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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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밤중소리  01-13 | VIEW : 1,010


  ≈ 53 ≈           생명과 계명


  (본문 : 로마서 7 : 10 - 13)

  서 론 : 바울은 10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도다”고 깊은 탄식을 합니다. 이 탄식은 바울이 체험하고 있는 탄식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어떤 사람이 그 율법에서 의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정죄를 받는 원리를 깨닫게 된 “나”라고 하는 사람의 탄식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인간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사망에 이르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니, “나”라고 등장한 이 사람은 율법에 대한 참뜻을 깨달은 이후에 그 율법과 생명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큰 모순을 발견하게 되면서 갈등과 번민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I. 도리어 사망을 주게 된 계명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과 계명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근원적으로는 한가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이 주신 전체적인 광의의 법을 말하는 것이요 계명이란 그것을 세분한 구체적인 조항으로 이것을 십계명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1)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란 그 계명자체에 있는 뜻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계명이 인간에게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그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 이유는 계명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레18:4-5, 신6:25, 눅10:25-28).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거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 3:21). 우리는 율법의 목적과 한계를 다시 한번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들에게 만약 너희가 율법을 지킨다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뜻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율법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요 율법자체도 하나님의 이 같은 약속을 거스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계명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할망정 왜 사망에 이르게 하였는가? 이 일에 대한 설명은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일은 세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계명이 오게 되자 인간의 죄가 그 계명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단에게 있어서 대단히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사단이 인간의 죄악성(탐심)을 자극하여 그 계명을 범하도록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 죄에 팔린 몸이기 때문에 그 사단의 공격을 따라 계명을 어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나라고 하는 인간은 육신이 연약하여 그 계명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계명은 결국 나로 하여금 더욱 죄인 되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다음 셋째로 그 결과 계명은 나에게 생명은 고사하고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는 촉매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나를 죽이는 죄

   사단은 언제나 자신을 광명한 빛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죄는 자기를 숨겨서 가장하는 수법으로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창3:1-5에서 아담과 하와가 겪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 앞에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속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I) 죄는 나로 하여금 행동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것은 괜찮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처럼 마음으로 범하는 죄에 대하여 제 10계명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죄가 어느 기회를 엿보아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죄의 모습은 인간에게 매력을 줍니다. 그 매력의 충동을 강하게 함으로 다만 우리의 눈으로 죄를 바라보게 하고 그것을 받아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3) 죄는 이것을 해도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속입니다. 하와에게 들려 준 뱀의 말이 그러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창3:4). 죄는 자신의 모습을 인간으로 하여금 탐심으로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하와에게 보였던 것처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게 한 그 방법으로 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죄는 너는 죄를 범했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죄 함이 없기 때문에 죄로 걱정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속삭이면서 안심시킵니다.

  (5) 죄는 우리에게 한번쯤이면 아무 상관이 없으니 한번하고 그만 두면 된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죄의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는 이성을 상실해 버리고 그 함정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이와 같은 속성을 깨닫고 죄를 멀리하고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3. 죄와 사망을 선사한 것이 과연 율법인가?

  이런 면으로 볼 때 계명은 결코 악한 것도 불의한 것도 아닙니다. 율법이야말로 거룩합니다. 죄인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온 율법에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명이야말로 의롭습니다. 지키는 자에게 의를 주는 하나님의 의의 표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절대 선합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에게 선한 판결을 내려 줄 수가 없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모두 죽게 된다고 해도 그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1)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이처럼 선한 것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해답은 바울 스스로가 간단히 내리고 있는데 “그럴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망이 오게 된 것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한 율법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이 있기 이전에도 죄가 우리 인간에게 있었고 이 죄로 이미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율법은 다만 인간에게 존재하고 있는 기존의 죄를 죄로 들추어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 온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2) 사실인즉 우리 인간에게 사망을 가져온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악한 죄가 선한 율법을 매개로 하여 주검을 선언하게 한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이전에는 우리는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죄인인줄을 몰랐고 그 죄 값이 사망이란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인간사회에 개입됨으로 인간의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되었고 그 죄 값으로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가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심히 죄인 된 사실을 보여 주었고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죄에 대한 정죄함을 밝혀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 인간들에게 악을 행하는 존재로 군임 한 것도 아니요 죽음을 선사하는 존재로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밝혀 냈을 뿔입니다. 우리에게 경종 했을 뿐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죄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6:12).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지만 그 옛사람의 습성은 아직 우리의 죽을 몸(육신)에 남아 있습니다. 이 세력은 주인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우리를 속여서 지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 힘을 우리의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물리쳐야합니다.




