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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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밤중소리  01-14 | VIEW : 1,107


  ≈ 77 ≈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본문 : 로마서 10 : 1 - 4)

  서 론 :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여겼습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고 했습니다(롬11:13).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늘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울의 한 혈육이요 형제였습니다. 그들은 다 함께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백성이었고 아브라함을 한 조상으로 가졌으며 예수도 그들과 한 혈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그와 반면에 이방인들이 오히려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하여 바울의 마음이 편할 순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신의 자리에서 하루 속히 깨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바울로서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천명하고 율법과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설명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떨어진 이유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떨어진 일에 대하여 분명한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하나님께 열심이 득심 했습니다. 실인즉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최종적인 심문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했을 때 주님을 심문한 대제사장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하여 구금되었을 때 천부장으로부터 언권을 얻어 자신을 변명하면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행22:3). 바울의 경우는 다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미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구원의 바람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간구는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그런데 그들의 이 열심이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과는 전혀 판이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창조주의 지식이요 영적 지식이요 사랑의 지식이요 구원의 지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은 육적인 지식이요 땅의 지식이요 정욕과 탐심과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일정한 지식을 정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그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그 섬김이 올바른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인줄로 잘못 알고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지식으로 이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율법에서 나온 열심으로 그들은 이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열심을 품어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증거하여 이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인간이 율법으로는 의를 얻기는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존재임을 분명히 하시고 율법 외의 하나님의 의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으며”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자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바른 지식인 것입니다(갈3:10, 롬3:20).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지식을 그들은 버리고 율법을 인간적인 지식으로 바꾸어 그 율법을 따라 열심히 하나님을 섬김으로 의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4)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큰 허점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고 하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물론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의 표준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려고 준 것이 아니란 사실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너무나 높아서 우리의 힘이 도저히 미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애써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식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 아들로 이 의를 이루게 하시고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갈2:16).

  2.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잘 밝혀준 논증입니다. 바울은 이 짧은 말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율법의 의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1) 율법의 마침이란 율법이 폐해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언제까지나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그 사람들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루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 율법이 요구하는 저주와 심판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율법이 예수님께 요구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2) 이 같은 일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안에서 이룰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이런 의를 작만 하시고 이 의로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로 섭리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이 율법이 있은 후 에 세워진 것이 아니요 신약시대에 와서 새롭게 구상된 것도 아니며 이미 만세 전부터 세워졌든 것입니다(엡1:3-5).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받으신 저주는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요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써 그로 인하여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갈3:13).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로 율법도 이루어 놓으시고 우리의 죄의 속량도 이루어 놓으시므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완전히 갖추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하셨습니다(마22:1-4). 우리의 할 일은 이 일을 이루신 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믿음으로 이 선물을 은혜로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또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롤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갈2:16).

  결 론 :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사람이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른 신앙생활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의 지식 갖기에 힘쓰는 성도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78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본문 : 로마서 10 : 5 - 8)

  서 론 :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에 대하여 그 현격한 차이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그릇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함으로써 아무 공로 없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의를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의 조건은 인간적인 경험이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증거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차이는 행함과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1)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것을 지키는 자가 의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법도를 쫓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레18:4,5). 이스라엘의 오해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광스러운 조상인 아브라함까지라도 행함으로 의를 얻지 못했다고 성경에서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4:1,2). 하나님께서 만일 이스라엘에게 능히 의를 얻을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면 하나님의 의의 표준은 율법이외에 존재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이란 있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롬3:20).

