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이메일 : bamjoongsori@bamjoongsori.org

 

  
로마서 10장
 밤중소리  01-13 | VIEW : 1,014


  ≈ 69 ≈           택한 자들의 특권


  (본문 : 로마서 8 : 31 - 34)

  서 론 : 사도 바울은 31절로부터 마지막 39절에 이르기까지 로마서 8장의 마무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여러 가지 특권적인 위치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하여 논증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소망” “성도를 위한 성령의 간구” 그리고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 “예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등을 서술했습니다. 바울은 31철에서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이 모든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우리는 더 이상 할말을 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무도 심오하고 신비로우며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 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은 경이롭고 감격스러움에 가득 찰 뿐입니다.

  1.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겉으로 보기엔 대적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만일 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우리의 대적자가 어디 있겠느냐’는 강조 적인 표현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논술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대적하는 존재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인즉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미 패배한 존재들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대적자는 없는 것입니다.

  (1) 육신의 생각이 우리의 대적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 받으려고 하는 생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정욕과 탐심을 불일듯 일으키는 육신의 생각이 우리의 영적 생활을 어지럽힙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롬8:7,8). 그러나 이 같은 육신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요 영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승리를 안겨주십니다(롬8:9).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그 영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받는 것입니다(빌1:6).

  (2) 죄가 우리의 대적자로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의 영적 생활을 얼룩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 죄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죄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 죄는 우리를 사망가운데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영역밖에 있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롬6:14). 죄는 다만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죄는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서 점점 쇠패하여지며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대적자를 근원 적으로 이길 수 있는 위대한 방패를 주셨는데 그것이 회개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요일1:9).

  (3) 율법이라고 하는 존재가 우리를 간섭하려고 우리를 넘나보고 있습니다. 율법은 과연 우리의 영적 생활을 쓰러트리려고 우리를 대적하는 두려운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율법적인 의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범죄 했을 때 우리를 여지없이 정죄 합니다. 이 대적자의 모습은 엄위하고 두렵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의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이 율법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전히 판정패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의는 모든 율법의 요구 사항을 완벽하게 이룬 의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요구할 것이나 정죄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었고 그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롬8:1).

  (4) 우리의 대적자로써 우리에게 엄위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자가 바로 사단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미 완전한 패배자가 된 존재입니다.  사단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로써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었지만 우리는 이미 그같은 권세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는 이미 없이한바 되었으며 우리를 주검의 종노릇한데서 놓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히2:14,15). 그리스도의 생명 이 우리 안에 있고 성령의 권능이 우리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에 사단의 모든 권세는 그 하나도 우리에게 미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다음에 두 번째로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풍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 아들은 바로 아버지와 한 본체를 이루어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것입니다(요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을 우리를 위해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라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그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 곧 영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하나님의 후사로 약속하신 하늘나라의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육신 적인 생활에 관한 일까지라도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시고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6:32,33).

  3. 누가 택하신 지를 송사 하리요

  33절에 있는 송사와 정죄는 같은 맥이요 같은 뜻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아무라도 이 세상에서는 그리고 하늘 위에 있는 존재나 하늘 아래 있는 존재나 그 어떤 존재라도 감히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송사 하거나 정죄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의롭다고 인 치셨거늘 어느 누가 송사 하거나 정죄할 자가 있을 것입니까?

  우리를 송사 하거나 정죄하지 못할 이유 중에 또 다른 하나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과 그의 살아나심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특권적인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요소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나 살아나심이 없으셨다면 우리들에게는 그 아무 것도 소유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와 특권은 전부 그 근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간구는 그의 대제사장 직분을 의미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큰 의의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가 지금도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면 송사 하거나 정죄할 자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이 귀한 것들을 우라는 어디 가서 무엇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셨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감격을 마음에 뜨겁게 간직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70 ≈           끊을 수 없는 사랑


  (본문 : 로마서 8 : 35 - 39)

  서 론 : 우리는 오늘 본문 로마서 8:35-39절에서 바울의 놀랍고 위대한 논증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논증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뜨거운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단정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구원교리에 있어서의 결론입니다. 이 장엄한 바울의 확신에 찬 기술은 성경전체에도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론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를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으니 누가 우리를 대적하며 누가 우리를 송사하며 누가 우리를 정죄 할 것입니까?

