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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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밤중소리  01-13 | VIEW : 907


  ≈ 35 ≈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


  (본문 : 로마서 5 : 18 - 19)

  서 론 : 우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확신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구원의 확신을 모든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지시켜 주기 위하여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에 대하여 비교해 나가고 있습니다. 로마서 5, 6, 7장안에 있는 진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 대한 확실한 구원에 대한 증거입니다. 5:15부터 17절까지의 논술을 보면 아담 안에서의 신분과 그리스도안에서의 신분의 분명한 차이를 증거해 주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보여 주시는 18, 19 절 말씀은 이 같은 바울의 논증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1. 한 사람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가 행하신 의의 한 행동

  우리에게 있어서 아담이 무엇을 했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가 지금 당하고 있는 죄와 사망이 오직 이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의 정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가운데 한 사람의 의인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인류가 아담의 영향을 받아 죄를 범하기 쉬운 위험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인가? 이 세상에 존재해 있었던 죄에 물들기 쉬운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인가?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어떤 해답을 주고 있는가? “아담 한 사람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담 안에 있는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행하는 선이나 의로움을 바라보고 그것에 어떤 가치를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자기를 바라보려면 아담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신뢰나 불의 때문에서가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정죄 하심을 받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죄에 팔린 폼이 되었습니다(롬7:14). 나는 이미 아담 안에서 사망에 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롬5:12). 이 같은 신분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3) 바울은 이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행동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하여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담이 범한 죄와 그에게 내려진 정죄와 사망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이 강조를 반복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같은 적용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에도 미친다는 사실을 증거 하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그의 혈통적인 자손들에게 미친 영향은 결정적입니다. 아담의 자손 중에 비록 아담보다 의롭고 아담보다 도덕적이며 아담보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이유가 되어 의를 얻거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 다만 아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고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원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의 행동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달라져서가 아닙니다. 내가 이전보다 선해졌거나 의로워져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을 때에 오직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어 정죄함에 이르고 사망에 이르렀던 그 원리대로,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다만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하려는 요점은 한쪽이 확실하다면 다른 한쪽도 그와 똑같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아 사망에 이르렀다고 하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기는 언제나 죄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죄 받은 죄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한 사람의 순종하심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명령은 무엇인가? 그의 목숨을 죄인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골2:6-10).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깊은 영적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정죄 하심을 받아 사망에 이르렀다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로움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일은 얼마나 당연한 일이며, 아담의 불순종이 사망을 가져왔다면 그리스도의 순종은 보다 더 풍성한 의로움과 생명을 줄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바로 이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설명해 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이 놀랍고 엄청난 축복을 지금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 36 ≈        죄와 은혜


  (본문 : 로마서 5 : 20 - 21)

  서 론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일에 있어서 바울은 5:12절부터 계속해서 독특한 방법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은 현격한 대립 점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극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결과적으로 의와 은혜의 승리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대조는 바울이 증거 하려는 하나님의 의와 은혜의 다시없는 설명  이 되기 때문에 비슷한 이론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1. 율법이 가입한 이유

  바울의 율법론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반론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 중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 바울이 말하는 율법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의 논리에 있어서 바울의 주장은 율법무용론이 아닌가하는 이론이 제기된 것입니다. 그 이유로 바울은 율법이 사람에게 의를 줄 수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인) 정죄 할 수도 없다고 하니 그러면 율법은 무용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언뜻 이 말씀이 가리키는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처럼 생각됩니다. 가입했다는 말은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 가입은 뒤따라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따라 들어온 것인가? 율법이 가입했다는 것은 율법이 죄를 따라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죄나 은혜처럼 그 자체가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따라 들어 온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죄와 관련된 존재로, 죄 때문에 죄에 따라 가입된 존재가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2) 가입하였다는 말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뜻입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13). 여기서 우리는 율법과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 엄연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란 존재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이미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입니다.