  (2)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하여 오직 그것이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아주 독특하고 묘한 방법으로 이 의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예수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에 그 반대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같은 사실을 누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확인할 수 있단 말이냐? 아니면 음부(무덤)에 내려가서 그의 죽으심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반론은 물론 율법주의자들의 억지요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지만 복음은 혹은 하늘에 올라가 확인하거나 혹은 음부에 내려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주창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르기를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라고 반박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같은 말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누가 그처럼 하늘에 올라가 확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삼으려고 한다면 그를 다시 이 세상에 모셔 오시게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기 위해서는 그를 모셔 내려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부란 사망 혹은 무덤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확인하려면 음부에 내려가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에 바울은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반격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려서 모든 사람에게 확인 시켜야 할 것이니 과연 그같은 일이 합당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고 했습니다. 즉 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고 되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이처럼 말했습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확인하거나 음부에 내려가 그의 죽으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의 지식이나 지혜는 이성으로 이해하고 상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같은 확인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논증을 할 때에 그는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믿음의 말씀을 증거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신30:11-14).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으며 바다 건너편 멀리까지 찾아 갈 이유도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서 심히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에 있었고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2)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외는 우리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도, 그리고 음부에 내려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확인해도 그런 것이 믿음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색 옷 입은 부자가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어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호소했을 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부자는 모세나 선지자들의 말로는 회개치 아니할지라도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이처럼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눅16:27-31).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말씀이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결 론 : 바울이 전파한 믿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고전1:21) 이 믿음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그 말씀으로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의를 율법과는 상관없이 아무 공로 없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 79 ≈            구원에 이르는 믿음


  (본문 : 로마서 10 : 9 - 11)

  서 론 :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가까이 있는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을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음부에 내려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그런 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확인인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믿음인데 그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도 음부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하였으니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1. 구원에 이르는 믿음

  바울은 9절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한 중요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기에 있는 이 말씀 뿐 아니라 바울의 서신 중에 나타나 있는 모든 구원 교리에 대한 진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에 대하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12:7).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그를 믿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 천국의 문제 등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바울은 간략하면서도 그 모든 믿음의 참 진리를 이곳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 우리의 입으로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시인이 전제조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주되심의 진실한 고백에 있습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주란 말은 하나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퀴리오스’란 헬라어는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는 세속적 의미에서 사용되는 주란 말의 뜻입니다. 세속에서 일반화된 ‘퀴리오스’란 말은 노예와 반대위치에 있는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소유자, 고용주 등을 지칭하며 아내에게 있어서 남편의 위치도 퀴리오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지칭으로 평범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70인 역에 의하면 이 퀴리오스를 하나님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퀴리오스가 되시는 분은 오직 그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이 말이 또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의 성경적인 토론에서 시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시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22:45). 이 말씀은 다윗이 말한 주란 칭호를 예수님이 분명히 하나님과 결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되심의 증거는 비록 신약성경에서 만의 일이 아닙니다. 구약 이사야에 있는 임마누엘이란 말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아들의 이름에 대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말 등에서 예수의 주되심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에 나타나 있는 모든 이단을 볼 때 한가지 공통점은 예수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어 있는 일도 그들이 예수의 주되심을 인정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믿음의 원인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말은 예수의 속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다시 살아나심을 믿으려면 그가 주되심의 사실을 믿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관한 더 깊은 지식을 가지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또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고전2:12).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인에 대한 속죄의 죽으심이란 사실은 그의 부활로서 확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믿음은 구원에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는 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나 상식이나 경험에서는 절대로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발생원인이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만 그 말씀이 심겨져서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곳은 마음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심겨진 믿음은 그의 입으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2. 마음의 믿음과 입의 시인

  바울은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마음의 믿음과 입의 시인을 구분 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한 믿음에 대한 양면적인 설명입니다.

  (1) 믿음의 지식을 간직하고 저장하는 곳은 마음입니다. 말씀의 씨가 마음의 밭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마13:19). 그리스도의 의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와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는 복음을 마음으로 믿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벙어리가 되어 그 입을 통하여 말로 시인할 수 없다고 해도 그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그 믿음은 그의 구원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2) 사람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사람은 그 신앙을 입으로 반드시 시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세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이 전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1절 이후에 전파하는 신앙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사람은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합니다. 누구에게나 예수 믿는 일을 고백하는 것을 큰 자랑과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한가지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일을 말합니다. 지난날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일을 거부하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 론 :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이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의 사실을 의심하거나 다른 그 어떤 것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잘못된 지식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 80 ≈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예수님


  (본문 : 로마서 10 : 11 - 13)

  서 론 :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원리에 대하여 구약적인 근거를 이곳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지극히 보편성을 띄고 있으니 인종의 차별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이방인과 유대인들과의 사이에 간격을 두고 있었습니다. 율법자체가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것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이 같은 장벽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를 율법의 속박과 저주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율법을 받았으나 그 율법의 정죄로 망하는 유대인들이나 율법 없이 망하는 이방인이나 차별을 두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1.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바울이 성경에서 인용한 말씀은 로마서 9:33에서도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이사야 28:16에 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1)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율법이나 양심 앞에서의 자책을 말합니다. 모든 죄인은 율법의 정죄 앞에서 그 부끄러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방인이라도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기록해 두신 마음의 율법, 곧 양심이 있습니다. 죄인들은 이 양:심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 앞에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같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정죄 의식에서 해방되어 지유함과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의가 내 것이 되며 그의 피로 나의 죄가 사유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주의 재림 때 그 앞에서의 입장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홈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벧후3:14).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 같은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심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6:15-17).

