말합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손을 쓰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들에게서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져 버렸습니다. 이런 인간의 구제 불능의 상태에 대하여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탄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창6:5,6).

  (2) 내어 버렸다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도록 하실만한 아무런 이유도 갖고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인간 스스로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떠나버렸고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게 한없는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기를 원하셔서 아담을 찾으셨고 살인자 가인에게조차 다른 사람이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에서 영원히 빠져나가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으며 무서운 죄의 함정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

  로마서 1장에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는 내용이 세 가지로 구분되어 나옵니다. 그 하나가 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하신 표현은 역리적인 음란의 죄를 가리키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전체적인  타락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욕되다고 하신 말씀은 추잡하다. 무시하다의 뜻으로 풀이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그들 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서로 자기들의 몸을 욕되게 하며 더럽히는 것을 간섭치 아니하시고 그들의 자유에 맡겨 두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생활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결국 피조물을 조물주이신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에서 온 마땅한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헛된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 께 돌릴 경배와 영광을 피조물에게 줌으로서 하나님은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죄의 타락에서 온 인간이 가장 추한 죄로 역리적인 성생활의 범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부끄럽다는 말은 수치를 말하고 욕심은 육신의 욕정으로 색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여인들의 역리적인 성범죄에 대하여 말씀하고있습니다. 성범죄에 대하여 남자들 보다 여자들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로마의 사회고위층에 있어서의 여인의 타락한 성생활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것을 바꾸어 역리로 쓴다”는 말은 인간의 남녀간의 성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자연적인 방법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바꾸어 쓴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남녀간의 결합은 성생활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성생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이요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나 수치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결합하는 성생활은 역리적인 성생활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들을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다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레20:13).

  (2) 다음에 남자들의 역리적인 성범죄가 지적되어 있습니다. 여인들 다음에 남자들에 대한 역리적인 성범죄에 대하여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지난날의 소돔 성이 이 남색으로 인하여 멸망당했습니다. 이성에 두 천사가 들어갔을 때 그 성의 많은 백성들이 이 천사들을 보고 그로 더불어 강제적으로 남색을 시도하려고 롯의 집을 에워싼 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창19:1-5). 그 악한 성은 결국 하늘의 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로마시민을 모델로 한 이방사회의 이 같은 범죄는 이미 그에 상응한 보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이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각인의 양심에 느끼는 심리적인 보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역리적인 성범죄로 말미암은 정신적 파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최근에야 밝혀지고 있지만 이 같은 성범죄로 말미암은 질병인데 이 질병 이름이 ‘에이즈’란 이름을 가지고 공포의 병으로 사회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고 하는 이 세계적인 공포의 병은 그 원인이 동성애에서 발단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 성경적인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결 론 : 28절에서부터 언급하고 있는 다른 또 한가지의 범죄는 인간의 모든 합당치 못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신 일이 여러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모든 불의라고 했습니다. 불의란. 인간의 행악과 옳지 않은 일을 말합니다 추악이란 악덕과 죄악을 말합니다. 탐욕은 육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욕심이며 악이란. 사악과 행실, 시기란. 질투․투기이며 살인, 분쟁, 시기, 악덕, 수근수근 하는 자, 비방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말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은 싫어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생각대로 내어 버려 두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무서운 죄악 중에 스스로 빠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 11 ≈            남을 판단하는 죄


  (본문 : 로마서 2 : 1 - 5)

  서 론 : 로마서의 전체적인 개요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 청의’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신 청의’의 기독교의 진리를 1:16절에서 시작하여 8:39절까지 펴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지적하는 바는 판단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이 되겠습니다. 이 경종은 주로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우월감으로 이방인들을 멸시하였으며, 판단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정죄하심을 면할 수 없다고 하는 경종을 들려주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남을 판단하는 자의 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대하여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판단이라고 하는 말은 ‘크리마’란 말로 ‘선이냐? 아니면 악이냐의 결정을 내리는 최종적인 선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율법에 속한 사람들이 남을 판단합니다. 율법의 사명은 죄에 대한 정죄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용서가 아니라 정죄를 내리게 됩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율법아래의 인간들은 정죄뿐 아니라 원수 갚는 일조차 허락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21:23-25). 이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하나님의 허락은 인간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입니다{마19:7, 8).