  (3)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넘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하다는 말은 ‘플레오나조’로 풍성하다란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죄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가 있었으면서도 죄가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들어오자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죄가 일시에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숨겨졌던 죄가 폭로되었습니다. 이 같은 죄는 인간사회에 풍성할 정도로 넘치게 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이 세상이 죄악 세상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죄가 인간세상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율법으로 의를 얻거나 죄를 감소하거나 죄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왕 노릇하고 있으므로 더욱 깊은 죄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죄의 기준이며 심판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사정없이 인간의 죄악을 들추어내고 그 죄악을 정죄 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사람을 의롭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요 바로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어 그 죄를 정죄 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는 율법에서 정죄하고 있는 바와 같은 죄인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선행과 의로운 행실은 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영광에 두고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정죄 받기에 합당한 죄악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영접치도 아니 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과 공로를 인정치 않는 일은 그 무슨 죄보다도 더 정죄 받아 마땅한 죄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3:18).

  2. 넘치는 은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범법함이 없었기 때문에, 죄는 있었지만 그 죄가 죄로 인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개입하므로 율법에 의하여 죄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자 인간의 죄가 이 세상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의인이 하나도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개입시키신 하나님의 의도십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3:22).

  (1) 그러나 하나님은 그 율법과 함께 은혜를 개입시키신 것입니다. 율법을 개입시키신 일은 오직 은혜를 개입시키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요 방편에 불과하셨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의를 주실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으로 인간의 죄를 정죄 하심으로 죄의 모습과 그 정죄의 두려움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와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은혜는 죄보다 더욱 넘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넘쳤다는 말은 죄를 삼켰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죄를 덮어 그 위에 넘친 상태를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그 이유와 증거는 죄는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는 흥미로운 비교이기는 하지만 사실인즉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상대인 것입니다. 아담은 땅의 생명을 가진 자요,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을 가진 자이시며, 아담은 피조물이요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아담은 범죄자요 그리스도는 속죄 자이시며, 아담은 산영이요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고전15:45).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죄를 이기고 소멸할 수 있는 충만한 은혜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요1:14 ; 엡2:7). 주님의 그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는 죄인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셨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셨습니다(요5:24).

  결 론 : 율법은 죄를 행하면서도 죄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정죄의 사슬에 메이게 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죄 값인 사망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절망 속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율법과 함께 은혜의 선물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불순종에서 나온 죄의 권세를 능히 이기고 정복할 수 있으므로 죄의 세력보다 더욱 넘쳤습니다. 이것은 마치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처럼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게 된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정죄하면서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므로 인간의 생명을 정복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의를 주시기 때문에 이 의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배하는 왕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은혜가 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정죄를 이깁니다. 사망의 권세도 이깁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우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





  ≈ 37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의 신분


  (본문 : 로마서 6 : 1 - 2)

  서 론 : 바울의 구원교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론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되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의인이 되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그 무엇이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도 그 율법으로 의를 얻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미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바울의 논증에 있어서 영적인 깨달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반론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의 이 같은 논증은 인간으로 죄를 더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그러면 율법이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인간에게 의도 줄 수 없고 정죄 할 수 도 없는 것이라면 그런 율법이야 없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6장과 7장에서 이 반론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8장에 들어가 보다 심오한 구원의 교리를 펼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은혜에 거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바울은 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란 말로 서두를 꺼내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은 자기가 주장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메시지는 위대한 진리요 놀랄만한 발견이지만 그 안에는 오해의 위험한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첫 번째로 등장할 오해의 요소에 대해 1절에서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예상되는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바울의 구원론은 마치 죄는 은혜의 방편인 것처럼 들려지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말하고 있으니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언제나 죄 가운데서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I) 이렇게 주장하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이론을 세웁니다.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하신 말씀은 경건치 아니한 자(죄인)에게 의를 주셨으니 우리가 죄악의 생활을 계속한다한들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믿음이나 의의 존재란 얼마나 편리한 존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만 받으면 앞으로 계속적으로 범하는 죄악은 그들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지어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죄와는 상관이 없이 보증수표처럼 맡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구원파’라고 하는 이단교파의 주장이 이들과 같은 주장입니다. 초대교회의 니골라당의 교훈도 이 같은 주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계2:15).