  (3)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의 부끄러움도 포함됩니다. 주님은 이 백보화 심판대에서 왼편에 둔 염소들에게 이같이 선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선언입니다(마25:41). 이 주님의 선언은 믿지 아니한 자들의 영원한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4) 이 부끄러움은 영원한 지옥에까지 연장될 것입니다. 자색 옷을 입고 한 평생 연락하며 지낸 어느 한 부자는 죽은 후에 음부에 내려가 이 부끄러움을 영원히 당해야 했습니다. 이 부끄러움의 두려움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마5:30).

  2.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같은 믿음의 축복은 결코 어느 한정된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방인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1)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한 주이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만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창세 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어 그들의 주가 되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을 입은 주의 백성들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습니다.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요 헬라인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일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2)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측량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엡3:8). 그의 은혜의 선물도 풍성하십니다(엡3:7).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셨습니다(엡3:19).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모든 것이 그의 소유이시기 때문에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그가 부르신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하는 그 부요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 부요로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심으로 그 부요를 공유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부요란 무엇인가? 그의 영광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교회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음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3:21). 바울은 로마서8장에서 이처럼 말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다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그에게 부요하십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이 생명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요일5:12).

  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이처럼 증거 한 후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구원의 보편성에 대하여 증거 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유대인에게 국한된 특권이 아닙니다. 헬라인들에게 주어진 특권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신앙의 시인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이미 9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 마음에 믿는 주의 이름을 그의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의 표현을 말하며 이 일이 주의 이름의 시인으로 인한 구원의 확신과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전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 예수님은 모든 것에 부요하신 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두 사람에게 능히 영생도 구원도 하늘의 영광도 천국도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구원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귀하고 은혜로운 일입니까? 그 은혜에 참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81 ≈           믿음의 구원


  (본문 : 로마서 10 : 14 - 17)

  서 론 : 오늘 봉독해 드린 14-17철까지의 말씀은 13절에서 밝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대한 영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설명을 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이 말씀은 실인즉 구약에 있는 요엘2:32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요엘은 2장에서 주의 재림을 전후한 인류의 종말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날 즉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 날’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란 말씀을 들려 주신데 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은 복음의 요체입니다. 주의 이름이란 곧 예수의 이름인데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입의 시인이기 때문에 훌륭한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롬10:9-10).

  1. 믿음의 과정

  14-I5절에는 주를 입으로 시인하기까지의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1)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9-10절에서 바울은 이처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지 못한 입의 시인은 구원이 따를 수 없습니다. 그같은 시인은 거짓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른다는 말은 진실된 믿음의 시인이며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믿음은 그 마음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라고 말씀하시므로 밭인 사람의 마음속에 씨가 뿌려져야 말씀의 열매가 맺어지는데 그 씨란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히신 것입니다(마13:18-23. 눅8:11-15).

  (3)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들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밭에 씨를 뿌리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의 말씀을 들려주는 전파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그 전파를 통하여 듣게 되며 그 들음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믿음을 통해서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파하는 자의 위치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믿음은 전파하는 자에 의해 그들로부터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4)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다면 그 전파는 복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교훈이요 인간의 종교일 따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선지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선지자중에 단 한 명의 예외자도 없습니다.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눅4:43). 예수님은 그의 복음을 전할 우리에게 이처럼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여기서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전파 자로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전파 자로 이미 택정 함을 입은 자들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사상에 철저하였음으로 복음전파 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본 로마서 초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함을 입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롬1:1). 우리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들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직분은 그 형태가 어떤 것이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5)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했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난하 주에 기록된 대로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움직이는 발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온 천하에 다니며 전하라고 명령을 받은 주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꾼은 그 주인의 명령을 제대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름답다고 하신 말씀은 그에게 주실 축복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에는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상급 또한 놀라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단12:3).

