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이메일 : bamjoongsori@bamjoongsori.org

 

  
로마서 7장
 밤중소리  01-13 | VIEW : 1,008


  ≈ 44 ≈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


  (본문 : 로마서 6 : 12 - 14)

  서 론 :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살았다는 사실을 여러 번 들어 왔습니다. 죄로 멸망 받을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우리는 또한 그를 살리신 하나님의 생명이 나를 살려, 나는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수차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을 몸”이 존재하고 있으며 죄의 세력은 이 죽을 몸 안에서 우리의 육신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사욕을 쫓아 유혹하는 이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할 사람들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사람은 비록 죽을 몸이지만 죄의 종은 아닙니다. 죄의 지배를 이길 수 있는 새사람의 권능아래 있다는 사실도 들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성화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결된 생활이나 성화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식 위에 자신의 생활 지침을 세워 자신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성결한 생활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1) 성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혹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대하여 어떤 순간, 즉 성도가 은혜를 받는 그 어떤 순간에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은혜를 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이나 매번 실패로 끝나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성화가 그처럼 순간적으로 단번에 이루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같은 체험은 평생가도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성화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의로움과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성화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의 몸으로 변화 받을 때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모든 것이 믿음으로 되니 죄를 이길 줄로 믿고, 성결된 생활을 이룰 줄로 믿고, 그 믿음 안에 있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믿음에 서 있어도 우리의 사욕을 따라 유혹하는 죄의 권능은 우리의 죽을 몸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2) 성화는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생활입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하는 이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생활을 권면해 주는 말씀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투쟁을 의미하는 명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은 하나의 투쟁입니다. 이 투쟁이야말로 바울이 말한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딤전6:12, 딤후4:7).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기나긴 인생의 전 과정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전 생애의 투쟁입니다. “죽을 몸”이 죽을 때까지 이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동기

  우리는 왜 성결된 생활을 하므로 성화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성화가 되어야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으| 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생활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로 만든 악한 존재입니다. 이 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 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죄 가운데 거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고 바울은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서 살겠느냐”고 반박했습니다(롬6:1,2).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죄 가운데서 더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버리고 앞으로 그 죄에 동참하지 말고 오히려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활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롬7:4).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생활은 순종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순종으로 아담에게 언약하셨습니다(창2:16,17).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은 원상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곧 순종의 생활입니다. 이 순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그의 아들을 믿는 일과,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실제적인 방법

  우리는 바울의 권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 나타내야 할 성결 생활의 방법을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죄가 다시 우리 몸에서 왕 노릇해서는 안됩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죄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 와서 왕 노릇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고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들 스스로가 죄를 우리들 몸에 불러 드려 왕 노릇할 수 있도록 나의 죽을 몸을 죄에게 스스로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죄는 우리의 몸을 월권적으로 지배하는 거짓된 왕이며, 우리의 죽을 몸 역시 실제적인 왕이 아닌 거짓된 왕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일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교리적인 지식을 구비했다면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했습니다. 몸이란 죽을 몸을 가리킵니다. 이 몸엔 인간이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본능적인 제반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선용하면 버릴 것이 없으며 선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몸의 사욕을 위해 쓰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본성에서 사욕을 충동질하여 우리로 죄 가운데 빠지게 하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몸의 사욕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병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불의를 위해 사용할 때는 불의의 병기가 되어 우리의 몸이 죄에게 드려지는 바가 되고, 의를 위해 사용될 때는 의의 병기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의 종이었을 때는 우리의 몸은 전적으로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었고 죄에게 드려지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이후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열매, 의의 열매를 맺도록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불의의 병기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적인 위치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는 것,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어야 할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은혜아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 45 ≈               순종과 소유권


  (본문 : 로마서 6 : 15 - 16)

  서 론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몸을 다시는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13). 그 이유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고 강조합니다(14). 법 아래 있는 신분과 은혜아래 있는 신분과는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있습니다.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속한 사람으로 그들이 최종적으로 갈곳이 지옥이요 은혜아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사람으로 그들의 최종적인 거처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만큼 그들의 생활양식이나 의식구조에도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1. 그런즉 어찌 하리요

  바울이 14절에서 밝힌 말씀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어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날카로운 항변입니다.