  1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성경전체의 결론입니다.
  (1)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에서 누가 끊겠느냐? 했습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사랑은 불확실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희생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랑의 모든 근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4:10).

  (2) 이 사랑은 이미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씀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창세 전부터 가지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무슨 악이나 선을 행하기 이전에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나를 그의 백성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며 그러므로 우리 생애에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거나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의 표준을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 구원이 불확실하며 자주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구원의 표준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그 구원관계에 대해 그 어떤 경우에도 요지부동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그 누가 그 무엇으로 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2. 무엇이 끊겠느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후 모든 인간적인 사랑을 끊을만한 악 조건들을 나열해 놓았습니다.

  (1) 바울은 첫째로 환난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람이 환난을 만날 때 과연 그 사람의 참 인품을 알만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기 스승이 환난을 만났을 때 모두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받을지 모를 환난 앞에서 비겁해 져서 예수님을 센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환난을 만났을 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고 하셨습니다(마13:21). 그러나 이 환난이 혹 그리스도인들을 잠시 넘어뜨릴는지 모르지만 그리스로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환난 중에도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2) “곤고냐”고 물었습니다. 곤고란 우리의 생애 중에 질병 또는 정신적 번민, 갈등, 어려움으로 말미암은 괴로움을 뜻합니다. 사람이 이 곤고한 밤을 만났을 때 앞이 캄캄해집니다. 사람의 위로도 거절합니다. 살아 있는 목숨이 한스러울 정도의 괴로움이 그의 생애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곤고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우리를 이 곤고한 밤에서 건져내실 것이며 우리의 곤고한 생애에 들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그것을 맛보시며 급기야 영광으로 우리를 맞이하시는 것입니다.

  (3) “핍박이냐”고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핍박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1,12).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능욕 받은 일에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행5:41).

  (4) “기근이냐”고 물었습니다. 기근은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에워쌌을 당시, 성중 사마리아인들이 기근에 허덕일 때 아들을 삶아 먹는 일로 두 여인의 싸우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처럼 기근은 처참한 것입니다(왕하6:28,29). 그러나 이 같은 기근일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보다 더 더욱 강한 것입니다.

  (5) “적신이냐”고 물었습니다. 적신이란 벌거벗은 몸을 말합니다. 이 같은 표현은 모든 자신의 소유가 다 없어지고 단지 자신의 육신만 남아 있는 상태의 표현입니다. 지난날의 욥이 그러했습니다. 욥이 사단의 궤계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다 상실하고 오직 그의 몸만 남았을 때 그는 이처럼 기도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고 했습니다(욥 1:21). 사업에 실패하고, 또 여러 가지 재앙을 만나 비록 우리의 처지가 적신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6) “위험이냐 칼이냐”고 물었습니다. 위험이란 공포나 협박, 칼이란 순교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때마다 위험을 무릅썼다고 했습니다(고전15:30). 믿음의 선진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히11:35). 이런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넉넉히 이기는 승리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자신에 찬 확신입니다. 성경이 증거해 주는 바요, 자신이 체험한 바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존재로 몇 가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사망이란 인생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으로 이 권세를 가진 자는 사단입니다. 생명이란 우리가 소유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천시들이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입니다. 그들까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권세 있는 자나 피조물을 전부 예로 들었습니다. 그들이 결코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넘어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 주심으로 우리는 결과적으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71 ≈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


  (본문 : 로마서 9 : 1 - 5)

  서 론 : 바울은 아직까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란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기독교 대 교리를 갈파했습니다. 이 교리는 또한 8장에서 내주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를 정죄 할 다른 아무런 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애에서 체험되고 맛보는 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의 기쁨과 감격은 하늘에 뛰어 오를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에게도 근심과 고통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1. 바울의 근심과 마음의 고통

  바울은 1장에서 8장까지의 논술에 그의 시선과 그의 마음을 우주적으로 넓혔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율법과 유대인위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법칙”을 증거 해 왔습니다. 그러나 9장에 와서 바울은 갑자기 그의 마음에 있는 괴로움을 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동족 유대인에게로 그의 시선을 돌린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총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에게는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바울은 심히 안타까울 뿐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 큰 근심이 되고 마음에 그치지 아니하는 고통이 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이것은 바울의 자기 동족에 대한 사람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본능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그리고 동족에 대한 사랑 등입니다. 후자의 경우, 어떤 경우에는 친구나 가족에 우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빠지게 되는가에 대하여 그는 안타까웠고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2) 바울은 이방인들까지 참여하게 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왔고 선민으로 인정되어온 유대인들이 누락된 사실에 대하여 그는 시기하는 마음이 불일듯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그의 사도적 직분을 잊어서가 아닙니다. 그도 유대인으로 태어난 유대인이란 동족의 혈연적인 관계에서 그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처럼 괴로워하는 바울의 심정은 그들이 정말로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괴로워했습니다.