  바울은 16절에서 이스라엘의 불 신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저희란 이스라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석이 18절 이하에 나오는데 이스라엘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불 신앙에 빠진 것이 아니라 순종치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이 복음을 순종치 못하게 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 일에 대하여 이미 오래 전에 예언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고 탄식했습니다(사53:1).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경우를 비추어 믿음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17).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이란 곧 말씀에 대한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순종이 따르지 아니하면 믿음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단단한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나 돌이 많은 밭에 떨어진 씨앗이나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은 결실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라고 하는 단단한 길가와 같은 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복음에 순종할 수 가 없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들음이란 곧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복음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철학적인 지식이나 인간의 지혜나 경험에서 고안해 낸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복음인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보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발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로 사용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 82 ≈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이스라엘


  (본문 : 로마서 10 : 18 - 21)

  서 론 :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은 버림받음은, 바울이 설명하기 어려운 난제 중에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의 뿌리는 바로 유대인들에게 박고 있습니다.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도 유대인의 혈통에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 복음은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로부터 여러 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았고 복음을 배척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증거 했습니다(롬10:17). 그러면 유대인들은 분명히 이 복음을 들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는 고사하고 버림을 받는 자라에 이르게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1.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면 그들이 믿지 아니함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성경의 증거를 인용하여 명쾌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시19:4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고 증거 했습니다.

  (1) 복음은 은밀한 곳에서 남몰래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다는 말씀은 장차 전파될 복음의 범위가 어는 한곳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것임을 의미해 주는 예언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이방인들에게만 전파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2) 이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신 활동무대는 유대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동안에 온 유대 땅을 두루 다니시면서 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바울도 이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첫째 번으로 전해졌다고 이처럼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 게요 또한 헬라인에 게로다”고 했습니다(롬1:16).

  (3) 이 복음은 유대인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발단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루살렘이 복음전파의 근원지를 이루었고 복음전도의 총사령부 격인 예루살렘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행1:8, 2:1-4). 그리고 이 복음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 되었습니다.

  2. 그러면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바울은 여기서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고 묻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 복음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느냐? 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아니했다면 그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곳에서 신명기에 나타난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이처럼 그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 같은 신명기에 예언된 말씀을 이곳에서 인용한 것입니까?

  (1)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아니한 것은 그들이 깨달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신한 그들의 죄 값으로 인한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마지막 노래로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의 생활이 부요하고 윤택할 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길 것을 예언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돌아갈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에게 돌아 갈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이곳에 인용한 신명기 32:21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으로 섬겨 나의 질투를 일으키고 그들이 허무한 우상으로 나로 진노케 하였으니 나도 그들에게 갚으리니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로 나의 백성이 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으로 내 백성으로 삼아 유대인들로 시기가 나게 하며 이스라엘로 그 분노를 격발시킬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예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이 예언대로, 돌아 올 것이 그들의 머리 위에 돌아온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알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고의적으로 애써 거역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메시야가 태어난 소식을 듣고서도 찾아가지 아니했습니다(마2:2-6).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도 들었고 그의 놀라운 이적도 수 없이 보았습니다(요10:37,38). 빌라도 마저도 유대인들이 송사 하는 예수님의 고소내용올 무혐의로 단정하고 무죄 석방하려 했음에도 그들은 없는 죄명을 무고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완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마땅히 그들이 믿고 구원받아야 할 복음을 이방인들로 믿게 하심으로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하신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이사야의 담대한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사야65:1에서 인용한 예언입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바 되었다고 한 말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찾은바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복음으로 부르셨고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그의 임재 하심을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일을 복음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4) 그렇다고 이스라엘에게 가만히 계셨던 것은 아닙니다.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순종치 아니하고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루종일 그의 손을 벌리셨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 손을 벌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돌아 올 것을 기다리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인내를 멸시하여 끝까지 거역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므로 결국은 복음의 은총에서 낙오자가 되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지금도 복음은 온 땅에 퍼져가고 있으며 땅 끝까지 전파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지 못함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핑계치 못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온 세계에 울려 퍼지게 하라는 명령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자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특권은 대단합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복음에는 죄 사함의 은총이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전도자의 대열에 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83 ≈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


  (본문 : 로마서 11 : 1 - 6)

  서 론 : 바울이 말한 10장까지의 논증을 들으면 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이 증거한 말씀으로 비취어 본다면 어느 면으로 이스라엘은 복음으로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도 이방인들처럼 복음적인 소망이 있다고 단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라고 말한 바울의 자기백성이란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정한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해 주는 말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1)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많은 민족가운데서 유독 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선택임으로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아오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율법을 받았고 그들에게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메시야가 그들의 혈통에서 태어나신 사실 역시 크나큰 축복입니다.