  ≈ 54 ≈           육신에 속한 자


  (본문 : 로마서 7 : 14 - 20)

  서 론 : 로마서 7장에서 우리를 당황케 하고 그 바른 해석에 골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7장에 등장시키고 있는 대상 인물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특히 14절부터 ‘나는’ 혹은 ‘내가’ 또는 ‘나의’ ‘내게’란 말이 등장하는데 이처럼 나라고 지칭하는 주인공이 과연 누구냐는 것입니다. (1) 중생치 못한 사람의 경우냐? (2) 중생한 사람의 경우냐? (3) 중생은 했지만 초기 신앙생활 단계에 있는 사람의 경우냐? (4) 아니면 바울 자신의 경험이냐?

  1. 로마서 7장을 바로 해석하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에 대하여 진술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의를 가져왔다고 논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6장에 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의로운 생활에 대하여 논증합니다. 그리고 7장에 와서 바울은 율법의 직능에 대하여 자세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듣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은 무 율법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자아냈으며 바울은 이런 유대인들의 공격의 화살을 받았습니다. 율법과 복음에 관한 바른 관계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어려운 일을 로마서 7장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1) 로마서 7장은 율법이 무엇이냐? 하는 율법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데 진술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지배하려는 죄의 권세와 그 세력 사이에서 번민하는 자기의 체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의 지배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나”라고 하는 사람을 통하여 율법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는 이치를 선명하게 진술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7장에서 나타내려고 한 그의 진술은 율법이 인간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과 그 결과 인간이 받아야 할 고뇌에 대해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이 이곳에 등장시킨 “나”라고 하는 인물은 바울 자신이 아닙니다. 바울은 물론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앙의 어린 아이 즉 초보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도 아니합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교회의 스승으로써 장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며 모든 그리스도안들에게 자기를 본 받기를 권면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7장에 나타나 있는 사건이 그가 당하고 있는 영적인 갈등이거나 그의 인격의 양면성의 표출로 보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3) 7장에서 “나”라고 표현한 인물은 중생한 사람이나 중생치 아니한 사람과 연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중생한 사람이나 중생치 못한 사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미치는 율법의 영적인 의미와 죄의 권능을 파헤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곳에서 “나”라고 하는 사람이 중생한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그 시기를 따지거나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죄의 권능도 율법의 직능도 깨달은 한사람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미치는 율법과 죄의 역할을 밝혀 주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문장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나” “내 죄” “내가” “내 속에서” “나는” “나에게”란 표현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고 한 인물을 사도 바울이라고 지적하기도 하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죄와 싸우는 모습이라고도 말하지만 실인즉 그런 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3.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린 몸

  바울은 14절에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자탄하고 있습니다. 죄 아래 팔렸다고 한 진술은 죄의 종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올바로 깨닫게 될 때, 자기는 죄의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바울은 14절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의 영적 역할을 말해 줍니다. 율법은 지키기만 하면 생명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 한 율법사에게 대답하신 말씀에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눅10:28). 율법은 그것을 행하면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배척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에 이를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2) 바울은 15절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자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율법의 신령한 요구를 의미합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율법의 신령한 요구를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선함을 진정으로 인정하지만 그래도 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3) 바울은 16절에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라고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는 그 율법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몸”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4) 바울은 17절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며 20절에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논증은 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우리들이 육신적으로 행하는 죄는, 내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그런 논리가 아닙니다. 죄 아래 팔려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율법의 선을 이룰 수 없고 율법이 미워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결과적으로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5) 바울은 18절에서 자기 육신에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써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이런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임을 바울은 수도 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율법 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탄식하기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9절에서 내가 원하는 율법의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의 모순된 생활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산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이런 생활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정죄하셨던 것입니다.