  (2) 그러나 은혜에 속한 사람들은 이와 판이합니다. 은혜는 판단이나 정죄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에 대하여 결코 정죄하라고 하시거나 판단하라고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마18:21,22). 은혜 받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무한대한 사랑과 용서입니다.

  다음에 은혜 받은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에 대하여 곧바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 하겠느냐”고 말씀하심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밝히셨습니다(마7:1-4).

  (3)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일은 자신이 자기를 정죄하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남에 대한 판단이 자기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 결과가 되느냐? 이에 대한 해답을 바울은 명쾌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려면 자신만큼은 절대로 그같은 죄를 범하지도 말아야 하며, 다른 이로부터 판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내린 것과 똑같은 판단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는 내가 판단한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중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의인은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일은 절대로 핑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한가지 죄가 더 추가되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죄와 또 판단한 사람과 똑같은 죄를 자신이 짓는 죄입니다. 이 같은 죄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죄가 된다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고 말씀했습니다.

  2. 남을 판단하는 사람의 세 가지 무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무서운 범죄자들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율법에 얽매어 율법적인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이 같은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율법을 가지고 남을 판단해 온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풍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풍성한 분이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시는 분이시라고 여긴 것입니다. 인자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똑같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시116:5). 하나님은 가난한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시35:10, 시9:12).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죄인에게도 인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죄인들에게도 오라고 하십니다(사1:18,19).

  (2) 다음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풍성하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용납이란 용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그의 무한대 하신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조차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정죄하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아들 안에서 무한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사55:6,7).

  (3) 다음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의 인내의 풍성을 몰랐습니다. 길이 참으신다는 말씀의 원어의 뜻은 사람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오래도록 참으시고 화를 내지 아니하시고 간과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시기까지 오래도록 길이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노아의 때에도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 사람들을 즉시 심판하실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오래도록 참으셨다고 하셨습니다(벧전3:20).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벧후3:8).

  결 론 :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이 같은 무리들에게 임하십니다. 이들은 고집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고집이란 말은 ‘스크레로테스’인데 완고, 완악을 의미합니다. 마치 마음을 경화시키는 영적 경화증입니다. 그 마음에 불신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가 완고한 마음입니다. 다음에 회개치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십니다. 회개란 말은 ‘메타노에오’로 마음을 고친다, 바꾼다, 뉘우친다의 뜻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하나님 앞에 반드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회개가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이 관용함에 따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 12 ≈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본문 : 로마서 2 : 6 - 9)

  서 론 :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에게 임하시는 일에 대하여 그것은 다만 인간들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하신 인자를 멸시함에서 온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공의대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두 가지 불변의 원칙에 의하여 이루어 질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내려질 것인데 하나는 선한 일을 행한 지의 보응이요, 하나는 악한 일을 행한 자의 보웅이라고 했습니다.

  1.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6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응한다는 말은 ‘아포디소미’로 이 말의 뜻은 반환한다, 청산한다, 넘겨준다, 돌려준다 입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행한 것만큼 그들에게 갚아 주신다는 뜻에서 비롯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부터 받은 우리의 모든 행실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다시 돌려주시는데 그것이 곧 보웅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는 모략이 크시며 행사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시며 그 결과 그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렘32:19).

  (1) 하나님의 보응에는 종말적인 보응과 현세적인 보응이 있습니다. 종말적인 보웅이란 백보좌 심판 시에 있을 심판을 의미하며 이 보웅에는 다시 돌이키고 뉘우치는 회개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적인 보웅은 우리 생애 중에 받는 보웅으로 이 보옹을 통해서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고 회개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보응은 심는 대로 거두시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7). 우리가 이 땅위에서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은 씨를 심는 일입니다. 씨란 언제나 정직하기 때문에 심는 대로 결실 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여 씨를 뿌린 자는 그 씨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린 자는 그 씨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한 것입니다(갈6:8).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응은 너무나도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 앞에서 변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보응은 그가 행한 대로 나타나십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담후4:14). 이 같은 보웅은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회개함으로 용서해 주시지만 그 행한 일에 대해서는 보응으로 우리 머리 위에 내리실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지난날의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보응으로 생각하고 우리의 생활가운데서 악을 버리고 선을 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단4:27). 그 결실이 앞으로 우리의 생애에 반드시 아름답게 열매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보응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1) 참고 선을 행한다는 말은 끝까지 구원을 이루는 일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선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의 열매, 믿음의 열매를 말합니다. 주님은 이 같은 열매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요15:5). “선한 일”이란 ‘앨곤 아가돈’이란 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선하게 보시는 일은 그의 아들을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29).