  (1) 하나는 “은혜아래 있고 죄가 주관치 못한다고 하니 죄를 져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의 궤도에서 벗어난 무 율법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다고 하니 그리고 죄의 세력이 그들을 주관치도 못한다고 하니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하는 일은 그 아무 누구도 정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는 기존의 도덕적인 인간의 생활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라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2) 다른 하나는 “율법적인 제약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생겨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사람이 한번 구원받았으면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니(종국적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니) 그 후에 그에게 일어 나는 모든 일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율법의 정죄나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없이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고 색욕거리로 이용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현재적인 신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자신의 확고한 신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인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이기고 물리철 수 있다고 하는 분명한 자기 신분을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현재적인 생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신분이란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지식과 믿음의 터 위에서 자신의 삶을 이룩할 때 그리스도안에서의 승리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2. 죄를 지으리요?

  바울은 이 같은 두 가지 면에서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란 말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정죄도 받지 아니하고 제재도 받지 아니하는 신분이 아니고 모든 것을 은혜로 처리 받는 은혜아래 있게 되었으니 그러면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냐? 는 뜻입니다. 14절에 나타난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먼저 죄를 지으리요 라고 한 바울의 말의 참 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어떤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말씀이 더러 있습니다(요일3:8, 9).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는다는 말은, 죄를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지었을 때와 자신이 지은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오지 않고 그 자리에 안주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 같은 행위의 이유가 자신들이 은혜아래 있으니 괜찮다는 뜻이 함유되어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 같은 생각에서 죄를 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정죄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 아래란 말은 율법아래란 뜻으로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는 일이나 율법의 정죄로 심판을 받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 같은 법 아래 속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로 적용되지 아니합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분명 아니지만 그 법을 버린 사람인 것이 아니라 법을 온전히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서 그 율법을 이루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저주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그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죄를 지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적인 생활을 버려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일은 율법을 버리려 함이 아니요 율법을 이루려 함임을 알아야 합니다(마5:17, 18).  이 같은 사실은 어느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마22:34-40). 예수님은 율법을 두 계명으로 나누셨는데 첫째 되는 계명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2)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종이란 죄의 지배를 받는 상태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죄 짓기를 스스로 즐기며 그 죄 가운데서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은 분명히 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죽을 몸에 죄의 습성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본능을 유혹하는 죄의 공격을 받아 잠시동안 죄 아래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계속적인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의 탄식하심으로 회개하게 됩니다(롬8:26). 그리고 이 같은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에 의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히12:5-11).

  결 론 :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 안에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빌 1:6). 만약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면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같은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은혜아래 있는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죄의 종 아래 그대로 있는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 46 ≈            거룩함에 이르라


  (본문 : 로마서 6 : 17 - 21)

  서 론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에 대하여 이 같은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신분에 따른 생활을 통하여 의의 종으로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8:31,32).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모르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도 없고 의의 열매를 맺는 생활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의의 종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정성을 기울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죄의 종이었을 때의 지체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로마 교인들의 건강에 관한 언급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이 아직도 죄에 의하여 지배되고 잘못 인도를 받고 있는 육신의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의 종으로 연단 받지 못하고 지난날의 구습에 따르는 생활환경으로 쉬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 육신의 영적인 연약함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를 행하기에 적합한 몸, 의의 종으로 익숙한 상태에 있는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의 자리에서 빠져 나온 지 얼마 안된 의의 종들을 향하여 이 말씀을 강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육신은 얼마 전까지 죄를 행하기에 아주 숙달했던 몸입니다. 의를 행한 경험이 전혀 없으며 의를 행하기에 전혀 익숙지 못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진리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사람의 예대로 알기 쉬운 예화를 통하여 다시 설명해 주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전에 우리의 지체는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렀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19절에서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너희 지체란 말은 한 사람의 전인적인 모든 육신에 관한 전부를 말합니다. 한 사람의 지식, 재능, 성품뿐 아니라 그의 제반 활동력전부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이 지체를 가지고 불법과 부정에 드려 왔습니다. 드렸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이유는 그때 우리의 몸은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종의 입장에서 죄에게 드리는 생활을 하여온 까닭입니다.