  (6) 바울은 20절에서 다시 결론적으로 17절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나”라고 하는 등장 인물이 율법의 선한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에(다른 구원의 도리가 없기 때문에) 아직도 그 율법을 지키려는 죄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자신의 참담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결론에 와서 다시 한번 7장을 기록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 7장은 중생치 못한 사람의 고민을 말하거나 중생한 사람이 죄와 더불어 싸우는 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아닙니다. 율법의 신성함과 선함을 증거 하려는데 있으며 그러나 그것이 그 본래의 뜻인 의나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죄의 권세 때문임을 밝혀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 55 ≈           육신에 속한 자의 탄식


  (본문 : 로마서 7 : 21 - 25)

  서 론 : 바울은 7장의 결론에 이르게 되면서 마음의 법으로서의 율법과 지체 속의 법으로서의 죄와의 대결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언제나 지체 속에서 역사 하는 죄의 법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7장의 결론에서 강조하려는 교리적 교훈은 사람이 중생하지 않고는 비록 율법의 선함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깨닫고 그 율법을 이루고자 힘쓴다고 해도 결코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으며 사망가운데서 헤어날 수 없으며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이 깨달은 한 법

  바울은 율법에 도전해 오는 자기 자신 안의 한 세력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같은 세력이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의 인격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바라보면서 깊은 탄식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은 20절에서 죄와 자기와를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이 분리는 죄는 자기와 상관이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계명의 선함과 거룩함을 깨달은 사람이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원하는바 선은 행치 못하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면 그 악과 자기와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탄식조의 자백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탄식은 바울이 중생한 자의 입장에서 “나”라고 하는 인물을 등징시켜 율법과 좌와의 갈등을 가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어떤 경우에도 죄와 자기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 같은 판단은 대단히 위험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1)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을 내세웠습니다. 바울이 자기라고 내 세운 이 대상자는 율법이 거룩한 줄 아는 “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12절). 그리고 율법이 신령한 줄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14절) 율법의 선한 것도 안다고 했습니다(16절). 그러므로 바울이 등장시킨 이 사람은 율법의 의로움을 잘 깨닫고 그 율법에서 의를 얻고자 힘쓰지만 죄가 자신을 지배하여 율법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죄에게 이끌리어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는 자신은 오히려 죄의 종으로 전락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자기가 지키려는 율법이 자기를 정죄하는 모습을 보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아직 구원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율법 안에서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한 사람의 안타가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율법과 죄와의 관계를 갈파하고 있으며 이로서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케 하시고 죄의 종의 멍에를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밝히려는데 그 표적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다른 법이 그것과 싸우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이란 거듭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나라 율법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신의 내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에게 있는 이 같은 속 사람이 아닌 존재가 자기 지체 속에서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고 있는 다른 법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법은 자신의 마음의 법과 싸워서 그 마음의 법을 내 생활에 이루지 못하게 하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법이 “나”를 사로잡아 “나”를 죄의 법 아래로 이끌어 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내”속에서 역사하는 죄의 권세입니다.

  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드디어 “나”는 이 같은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죄의 종의 상태를 바라보고 탄식하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외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바울의 탄식 어린 외침을 바울의 그의 신앙 생활에서 체험한 신앙적인 갈등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신앙의 어린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신앙적인 갈등을 체험하는 단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은 바울 자신의 체험적이 간증이나 중생의 초기단계에서 느끼고 있는 갈등의 표현이 아닙니다.  

