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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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밤중소리  01-14 | VIEW : 845


  ≈ 86 ≈          믿음과 접붙임


  (본문 : 로마서 11 : 19 - 24)

  서 론 :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차이점을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와의 경우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구원의 나무는 참 감람나무뿐입니다. 돌 감람나무는 구원의 여망이 전혀 없습니다.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입니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 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참 감람나무의 얼마간의 가지를 꺾으시고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을 그 꺾이운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음을 명심하라고 바울은 모든 교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원가지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꺾이운 이유는 그들의 불 신앙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믿음으로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받으므로 원 가지와 같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원 가지가 꺾이운 것은 이방인으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예를 들어 버림받은 유대인과 구원을 얻게된 이방인의 경우를 비교하는 논리를 펴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바울의 논리를 들은 로마교회 교인들은 자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 아니냐? 유대인은 불 신앙으로 꺾인바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꺾인바 된 것인가? 물론 그들의 불 신앙이 이유이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영원한 구원섭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꺾이운 것은 이방인으로 하여금 그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리에 질문할 로마교회 교인들의 물음을 스스로 질문하면서 또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2) 그러면 참 감람나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이 비유로 들고 있는 참 감람나무란 하나님의 구원의 줄기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참 감람나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한 언약으로 비로소 세상에 그 비밀을 들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의 뿌리는 아브라함으로 그 뿌리로부터 줄기가 뻗어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이 나무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은 이 나무에 전혀 관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방인중에도 혹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겠지만 여기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그같은 개인적인 구원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포괄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참 감람나무의 뿌리가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로 그 줄기로 하신 일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실로 이방인들도 그 나무에 접붙이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약속은 그의 혈통적인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요, 땅의 모든 족속과 연관된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 라”고 말했습니다(롬4:16).

  (3) 열매를 맺는 나무는 오직 참 감람나무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사역을 때를 따라 역사 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기점으로 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과 이방인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아브라함과 이어지게 되었으며 아브라함의 약속이 전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9).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때가 세례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그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심에 참 감람나무의 원가지를 꺾으시고 그곳에 돌 감람나무 가지들을 접붙이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2.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에게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이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잠정적으로 버리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우리들도 그들처럼 불신 중에 처하면 버린바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버리고 인간의 지식으로 의를 얻고자 하면 꺾이운 바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를 버리시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처럼 아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일은 우리는 돌 감람나무의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참 감람나무의 뿌리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가지들도 아니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돌 감람나무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아무짝에도 쓰지 못할 돌 감람나무 열매를 맺어온 가지였습니다. 이 가지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바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에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전에 그 원 가지였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긍하며 높은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3)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에게는 엄위가 있으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나 사랑에는 언제나 공의가 있으며 엄위가 그것을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 넘어지는 자에게는 사랑과 긍휼 대신에 엄위가 그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얻으려면 죄를 멀리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철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의 경우에 비취어 참 감람나무 가지였던 이스라엘이 불신에서 돌이킬 때 그들의 접붙임이 얼마나 확실하겠느냐고 강조하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소망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24절에서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실인즉 우리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 감람나무에서 찍으시고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하물며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겨 온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날, 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시는 일이야 하나님께 얼마나 쉬운 일이며 당연한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돌 감람나무에 속한 가지들로 하나님의 구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무 쓸모 없는 이 같은 존재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심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 87 ≈         이스라엘 회복의 비밀


  (본문 : 로마서 11 : 25 - 27)

  서 론 :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전체에 걸쳐 실로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언으로 이사야로 말씀하신 내용을 들었지만 그의 문제는 이스라엘 회복에 관한 여러 예언을 함축 있게 종합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예언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여 이 예언이 성취될 시기의 비밀을 이곳에서 밝혀 주었습니다.

  1. 이스라엘이 언제 회복될 것인가?