  우리의 온 지체는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될 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죄에게 팔린 몸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모든 것을 죄에게 드리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원래가 하나님이 주신 우리 인간의 모든 선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에게 팔려 죄의 종이 되면서 이 같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의 종의 몸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거룩해야 할 몸이 부정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고 헌신해야 활 우리의 몸이 향락의 도구가 되었으며, 의로운 성품이 죄악의 도구가 되어 버렸으며, 지혜가 간교가 되었고, 하나님을 알아야 할 지식이 인본주의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우리의 지체를 이처럼 죄의 종의 도구로 전적으로 드리는 생활을 하므로 불법에 이르렀었다고 사도 바울이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기 이전의 우리의 신분이었습니다. 이 같은 상태에서의 예외자란 우리 인류사회에 한 명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란 말은 이전에서 새로운 상태로 돌아온 의의 종으로서의 우리의 신분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전과는 그 위치가 분명히 달라진 상태요, 이전의 죄의 종의 생활에서 의의 종의 생활로 방향 전환된 지금 우리의 새로운 위치를 말해 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우리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우리의 신분은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제란 말은 의의 종이 된 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종으로 드렸던 우리의 지체와 지금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고 하는 너희 지체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우리들이 이제 의에게 드리게 된 우리의 지체가 죄의 종으로 사용되었던 이전의 그 지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지체란 뜻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지체는 죄의 종으로 있었던 이전이나 의에게 종으로 된 지금이나 하등 변함이 없는 그 지체입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 드려지느냐에 대한 대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개성의 근본적인 변화가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개인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개성은 잘만 쓰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성격의 근원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말도 아닙니다. 급한 성격의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느릿해져야 한다거나 다혈질적인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근본적으로 변화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그들이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고 위대한 사도의 직분을 받고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선택을 받았지만 바울은 바울 대로 베드는 베드로대로 요한은 요한 대로 제각기 자신의 성품과 개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른 것이냐? 드리는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죄에 드려졌던 것이 이제는 의에게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지체들이) 선한 본성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문장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해석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깨닫는 일에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아낌없이 쓰여져야 합니다. 우리의 말의 재능이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인격이 온전히 의의 병기로 바뀌어지는 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지체가 이제는 죄의 종으로서 불법에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2.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드리란 말은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결 생활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1) 자동적으로 드려진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우리들의 지체가 힘 드림이 없이 자동적으로 의의 종으로 드려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리는 일에 스스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애씀이 없이, 아무런 힘도 드림이 없이 의로운 생활을 하거나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의 입장에서 주인을 향하여 주인의 요구에 따르는 일을 말합니다. 죄의 종으로 있었을 때에 죄에게 드렸던 것처럼 의의 종이 되었으니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던 주인의 요구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야 할 의무와 책임이 의의 종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믿음으로 저절로 얻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의의 종이 되었으니 의에게 순종함으로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이 의의 열매를 맺는 생활은 믿음으로 얻은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생활에서 이루어야 할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아직 연약하므로 의의 종으로 합당한 생활을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이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의를 행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종들  처럼 순종하고 드려져야 합니다.





  ≈ 47 ≈          죄의 삯과 하나님의 은사


  (본문 : 로마서 6 : 20 - 23)

  서 론 : 우리는 로마서 6장에서 많은 진리를 배웠습니다. 주로 죄의 종과 의의 종에 대한 교리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죄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러던 것이 의의 종의 신분으로 바뀐 사실에 대하여 자세하게 배웠습니다. 종이란 완전한 노예의 신분을 가리킵니다. 노예의 이동은 매매의 수단으로 됩니다. 하나님이 충분한 대가를 치르시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물인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전은 완전한 것입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소유권의 이전입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종에서 의를 종의 자리로 옮기게 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로마서 6장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1. 죄의 종이 되었을 때의 열매

  바울은 우리로 다시 죄의 종이 되었을 때의 상황을 돌이켜 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 죄의 종으로 있었을 그때에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다는 말은 노예  로마서가 아닌 상태를 의미해 줍니다. 의의 종이 되기 이전임으로 의에 대해서는 노예상태가 아니라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의의 종이 아닌 신분이었기 때문에 의에 순종해야 할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의에 속박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죄가 그를 폭군처럼 지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아담이 불순종으로 최초의 죄인이 되었고 우리는 이미 죄인이 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상태를 원죄(原罪)란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성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그들이 절대로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죄인으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도덕적인 행위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열매란 성결에 대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육신에 속한 열매인 것입니다. 바울은 죄의 종들이 맺는 육신의 열매에 대하여 이처럼 열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갈5:19-12). 죄의 종으로 있을 때에 우리가 얻은 열매란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 못되었습니다.

  (3)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제란 말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라고 한 말은 죄의 종의 자리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의의 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과 의의 종과의 분계선을 분명히 넘어 온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그 일을 부끄러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의의 종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 죄의 종으로 있었던 그 때를 회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즐거움으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그같은 육체의 일을 행했지만 이제는 그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면서 지난날의 일에 대하여 하등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아직도 그런 일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죄의 종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 사람이지 의의 종의 신분으로 바뀐 사람이 아닙니다.