  (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곤고란 말은 실의 속에서 전혀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어쩌다가 이따금 이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간단없이 이 같은 일만이 연속적으로 계속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이런 질곡 속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자포자기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 사망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몸이란 사망 속에 갇혀 있는 몸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아직 사망 안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곳에서 빠져 나오려고 무던히 애는 쓰고 있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발버둥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여기 등장시킨 “나”는 율법에는 열심이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아직 자기를 율법의 저주와 죄의 권능에서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망 안에 갇혀 있는 절망적인 자기를 건져낼 자가 없다는 호소입니다. 율법이 선한 것임을 알고 그 율법을 따르려고는 하지만 자기 안에 더 강한 죄의 세력이 자기를 지배하기 때문에 이런 처지에 있는 자기를 건져낼 수 있는 자가 누구냐? 고 자신의 구속자를 찾는 모습입니다. 바울의 이 같은 논법은 이런 사람을 등장시켜 율법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려는데 이 글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로마서 7장을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바울은 “나”라고 하는 한 구도자(求道者)의 안타가운 처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기에게(바울 자신) 승리를 안겨다 주신 그리스도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점은 바울의 이 외침은 “내”가 이런 생활 가운데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런 가련한 “나”란 사람을 바라보았을 때,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우리야말로 이런 문제의 해결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고백한 바울의 말은 바울이 롬7장에 등장시킨 “나”란 사람과 연결시킬 부분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말,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까지는 아마도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며 또한 죄의 지배 아래서 율법의 정죄를 의식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이 사람은 마치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와 같은 구도자의 입장에서 그 마음으로는 영생을 바라는 간절한 심정을 갖고는 있지만 그러나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나”의 생활은 언제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하는 탄식의 생활이 계속될 것이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그러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지 않을 수 없는 “곤고”한 생활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바로 이 같은 위대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논증하려는 그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바울이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한 말은 육신에 속하여 율법과 죄악의 사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적인 처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이 같은 상태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이제 매우 어렵고 심각한 로마서 7장의 막이 내려지고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바울의 로마서 7장에서의 이런 논증은 바울 자신의 거듭나기 전이나 거듭난 후의 신앙적인 경험담이나 갈등을 기록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해야 하는 탄식도 아닙니다. 이 같은 바울의 논술은 바울이 율법과 죄의 권능을 비교하면서 그것이 인간에게 역사하는 면을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실패를 드러냄으로써 율법으로는 죄의 종의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율법을 고수하고 복음을 오해하는 유대인들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서만이 이 같은 결박에서 우리를 풀어 주시고 해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 56 ≈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인


  (본문 : 로마서 8 : 1)

  서 론 : 우리는 이제 로마서 8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7:18절 이하에서 한사람의 절망적인 탄식을 들으면서 죄의 세력아래에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헤어 날 길이 없는 한 사람의 비참한 운명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운명인 사실을 깨닫게 되어 우리의 마음이 어두웠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8장에 들어서면서 이 같은 어둠이 일시에 개이고 밝은 생명의 약동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8장을 배우면서 깨닫게 되겠지만 8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를 위한 성령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장이 아닙니다. 율법의 정죄와 죄악의 권세에서 이기게 하신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8장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성화 되느냐는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실성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5, 6, 7장과의 연결관계

