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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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밤중소리  01-13 | VIEW : 903


  ≈ 61 ≈            그리스도인의 성화


  (본문 : 로마서 8 : 12 - 13)

  서 론 : 오늘 주신 로마서 8:12,13절 말씀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생활에 직접 부닥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인 것입니까? 이 같은 질문을 목회자들은 교인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세 가지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의 해답은 육신에 지는 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두 번째 해답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리고 세 번째 해답은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1. 빚진 자인 우리


  우리는 로마서 8장 초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적인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들어오신 성령에 내주에 의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영원히 살려주신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우리의 생애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한다는 사실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빚이란 죄의 빚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빚졌다고 하는 말은 종의 위치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지난날 죄의 종으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빚진 자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종들은 언제나 그 주인에게 빚진 자의 입장에서 종신토록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이전에는 바로 그런 생활을 해 왔었습니다. 이 빚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다 갚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무서운 이 빚을 예수님이 다 갚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죄에 대한 채무는 다 갚음이 되었습니다. 더 갚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완전히 그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죄에게 얽매일 필요나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빚을 다 갚았는데도 종노릇을 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2) 그러므로 이 빚은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빚은 갚았지만 새로운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빚은 너무나도 은혜로운 빚이며 감격스러운 빚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빚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피로 값 주고 당신의 소유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빚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영광은 바로 이 빚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빚을 채무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종의 자리에서 의의 종이 되었다는 이 사실은 종의 위치나 빚의 종류로 볼 때 너무나도 판이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롬6:22)

  2 육신에 져서 육신의 원대로 살면 안 된다고 함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께 빚진 우리는 육신에 빚진 자처럼 육신에 져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에 진다는 말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으로 곧 죄를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1) 죄는 아직 우리들의 죽을 몸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에서 해방되었고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들 몸 안에는 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무장 해제된 존재입니다. 아무런 권능도 권세도 못 가진 존재로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의 자리에서 떨어졌을 뿐 아니라 우리를 지배할 권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아직 영화로운 몸으로 구속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이 살았습니다. 우리의 참된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은 아직 살아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몸은 우리 몸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부활의 날까지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무장해제 당한 채 바로 이 죽을 몸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우리의 영적 생명에는 손도 못 대지만 우리의 죽을 몸을 유혹하여 죄를 유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는 바로 이 육체에 자리잡고 우리의 몸을 죄로 유혹하는 남은 죄의 세력과 싸우는 일을 말합니다. 이 싸움이 그리스도인의 성화과정이며 그리스도인들의 당면한 믿음의 싸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인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이전엔 성령의 소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됨으로부터 성령의 소욕이 생겨난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역사하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면 안돼는 것입니다. 육신에 진다는 말은 육신의 소욕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3) 그런데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셔 죽는다는 말은 죄 값으로 말미암은 죽음으로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그의 백성들에게 진실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며 그 안에서 참 생명을 얻기를 원하며 거짓에 미혹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육신대로 산다는 말은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면 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육신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언제까지나 육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으로 중생치 못한 사람입니다. 육신대로 계속 살아 나간다는 말은 그에게 성령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바울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실질적인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언제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생활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중생치 못했을 때와 같은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같은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와의 싸움은 맡기라고 하지 않고 순종하고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 말씀만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존재하십니다. 새롭게 살아난 우리의 영적 생명도 능력이 되거니와 그 보다 더 강력한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2)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죄가 조종하는 육체의 일을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육체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일차적인 죄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마음으로 죄의 유혹에 동의치 말아야 합니다. 그 유혹을 마음으로 받아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이제 성령을 쫓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죄악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을 쫓아 행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유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7:4). 이 열매란 그리스도인의 성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 62 ≈             양자의 영


  (본문 : 로마서 8 : 12 - 15)