  (2)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이 선한 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가장 큰 열매는 그 아들을 믿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요1:12),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그 아들에 대한 믿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3:18).

  (3)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육신의 사람이 죽고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톰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롬8:13). 우리의 옛사람은 언제나 육신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선언되어 있습니다.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영적인 생활을 하려면 참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 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눅8:15). 이처럼 믿음의 결실에는 인내가 따릅니다.

  (4) 이 같은 일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만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궁극적인 소망을 말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참고 선을 행하면 우리에게는 영광이 옵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함을 받습니다. 하늘에서 영광 중에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이 낮은 몸이 그리스도와 같은 존귀한 몸으로 됩니다. 썩지 아니함이란 영생의 부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썩지 않고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참고 선을 행함으로 영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선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불의를 쫓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노와 분

   바울은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웅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했습니다.“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고 불의를 쫓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한 것입니다. 당을 짓는다는 말은 진리를 거슬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당이란 말은 원어 적으로 볼 때 다툼이나 이기심과 같은 뜻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불의한 일을 이루는 일에, 다툼을 일으키는 일에 당을 짓는 것입니다. 모세를 대적한 고라와 다단과 온이 당을 지은 것은 모세와 아론을 거스리기 위한 행위였습니다(민16:1-3).  

  당이란 말은 진리를 대적하기 위해 파당을 형성하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같은 파당의 형성은 그 어떤 명목으로도 하나님 앞에 정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불의를 쫓기 위하여 이기심이나 다툼으로 한 무리가 되어 진리를 거스리거나 불의를 쫓는다면 하나님의 보웅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모함하고 진리를 거스린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무리들이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결 론 : 진리를 쫓지 않는다는 말은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대적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같은 일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끝까지 거역하는 자들이며, 회개를 거부하고 죄 가운데 거하는 생활을 말하며, 잘못된 사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나머지 진리에 선 자들을 핍박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불의를 쫓는다고 하신 말씀도 이와 똑같은 경우로 고의적으로 불의한 길을 택하고 구원의 복음을 배척하는 일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가 노와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 13 ≈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본문 : 로마서 2 : 9 - 11)

  서 론 : 하나님은 편벽 되지 아니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심판 에 있어서도 이 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시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축복도 구원도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줄로 인식해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이 같은 사고방식을 두들겨 부수고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1.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있을 환난과 곤고

  바울은 말하기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들 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라”라고 했습니다.

  (1) 악을 행한다는 말은 진리를 거스리고 불의를 좇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고 불의를 쫓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악이란 말은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롬1:28). 악은 죄요 곧 어두움이기 때문에 복음을 거역하며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2) 이들의 영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이란 말에 대하여 얼마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온 영과 혼과 몸”이란 말씀을 보게 됩니다(살전5:23 ; 히4:12). 그런데 여기 나타나 있는 영과 혼에 대하여 원어를 살펴보면 그 안에 스며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영이란 말은 ‘프뉴마’로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불다, 숨쉬다 에서 유래된 말로 바람, 영, 성령이란 뜻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이란 말은 ‘프쉬케’란 말로 달리 나와 있는데 이 말의 뜻은 호흡, 생명이란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나오는 영혼이란 말의 헬라어를 보면 제각기 말씀의 내용에 따라 두 가지로 달리 표현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혼이란 말이 어떤 경우에는 ‘프뉴마’란 뜻으로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프쉬케’란 뜻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라고 하신 말씀에서 목숨이란 말이 헬라어에는 영혼으로 나왔는데 이 영혼은 프뉴마가 아닌 프쉬케로 나와 있습니다(마6:25).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는데 이 목숨도 영혼을 버린다는 말씀으로 프쉬케란 말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눅10:19). 이처럼 영혼이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킬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우리 인간에게는 영원히 멸하지 아니하는 영적인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 수 있는데 이 존재 역시 한글 역에는 같은 영혼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헬라어로는 프뉴마란 말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23:46). 그런데 이곳에 있는 영혼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자신의 목숨이나 생명을 의미하는 프쉬케란 말이 아니라 성령과 동일한 말로 사용하는 프뉴마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속에 영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일리요”라고 했습니다(고전2:11). 그런데 이 영이란 말이 성령과 같은 말인 프뉴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라고 한말도 영원히 존재하여 멸절하지 아니하는 존재로 나타낸 프뉴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약2:26). 그런데 오늘 주신 본문에 나타난 영이란 말은 목숨이나 생명을 뜻하는 프쉬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의 육체가 살아 있을 동안에 당하는 영육간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환난과 곤고에는 유대인에나 헬라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율법이 있다고 치외법권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이 같은 환난과  곤고의 길을 떠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악인이 살 수 있는 길은 악에서 돌이키는 길입니다(겔33:11). 악에서 돌이키는 길은 먼저 죄를 자복하고 그의 인생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로 나타납니다(행2:37,38).