  우리는 8장 서두에 등장하고 있는 “그러므로”란 말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란 표현은 확실히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이어지는 고리가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8장 서두에 나오는 “그러므로”란 말은 7:25절에서 이어지는 문장의 연결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7장의 결론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이 전혀 없는 한 절망적인 사람의 탄식을 그리고 있으며 그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죄의 종의 상태를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8장 서두에 나오는 “그러므로”란 말은 이 사람의 경우를 계속적으로 논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I) 우리는 6장과 7장이 5장과 8장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장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의 위대한 논증을 바라봅니다. 한사람 아담으로부터 온 범죄와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에 대하여 놀랍게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복음의 증거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공격을 예상했습니다. 율법에서 의를 얻는 줄로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죄를 조장하는 내용이 아니냐? 율법의 거룩함을 부인하는 반 율법적인 것이 아니냐? 는 오해를 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6장과 7장을 다루게 된 것입니다. 6장의 내용은 전자의 경우요, 7장의 내용은 후자의 경우인 것입니다. 바울은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어떻게 죄 가운데서 거하겠느냐고 반격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율법은 선하고 신령하고 의롭다고 유대인들의 율법 관을 시인해 주면서 그러나 인간의 지체 안에 있는 죄의 권세가 이 거룩하고 선한 율법의 요구를 묵살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기고 나로 하여금 더욱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기 때문에 선한 율법으로도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줄 수 없다는 탄식을 토로함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율법의 무력함을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장에서 8장으로 이어나가는데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에게 걸림이 되는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명쾌히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2) 그러기 때문에 “그러므로”란 말은 5장 끝에서부터 8:1절로 이어져야 할 문맥의 연속이 되는 것입니다. 5:12절에서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논증하고 6장과 7장에서 죄와 율법에 대한 오해 될 부분을 해소하고 다시 5장의 마지막 부분이 이어지면서 “그러므로”라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8장은 새로운 발견인 것이 아니라 5장에서 논술되고 있는 바를 더 자세히 강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우리는 1절에서 또다른 위대한 선언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은 복음의 핵심을 들어낸 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특성을 나타낸 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선언이야말로 인생의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문제해결의 결론이 되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종교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란 그리스도와 연합한자로 그리스도를 영접한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는 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순종의 생활을 할 때는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생활이지만 죄를 범했을 때는 마치 이 특권이 살아져서 그리스도 밖으로 버림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것은 영원한 옮김이 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 다시 사망으로 옮겨질 수 없는 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건 그 사람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3.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 함이란 말은 율법의 정죄를 말하는 것으로 곧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인류는 모두 이와 같은 율법의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한 명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1)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선언이야말로 인류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정죄함이 없다는 놀라운 선언을 액면대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이 너무나도 놀랍고 엄청난 선언이기 때문에 이 선언에 토를 부칩니다.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를 회개했을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죄를 범한 상태에서는 이 선언이 해당될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이 같은 주장이나 생각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정죄함을 받았다가 그 정죄에서 풀려나는 생활을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2) 이 정죄에서의 해방은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초월한 전 생애에 해당되는 선언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의 시발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 그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승리의 시점인 하나님 앞에 가서 설 때까지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그 일에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범하는 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안에 들어 온 사람도 죄를 짓습니다(요일1:8).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죄는 이미 율법에 대한 죄가 아닙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죄는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죄일 뿐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 대한 가족적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처리는 율법의 정죄가 아니라 사랑의 징계로 나타납니다(히12:7-9).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결코 율법적인 정죄감에 사로잡힐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죄는 세상사람의 죄와 구별됩니다. 율법적인 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과 인격적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죄를 범했을 때 결코 정죄감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그 일에는 두려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배반한 자신을 바라보고 슬퍼하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사랑과 인격적인 관계를 생각하고 율법아래 있는 사람보다 더욱 죄를 미워하고 죄와 더불어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 57 ≈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본문 : 로마서 8 : 1 - 2)

  서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선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이 죄와 사망의 법(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절은 바로 1절의 해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방이란 말은 죄와 사망의 법의 속박에서의 벗어남을 말하며 이 해방은 한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해방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속박 안에 들어갈 수 없는 해방, 그곳으로부터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그와 같은 해방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

  구원은 단회적(單回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구원은 영적이요 완전한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우리의 환경이나 어떤 조건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이 아닐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불완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고 확실하다는 것은 성경적인 증거에 기인합니다.

  (1)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고 하늘에서 성취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1:3,4).

  (2)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선악)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따라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 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롬9:10-12).

  (3) 우리의 구원은 우리 생애 전반에 걸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구원에 어떤 조건이 필수적으로 따라야만 한다면 그런 구원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계속적인 의의 실천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언제 구원에서 떨어질는지 모른다면 그 구원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같은 막연하고 실현 가능성도 불확실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셨다면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역사는 분명히 실패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이건 그리스도 밖이건 의를 행할 자란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소식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이를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 구원이 우리에게 영원히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2. 정죄함이 없는 생애에서 오는 기쁨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기쁨과 감사의 원인이 되는 일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도 정죄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쁨 대신 언제나 불안이 깃들 것이며 감사대신에 회의 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I) 정죄함이 없는 생활로서만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화평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이 화평이란 다시는 깨어질 수 없는 영원한 화평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이유에서이건 또 정죄함이 오는 일이 있게 된다면 이 화평은 그때까지 만의 제한적 화평이 될 것입니다. 이런 화평은 화평이 아닙니다. 다시 진노를 받게 되거나 다시 깨어지는 화평이라면 아무 가치도 없는 화평입니다.