  서 론 : 성화교리(聖化敎理)와 영화교리(榮華敎理)는 다릅니다. 성화는 영화의 한 과정일 뿐 영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성화교리에 얽매일 때 그의 생활이 행위 면에 치우치게 되고 멀리 소망을 바라보는 생활에 등한하기 쉽습니다. 성화는 그 과정이 쉽고 단순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시야는 마땅히 우리의 영화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됩니다. 우리는 그 날을 소망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성화의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영화에 우리 신앙생활의 표적을 둘 때 우리의 생활이 활기차게 되며 성화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화나 영화나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는 이는 오직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 주셨고 성령이 내 안에서 주님의 새 계명을 이루어 주심으로 성화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15절에서는 이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말씀하였고 우리는 이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이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한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령께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진리란 무엇이냐? 이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17:17절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기록된 성경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성경만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입니다(딤후3:16,17). 성령은 언제나 우리들을 오직 성경 안에서만 가르치십니다. 그 안에서만 감동을 주십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 외의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려는 영이 있다면 그 영은 성령이 아니십니다. 천주교인들은 마리아나 다른 사도들이나 성자들로 인정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마리아의 동상 앞에 기도하고, 마리아가 무죄로 잉태되었고, 그녀는 죽지 않고 부활 승천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적인 모든 것을 오직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의 관점에 결부시켜 판단해야 합니다.

  (2) 성령은 그리스도의 지식과 지혜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이심에 대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10,11).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 하나님의 우편에까지 높이십니다. 성령의 증거는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요1:1).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를 아는 자식을 기뻐하고 그의 말씀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3)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은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만약 그것이 우연히 혹은 자동적으로 생겨났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알기 이전에는 왜 그런 일이 전혀 불가능했던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인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를 아는 자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요17:3).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생활은 죄를 따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1)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는 새로운 생애를 발견하고 그 길을 가기를 원하고 그 길을 가는 일을 기뻐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기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이 좀 미약해도 이런 생명의 싹이 분명히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며 우리의 신앙이 좀더 장성하면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기를 사모합니다. 이전에는 성경을 전혀 가까이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귀하고 그 말씀을 배우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좋아하게 만드십니다.

  (3)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 때 마음의 큰 고통을 받게되고 근심에 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7:10). 우리의 회개는 바로 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결과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내 안에서 성령이 하십니다.

  3. 양자의 영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15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고 있는 아바 아버지란 말의 아바란 말은 아람어로 아버지란 뜻으로 ‘아버지 아버지’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이중적인 중복표현으로 아버지를 정답게 부르는 그 당시의 하나의 표현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같은 표현을 쓰셨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양자의 영이란 곧 성령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사역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 하시는 사역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부쳐지고 있습니다. 혹은 보혜사, 진리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이곳에서는 양자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자란 법적으로 아들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독생 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아들들로 말하자면 양자들입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아들이신 예수님과 똑같은 신분의 대우를 받는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성령으로 인쳐 주셨다는 뜻입니다.

  (2) 이 양자의 영이 우리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외쳐 댈 수 있는 것은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 같은 호칭으로 부르짖을 수 없습니다. 한두 번 어쩌다 흉내 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참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는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된 일에 대해 이 시간 감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63 ≈            후사의 영광과 고난


  (본문 : 로마서 8 : 16 - 18)

  서 론 :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서술이며 내주 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사역에 대하여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15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면 그는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자녀라면 후사의 자격자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후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후사란 말은 대를 잇는 자란 뜻인데 원문에는 ‘클레로노모스’로 나오는데 이 말은 상속자란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재산상속권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후사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국한됩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천사들이나 다른 하늘의 영적인 피조물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후사들을 위한 봉사자이지 그들이 천국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고 말씀해 주 고 있습니다(히1:14).

  (2) 천국의 모든 생활과 모든 구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계21:3).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새 예루살렘은 성곽의 문이 열둘이요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양의 12사도의 이름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이 그 성의 영원한 거주자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성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니 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11:16).

  (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 예비하시고 약속하심으로 이 같은 일이 곧 하나님의 후사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히브리서에는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 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히6:17,18).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후사인 그의 백성들이 후사로서의 약속, 곧 천국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말씀하심으로 그 뜻이 변치 아니하심을 충분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을 자의 자격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했습니다(갈3:29).
  (2) 하나님은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미 창세 전에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예정하시고 세상에 보냈으며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자신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후사가 될 많은 아들들을 만드셨습니다(사53:20).