  (2) 이들의 주장은 우리의 의는 우리의 어떤 의로운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것이므로 우리가 짓는 죄와는 상판이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3) 또 한가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아니하니 죄를 범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닌가? 라는 주장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제기되는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를 범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으니 죄를 범하는 일에 대하여 오히려 더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 알고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율법을 초월한 자들이니 그리스도인들과 율법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율법은 무용지물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율법의 완성이요 율법의 성취이기 때문에 율법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존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엔 죄가 없기 때문에 그런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 그 은혜에 대한 감사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규범을 배워 그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율법에 얽매이는 생활이거나 율법에서 의를 얻고자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감사에서 나오는 결실인 것입니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이 같은 반론들에 대하여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우리들이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이신청의의 구원교리를 설교하다보면 바울이 예상했던 이 같은 반론이 반드시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런 무리들에게 우리는 단연“그럴 수 없느니라”고 못을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반론은 “죄에 거하는 일은 은혜를 더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 죄는 사망 안에서만이 왕 노릇 하는 존재지 은혜 안에서는 발 부칠 곳이 없는 존재입니다. 은혜는 죄 안에서 역사 하지만 죄와 손을 잡거나 죄와 공동보조를 취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죄인이 은혜 안에 들어서면 이미 그의 죄는 은혜 안에서 죽어버리고 은혜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의 종인 것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신분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요5:24).

  (2) 바울은 죄에 대하여 우리는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격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뜻하거나 성화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죄로 죽었다는 것과 의로 인하여 살았다는 이것입니다. 죄로 죽었다는 신분이 없으면 의로 살았다는 신분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영적인 신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이나 모든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죽었다고 말할 때 이 사실은 영적인 신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육은 무익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신분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신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법적인 선언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은 그 무엇으로도 취소할 수 없고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살아지면 우리의 믿음은 파선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신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분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죄와 의에 대한 공동 운명을 말함인데 그리스도가 내 죄를 속죄해 주셨기 때문에 그와의 연합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의롭다하심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음으로 그와의 연합은 의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입각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6:11). 그럴 때 우리의 생활은 은혜 안에서 의가 왕 노릇하여 의의 열매를 맺는 생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결 론 :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제시한 반론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악의적인 비방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분명한 신분을 알아서 그 신분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38 ≈           그리스도와의 연합


  (본문 : 로마서 6 : 3 - 4)