  2.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영광과 존귀와 평강

  악인과 선인의 보응은 천국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1) 선이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롬2:7).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언약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자기 인생의 최고의 소망으로 삼고 살아 나가는 사람들의 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선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맺는 열매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했던 지난날의 생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하나님 앞에 최선의 선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그의 생애에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었습니다. 그 축복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이란 말은 ‘독사’로 어떤 좋은 평가로 말미암은 명예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예롭게 해 주십니다. 존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중히 여김을 받는 일인데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메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3:3). 평강이란 마음속에서 언제나 생수처럼 샘솟는 평안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 평강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14:27).

  이 같은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도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과의 차별은 그리스도가 태어나시기 이전까지에만 해당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기 위하심이요,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로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간수하며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입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후로는 그리스도로 만민의 구주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이 같은 차별의 담이 무너지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지 못한다면 그 율법이 그들에게 특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요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면 유대인이란 혈통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일에 아무런 특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롬9:6-8).

  결 론 : 공의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외모란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가문이나 교육이나 명망이나 인물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차별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중심의 진실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상한 심령, 깨어진 마음을 말합니다. 죄악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인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선한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 14 ≈         율법과 양심에서 오는 정죄


  (본문 : 로마서 2 : 12 - 16)

  서 론  : 인간의 심판자와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이란 말은 인간의 양심이나 율법의 정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일이요, 구원이란 인간이 죄 값으로 받을 사망에서 건짐을 받아 새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에나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을 두지 아니하시고 다 동일하게 하신다는 것이 성경적인 증거입니다. 12절에 나와 있는 말씀대로 “율법 없이 망한다”는 말씀은 율법을 갖고 있지 아니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으며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1. 세 가지 하나님의 법

  성경에서 명시해 주고 있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세 가지 법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1) 그 하나가 양심의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지 오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율법이란 것이 인간 사회에 존재치 아니했으며 다만 인간의 마음에 기록된 양심의 법에 의하여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양심이란 말은 ‘순네이데시스’로 선악에 대한 인간의 지각, 이해력,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도덕적인 생활규범으로 주신 율법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율법과 양심이 다른 점은 다만 양심은 마음의 법으로 심령에 새겨 주시고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문(돌판)에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양심이란 오직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이요 책임입니다. 최초로 아담의 마음에 심어주신 양심은 범죄이전의 양심으로 깨끗한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후 그 양심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졌습니다. 이 같은 양심은 더러워진 양심, 혹은 약해진 양심이라고 말합니다(고전8:7). 이 마음은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상태로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방치해 두시는 인간의 마음입니다(롬1:28).

  인간의 마음이 이처럼 더러워진 후에 자신의 죄에 대한 판단이나 정죄하는 일에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나 그 양심대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를 따를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은 율법대로 살 능력을 상실한 자신의 비참함을 고백한 말이지만 양심대로 살 수 없는 안타까운 양심의 외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롬7:23).