  2.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하나님의 후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후  사의 자격을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1) 왜냐하면 하나님의 후사는 한 분, 예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2). 이 아들이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위한 많은 아들을 아버지께로 이끄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히2:10).

  (2)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일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장사까지 지냈습니다(롬6:4).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되었습니다(롬6:5). 이 같은 사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연합이란 말은 물이 하나가 된 상태로 영원한 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받아야 할 고난

  하나님의 후사는 정말로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큰 영광스러운 약속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소유한 하나님의 후사들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본향이 아니라 나그네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나그네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없다고 하는 말은 비 성경 적입니다. 성경에서는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겠다는 말씀은 있으나 고난을 유월해 주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핍박에서 지켜 주신다는 약속은 있어도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해 주신 일은 없습니다. 시험이나 고난 중에서 인내하라는 말씀은 있어도 우리 생애 중에서 그런 것을 제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빌1:29).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쫓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딤후1:8).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벧전4:13).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5:10).

  우리는 이런 고난이나 핍박이나 환난이외에도 우리들 스스로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 징계가 어떤 방법과 모양으로 나에게 온다고 해도 이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으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된다고 했습니다(히12:11). 우리는 예수를 믿는 일이 우리의 현실 세대에서의 고난의 탈출이나 시련이나 환난에서의 모면에서 출발하면 안됩니다. 그런 목적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지 아니하셨으며 그같은 육신의 썩어질 일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고귀하신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우리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전케 양육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될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전케 양육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으로 온전케 하시고 징계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누릴 하나님의 유업 자로서의 영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위대합니다. 이 소망을 견고히 잡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64 ≈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영광


  (본문 : 로마서 8 : 18 - 23)

  서 론 :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는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영광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영광스러운 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 것입니다. ‘함께 한 후사’란 말은 우리들이 그 일을 위하여 무엇을 함께 했다는 뜻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된 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스러운 비밀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가능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일을 위하여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18절부터 23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탄식이 나오면서 그러나 이 같은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

  18절에서 이르시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현재의 고난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세계는 고난이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곳에는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고 썩음이나 쇠함이나 죽음이나 탄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고난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3:17,18). 이 같은 피조 세계의 저주는 새로운 세계가 조성되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2)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지내야 하는 세계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3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중에는 탄식이 없는 생활로 한 생애를 살아갈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 나가 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입니다. 영과 육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영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구원은 장차 나타날 소망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 나타날 날이 부활의 날입니다. 이때까지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저주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기 때문에 우리도 그 안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우리들에게 장차 나타날 무한한 영광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이 세상의 모든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된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안식이 계속되는 세상입니다. 이 같은 영광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니라”고 했습니다(계21:3,4).

  우리 그리스도들에게는 이 같은 영광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일이 곧 하나님의 후사인데 이 영광에 대한 소망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탄식이나 고난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이 있는 사람마다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현재와 장차의 세계는 밀접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의 세계가 이 세상만으로 끝난다면 우리의 생애는 가장 비참한 생애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5:19).

  그리스도이건 아니건 모든 인류는 현세와 내세와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인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에게 예비 된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를 물려받는 일이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또 일단의 무리들에게 내리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무리들이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무리들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또 왼편에 있는 자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소망을 가지고 장차 나타날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소망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피조물들의 탄식과 기다림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탄식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치고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함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이들로 이처럼 탄식하며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영광을 누리는 그런 시기가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회복은 곧 만물의 회복이 따를 것이기 때문에 그날에는 모든 피조물들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도 그들과 함께 탄식하는 존재로써 다른 피조물들의 탄식함도 능히 깨닫게 된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양자 될 것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그 속에 포함시켜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15절에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양자로서의 완전한 신분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후사로서의 지위에 오르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양자 된다는 말은 곧 몸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몸의 구속이란 이 땅에서 지금 탄식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육신적인 몸의 완전한 구원으로 곧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영광의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영광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탄식이나 고난 중에도 인내로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현재의 고난은 그 고난이 어떤 것이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 65 ≈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


  (본문 : 로마서 8 : 24 - 25)

  서 론 : 바울은 아직까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무한한 영광에 대한 일을 논증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영광, 장차 나타날 그 영광에 대한 아름다움,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그 같은 영광의 날이 오기를 탄식하며 기다림은 물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의 몸의 구속의 날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바로 이 날에 이루어지며 그 약속이 성취되는 그날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안다”고 했습니다(갈2:16).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게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했습니다(갈3: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5:1).