  2.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원한 바울의 심정

  바울은 자신의 이 같은 고통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심도 있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진실성을 이 같은 표현으로 나타냄으로 자기가 유대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자기 심정을 애써 나타냈습니다.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1)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란 말은 그들의 구원을 얻는 일이라면 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기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을 얻는 일이라면 자신이 차라리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같은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바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롬8:38,39).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다만 그의 거짓이 없는 진실과 그가 참으로 원하는 간절함의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근심과 마음의 고통 때문에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 지칭하면서도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였고 동족의 구원을 위한 바울의 눈물어린 기도로 그는 최종적으로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유대인의 궁극적인 구원의 계시를 받으므로 유대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롬11:25-27). 바울의 이 번민은 베냐민으로 말미암은 유다에게서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한 모세의 기도에도,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눈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창44:33. 출32:32, 삼하18:33).

  3. 바울이 지적하는 유대인의 특권

  바울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은 버림받음에 대하여 심히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슬퍼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권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들을 가리켜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그의 혈통이 뚜렷합니다. 한 조상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번성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의하여 특별한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유대인의 자존심과 명예는 대단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메시야의 언약이 있었으며 몇 가지의 축복이 있습니다.

  (2) 저희는 양자 됨의 축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특별한 신분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셨습니다(출4:22).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라”고 하셨습니다(출19:5).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호11:1).

  (3) 그들에게는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영광이란 그들의 신분적인 영광과 약속으로 말미암은 영광입니다. 이 같은 영광은 일직이 아무 민족에게도 주신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대인들에게 뿐이었습니다.

  (4) 그들에게는 언약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있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그리고 그 수많은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언약은 모두 이스라엘에게 유효한 것들이며 그들은 마땅히 그 언약을 믿고 그 언약을 따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했습니다.

  (5) 그들에게는 또 예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 민족이란 오직 이스라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예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6) 그들에게는 약속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약속은 엄청나게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스스로 폐기해 버렸습니다.

  (7)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나셨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브라함이 그들의 첫 조상이요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조상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족장들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고 그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육신적으로 보면 저들과 함께 유대인으로 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 말로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결 론 : 이 같은 경로로 보건대 유대인들이야말로 이 세계 인류 중 가장 복된 민족이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구원의 은총에서 제외될 리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안타까워했고 큰 근심과 마음의 고통으로 괴로워했습니다.






  ≈ 72 ≈             약속의 자녀


  (본문 : 로마서 9 : 6 - 8)

  서 론 : 바울이 논증한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면 이스라엘의 선택과 우위성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가슴이 아픈 나머지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토로했습니다. 이처럼 말한 바울은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냐”는 의문의 제기입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여졌고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된 것이 아니냐?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파헤쳐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원의 섭리, 곧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폐하여지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

  4,5절에서 바울이 증거한 이스라엘의 특권이 그들의 불 신앙으로 상실되어 버렸다해도 그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참으로 선택한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논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곧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선민으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유대인들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자녀를 얻기 위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육신으로 태어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인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이 무익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세례 요한은 이처럼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마3:8,9).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고 나무라셨습니다(요8:39,40).

  (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었습니다. 구약에 언급된 말씀은 영적인 깊은 뜻이 드러날 때 비로소 그 참 모습을 들어내 놓는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말씀의 영적인 뜻이 신약에 와서 새로운 계시로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얼굴에 수건을 쓴 채 얽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 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고후3:14-16).

  그리스도를 배격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마음이 회개치 못한 완고한 마음 때문에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을 쓴 채 읽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있는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로 돌아서면 그 수건이 벗겨져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완고하여 회개 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4:6).

  2. 씨로 여기심을 받는 약속의 자녀

  바울은 이곳에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아브라함의 씨에게 적용시켰습니다.