  바울이 이곳에서 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특히 강조하려는 것인가? 이스라엘이 참 감람나무 줄기에 반드시 접붙임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방인 교회에게 밝혀 주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한 이방 교회의 교만을 꺾으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자만하려는 이방교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진리를 깨달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1)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이 불가불 완악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참 감람나무 가지 얼마가 꺾이운 바 되었고 그곳에 이방인인 돌 감람나무 가지가 접붙임을 받아 참 감람나무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무한정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때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 이제 버림받은바 된 원 가지들이 다시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바 되는데 이때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확실히 언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언제 채워지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완악하게 되었다는 바울의 말은 이스라엘이 율법적인 의를 고집하므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저버렸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적인 의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만 주신 은혜의 선물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의만이 구원의 의인 줄로 고집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고집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 완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배척한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 받을 구원의 수효도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그 수효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때까지 온 이방세계에 힘있게 전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전파의 문이 닫혀질 날이 반드시 옵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바울은 여기서 그 비밀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시는 날

  바울이 말한 이스라엘의 완악한 마음이 돌이킴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시기에 대하여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신다”고 말했습니다.

  (1)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신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하늘의 보좌인 시온에서 내려오실 때가 있습니다(계19:11-21). 이때 이 구원자는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오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회복하시고 새로운 메시야 왕국을 이 땅 위에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 왕국이 계시록 20장에서 밝혀주고 있는 천년왕국입니다.

  이스라엘은 옛날부터 메시야를 대망 해 온 민족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은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 관은 메시야가 나타나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이 땅위에 메시야 왕국이 건설된다고 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란 그들의 메시야일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빌라도의 사형판결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나약한 무명 청년을 배척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인가 시온에서 내려오시는 진짜 메시야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란 사실을 알고는 가슴을 찢는 민족적인 회개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2) 구원자가 오시면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인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신의 자리에서 돌이키시는데 그 일도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일에 대하여 스가랴는 이처럼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슥12:10).

  (3)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시는 일에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에 관한 분명한 약속을 주셨지만 그들은 그 비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니엘 9장에는 메시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왕국에 대하여 70이레의 비밀로 밝혀주셨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메시야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하에 나오는 25절과 26절에서 이런 왕국이 건설되기 이전에 기름부음 받은 자인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그들은 간과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62이레가 지날 것이요… 62이레 후에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고 말씀하신 초림의 메시야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만약에 이 메시야의 예언을 이사야 53장에 나와 있는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킬 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4) 바울이 온 이스라엘이라고 말한 이스라엘은 끝까지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많은 십자가를 지고 인류 역사의 종점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재림을 전후하여 이방인 교회들도 많은 환난을 겪고 통과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이 겪어야할 환난은 더욱 큰 것입니다. 이 시기를 예레미야는 ‘야곱의 환난의 때’라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렘30:7). 그들이 시온에서 오시는 메시야를 바라볼 때 그들의 형편이 어떠한지 스가랴는 이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슥14:1,2). 그리고 이때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수에 대하여 이처럼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3분지2 는 멸절하고 3분지1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3분의1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슥13:8,9).

  결 론 : 지금 이방인의 때의 문이 점점 닫혀져 가고 있습니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14).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어 이방인의 수가 채워지면 이제 인류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이때에는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에게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복음을 거역하는 모든 인류에게 긍휼이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이 구원의 시기에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 88 ≈     후회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


  (본문 : 로마서 11 : 23 - 36)

  서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은 실인즉 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이들 둘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교회와 복음을 배척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어떤 면으로 보면 서로간에 원수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 일은 구약시대에는 이방인들을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심으로 이스라엘로 긍휼을 얻게 하시고 신약시대에는 이스라엘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심으로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얻게 하시는데 이제 앞으로 이스라엘은 이처럼 이방인들에게 베푸시는 긍휼을 저희도 다시 얻게 될 것이라고 밝혀 주므로 종국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함에 이르게 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이스라엘

  바울은 28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양면적인 관계를 ‘원수 된 자’와 ‘사랑을 입은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를 인하여”란 토를 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스라엘로 그 심령을 어둡게 하시고 복음으로 이방인들을 불러 드리심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리에 있었을 것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그들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 아래에서는 오직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지손 중에 씨로 여기심을 받는 약속의 자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2)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입었다고 하는 대상은 물론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논리가 되겠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택하심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스라엘의 특수한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선택을 두 가지 견지에서 살펴 볼 수 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선택입니다(엡1:3-5). 이 같은 선택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선택에 의해서 그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또 한가지의 선택을 언급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선택입니다.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인의 후손으로 언약하신 메시야의 탄생을 계획하시고 만인 중에서 이스라엘을 그같은 백성으로 선택하신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을 지닌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지금은 복음을 거스리므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지만 이 같은 택하심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그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져 왔으며(1948년 8월 15일에 독립을 선포했다). 또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대로 인류의 종말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고 그 거역하는 기간이 심히 오래 계속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나님은 그들의 택하심에 대하여 후회하시는 것이냐?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므로 결코 그의 하시는 일에 후회하심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말씀하셨습니다(민23: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일에 대하여 그의 뜻을 거스려 잘못된 점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애초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성취되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추호도 실패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후회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대로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에게 긍휼 하심을 베푸시는 하나님

  바울은 30절부터 32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관계를 매우 조화 있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순종치 아니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죄로 버려진 상태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몰랐고 그 말씀에 대한 순종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결과적으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말했습니다(행13:46).