  2. 하나님께 종이 되었을 때의 열매

  바울은 22절에서 다시 이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현재적인 신분을 의미해 주는 표현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이 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1)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다시는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죄의 종의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다른 영역으로 지역적으로 옮겨졌을 뿐 아니라 우리의 지배자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노예는 팔려 가면 장소도 주인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들은 이 주인에게서 다른 주인에게로 팔려가며 팔려간 그 주인의 소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죄의 종에게서 하나님의 종으로 팔려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죄에게 팔려갈 수 없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죄가 우리에게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들의 이 죽을 몸에 아직 남아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 우리를 지배하거나 주장하는 일에 왕 노릇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이 죽을 몸에서 이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힘써야 하며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입니다.

  (2) 우리는 이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의 열매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결 생활은 세상사람들의 도덕적인 기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열매는 성결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따른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드시 이 열매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이전의 죄의 종으로 있었을 때의 육체의 일을 끊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이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는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거룩이란 말은 ‘하기아스모스’로 봉헌한다는 뜻입니다.

  (3)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이란 그리스도인들의 종국적인 목표점입니다. 우리는 이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영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생의 실제적인 실현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에 이루어집니다.

  결 론 : 바울은 본문의 말미에서 “죄의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값이란 말은 일한 임금(賃金)의 배당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배급, 배당을 말합니다. 죄의 종으로 죄를 위해서 노예로 일한 사람은 응당 그 임금을 배당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배당의 규정은 율법이 정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이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임금은 값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사신 일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선하심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공로나 의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은사 곧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 대가는 놀랍게도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 48 ≈            율법의 기능


  (본문 : 로마서 7 : 1 - 4)

  서 론 : 우리는 로마서 7장을 해석함에 있어 여러 가지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을 난해 장이라고도 하여 진리에 대한 이해에 매우 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7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령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고 율법에 대한 언급으로 일관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6에는 율법과의 결혼관계, 7-12에는 율법의 옹호, 13-25에는 율법으로 인한 탄식 어린 호소 등으로 이어 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을 기록한 목적은 율법의 기능과 그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데 있습니다. 바울이 7장에서 밝혀주려고 애쓴 일은 율법은 통한 칭의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그뿐 아니라 율법에 의한 성화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7장 서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율법과의 결별과 그리스도와의 결합에 대한 문제를 남녀간의 혼인관계를 예로 하여 깨닫게 해주려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율법과 혼인관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설명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비유를 혼인관계에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1) 율법이 사람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이 율법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모든 일이 끝나버립니다.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는 권능이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들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죽음은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을 정죄치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롬6:2,4,6).

  (2) 바울은 이 원칙을 남편 있는 여인의 경우와 결부시킴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율법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며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은 자유로운 신분이 못됩니다. 남편은 그의 머리가 되어 있으며 그는 범사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할 입장에서 있기 때문입니다(엡5:23,24).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율법의 지배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리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남편의 지배아래 있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만 입니다. 죽으면 남편의 법 아래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약 사람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면 그 사람은 그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편의 법에서 자유 함을 얻은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합법적으로 시집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법을 어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음부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비유적인 해석은 4절에 가서 그 의도하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결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 일이 어째서 하나님 편에서 합법적인가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이런 설명은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오해의 위험성을 분명히 밝혀 두려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죄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다시 율법 아래로 잡아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율법의 정죄 아래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하루에 몇 번씩이건 율법과 그리스도와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같은 일은 다만 자기와 율법과의 관계를 모르는데서 나온 잘못된 지식으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관계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려고 혼인관계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혼인관계

  바울은 4절에서 아직까지의 혼인관계의 비유에 대한 실체를 들어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첫 번째 것이 해소되어야 다음 일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에 대한 처리를 분명히 하지 않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과의 관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또 다른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음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면 율법과의 관계가 해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해소의 방법이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는 일입니다.

  (2) 우리가 율법과의 혼인관계가 해소된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함으로 우리가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신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평생을 지내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도 없고 율법의 지배아래서 빠져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더럽혀 진 우리의 육신의 연약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습니다(롬8:3). 하나님은 자기 아들로 이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율법의 정죄함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뿐이면 아무 것도 우리에게 올 것이 없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나셨습니다. 이 생명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생명이 아닙니다.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생명,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가 이처럼 살아나신 것은 우리에게 그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중생은 이 생명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 같은 사역을 믿을 때 우리는 그 순간 그와의 새로운 연합관계가 이루어짐으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자가 되어 율법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3) 이렇게 하여 우리는 율법이 아닌 새로운 남편과 혼인관계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결합은 하나의 혼인관계입니다. 이 새로운 혼인관계는 율법과의 혼인관계를 청산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그 길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로 가서 새로운 혼인관계를 성사시킨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왜 이처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어주셨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혼인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당신의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남을 얻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이 열매를 원하시는 것입니다(요15:1,2 ; 눅13:6-9 ; 벧후1:8).