  (1)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청할 것임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해석입니다{창21:12).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브라함에게는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전혀 무관한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서 태어날 이삭이란 아들만을 아브라함의 씨로 언약하셨던 것입니다(창17:19).

  (2) 그러면 이삭으로부터 난 자란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삭으로부터 태어난 육적 이스라엘을 가리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이스라엘은 다 바로 이삭의 씨로부터 태어난 혈통적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곧 약속의 자녀란 영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약속의 자녀란 영적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예정된 참 이스라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원섭리를 간략하게 이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그를 부르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삭으로 약속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만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8,29). 이 같은 일은 신약에 와서 새삼스럽게 나타난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택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그러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만 그같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3) 이스라엘에게는 물론 바울이 지적한대로 이방인보다 우월한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그들의 특권이 결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보증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타난 율법으로 인하여 교만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소경이 되어 참 지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놀라운 특권 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이야말로 참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로 여기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스스로 그같은 영광스러운 일을 걷어차 버렸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증거처럼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견고해진 것입니다.

  결 론 : 이스라엘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우월하고 아름다운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특권의 뜻을 잘 이해하고 선용했었다면 그들이 결코 버림 바 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버림받았고 이방인인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것이 아니라 더욱 굳게 세워진 것입니다.





  ≈ 73 ≈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본문 : 로마서 9 : 9 - 13)

  서 론 :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진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의 논증을 통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씨를 통하여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약속해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육신의 자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를 말씀하신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삭이 약속의 씨로 약속 받은 일과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적인 문제를 깊숙이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 이삭의 경우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자녀이기 때문에 씨로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직 이삭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이스마엘이 있었고 사라가 죽은 후 후처인 그두라로부터 낳은 아들들이 여섯이나 되었습니다(창25:1,2). 이들은 혈연적으로는 의당히 아브라함의 씨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첩의 아들이거나 서자였던 관계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는 오직 이삭만이 하나님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씨를 이미 창세 전에 생명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이처럼 생명 책에 기록하셨을 때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주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셔서 약속의 자녀로 그의 씨로 여기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인위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했을 때 그의 약속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9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창17:17). 사라는 어떻게 생각한 것입니까?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말했습니다(창18:12).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인간의 방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들의 몸이 노쇠하고 경수가 그치고 아브라함이 죽은 자처럼 되었을 때 이삭을 주심으로 이삭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의 씨인 것을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삭처럼 약속의 씨로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났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을 받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태어난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씨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3:28,29).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야곱의 경우

  하나님의 이 같은 약속의 씨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야곱과 에서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약속의 씨인 이삭의 경우에도 그 쌍둥이 아들들 가운데 하나는 약속의 씨요 하나는 버림받은 아들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의 혈연적인 자손들이 약속의 자녀들이라면 이삭의 두 아들의 경우는 마땅히 야곱보다 에서가 그 순위가 더 앞설 것이며 두 아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로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야곱은 택함 받은 약속의 씨로, 에서는 버림받은 불택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2)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은 인간의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에 결정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이나 악으로 표준삼은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놓은 것입니다. 이같이 행하시는 모든 근거는 무엇인가?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교리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라는 문제입니다. 이삭은 분명히 선택받은 약속의 씨이지만 이스마엘은 분명히 버림받은 유기자인 것입니다. 야곱은 선택받은 자이지만 에서는 버림받은 불택자인 것입니다.

  (1) 선택자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선택을 받은 자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가운데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은총을 받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라고 하셨고 이들 중에 단 한 명도 잃은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 유기자란 이 같은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떨어져 버림받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이런 특별한 하나님의 작정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로 그들은 다만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비밀에 속한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그 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타락은 불가피했다는 것과 그 타락이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크나큰 복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게 되었고 영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왜 하나님이 어떤 인간을 타락 상태에 그대로 두기로 작정하셨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이것도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감사할 것은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영원히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74 ≈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본문 : 로마서 9 : 13 - 18)

  서 론 : 이삭과 야곱의 선택에 관한 바울의 증거는 유대인들에게 몇 가지 의문을 던져 주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가 인간의 구원이 전혀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인 자신들의 유익이 무엇이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선이나 악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이같이 행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불의 하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출애굽에 나타난 바로의 경우를 예로 들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한 문제는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었습니다. 지금도 이 문제 때문에 신학자들간의 열띤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진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교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라고 하는 책이며 이 책에서 주장되고 있는 성경의 핵심적인 교리가 오늘날 전 세계 장로교회의 교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교리가 곧 ‘칼빈주의’라고 통칭되고 있으며 이에 반하는 교리로써 ‘알미니안주의’라고 하는 인간자유 의지의 구원론이 등장한 것입니다.