  (2)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 같은 불순종은 결국은 이방인에게 나타내 보이신 긍휼을 그들에게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순종은 마음의 완악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처럼 인간의 불순종에 대하여 길이 참으심은 그 불순종 가운데서 그들로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게 하려는 것이라고 갈파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불순종가운데 있는 것은 이제 그들로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이 계시는데 이스라엘은 이런 긍휼을 통해서 지금 그들의 불순종한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3) 바울은 여기서 이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타락은 회복할 수 없는 무서운 죄를 가져오게 되어 모든 인간이 사망 중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에게 의를 얻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열어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도,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도 의의 도구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불순종 중에 얽매어 놓아 두셨는데 그 이유는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크신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너무나도 갚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는 놀라운 찬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아멘.





  ≈ 89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예배


  (본문 : 로마서 12 : 1 - 2)

  서 론 : 바울이 내 세우고 있는 이신청의(以信稱義)의 교리는 진리입니다. 그 안에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섭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의 진리를 구원의 교리로 정리한 곳이 로마서이며 바울은 이 놀라운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혹자는 교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입각한 바른 교리는 이단의 정체를 폭로하고 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11장까지 걸쳐 기독교의 위대한 교리적 설명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 그 교리를 그리스도인들의 실생활에 적용하는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참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생활이 바른 교리의 토대 위에서 꽃을 피워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룸에 처음 1, 2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인데 그 영적 예배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릴 영적 예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영적 생활이어야 한다는 말을 이곳에서 “영적 예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지적한 영적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에 나타내야 할 영적 생활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는 “너희 몸”이란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된 너희 몸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거듭난 사람의 새로운 삶의 방법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옛 사람과는 영원히 결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저 말로만, 이론적으로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대신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나를 그와 연합시키셨기 때문에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요 진리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만약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요 구원의 뿌리가 되는 대속의 은총이 무너지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취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2) 산 제사란 새로운 제사를 말합니다. 이 산 제사는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제사란 곧 제단에 바칠 제물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난날 죽은 제사를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의 옛 몸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왔다”고 했습니다(롬6:13). 우리는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죄에게 드려왔으며 이것이 곧 죽은 제사였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16). 그러나 산 제사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는 제사입니다. 지난날의 죄의 병기에서 의의 병기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롬6:17,18).

  (3) 바울은 이 제사를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지난날에는 육신으로 죄를 섬겨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그 육신의 사람은 이미 옛 사람으로 죽고 영적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죄는 육신으로 섬겼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육신으로 섬기지 않고 영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섬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때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마음으로건 몸으로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고전10:31).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은 곧 말씀에 순종의 생활입니다.

  2. 새롭게 변화 받는 생활

  바울은 2절에 가서 1절에서 밝힌 그리스도인의 영적 예배의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롭게 변화된 생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생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대목에 와서 1절과 2절과의 연결 문제로 신학적인 많은 논란이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에서 2절이 영적 예배를 해석해주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1)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란 지난날 우리가 살아온 이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요일2:16,17).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리의 육신은 이 세상에 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기까지는 죽을 육신(무덤에 장사될)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지난날에 우리를 지배해 온 죄의 습성이 우리 육체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잔여세력과 끊임없는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 받으려는 죄의 잔여습성과 싸우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입니다. 마귀는 바로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죄의 잔여세력을 등에 업고 우리를 유혹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엡6:10-17).