  ≈ 49 ≈            구원의 목적


  (본문 : 로마서 7 : 1 - 4)

  서 론 : 바울은 로마서 7장 초두에서 율법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폭군적인 남편과의 혼인관계로 비유하고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서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새로운 신랑을 남편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은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 함을 얻었으므로 다른 이에게 혼인올 해도 그 일은 결코 불법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이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은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 그 목적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의 변명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혹은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에게 오해를 살만한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많은 대적자가 있었고 그들과 진리에 대하여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바울의  대적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바울의 해석을 ‘무 율법주의’ ‘반 율법주의’ ‘탈 율법주의’라고 매도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제일 안타깝게 여긴 것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벗어났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생활을 설명하며 이해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1)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러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느냐는 반론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못박았습니다(롬3:20). 바울이 주장한 그 단면만 본다면 바울의 말은 분명히 ‘율법 폐기론 자’의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같은 반론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참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오해인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인간에게 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정죄에 있으며 이 정좌는 사람으로 죄를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데 있으신 것입니다.

  (2) 다른 또 하나의 악의적인 비방은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그리고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였으니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은 죄를 범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면 죄 가운데 살아가도 될 것이 아니겠는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칠 것이 아니겠는가? 이 같은 반론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단호하게 그들의 주장을 부정합니다.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격하고 있습니다.

  (3) 바울의 이 같은 문제가 7장에 와서 혼인관계를 비유로 하여 강력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이유는 무 율법이나 폐 율법적인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뜻은 율법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을 버렸다는 것은 양심을 버렸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율법이 없는 생활은 인간의 생활이 아니라 금수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바로 율법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양심이 율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롬2:14).

  (1)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 합니다. 율법의 정죄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율법의 정죄는 죄 값을 요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되고 있습니다(롬6:23). 이 같은 사망의 선언은 율법의 정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율법의 정죄 함이 없는 것입니다(롬8:1).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이처럼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2)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모든 죄인들을 지배합니다. 죄의 종들을 지배하는 역할을 율법이 합니다. 율법은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율법의 지배에서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명령과 그 지배아래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과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은 목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율법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아 죽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논증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롬8:3,4).

  (1)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죄 가운데서 살아가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하심”에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실인즉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혀 버린다고 하셨습니다(요15: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약2:26).

  (2) 하나님을 위하여 맺는 열매란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율법사에게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말씀하셨습니다(마22:34-40). 이 강령은 율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 율법으로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요13:34).

  결 론 : 하나님을 위한 가장 위대한 열매란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0:31).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한 평생에 이루어야 할 계속적인 열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받은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은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이 열매야말로 하나님을 위하여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갈5:22, 23). 이런 열매들은 율법아래에서의 열매보다 차원이 높을 뿐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이룰 새로운 계명의 열매입니다.





  ≈ 50 ≈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


  (본문 : 로마서 7 : 5 - 6)

  서 론 :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육신에 있었을 때와 율법에서 벗어났을 때의 생활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있을 때 에란 그 시기는 우리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 곧 아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아니했을 때의 시기, 중생 이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때는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하는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얽매였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지난날 거듭나지 못했을 때처럼 의문의 묵은 것으로가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육신에 있었을 때의 생활

  우리가 지난날 육신에 있었을 때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우리 지체 중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역사 했던 하나의 놀라운 세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세력이 바로  죄의 정욕입니다.

  (1) 육신에 있을 따란 죄의 정욕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을 때를 의미합니 다.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서 권능을 가지고 무섭게 역사하는 죄의 정욕을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이 우리들 마음속에 죄의 정욕을 심어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의 마음속에 죄라든가 정욕을 심어 주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범죄한 우리 인간의 마음속은 온통 불의와 탐욕과 정욕과 음란으로 들어 차 있습니다(롬1:28-31 ; 마15:19,20). 그런데 이것들이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발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나타나자 그 율법을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은 잠자는 우리 마음속의 죄를 깨웠습니다. 그 죄로 우리 가운데서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 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롬 5:20). 더 한다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존재했던 죄가 밖으로 자꾸 드러나는 상태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의 세력은 율법의 권능보다 더 강합니다. 강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의 종으로 죄에게 팔린 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3:11). 우리는 율법이 없었을 때에도 많은 죄를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죄를 행하면서도 인간들은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나타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하지 못한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정죄 했습니다. 우리는 그 율법의 정죄함을 바라보고 비로소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결코 우리의 범죄행위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롬3:20). 그리고 율법은 믿음의 의를 보여줍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롬3:21).