  (2) 정죄함이 없는 생활만이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구원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라든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신앙이 침체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그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믿음이야말로 시험과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되며 구원을 의심하므로 더욱 깊은 죄악의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위기에서 자신을 건질 수 있습니다.

  (3) 정죄함이 없다는 믿음만이 죄의 속박에서의 해방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죄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자기 지배의 영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나를 아주 떠나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난날의 죄의 지배에 익숙해져 있는 지체가 있습니다. 죄에 지배를 받아온 육신에는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옛 습성이 있습니다. 죄는 이 습성을 이용하여 우리들을 끊임없이 죄 가운데로 유도하며 지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는 그리스도인을 다시 그의 종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창세 전에 이루신 하나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흘리신 속죄의 피는 우리로 죄의 종의 자리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죄는 죄의 지배를 다시 받게되는 죄가 아니며 율법의 정죄를 받는 죄인 것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의 죄이며 사랑에 관한 죄입니다. 우리는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하며 그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이지만, 죄의 종으로 되돌아가게 되거나 율법 아래로 다시 돌아가 정죄함이 없다는 이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평안을 되찾을 수 있으며 믿음에 다시 굳건히 서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담대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생명의 성령의 법

  이처럼 그리스도인을 정죄에서 영원히 해방시킨 일에 대하여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말은 어떤 계명과 같은 것을 연상해 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법이란 단어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과 대조적인 견지에서 이것을 성령의 법이란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 언약을 행위언약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두 번째의 언약 곧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언약을 세우실 때 믿음으로 의를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 언약 역시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은혜를 “믿음의 법”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롬 3:27).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는 하나님의 의는 “믿음의 법”입니다.

  4. 죄와 사망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이란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롬7:23). 바울이 7:23절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법이란 인간의 지체 속에서 율법을 거역하고 우리로 죄 가운데로 사로 잡아가는 죄의 권세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8:2절에 나와 있는 죄와 사망의 법이란 사망을 주는 죄의 법이란 뜻으로 곧 율법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해서 풀이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온전히 해방시켜 주셨음으로 영원히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같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약1:25).

  결 론 :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 법은 율법에 우선하고 율법을 초월하고 율법의 속박을 받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런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 적용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시는 지난날 우리를 지배했던 율법의 통제를 받거나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 법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 58 ≈         하나님이 하신 율법의 일


  (본문 : 로마서 8 : 3 - 4)

  서 론 : 오늘 주신 로마서 8:3,4절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변에서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율법의 일을 하나님께서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 주신 이유에 대하여 그것은 우리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하심에 있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롬7:4절에 있는 말씀과 동일한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성경구절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죄에서 자유를 주시고 구원함을 주신 것은 이제 다시는 지난날에 얽매었던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하심에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1.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3절 초두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의를 주고 구원하시는 일에 율법이 할 수 없었다고 한 것입니다.

  (1) 이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를 우리가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하고 신령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결코 율법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약한 쪽은 오히려 우리편입니다. 우리가 율법만 지키는 생활만 하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의를 주어야 할 율법이 우리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정죄하는 구실을 하게된 것입니다(롬3:20, 갈2:16).

  (2) 율법이 그 선하고 신령한 뜻을 우리에게 이룰 수 없는 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함” 때문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의롭고 선하고 강하지만 우리의 육체가 연약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체가 율법의 요구를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부족함이 없고 모든 것을 다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체가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말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우리가 이룰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는 태어남으로부터 죄에 팔린 몸, 곧 죄의 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이 같은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롬5:17). 우리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몸”들입니다(롬7:14). 이 모든 말씀은 우리들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이룰 수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하시나니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일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죄를 인하여란 말은 우리의 육신의 연약한 원인을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죄로 인하여 율법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는 이상 우리는 죄의 종이요 죄의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율법의 의를 이룰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로 인하여 할 수 없는 것을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2)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같은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문제인데 하나님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죄인 같은 모양만 취하셨지 죄인은 아니십니다. 이것은 그가 우리 죄인들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뜻입니다(요1:14, 벌2:6-8).