  (1)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확고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릴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권 적인 주권이 작용한다고 해서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무시한 것이라 하여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그렇게 주장한다면 결국 하나님을 불의 하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전개하는 그의 논증에서 인간의 선택과 유기와 같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 문제는 그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출애굽기 33:19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다”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2) 바울은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원하는 자란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에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 중에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44).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유의지는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인간은 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이이며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완전히 두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한 것은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덕적인 선이나 죄를 벗어버리기 위한 고행이나 생명을 얻기 위한 선행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같은 일은 자기가 행한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지 인간의 달음박질하는 애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이 얻기를 노력한 의에 대하여 이처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한 것입니다(롬10:3).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속한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2. 바로에게 보이신 경우

  바울은 애굽 왕 바로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인간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대하여 논증했습니다. 그는 17철에서 출9:16에 나타난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1) 바로란 인물은 우연히 애굽에 태어나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왕의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란 인물은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유기 된 자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의 권능을 만방에 전파하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애굽 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일에는 이론이 제기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과 쟁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같은 쟁론이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바로를 이 일을 위하여 세웠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어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신 사건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시어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기 위하여 모세를 바로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에게 바로 왕 앞에서 이적을 행할 하나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권능으로 바로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단 한가지 재앙만으로도 바로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보내시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아니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다 내리시기까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으로 그 재앙을 다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바로 왕에게 너무나 무자비한 일일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잔인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섭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섭리란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하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3) 그때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 이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당시의 사건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나 애굽 사람들에게 아무런 효과를 줄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이후의 세대에 가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친히 목격하고 그 능력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을 받은 이스라엘까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강퍅함으로 광야에서 죽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일이 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도 해당되어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4) 바울은 결론적으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로의 강퍅함이 자신의 자유의지와 결단에 의한 것으로 자기 자신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느냐?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비밀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고유한 주권적 권능이신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권한을 우리 인간들은 침해할 수 없고 또 침해당하지도 아니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시되 하늘에 예비된 모든 신령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다고 하는 이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서도 한 평생 감격하고, 한 평생 감사하고, 한 평생 그 은혜를 찬미해도 부족하다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75 ≈            선택과 유기에 대한 권한


  (본문 : 로마서 9 : 19 - 29)

  서 론 :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예상된 반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가지로 예상되기도 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반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같은 일에 대한 변명이 그들에게 순리적으로 받아 드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타당성에 기초를 두고 자기들에게 비이성적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자들에게 결론적으로 한 말은 이 모든 일은 그 일을 당하는 인물과는 아무런 상판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적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관한 논쟁에는 이 이상 더 명쾌한 대답과 더 확실한 결론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누가 그 뜻을 대적하리요?

  바울은 18절에서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언급한바 있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도전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진리를 매도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 그 첫째 반론이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 하실 수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자의대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하실 자를 강퍅케 하신다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을진대, 그리고 만약 강퍅케 한자의 경우라도 그 사람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어찌 자신이 강퍅케 하신 그 사람을 허물 하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만들어 놓으시고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허물 하신다면 그 일이 어찌 합리적이겠느냐는 것입니다.

  (2) 그 두 번째 반론이 “누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권자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에 대해 이미 그처럼 예정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예정을 대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피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강퍅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진리를 매도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2. 토기장이의 권한

  바울은 이 같은 반론에 대하여 다른 변론을 사용치 아니하고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돌리는 날카로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 바울은 그 첫째 대답으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뇨”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공격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사용한 힐문이란 말은 잘못을 꾸짖으면서 질문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울은 네가 뉘기에 ‘감히’ 란 말을 썼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재를 알아야 합니다. 그 자신의 위치와 존재가치를 인식치 못하고 하나님께 힐문하는 일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로부터 창조하심을 받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존재의 차이란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일은 나를 지으신 창조주의 임의적인 권한인 것입니다.