  그리고 성경에서는 양심의 최악의 상태를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딤전4:2). 우리 인간의 더러워진 양심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함에 자연히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상실되어 버렸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양심의 소리가 묵살되어 버렸습니다. 다만 있는 것이라고는 도덕적 양심뿐이나 이 양심도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능만 살아 있을 뿐 행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갈수록 완고하고 완악해 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3) 다음에 율법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화인 맞은 상태에서 정죄와 판단의 기능이 약해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약해질 수도 없고 무뎌질 수도 없는 인간의 본래의 양심을 돌판에 새겨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간이 양심이 마비되어도 돌에 새겨진 율법이 엄존하는 이상 인간은 하나님의 정죄에서 모면할 길이 없는 길입니다. 인간의 양심이라고 하는 등불이 죄의 관용으로 희미하게 꺼져 가는 이 세상에 온전한 양심의 등불을 (사람이 끌 수 없는) 주신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 등불(율법)은 화인 맞은 양심이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죄를 명백히 들어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롬3:20).

  (3) 끝으로 믿음의 법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 양심의 법도 율법도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져 버렸고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더러워진 것은 아담의 원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깨끗한 양심으로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온전한 의를 주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 새로운 법을 주셨는데 이 법이 믿음의 법입니다.

  믿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는 법입니다. 이 믿음의 법은 두 가지 면에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근원적으로 씻어 주시는 일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을 듣지 못한다면 영원토록 양심의 법에 의한 정죄, 율법에 의한 정죄를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양심의 법과 율법에서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를 주시는 일입니다. 아무리 양심이나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고 그 죄에 대한 사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언제 또다시 죄를 범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의 법이나 율법에서 참으로 영원히 벗어나려면 영원한 의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법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시는 영원한 의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법을 소유한 사람은 그 마음이 새롭게 창조함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깨닫게 될 뿐 아니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도 받은 것입니다.

  2. 양심의 송사

  바울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있는 자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신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해답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는 자는 그 율법대로 행해야 의를 얻을 수 있는데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롬3:20). 그런데 바울은 이곳에서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율법이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율법이 없어도 율법적인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양심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2) 양심이 이방인의 마음속에서 율법적인 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양심이 우리의 행위를 이 재판에 송사 하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 인간은 변명이 시도되지만 양심은 정죄를 내립니다. 이때 우리 인간은 가책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일이 한평생 계속됩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 양심의 가책과 정죄 속에서 살게 되고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는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죄의 길이 없고 구원의 길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이 같은 인간의 죄는 바울이 증거한 복음에 이른바와 같이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내려지게 되며 이 심판에서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 15 ≈         율법으로 정죄 받은 유대인


  (본문 : 로마서 2 : 12 - 24)

  서 론  : 로마에서 복음에 거침돌이 된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선민의식과, 율법이 오히려 그들로 복음을 배척케 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 같은 그릇된 사상을 통렬히 비난했습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다 한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준엄하게 선언했습니다(롬232). 그 이유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증거하면서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그 율법에서 정죄함을 받는 몇 가지 사례를 지적하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1. 유대인들이 자랑한 것들

  모든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특권적인 존재로 여겨 왔습니다. “모든 민족가운데서 빼낸 백성”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 “아브라함의 자손” “할례 받은 백성” 등 등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명한 그들의 특권적인 사실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의 큰 경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들은 율법을 의지한다고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곧 그들의 생활의 규범이요 생활의 법도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생활은 마땅히 율법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율법에 의지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그들의 자랑은 사실인즉 거짓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깔려 있는 진리는 버리고 겉에 나타난 외형적인 모형만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율법을 사람의 뜻을 따라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이처럼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23:16, 17).

  유대인들은 이처럼 율법을 의지한다고 자랑했지만 그들이 의지한다고 자랑한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조항을 소홀히 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는 올무가 된 것입니다.

  (2)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랑한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랑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했다면 그들의 자랑은 오히려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 되는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신 모든 행사는 유대인들로 참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만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이라든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권능이라든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일,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일 등, 허다한 자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같은 역사가 그들의 자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랑하는 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 주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을 실망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탄식하셨습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느냐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5:4).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할찌니라”(고후10:17). 이 자랑은 우리들의 자랑해야 할 모든 공로가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뿐입니다.

  (3)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는 백성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율법의 교훈은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또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길 줄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자랑대로 어려서부터 율법의 교훈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들은 어느 민족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길 줄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는데 만족했습니다. 행하는 일에는 인색한 나머지 외식으로 흘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롬2:13).