  (2)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변화의 근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새로운 행동은 새로운 마음에서 탄생됩니다. 마음의 변화 없는 영적 예배의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새로운 변화는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이 변화는 근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이 변화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은 변화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로 변화의 발판은 형성되었어도 그 변화가 당장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따라야 하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소멸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성경께서는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 안에서 역사하사 먼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3)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했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엡5:10). 우리의 생활은 무조건 세상 사람이 정당하게 보는 습관을 따라가거나 세상 풍습을 쫓거나 세상의 도덕적 윤리적 관념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할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같은 분별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의 지름길이 되며 이런 생활이 곧 그리스도인의 영적 예배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란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도록 분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90 ≈         한 몸의 지체를 이루는 성도들


  (본문 : 로마서 12 : 3 - 5)

  서 론 : 성경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몸과 지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을 말합니다(롬6:5). 그러므로 모든 근본은 오직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곳에 연합된 지체에 불과한 것입니다.‘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하신 말씀 등은 교회에 있어서의 성도들의 위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엡1:23, 골1:18). 바울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고전6:15). 지체에는 제각기 부여된 기능이 있으며 그 지체는 그 기능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각의 절제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교회에서 각기 받은 은사대로 충성하고 봉사하려면 가장 명심해야 할 일이 있는데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생각하지 못하면 생활에 파탄이 옵니다. 믿음이 파선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지혜롭게 생각하는데는 두 가지 일이 전제됩니다.

  (1) 하나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생각의 비약은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마음에서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 생각대로 움직이다간 말할 수 없는 낭패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능력이나 지혜나 사업적인 역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성공했다고 해서 자신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생각은 그 생각 자체보다도 그 생각을 자아내게 한 마음의 동기가 중요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업의 동기가 정욕에서 나왔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의 생각은 아무리 훌륭하고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성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약4:3).

  (2)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를 이루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제각기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은 자기가 자기 멋대로 정하는 것도 아니요 자기 생각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정한 분량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분량을 초과해서 생각하면 영적 교만에 빠지기 쉽고 이 분량에 미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믿음의 분량을 바르게 판단하려면 우리는 기도로 ‘믿습니다’라고 결정을 내려 행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몇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 같은 자기의 생각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냐? 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핵심적인 문제에 대하여 신앙적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거짓됨이 없어야 합니다. 자신의 정욕이나 탐심에서 나온 생각을 하나님의 영광에 억지로 맞추어 보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로 자기가 품고 있는 그 생각이 어떤 일시적인 감정이나 자기 감정의 충동에서 온 것이 아닌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생각은 내 마음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성령의 역사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라잡고 있는 믿음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자기 감정에서 생겨난 자기 생각의 믿음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심어 주시는 불가항력적인 믿음입니다. 이처럼 두 가지 모습으로 솟아나는 내 마음의 생각을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대처하여 절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그 어려운 시험 중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욥의 큰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라도 욥처럼 어려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지체와 직분과의 관계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한 것은 이 같은 생각의 절제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함에 우선적으로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1) 몸의 지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한 지체를 가진 몸이란 아메바와 같은 단순세포로 형성된 미생물뿐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몸이란 사람의 몸을 비유한 표현이며 지체란 그 몸을 이루는 몸의 각 부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몸을 이루는데 있어서 한 지체 만으로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여럿이 한 몸을 이룰 때에 그 지체로서의 참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몸의 지체는 언제나 다음 몇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체는 어떤 경우에나 몸보다 더 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지체를 떠나서 그 이상의 자리에 앉을 수도 없고 군림할 수도 없습니다. 또 지체는 자신이 아무리 중요한 부분을 맡아 있다고 해도 그 한 지체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몸에 여러 지체가 불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러 지체로써 이루어져 있습니다. 교회의 몸이 되신 주님은 각기 지체의 직분은 다르지만 모두 한 지체로서 똑같이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자기가 교회를 움직이는 존재인양 자신을 높여서는 안됩니다.

  (2) 모든 지체가 한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체가 제각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따로 따로 있습니다. 모든 지체가 한가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교회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각기 맡은 직분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던지 그 직분을 주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를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임을 알고 교회를 바로 섬기고 자기 사명을 충성스럽게 이행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같은 일을 잘 명심하여 우리들이 교회에서 맡은 일에 성실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다 하지 못할 때 몸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사람의 구조는 지극히 신비적입니다. 맹장이란 것은 아직도 그것이 왜 우리 몸에 붙어 있는지에 대하여 밝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필요 없게 여겨지는 필요악의 맹장이라도 그 지체가 고장이 나면 맹장염이 되고 그것이 확산되면 복막염이 되어 생명의 위험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을 귀히 여겨야 하며 자기 지체만을 제일로 알고 자신을 나타내는 일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체는 오직 몸을 위해 존재하며 지체의 사명은 그 몸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91 ≈           지체로서의 은사