  (2) 바울은 그 두 번째 대답으로 토기장이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한 줌의 진흙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한줌의 흙 중에서 얼마인가를 가지고 귀히 쓸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남은 흙으로 또 하나의 그릇을 만들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이전 것과는 전혀 상반된 천하고 값싼 그릇을 만들어 냈습니다. 토기장이는 그 그릇을 손에 들고 만족했습니다. 이런 경우 그러한 그릇이 이 토기장이에게 왜 당신은 둘 다 귀한 그릇을 만들지 아니했소? 하고 항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 토기장이의 답변은 그것은 내 권한에 속한 것이고 그렇게 한 것은 내 뜻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한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사실상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바울은 토기장이의 경우를 예로 들은 후 천히 쓸 그릇과 귀히 그릇을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연결시켜 논증했습니다.

  (1)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의 뜻이,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려 하심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는 애굽의 바로 왕의 경우를 말합니다. 바로는 분명히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진노의 심판을 속히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알게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바로에게는 하나의 관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2)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신다해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이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릇에 대하여 영광 받기로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한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들이 받을 무한한 영광의 부요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토기장이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단독적인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이 문제는 각 사람들에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며 관용을 베푸시나 그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가운데서 멸망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기 때문에 그의 생애 중에 그의 선택하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결 론 : 이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믿는 우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리란 범위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선택을 받아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의 선택에 어떤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종말에도 모든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남은 자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입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감사하면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76 ≈            행위에 의지한 이스라엘


  (본문 : 로마서 9 : 30 - 33)

  서 론 : 바울이 로마서에서 중심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란 사실의 논증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들인 이스라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씨인 영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복음은 헛것이 되어 버리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고민은 자기 동족 때문에 극치에 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들이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의의 표준인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1. 이방인들이 얻은 의

  바울은 30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의를 얻는 일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누누이 증거하고 있으며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감히 힐문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있어서 그 결론을 믿음과 행위에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1)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의를 쫓지 아니했다는 말은 율법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입니다. 이 율법은 이방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의 의를 전혀 알지 못했고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이스라엘에게 과연 율법의 의가 주어졌는가?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2:12). 이 말씀에 따르면 이방인은 율법 없이 망하게 되어 있고 이스라엘은 율법 때문에 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20).

  (2)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은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래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율법이나 양심이나 그 무엇으로도 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것인데 이 말씀은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거나 율법으로 의를 얻으라는 뜻이 아니십니다(롬10:5). 이 율법의 의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하나의 그림자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의를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므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율법의 의, 그 보다 더 온전한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아 우리가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쉽사리 이 같은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이 믿음으로 의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롭다하심을 받은 첫 번째 사람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의 의는 무엇으로 얻은 것입니까? 아직 그때는 율법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행위로서는 의를 얻을 수 없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롬4:2,3). 이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후사 곧 언약의 씨라는 사실을 의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했습니다(롬4:23,24). 그러므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은 일은 하나님의 뜻이며 성경적입니다.

  2.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이유

  바울은 이방인이 의를 얻고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일에 대하여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고 했습니다.

  (I) 그들이 실족한 첫째 원인이 믿음에 의지하지 아니한데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의의 소재가 율법에만 있다고 확신한 나머지 믿음을 배척했습니다. 율법은 행위가 따르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 한가지 일에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처럼 율법의 관습에 젖어온 이스라엘은 행위가 개입되지 않고 다만 믿음으로 의를 얻는 일에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판단에 ‘대단히 잘못된 이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소송했던 일단의 유대인들은 벨렉스 앞에서 바울을 지칭하여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행24:5).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긴 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사는 육신을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9). 이스라엘은 율법에 그들의 얼굴이 가려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2) 유대인들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의지했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의는 행위로 나타난 의여야 함으로 그들은 의를 얻으려고 그들의 행위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면 행위에 의지한 그들의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12).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를 유산으로 받은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의를 얻으려고 했고 끝까지 복음을 배척했기 때문에 의에서 떨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3) 그들은 결국 부딪칠 돌에 부딪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이 영생이 영원히 보장됩니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그들이 의지하고 의를 얻으려고 표본으로 삼았던 그 율법이 그들의 심판의 공정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석하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의를 버리고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힘써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부딪칠 돌에 부딪치고만 것입니다.

  결 론 : 율법은 결코 이스라엘에게 의를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로 의의 기준을 삼으시고 그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의를 주시기로 애초부터 섭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견고히 잡아 우리의 의를 확실히 하여 구원의 증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PREV :   로마서 11장 밤중소리 
 NEXT :   로마서 9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