  (1) 우리가 받은 구원은 소망 안에서 받은 것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영생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뜻이 영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영생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나는데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의미해 주는 것으로 이것은 장래의 일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의미해 주는 것으로, 이 생명 역시 우리의 몸을 떠나야 그 영화를 누리는 시간적 제약아래 있기 때문에 실체적으로 그 생명의 향유 역시 미래에 속한 것으로 이것 또한 우리의 소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영적인 구원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생명이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믿는 자 안에 들어오시는 이유는 바로 이 생명을 살리시려는데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중생,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지금 우리 안에서 그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몸에서 벗어날 때 온전히 영화로운 생명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죽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이 생명은 하나님께로 가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5:8). 그리고 우리의 이 육적인 몸의 구원은 부활의 날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롬8:23).

  (2)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은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신기루 같은 허망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해 주는 바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증거로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이 소망을 바라보고 기쁨으로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일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5:19).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나타날 소망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위에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히12:2).

  2. 구원의 삼중 성

  우리의 구원이 이처럼 미래에 속한 소망 적이긴 하지만 이 구원에는 삼중 성이 동시적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속한 구원, 현재에 속한 구원, 미래에 속한 구원으로 나뉠 수 있는 것입니다.

  (1) 우리의 구원은 분명히 과거에 속해 있습니다. 과거에 속해 있다는 말은 우리의 구원은 이미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요일 5:13).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요5:24). 이 같은 구원에 관한 표현은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과거에 속한 일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과거에 속해 있다는 증거는 구원의 확실성과 영원성을 증거 해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사질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예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처럼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변함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으며 변질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요6:38,39).

  (2) 다음에 우리의 구원은 현재에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 2:12).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미 지난날에 확실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소망의 날까지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 언제나 우리의 현재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과거에 속한 것이라고 방심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고 했습니다(빌3:12-14).

  (3)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했습니다(24절). 물론 소망이란 장래에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소망으로 기다림으로 얻은 구원이란 어떤 구원인가? 23절에서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이란 우리의 구원의 완성으로 몸의 구속 곧 부활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을 우리의 소망의 실현의 날로 믿고 소망 중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세상에서 고난도 받습니다. 환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불같은 시련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이 같은 고난으로 말미암은 탄식은 그 탄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믿는 우리는 이 모든 시련과 환난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5:4,5).





  ≈ 66 ≈           성령의 탄식과 간구


  (본문 : 로마서 8 : 26 - 27)

  서 론 :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영이십니다.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로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라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6-18). 예수님은 이곳에서 성령과 보혜사와 자신과를 연결시켜 말씀해 주셨으며 그가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우리로 고와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성령의 탄식과 간구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있지만 연약에 싸여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 우리 몸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연약은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가지고 계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히5:2).

  (1)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적인 연약 뿐 아니라 영적인 연약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연약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영적인 연약에 싸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 뜻을 분별함에 너무나도 무식합니다. 우리들 앞에 어떤 돌변적인 사태가 벌어졌을 때 우리의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인지 알 수 없어 고민할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신3:23-27).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고후12:1-10).

  (2) 이 같은 우리의 연약함에 성령이 탄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탄식은 우리의 탄식과 다릅니다. 우리의 탄식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괴로움의 발로지만 성령의 탄식은 우리의 이 같은 괴로움에 동정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성령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의 탄식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며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죄악된 행실을 안타까이 여기시며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의 부족과 마땅히 간구할 바를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탄식하십니다. 우리를 위한 성령의 사역은 바로 이 탄식이 그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밝혀주고 있는 성령의 간구가 어떤 형태의 것이냐는 것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에 도움을 주신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기도와는 별개의 성령자체의 기도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난해구절을 해석할 때 주의할 점은 먼저 본문에 기록된 말씀의 문장을 철저히 파헤치는 일입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성령의 어떤 도우심을 주신다는 뜻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친히 간구 해 주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의 ‘친히’란 말은 ‘아우토 토프뉴마’로 성령자신이란 의미로 성령이 나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 죄악 중에 방황할 때에도 이 성령의 탄식 어린 간구로 우리의 마음에 회개하고자 하는 감동을 받아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에도 우리는 전혀 그런 사고의 발생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의 탄식 어린 기도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위험한 일들이 수다히 많은 것입니다.