  (4) 유대인들은 또 자기들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라고 자랑했습니다. 이 같은 유대인의 자랑은 자신들이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자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소경이란 율법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우맹이요 소경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23:16-26). 성경에서는 누구를 보고 소경이라고 부르나?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후1:5-9),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또 어리석은 자의 훈도라고도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기도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깨닫고 그 율법에서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면 이들의 자랑은 다 옳은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랑이 헛된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잘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요15:1,2 ; 롬11:20).

  2. 유대인들이 받은 정죄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자랑에 대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질문하시는 책임은 준엄하게 내려집니다. 이 같은 준엄한 책임은 그들의 자랑이 헛된 일임을 깨우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은 가르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소홀했습니다. 그들이 외식으로 흐르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도적질 말라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결 론 : 바울의 이 같은 논법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반성을 재촉하는 일련의 반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자랑을 하기에 앞서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자녀를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 16 ≈         참 유대인


  (본문 : 로마서 2 : 25 - 29)

  서 론  : 할례란 말은 ‘페리도매’로, 뺑 둘러 벤다는 뜻입니다. 할례가 사람의 인체에 주는 의미는 의학적으로나 위생학적으로 어찌되든 이 할례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 그 언약의 표시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시는 선민의 표식 이였습니다. 갈데아 우르땅에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신지 어언 24년이 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시기에 앞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언약으로 할례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이 할례란 돌로 사내아이의 양피를 베어내는 의식을 말하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같은 언약에 의하여 세상에 출생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신약에 와서 영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1. 문제가 된 할례

  이처럼 할례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된 언약의 표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행하므로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임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신약시대에 와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 그리스도를 믿게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언약의 약속을 이루신 이상, 이런 약속에 참여하기 위해 할례를 받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엇갈린 주장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안에 할례 당까지 만들어졌으며 이 할례로 인하여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핍박까지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바는 할례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할례자가 만약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못하면 그 할례가 무 할례와 다름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할례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한다면 그 무 할례를 할례와 갈이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반증했습니다.

  2. 할례의 영적 의미

  바울이 이곳에서 주장하는 바는 할례는 율법에 속한 사람들에게나 소용되는 일이요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할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주장하므로 오늘날 할례는 새로운 영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롬2:28,29).

  (1) 할례의 유익은 율법을 지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할례 자체가 언약이 아닙니다. 할례란 언약의 증표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이 받는 할례야말로 선민 그 자체의 특권적인 증거인양 자랑했고 할례를 행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에 이르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율법과 동일하게 연관시켰기 때문에 바울은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라면 유대인들의 할례는 그 율법을 지켰을 때 율법을 통하여 의를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된 증표인 할례가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할례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20).

  (2) 할례에는 참 할례와 육신적 할례가 있습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38). 육신적 할례란 말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이란 의미에서 받는 할례를 가리킵니다. 혈통이란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요1:12, 13). 또한 육신적인 할례란 율법적인 할례를 말하는 것으로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므로 할례의 언약이 미칠 수 없습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고 밝힌 할례란 참 할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약에 나타난 할례만을 볼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의 영적인 뜻을 찾아내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란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할례란 영적인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할례란 아브라함의 믿음의 언약에 연합한 자들에 대한 인 치심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야말로 신령한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언약의 보증으로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할례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할례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할례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세례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했습니다(골2:11). 12절에서 이 할례는 세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세례가 오늘날 우리들이 형식적으로 받는 물세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세례란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란 곧 육적인 몸을 벗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며,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데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 유대인도 표면적 유대인이 있고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란 말씀은 유대인을 둘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란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을 의미하고 있지 아니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유대인은 에서나 이스마엘을 말합니다. 에서는 자신의 장자 권을 경망스럽게 팔아먹은 아들로 장자 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이미 그는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곧 유대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마앨도 약속의 씨로 태어난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축복의 언약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유대인을 고집하고 아브라함의 약속 안에 들어오지 아니한다면 그들은 참 유대인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유대인이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를 말하며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가진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이 증거한 이 말씀은 비단 그 당시 육적인 유대인들에게만 교훈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면 그는 표면적 유대인이며,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령한 생활을 못한다면 그의 세례는 표면적 육신의 세례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이면적 유대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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