  (본문 : 로마서 12 : 6 - 8)

  서 론 :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들은 그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밝힌 바울은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지체로서의 사명이 은사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몸의 지체가 여럿인데 그 여럿의 지체들이 제각기 하는 직분이 다른 것처럼 교회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의 은사 역시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각인에게 제각기 다른 은사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몸을 이루는 일에 지체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한다는 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1. 은사는 어떻게 주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은사의 직분을 받아 지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그러면 이 은사는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1)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직분의 은사는 자기가 원한다고 받을 수 있거나 자기 뜻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으로 받는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아무리 미미한 듯한 은사(직분)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 은사야말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대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귀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가 받은 은사에 대하여 하찮게 여기며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업신여기는 망령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모든 성도들은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똑같은 은사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는 동일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의 은혜의 분량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믿음을 따라,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또 이와 같은 것들과 조화시킬 수 있는 그 사람의 재능이나 지식을 따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유익한 방법으로 각각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주신 은사로서의 직분은 이처럼 제각기 자기의 은혜의 분량대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 몸에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지체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쓸모 없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 하나가 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할 때 우리의 몸은 정상적인 건강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2. 은사의 분별과 활용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의 직분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권위의 은사, 구제의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의 은사 등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의 한 부분을 열거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하려는 바는 이 같은 은사적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떤 자세로 교회를 섬겨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을 교훈 해 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1) 받은 은사가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직분이 예언의 은사였습니다. 이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구약적 표현입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예언이라 하였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의 예언이 기록된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신약성경이 완성되기까지 얼마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진 사도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에게 은사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전파하도록 하셨는데 그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초대교회에서 은혜를 따라 은사로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다 기록된 이후, 목사나 교사직분으로 바뀌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므로써 이 예언의 은사적인 직분은 변경되었고 온전해졌습니다. 오늘날 혹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은사의 직분이 있어서 예언이 계속된다고 주장하므로 계시의 계속성을 내 세우기도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계22:18,19). 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에서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예언이 믿음의 분수를 넘으면 그 예언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참 예언자들입니다.

  (2)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섬김의 온사적인 직분이 있습니다. 아마 이 직분은 은혜의 분량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기도하며 또 교회에서 존경받을만한 직분자에게 주시는 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받든다는 뜻입니다. 이 은사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0:26-27). 다른 형제를 대접하고 섬기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남을 위해 회생하는 일에 기쁨을 가지며 다른 이를 자기보다 높이어 존경하는 일은 보통 은사가 아닌 것입니다.

  (3) 다음에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은사는 교사의 직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계속되어야 할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고 말씀으로 그의 뜻을 나타내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교훈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은사는 교회에서 가장 귀한 은사적 직분입니다.

  (4)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권위의 은사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직분자를 말합니다. 오늘날 각 교회에서는 이 같은 직분을 위해 권사 직분을 두고 있습니다.

  (5)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남을 구제한다는 일은 보람된 일이며 또한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구제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한가지는 교회의 재정으로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물로 도와주는 일입니다. 구제는 사회사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어데 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선한 청지기의 사명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성실함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다음에 다스리는 은사에 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은사는 교회의 치리를 말하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 직분 자를 위해 치리장로를 피택하여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푸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즐거움으로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지체적 사명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 92 ≈           사랑의 생활 지침


  (본문 : 로마서 12 : 9 - 13)

  서 론 : 바울은 12장 초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생활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생활”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교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체로서의 은사적인 직분을 잘 감당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9절 이하에서 바울은 이것을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천적인 생활 면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사랑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사랑으로 출발해서 사랑으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1)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사랑이란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회에서 인간간에 연결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지체로서의 은사적 직분이 있지만 그 모든 직분 위에 이 하나님의 사랑의 은사가 덮여져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 하라 이는 온존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3:14).