  (3) 이처럼 우리가 육체에 있었을 때에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 하는 죄의 세력은 말할 수 없이 강력합니다. 율법도 그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치 못합니다. 양심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 다음으로 강력한 세력으로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망을 위한 열매란 인간의 모든 열매를 말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롬1:21). 사람이 선하고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성령 안에 있지 아니하면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죄의 정욕이 그 지체 중에서 역사하여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생애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은 모두 율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며 율법의 정죄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 거듭난 사람,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제는 이란 말은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의 분기점을 말해 줍니다. 육신에 있을 때의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경지에 들어선 사람의 경우를 말합니다. 이 선은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의 분명한 경계선입니다. 우리는 다 이 경계선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2)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얽매였던 것이란 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얽매여 왔습니다. 우리는 죄에 팔린 몸으로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그 얽매임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양심과 율법을 통해서 놓임을 받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율법으로 인하여 죄의 세력이 더 강력해 질뿐 아니라 정죄까지 하게 됨으로 율법은 더욱 죄에 얽매이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얽매였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 죄로 인한 죽음이기 때문에 곧 우리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일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죄에 얽매임에서 풀려났으며 해방된 것입니다. 이 일은 또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뜻으로 율법의 저주가 미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정죄의 구실을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이제 그 죄를 정죄하는 율법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3)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은 새로운 생활입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난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다른 이 곧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율법의 영역 안에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새로운 영역 안에서의 생활을 의미해 주는데 이 영역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생활입니다. 이것은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형태입니다.

  (4) 의문의 묵은 것은 이제 쓸모 없어졌습니다. 의문의 묵은 것이란 글로 쓴 율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같은 율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시 그 법 아래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영의 새로운 것이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받은 부활의 생명,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입니다. 이 생명 안에는 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습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제 단순히 율법적인 의를 이루려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한 삶입니다. 이 같은 삶의 자세가 죄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서 벗어난 우리의 진실된 삶의 자세임을 알고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51 ≈         율법이 죄냐?


  (본문 : 로마서 7 : 7)

  서 론 : 바울은 로마서에 와서 같은 내용에 대한 반복법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로마서 강해에 좀 서먹한 것은 같은 내용의 반복 구절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 중복되는 반복적인 설교를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강조 점에 가서는 바울처럼 반복적인 설교를 대담하게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드디어 이곳 에 와서 “율법이 죄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언어의 구사법은 하나의 반문법의 형태로 나타내면서 자신의 강조하려는 점을 더욱 깊이 있게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1. 율법과 죄와 나와의 시나리오

  우리는 바울이 7절부터 25절까지 전개하고 있는 말씀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준수하고 죄를 미워하는 한 사람이 율법과 죄와 자기와의 상호 관계를 적나라하게 밝혀 주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5절과 6절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죄의 권세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를 받아 사망을 위해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으니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할 것임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그런즉 율법이 죄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의를 얻을 수도 없고 결과적으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면 율법이 죄냐? 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다음 말씀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면서 “율법”과 “죄”와 “나”와의 관계를 밝힘으로 인간의 구원이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나리오에는 세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죄”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 율법은 “나”에게 감동도 주고 그 법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하는 의무감도 줍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나”에게 자신의 법을 지킬 것을 강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에는 그런 것을 “나”에게 이루어 줄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종이 호랑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대로 살려고 하는 “나”에게 나의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죄”라고 하는 또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죄”는 매우 악한 존재입니다. 그 죄는 “나”에게 번민을 주고 괴로움을 줍니다. 나는 “죄”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원하지도 않고 있는 이 “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로 나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은 선하고 “죄”는 악한 것인 줄 알면서도 죄의 권세에 이끌리어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이런 생애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나”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것으로 “율법”과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외침이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나”에게 들려주는 승리의 함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등장시키고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7절부터 25절까지 “나” “내”라고 지칭하는 인물이 무려 31번이나 나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나”라고 하는 인물이 바울 자신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중생한 사람을 상징하거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상징하거나 중생은 했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의롭게 여기고 율법대로 살기를 원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를 “나”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주의자가 어느날 자신이 의롭게 여기고 거룩하게 여기는 율법이 자신이 원치도 않는 죄의 세력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바울이 이처럼 “나”라고 하는 이 율법주의자가 율법과 죄가 자기 속에서 서로 견제하고 싸우는 모습을 이 모든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바울의 입장에서 쓴 글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바울의 논법을 바울 자신이 자기의 신앙 생활에서 체험한 갈등이라든가 죄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신의 경험담으로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바울은 단순히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지만 죄의 세력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율법을 지키려는 자는 결과적으로 죄 앞에 굴복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게 된다고 하는 그의 율법 관을 밝히려는데 목적을 두고 이런 시나리오를 썼던 것입니다.