  (4) 성령의 이 같은 탄식 어린 간구는 우리로 기도하고자 하는 강한 영적 의욕을 일으켜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그 간구로 인하여 우리로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 어린 간구는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여 우리의 영적 잠을 깨게 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불을 부쳐주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는 성령

  우리는 27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 하시는 성령의 간구를 바라보게 됩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와 성령은 한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을 아시고 하나님은 또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2:10).

  (2)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간구 하심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 하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성령의 생각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간구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령의 사역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지정소에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셨습니다(롬8:34).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들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 해 주시는 보혜사이십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바른 기도생활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성령이 탄식으로 간구 하시는 일은 우리들의 바람직한 생활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언제나 인간적인 지혜나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따라 그의 뜻을 잘 살펴서 기도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 같은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의 연약을 위한 기도, 죄를 이길 수 있는 생활의 기도, 육신의 정욕이나 탐심이나 교만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도 등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의 연약함을 인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간구 하시는 그 기도를 내가 영감으로 들으면서 성령의 그 탄식을 내가 안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 같은 자세의 기도를 의미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엡6:18).

  결 론 : 우리는 성령의 이처럼 놀라운 사역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같은 성령의 탄식 어린 간구는 우리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사랑이시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엡4:30). 우리는 또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처럼 성령의 탄식 어린 기도를 마음 아프게 여기면서 성령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 67 ≈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본문 : 로마서 8 : 28)

  서 론 :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은 성도들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짤막한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예정과 성도들의 견인(堅忍)과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데 이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생애를 지배받으며 이 모든 결과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극히 선한 결실을 맺게 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또 이루어질 것인데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약속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섭리를 깨닫고 있는 성도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입니까? 아마도 이 진리를 참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도라면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평안에 젖어 있을 것이며 그의 생활은 언제나 감사로 충만할 것입니다.

  (1)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논함에 앞서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우리란 어느 정도 믿음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배를 받아 온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우리가 알거니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이란 그의 생애에 나타나 있는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체험이란 물론 자신의 계획이나 자신의 노력에서 얻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부단한 간섭에 의해 인도되는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다는 말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애를 통해서 한결같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 다음에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범주에 들어갈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랑이 현재적인 사랑이라는 전제조건하에서 해석을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냐?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무엇을 말하며 누구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까?

  (3)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씀으로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단어의 뜻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란 과거에 속한 것이거나 현재에 속한 것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떤 형편에 있었던지, 지금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던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이 문제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남게 되느냐? 이에 대하여 바울은 증거하기를 “그 뜻대로 부르심을 업은 자들”이라고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얼마나 은혜로운 진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들어가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그의 예정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하나님을 사랑할 자를 이미 예정하셨다는 사실은 성격적인 증거요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1:4).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을 백성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미 창세 전에 구별해 놓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예정교리는 많은 사람에 의해 도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정교리는 성경의 움직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예정교리는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의해서 이 예정교리가 비판받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와 칭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이 예정교리란 영원히 정답을 가져 올 수 없는 난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정교리는 불신자들이나 예정에 없는 사람들을 매도하거나 그들에게 공격의 여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감사를 위해 주신 진리이며 이로 예정가운데 들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를 공급해 주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시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효과 있는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효과 있는 부르심의 방편이기는 하지만 복음을 들은 모든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만방에 나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듣는 자 중에 오직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들만이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만을 그의 자녀들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귀한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그는 하나님께 대한 지속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처럼 얼마간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사랑치 아니했던 그리스도인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자비하심으로 더욱 큰사랑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경우에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지만 탕자의 경우에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심

  이처럼 예정을 입은 택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그들의 생애에 오는 그 어떤 사건일지라도 그 일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모든 일”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사건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 그의 백성의 반열에 들어오기까지의 그의 생애를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신 것입니다(행9:15). 모든 일을 합력 하여 선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시면 그의 택한 백성들이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아니 할 것입니다.