  (3)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양으로 보내셔야 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연약하여 이룰 수 없는 율법을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진실과 공의에 어긋나는 방법으로는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로 인하여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율법의 일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심으로 진실과 공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죄인으로 오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이루시려면 율법을 지키셔야 하며 결코 추호만큼의 죄도 지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셔야 할 율법의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한가지는 아직까지 우리들이 범한 죄에 대한 충분한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그 일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는 그는 우리가 이룰 수 없었던 율법의 의를 온전히 이루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실 동안 흠없는 율법적인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으로 연합시킴으로 그가 하신 일을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에게 죄를 정하사 이 일을 하셨습니다. 죄를 정하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죄를 그에게 넘기시어 십자가에서 죄 값을 받게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우리의 죄를 그에게 전가(轉嫁)시켜 대속의 제물로 심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3.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시도록 하신 것은 “육신을 쫓지 않고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육신을 쫓지 않고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라고 하는 대상은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여 주심으로 그 혜택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을 쫓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간혹 어떤 때에는 육신의 미혹을 받아 곁길로 빠질 때도 있지만 이런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참으로 놀라우신 일을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일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이제 율법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일은 율법보다 더 온전하시며 더 거룩하시며 더 의로우시며 더 신령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한 의와 생명은 온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일을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일에 대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59 ≈         육신을 쫓는 자와 영을 쫓는 자


  (본문 : 로마서 8 : 5 - 8)

  서 론 : 우리는 지난 시간 우리 인간이 육신의 연약으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이룰 수 없었던 그 일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대신 이루어 주신 일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그의 육신에 정죄하사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시고 그가 온전히 이루신 율법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의를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의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해방이 되었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 육신을 쫓는 자

  우리는 5절에서 육신을 쫓는 자와 영을 쫓는 자란 말을 듣고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 말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중에 육신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영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표현한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육신을 쫓는 자란 그리스도안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비 그리스도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사람들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1)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올 지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육신적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의 일을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일은 신령한 일입니다. 선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사람은 그 일을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쫓는 육적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일에 굴복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적인 일이 아닌 것에 대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신령한 일은 영적으로라야 깨닫게 되며 이 일은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2:10-12).

  (2) 그러므로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치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들도 지난날에 그러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나가는 과정에 어쩌다가 오류에 빠지거나 육신의 생각에 잠기는 그런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언제나 그들의 생활가운데서 100%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도, 자기 가족의 일에 있어서도,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들의 장래문제에 있어서도, 사업적인 일이나 학문적인 일이나 사업적인 일이나 국가적인 일이나 그 모든 매사에 그들은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란 쉽게 말해서 그의 모든 생각 속에 하나님이 전혀 없는 그런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교회행사에 참석할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중심에는 전혀 하나님께 대한 영적 감각이나 책임감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생활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각이라 하면 탐심이라든가 거짓말이라든가 간음이나 도적질 등 파렴치한 범죄, 반 율법적인 범죄 등으로 규정하기 쉬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상하고 품격 있는 인격자중에도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육신에 속한 사람, 육신을 쫓는 사람,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필요치 아니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그들의 생활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된 증거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분명하고 명확한 증거인 것입니다.

  2. 영을 쫓는 자

  다음에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육신을 쫓는 경우와는 전혀 상반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쫓는 자와 영을 쫓는 자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보다 더 현격합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요5:24). 육신을 쫓는 인간과 영을 쫓는 이 두 인간은 완전히 다른 인간입니다. 완전히 결별된 인간입니다. 완전히 변화된 인간입니다. 영을 쫓는 자란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는 전혀 다른 인간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에는 그들 중에 하나님의 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육신을 쫓는 인간들이었고 육신의 생각만으로 그들의 인생을 계획하고 꾸려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이후로는 그 영이 그의 인생을 지배하고 그의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자기 생애를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의 움직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움직임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이 내 안에서 그의 생명력으로 내 인생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이미 이 같은 생명 안에 들어가 그 생명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요,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나로 그리스도인다운 생애를 살아가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3) 이처럼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영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이름만의 그리스도인이요 결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영의 일이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영의 일이란 곧 성령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의 생활 중에서 자신의 영적인 생명을 해롭게 하는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운 그 모든 것들을 알기를 사모합니다. 그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고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의 놀라움을 좀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며 예수님이 나를 위해 당하신 그 모든 고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깨닫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이 같은 영의 생각이 없다면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결 론 : 바울은 결론적으로 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 생각이 노벨상을 받을 만큼 인류에 공헌할만한 것이요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든 사람의 흠모를 받을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에 대한 보상이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영으로 생각하는 모든 생각과 그의 열매는 생명의 결실을 가져오며 언제나 그 마음에 평안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 하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생명의 결실과 참 평안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평안을 누리시는 생애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 60 ≈            내주 하시는 성령