  2. 탐심과 죄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죄와 연결시켜 설명함에 있어서 특별히 ‘탐심’과 연결시키고 있는 일은 매우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탐심에 관해 율법이 지적하는 죄의 목표로 삼은 것인가?

  (1) 탐심이란 말은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있는 강한 욕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탐심이란 말의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면 그 뜻이 중성으로 나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은 악한 뜻으로만이 아니라 선한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내시기 위해 예비된 다락방에 오르셔서 말씀하실 때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눅22:15). 여기서 원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이 ‘에피뒤미아’인데 이 말은 이곳 로마서 7장에 나오는 탐심에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을 때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나오는 ‘욕심’역시 원한다고 하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있는 모든 욕망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처럼 선한 욕망인 것이 아니라 악한 욕망이기 때문에 이 같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탐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은 갖아서는 안될 욕망이며 가지면 가질수록 더 무서운 죄의 분출구 구실을 하며 크다란 폭발력을 나타낸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이 같은 인간의 탐심이 죄라고 정죄한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인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탐심의 지배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한평생 탐심에 젖어서 그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 상상력, 풍부한 공상 등 이런 것 등이 어찌 죄가 될 것인가 고 되묻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느 사회이든 실정법 상으로 마음의 상상이나 생각은 자유입니다. 그런 것을 책하고 벌하는 규정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어떤 죄악된 일을 마음의 생각으로 상상으로 즐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이 무서운 죄인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육체로 짓는 다른 범죄와 똑같은 죄이다”라고 정죄한 것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4) 이 탐심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유대인들은 이 열 번째 계명을 중요시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수록된 내용이 다른 계명 둥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질하지 아니했으면 8계명을 범하지 않은 줄로 여기게 되었고 몸으로 간음하지 아니하면 간음죄와는 거리가 먼 줄로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 탐심에 관한 계명이야말로 전 계명의 중심이 되는 계명인 것입니다. 다른 계명을 다 지킨다고 할지라도 탐심에 관계된 이 계명을 범하면 그 역시 다른 모든 죄에 대한 정죄를 받게 된다고 하는 계명의 참 뜻을 알아야 했는데 유대인들은 율법은 지킨다고 하면서도 이 탐심의 죄만은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밝혀주시고 계명의 참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8). 이것이 율법이 가르치는 참 뜻입니다.

  (5) 이 탐심은 죄의 뿌리요 근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 탐심으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그 무서운 죄를 보여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바로 이 탐심에서 파생되는 가지들입니다. 가지만을 아무리 쳐 대도 그 뿌리가 튼튼한 이상 인간의 죄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아무리 선한 인간이 되어 보려고 노력해도 마음속에서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이 탐심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으로는 홈이 없는 자라고 자랑하면서도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탐심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죄의 욕망 때문입니다. 바울이 24절에서 탄식 어린 자폭적인 선언을 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한 말도 이 탐심의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외침이었습니다.

  결 론 : 우리에게 반드시 구주가 필요한 이유가 인간의 벗어버릴 길이 없고 씻을 길이 없는 탐심 때문입니다. 이 죄를 밝혀 보여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 보다 율법에서 이 탐심의 죄를 발견했었던들 그들은 그들에게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탐심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롬12:2).





  ≈ 52 ≈        계명으로 드러난 죄의 권세


  (본문 : 로마서 7 : 8 - 9)

  서 론 : 죄는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미화시키고 자기를 정당화시키는 일에 간교하며 매우 익숙합니다. 죄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탐심 때문입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 인간의 본래의 죄악의 본성인 탐심과 손을 잡는데 숙달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탐심은 죄의 속삭임에 쉽게 미혹을 당하고 양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이 오게 되자 그 계명이 이 같은 무서운 죄의 정체와 권세를 들어냈습니다. 바울의 탄식 어린 호소인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한 말이 이런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1. 계명으로 각양 탐심을 일으키는 죄

  바울은 말하기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의 성격과 죄의 권능을 잘 나태내 주고 있습니다.