  (2)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사람들에게 더욱 풍성하게 공급되는 은사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4:10,11).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2. 사랑의 본질

  바울이 9절에서 지적한 말씀에서 사랑에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참 모습은 언제나 진실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 깊은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말은 처음 사랑의 출발과 마지막 사랑의 끝이 한결같다는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사랑을 쏟다가 그 사랑이 얼마안가 끊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익이 따를 때는 사랑이 가고 손실이 있을 때는 사랑을 거두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높으면서도 깊고 그리고 일직선으로 끝없이 이어 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말은 사랑을 행하므로 그 아름다움이 밖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으로 사랑이란 말로 불려질 가치조차 없는 사랑입니다.

  (2) 다음에 사람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의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한 일에 적용될 수 도 없고 활동할 수 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도모하는데 사랑을 쏟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에나, 불의한 일,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에 사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악과 병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악을 미워한다는 말은 사랑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악한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악이 들어가 있는 모든 일에는 오직 흑암의 권세만이 활개치기 때문에 그런 곳에 사랑이 개입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사람은 선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선한 일에 개입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선한 열매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서로 선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선한 일에 성도들이 마음을 함께 하여 힘써야 합니다. 그곳에서 형제간의 참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사랑의 세 가지 본질을 잘 알고 모든 일에 거짓을 버리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형제에 대한 사람과 봉사의 방법

  10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은 교회에서 형제들간에 이루어 나갈 사랑에 대한 권면입니다.

  (1)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형제간의 사랑이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우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형제간의 사랑은 우애와 존경입니다. 우애란 말은 친구간에 나타내는 최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형제간의 사랑엔 존경이 필수적입니다. 존경이 없는 곳에 사랑이 설 곳이 없습니다. 존경의 반대말은 멸시와 천시가 됩니다. 멸시와 천시가 있는 곳에 사랑이 발 부철 곳이 없습니다. 형제들과 바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존경이 따르는 것입니다.

  (2) 11절에서 봉사의 방법이 나옵니다. 첫째로 교회에서 봉사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교회에서 사랑의 봉사의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봉사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다음에 게으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게으름은 하나의 죄악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할 시간이 없어도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시험은 우리의 기도가 나태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에 항상 힘쓰는 일은 모든 일에 우선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 성도들의 쓸것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형제들에게 필요한 일을 내가 채워준다는 일은 보람있는 일입니다. 성도들간의 사랑의 교통은 이런 곳에서 싹트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오는 형제를 후히 잘 대접하는 일은 진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했습니다(히13:2).

  결 론 :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각 지체마다 조화 있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일 이상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랑을 따라 여러분의 지체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지체로서의 사명을 이루실 것입니다.





  ≈ 93 ≈           사랑의 사회생활


  (본문 : 로마서 12 : 14 - 21)

  서 론 :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사회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일찍 이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생활의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 대 전제를 말씀하신 일이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뿔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 앞에 비취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5:13-15). 오늘 주시는 14절 이하의 말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생활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이웃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원수에 대한 생활방법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 우리 생활에 부딪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의 형제들이요 다음은 우리의 대적들입니다. 그런데 원수에 대한 우리의 생활 태도에 대해 축복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원수를 갚지 말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해 주어야 할 일은 우리가 받는 핍박은  우리의 상급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2)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진리를 알지 못하므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저주하면 안됩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축복하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로 진리를 깨달아 구원을 얻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3)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도 그들에게 관대하시다 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벧후3:9). 하나님은 악인이 그들의 죄악으로 죽는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겔18:31,32). 그 뿐 아니라 악인들에게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겔 33:19).

  (4) 우리가 그들을 정죄치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주나 정죄의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직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여 준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경종 하셨습니다(마18:22-35).

  2.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바울은 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먼저 형제에 대하여 몇 가지로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형제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기가 좀 상해 있어도 형제의 즐거운 일을 들으면 그와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는 자의 고통을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도울만한 일을 찾아서 스스로 도움이 되고 함께 그 짐을 져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지체로서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했습니다. 형제의 사랑은 겸손에서 그 잎이 솟고 그 뿌리가 내려집니다. 형제는 서로 마음을 같이 해야 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자신을 형제보다 낮은데 처할 때 하나의 마음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는 자는 융합이 어렵습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인데 이런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2) 다음에 원수와의 화평에 대하여 몇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살전5:22). 악을 대항하기 위하여 악을 사용하는 일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악은 그 어떤 일에나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려면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38-45). 원수 갚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를 갚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할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결 론 :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이 같은 삶이 한없이 미련스러운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방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생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생활임을 알고 이 같은 생활을 통해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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