  (본문 : 로마서 8 : 5 - 8)

  서 론 :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이 거하시는 일이 왜 필요한가? 이에 대한 해답은 교리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쫓는 사람과 영율 쫓는 사람의 차이에 있어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을 양분해서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안에서 아직 육신을 쫓는 생활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장성하여 영을 쫓는 생활을 한다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바로는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쫓는 사람인 것이 아니라 영을 쫓는 사람들이며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육신을 쫓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9월에 와서 바울은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해 줌으로 그리스도인과 성령의 임재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

  바울은 9절 초두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경우에건 육신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1)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속해 있는 하나의 영역을 의미해주고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전에는 육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 왔고 그 육신은 언제나 죄의 지배아래 있었으며 율법의 정죄를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런 옛사람의 지배를 받는 영역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는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이전과는 달리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아가며 그의 명령을 쫓아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성령의 지배나 인도하심이 없다면 그는 성령이 없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영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있다는 밀입니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이 함께 거하십니다. 바울은 고전6:19에서 우리의 몸에 대하여 이르기를 “너희 몸은 너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함께 계신다는 말은 잠시적인 정유가 아니라 영원한 거주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23). 성령이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말씀은 대단히 신비적인 말씀입니다. 9절에서 이 성령에 대하여 세 가지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 ‘영’ ‘그리스도의 영’ 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 10장에서 “우리가”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에 대해 이처럼 삼위 되시는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아들도 보내신다는 뜻이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그리스도를 나타내시는 일을 하심을 의미해 주는 표현입니다.

  2.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우리는 10절에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몸이란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실제적인 육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몸이라고 할 때 이 몸이란 보이는 육체적 몸과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양면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우리에게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면은 이 영혼이 사람의 목숨이나 이 세상의 생애에 필요한 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 함으로 그 영혼이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두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온 모든 일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범죄 함으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회복할 수 없는 자리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전적 타락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서만이 회복됩니다. 그 이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일에 필요한 부분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명은 다른 피조물에게도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은 인간의 생명은 고도로 우수하고 그 마음에 양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이 새겨진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 영혼의 살아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의 구원은 엄격히 말해서 두 가지 면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영혼의 구원으로 이 구원은 믿는 즉시 얻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내 죽은 영 안에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으면 누구나 영생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의 죽었던 생명을 살려 주시되 영원한 생명의 씨로 살려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세상 끝날까지의 보호와 위로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우리의 몸이 죽기까지 이러한 죄의 요소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죄와 끝임 없이 싸우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를 인하여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죽었던 생명이 살아났으므로 육신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3. 부활의 소망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그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지만 (후패하여 장차 죽을 것을 의미함) 우리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온전한 구원이십니다. 온전한 구원에는 몸의 구속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 몸의 구속이 곧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서 죽음의 씨앗으로 죽은 상태에 있지만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언제인가 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벌거벗은 영으로가 아니라 영화로운 몸인 새로운 옷으로 단장한 영광된 부활 체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갈 것입니다.

  이날이 우리의 구속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결 론 : 우리의 이 몸은 아직은(부활 때까지) 죽어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죄는 이제 내 영혼은 건드리지 못하고 이 몸 안에서 나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죄가 내 몸 안에서 나를 사로잡아 왕 노릇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죄의 시도를 물리치고 싸워 이겨야합니다. 우리 안에는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이 성령을 쫓아 행하는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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