  (2) 모든 일이 합력 한다는 말에는 하나님의 징계까지도 포함됩니다.󰡒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히12: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징계의 결과가 언제나 선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3) 모든 일이 합력 한다는 말은 우리의 잘못된 범죄까지도 포함됩니다. 물론 모든 죄는 악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죄는 자기 생애에 말할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하게 되고 불행과 파탄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는 죄로 끝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로 인하여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죄는 결과적으로 회개를 이루게 됨으로 그들의 생애에 무한한 축복을 가져오게 되며 세상 줄을 끊을 수 있는 계기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결 론 :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신 ‘선’이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참으로 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엡1:3).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기업을 차지하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는데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 68 ≈           효과 있는 부르심


  (본문 : 로마서 8 : 29 - 30)

  서 론 : 우리는 28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이 이루어지는 자”는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결과적인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결과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9절과 30절에 와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미리 아신 자로 미리 정하셨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정하셨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미리 아신 자들로 이루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모르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전혀 모르고 있다가 그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그때 비로소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여기서 아신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장래에 예수를 믿을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을 예정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가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들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미 내 얼굴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는 하나님이 미리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 명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예정은 이처럼 미리 아신 자들로 정하셨습니다. 이 아심과 정하심은 거이 동시적일 수 도 있습니다. 정하셨다는 말은 예정의 확정을 말합니다. 이 같은 예정은 그 시기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엡1:4,5). 창세 전이라 함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 그 보다 훨씬 앞선 시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아직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이란 뜻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가 택하실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미리 알고 계셨으며 그 사람들로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 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계 13:8).

  (3)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 세우는 알미니안 주의에 조심해야 합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화란 신학자인 ‘알미니우스’(1560-1609)에 의하여 주장된 교리인데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예견된 믿음에 의해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들의 자유의지로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이 같은 일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예정하신 것이 아니고) 선택하신 것이지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알미니안 주의는 성경해석에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구원론에 차질을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우리가 다른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보편 구원론이라고 하는 만인 구원 설입니다. 이 설은 하나님의 사랑이란 미명아래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이 같은 구원 설을 주장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오리겐’(254년에 사망)인데 그는 영원한 형벌의 개념을 거부하고 악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마귀까지 얼마간의 지옥의 고통을 받은 후에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 중에는 우리가 죽은 내세에도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의 피조물인 인간들을 지옥에 영원히 파멸시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큰 의문을 던져 주며 성경을 비 진리로 오도하는 사단의 계략인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철학적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비 그리스도인들이나 구원의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들에게 인기와 매력을 주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사단의 간계에 넘어가면 절대로 안돼는 것입니다.

  2.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 같은 예정의 뜻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아들의 형상이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예정하신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그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께는 그의 참 아들이 한 분이시지만 그 아들로 많은 아들들을 삼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우리로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기 위해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입니다.

  (2) 아들의 형상이란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로 삼으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택하셨다고 했습니다(엡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의 이름을 주신 것은 이처럼 그리스도에게 주신 유업을 우리들로 함께 누리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신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요?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롬8:17).

  (3) 이 일은 또한 예수님으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 맏아들은 최상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가 얻으신 최상 최고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써 당연히 이 같은 영광과 존대를 받으셔야 하지만 예수님이 친히 그같은 공로를 세우시고 스스로 그런 지위를 차지하신 것입니다.

  3. 효과 있는 부르심

  30절에 와서 바울은 하나님의 효과 있는 부르심에 대하여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I) 하나님은 이처럼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을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목자의 음성으로 들려주십니다. 이 음성은 주의 복음으로 온 세계에 펼쳐집니다. 이 음성을 듣고 그의 양들이 목자를 따르게 되는데 이 음성은 그의 양 무리들에게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으로 작용합니다.

  (3) 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야말로 효과 있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에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포함됩니다. 효과 있는 부르심에는 한 명의 누락자나 탈락자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6:37). 그리고 예수님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러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6:39).

  결 론 : 이 같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나온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영원히 버려진바 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바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그의 자녀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영화로운 몸입니다. 그리고 그 몸은 또한 장차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사는 약속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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