  (2) 그러나 이 같은 이스라엘의 택하심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택하심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태어난 육신의 자녀가 자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롬9:8). 이스라엘이 복된 것은 이방인들에게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특권적인 민족적 우월성을 스스로 버리고 육신적인 자손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 왔습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이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3)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셨다면 자기도 그의 백성인데 어찌하여 사도의 직분까지 주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삼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고 말한 것은 그러면 이스라엘 중에는 복음으로 구원받을 자가 전혀 없다는 말이냐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자기 백성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를 할 것이란 말이 아닙니다.

  (4) 바울은 다시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거슬려 올라가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사실에서 증거 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과 이세벨에 의하여 그의 생명이 심히 위태한 처지에 놓여 있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송사 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보기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7천명이나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숨겨 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에 복음을 따라 구원을 얻을 백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도 남겨두신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바울은 5절에서 이 남겨 두신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1)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랐다”는 말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스라엘의 택하심은 은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 말미암은 택하심이 아닙니다. 이방인이건 이스라엘이건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택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의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구원의 선택인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도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다 불순종하는 것 같고 다 복음을 거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혜로 하나님의 선태 받은 사람들이 남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같은 일은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행위로 보아서는 구원 얻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10장에서 밝혀 준대로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리라”고 했습니다(롬10:2,3). 이 같은 그들은 마땅히 복음에서 떨어질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 가운데도 구원받을 그의 백성들을 선택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6절에서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택하심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기 때문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그들이 또한 율법을 지키는 대가도 아니란 것입니다. 만약 육신적인 어떤 조건이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이는 결코 은혜일 수가 없습니다.

  (4) 은혜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말합니다. 은혜엔 인종이나 지식이나 학식이나 빈부나 사회적 신분에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 생명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의 역사에 속합니다.

  결 론 :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복음을 거슬림으로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진 사실에 대하여 심히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의 많은 수효가 복음으로 돌아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그 복음을 거역하는 사실에 대하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절망적이 아님을 알고 이스라엘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는 계시를 받고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남은 자, 잃은 양을 찾아야 할 사명에 불탔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바울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84 ≈        아직 소망이 있는 이스라엘


  (본문 : 로마서 11 : 7 - 12)

  서 론 : 유대인들 중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이방인들 중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가장 궁금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복음으로 넘어졌으며 이방인들이 오히려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스라엘이 넘어짐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얻지 못한 이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 약속된 메시야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메시야를 약속 받았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한 말을 보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습니다(요1:45). 안드레가 자기형인 시몬 베드로를 찾아가 예수를 소개할 때도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요1:41). 메시야의 약속에 대하여는 다니엘 9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예언을 계시 받은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62이레가 지날 것이요… 62이례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단9:25,26)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기름 부은 자란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약속된 구원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로 말미암은 구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한 구원은 메시야를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메시야 왕국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원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이 구해 온 이 같은 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자신들이 구해 온 것을 얻지 못한 이유는 다른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된 지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 속에 깊숙이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정죄하는 율법의 의만 알았지 죄에서 벗어나게 하며 완전한 의를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의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읽었다고 했습니다(고후3:14,15). 구약은 수건으로 덮어져 있는 글입니다. 그 수건이 벗겨져야 진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성경지식은 메시야에 대한 지식의 오류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원한 메시야는 영광 중에 나타나는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이 대망해 온 메시야는 죽지 아니하는 메시야로 그 메시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메시야였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고 공박했습니다(요12:34).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바라보고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고 물었습니다(행1:6).