  (1) 죄는 하나의 세력입니다. 죄는 그 출처가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죄의 시초는 에덴에서 마귀로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왔습니다. 그후 이 죄는 인간의 육체 안에서 인간의 탐심을 휘어잡고 우리로 죄로 이끄는 한 큰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23철에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한 말에서 죄를 마음속에 실존하고 있는 죄의 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분명한 세력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 안에서 권능을 행하는 것입니다.

  (2) 죄는 율법의 명령도 거역하는 세력입니다. 죄는 율법의 두려움을 잘 압니다. 자기를 정죄하는 권세가 율법에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율법에 굴복하여 순종치 아니합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할 때 죄는 해도 된다고 우리를 기만합니다. 죄는 율법까지라도 정면 도전하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3) 죄는 기회를 타서 역사 합니다. 죄는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그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단 그 기회가 주어지면 여지없이 공격을 가합니다. 죄가 다윗을 공격하여 살인죄와 간음죄를 범하게 만들었을 때, 우리아의 아내가 벗은 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바라보는 그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죄는 자신이 역사할 기회를 포착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든 간교와 위장과 권능을 총동원하여 우리를 공격하여 그 죄 앞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바울은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죽었다’는 말은 죄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치 죽은 것 같다고 한 말입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일은 실상인즉 그 죄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1)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죄를 보여 주었습니다. 양심이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건 안 주건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모든 사람을 정좌하시기 때문에 율법이 이 세상에 없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했다”고 하셨습니다(창6:5). 하나님은 이 인간의 죄악을 한탄하셨지만 인간은 그것을 죄로 알지를 못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점점 퍼져 죄에 대해 관용해 진 것입니다.

  (2) 율법이 들어 온 후,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죄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우리 안에 숨겨 있는 죄의 정체를 여지없이 들어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오히려 계명에 나타나 있는 죄의 종목까지라도 이용하여 우리들 마음속에 죄악의 욕구를 심어 줍니다. 이것은 결코 계명이 거룩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계명에는 죄를 이길만한 권능이 부여되어 있지 못합니다. 계명의 사명은 죄를 이길 권능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는 일이 아니라 죄를 죄로 들어내고 그 죄를 정죄하는 사명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그 계명을 따르고자 하지만 육신이 약하여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양심까지 지배하고 있는 죄의 세력이 우리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세력 밑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갈2:16). 율법은 우리 인간에게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권능이 없는 반면 죄는 인간으로 자신 앞에 굴복케 할 수 있는 주인의 입장에 있으므로 율법이 금지하는 죄의 각 조항은 오히려 죄에게 그것까지도 범하게 만드는 호 재료로 작용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3.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1)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란 계명의 의문만 알고 있었지 그 계명이 주신 하나님의 참뜻을 모르고 있었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영접하기 이전에는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계명을 바로 지키는 생활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기 이전에는 바울도 율법으로 홈이 없는 자로 자부하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이 없는 자로 매도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외형적으로 지키는 생활을 해 오면서 자기들은 율법의 의를 이루고 있는 사람으로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참 뜻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율법의 창시자이시기 때문)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정죄 하셨습니다.

  (2) 바울은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자기는 죽었다고 했습니다. 계명이 이르렀다고 한 말은 그 계명의 참 뜻을 깨닫게 된 자신의 지금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은 우리에게 의를 줄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복당하여 인간에게 그 계명 때문에 탐심을 일으키게 할 뿐 아니라 그 계명이 자신의 모든 죄를 들추어냄으로 죄는 살아나게 되었고 자기는 죽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했을 때의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는 다만 계명과 죄와의 관계를 밝히는 일에 있어서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있는 상태에서 “나”라고 등장시킨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사실을 가상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이 내가 살았다고 한 말은 율법의 참 의미를 몰랐을 때의 자신의 형편입니다. 사실 바울은 자신이 계명으로 죽어 있는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그 계명의 참 뜻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율법의 직능을 깨닫게 되었을 때, 율법으로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되었고 그 죄를 정죄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자기가 죽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바로 인간들로 율법을 통하여 이런 사실을 깨달아 양심이나 율법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2:24절에서 이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PREV :   로마서 8장 밤중소리 
 NEXT :   로마서 6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