  2.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는 이유

  바울은 7절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택한 자와를 구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이스라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된 영광을 얻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가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롬9:6-8). 여기서 밝히고 있는 육신의 자녀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말하고 약속의 자녀란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 택하심을 입은 자란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적인 이스라엘을 그의 택하신 백성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을 그의 백성들을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예정된 백성 외에는 아무런 특권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육신적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으로 태어난 특권,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를 주장해 오신 사실,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신 일, 제사제도를 주셔서 사죄의 길을 주신 일 등에 대한 축복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같은 특권도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2) 택하심을 입은 자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구원 얻을 약속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녀가 아닙니다. 그의 믿음의 자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이 성경에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3:28,29).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믿음에서 떨어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이라고 바울은 밝혔습니다.

  3.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바울은 11절에 와서 이스라엘이 실족한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5절에서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중에도 하나님이 은혜로 남겨 놓으신 그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의 하나님의 섭리의 배경에 대하여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구원받을 백성들이 있는데도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그처럼 예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받은 백성은 은혜로 택하신 대로 계속해서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일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어 주신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시기는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아마 주님의 재림 시에 그들의 시기심이 격발되어 그들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민족적인 회개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슥12:10). 바울은 이 같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시편 69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죄과에 대한 보응임을 예언했습니다.

  결 론 : 바울은 이스라엘의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받는 십자가에 대하여 종말에 가서 넘치는 은혜의 축복이 있을 것임을 밝혔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의 역사가 나타날 때에는 그들의 그 역사로 인하여 온 세계가 축복 받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축복이란 선지자로 예언하신 것인데 그리스도의 왕국의 축복입니다. 이 땅에 세워질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인 천년왕국입니다.





  ≈ 85 ≈        자긍치 말아야 할 이방인


  (본문 : 로마서 11 : 13 - 18)

  서 론 :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분에 대하여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갈2:8).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골육의 형제들인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에 대하여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견딜 수 없이  마음에 분함을 안겨준 것은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의 자긍이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방인 교회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불신적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교만하고 자긍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구원의 뿌리를 밝히면서 자긍치 말아야 할 것을 경종 했습니다. 이 같은 경종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 교회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 할 수 있게 한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버림당함으로써 세상이 화목된 복음

  바울은 15절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복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의 구약적인 섭리의 구분을 의미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I)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있어서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모든 육적인 자손이 구원의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9:6-8). 물론 이 약속의 자녀가 신약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인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지만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기 이전까지는 이 약속의 자녀가 이스라엘 중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저희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구원의 은혜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구약시대에 이미 그 수를 채우셨습니다. 이제는 그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미쳐야 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바울은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만의 선택이나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일차적인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갈 것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참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정된 모든 백성들에게 적용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복음으로 나타나는 사실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읽을 때 모세의 얼굴에 씌운 수건을 벗기지 않은 채 읽었기 때문에 율법에 숨겨져 있는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3) 바울은 이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져온 것입니다(엡2:16-18.)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으로 언제나 공평하시며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받아드림으로 소생하는 역사

  바울은 이스라엘의 버림당함과 함께 그들이 다시 받아드려질 일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 드리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은 영원히 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장차 회복될 일에 대하여 19절 이하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바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두 가지 모습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하나는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의 구원”입니다.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이 버림당한 것 같은 이제도 “그런즉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1:5). 바울의 뜨거운 염원은 바로 이 같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키게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롬11:14).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의 시기입니다. 바울은 이 시기가 반드시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은 받아 드려질 때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25절에서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와야 그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바로 예수님의 지림 때이며 이때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마지막 추수의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슥12:10).

  3. 자긍하지 말라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공평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방인중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의 택한 모든 백성들을 한 명도 상실함이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일과 그 순서에 있어서 이방인보다 이스라엘을 우위에 두었습니다.

  (1)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적용한 이 말은 처음 익은 곡식가루의 떡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제물을 드림으로 그들이 수확한 곡식 전체를 드린 것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신15:17-21). 제사하는 처음 곡식가루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처음 선택한 아브라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식이나 야곱 등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다분히 처음 익은 곡식 가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이방인에게 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우위를 둘 수 있습니다.

  (2) 이방인은 꺾여진 가지에 접부침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꺾여졌다는 것은 그들의 불신을 말합니다. 사실인즉 유대인의 불신이 이방인에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접부치기 위하여 그 가지를 꺾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은 그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된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의 이 같은 경종은 바울이 자신의 골육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울분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복될 날이 올 것임을 바라보고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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