  서 론 : 로마서 6장에는 세례란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일은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란 단어는 우리가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신청의의 구원교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이신칭의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세례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세례란 말의 의미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세례입니다(마28:19). 두 번째는 성령세례가 있습니다(행1:5). 다음 세 번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세례인데 바울은 이 로마서 6장에서 바로 이 세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바울은 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합한다고 말한 표현은 그 뜻이 세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는 표가 아닙니다. 세례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인 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이 된 사람이 그 진리를 깨닫고 그후에 이 사실에 대한 고백적인 인 침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세례는 눈에 보이는 의식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완벽한 의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온전한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구원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습니다. 연합이란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현재의 자신의 신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소유가 자기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함께 소유케 하시기 위해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아담의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었습니다. 그가 지은 죄에 동참하게 되었고 그 죄 안에서 함께 정죄 받게 되었고 그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지난날의 우리의 신분은 단지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다는 그 이유만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리스도안에서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날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한가지 사실 때문에 아담의 모든 소유가 내 것이 되었던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소유하신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요 그리스도인들의 칭의의 근거입니다. 이 같은 근거에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구원의 확신, 칭의의 확신,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승리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체험적이거나 주관적인 판단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린 객관적 사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의 신분을 보아도 우리가 언제 아담의 죄에 동참했으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아담의 정죄를 함께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체험적으로 객관적으로 찾아 낼 도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인간의 주검으로 그 실질적인 증거나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일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일이 없습니다. 그와 함께 부활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체험적으로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이 모든 일이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 때문에 그가 하신 모든 일이, 그의 가지고 계시는 그의 모든 소유가 나의 것이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사실을 무시하고 체험적인 면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구원을 찾고 사죄를 찾는다면 그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자신의 환경과 형편에 따라서 하루에도 수 차례씩 구원과 멸망, 의와 죄악사이를 들락날락하게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이 세례는 칭의 후의 인 침이나 상징이나 회개의 표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와 그리스도와의 전 인격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가지가 아닙니다. 어느 두 가지도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 전부를 의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이처럼 전 인격적인 연합이 이루어졌다면 다른 이유에서나 다른 구실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고 하는 이 한가지 사실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칭의에 있어서 만약 다른 그 무엇을 요구하거나 다른 조건을 바란다면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 모든 것의 소유는, 지난날에 아담 안에서 아담의 소유를 가졌던 원리와 똑같은 원리에서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그와의 연합이란 현재의 내 처지에서 당연히 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음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할 일뿐입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연합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어떤 침례교인들은 이 같은 바울의 표현을 그들이 교리 적으로 주장하는 침례와 연관시킵니다. 침례 시 사람이 물 속에 잠기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장사지내신 그리하여 무덤에 들어가신 일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합니다만 물 속에 침례로 잠기는 일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한 연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그런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이곳에서 물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칭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강조 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죽음 역시 기정사실화 된 것으로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함께 죽어야 한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함께 이미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연합이라면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에 그가 죽었으면 연합된 나도 그와 함께 죽었어야 합니다.

  (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이나 그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칭의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지 성화의 과정을 절명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장사되었다고 최종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사되었다는 말은 그 죽음의 확실성에 대한 더 어쩔 수 없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을 뿐 아니라 이미 장사까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신 후 장사되어 죄에서 끊어졌습니다. 완전한 단절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들 역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에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심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의 부활에도 연합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의 권능을 이기신 산 증거이며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고후5:17 ; 빌3:20 ; 엡2:6).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성화의 과정이며 이 성화는 온전한 칭의의 토대 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 39 ≈         연합이 의미하는 뜻


  (본문 : 로마서 6 : 5 - 7)

  서 론 : 바울은 6장에서 연합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연합은 우리로 그리스도안에 있게 만든 요소입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우리는 아담과 연합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이 그와 연합된 우리에게 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의와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왜 이곳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4절 마지막 절에서 이처럼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과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이유는 이 진리 위에 우리의 믿음의 터를 세워야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과의 연합과 부활과의 연합

  바울은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왜 만일이라고 하는 낱말을 사용하였을까? 이 말은 바울이 어떤 가정을 전제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 사실이라면”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강조 점을 부친 말입니다.

  (1)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한 본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스’로 같게 만들어진 것이란 의미가 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참뜻을 타나내 주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체험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건이며 지난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서 온 영적인 지식이지 실질적으로 우리가 체험한 사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모든 은혜와 구원의 역사는 모두 영적인 사역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63).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이나 우리의 살아남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이 나에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이 본 받는다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죽으심과의 연합은 죄에 대한 완전한 청산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모든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었음을 선포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죄는 영원히 청산된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연합하여 죄에 죽은 우리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문제인 이상 영원히 해결되었고 청산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주님의 그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죄의 속박아래서 영원히 벗어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의 부활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함께 살아났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살아 나셨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에 우리는 연합이 된 것입니다. 옛 생명이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나사로의 살아남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살아남은 옛 생명의 다시 살아남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은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은 부활이십니다. 그는 아담의 생명으로 죽으셨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새 생명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죽음과 살아남은 옛사람이 죽었고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이 둘간에는 아무런 연결이 없습니다. 옛사람과는 완전히 두절된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아담 안의 나의 생명과 그리스도안의 나의 생명이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우리가 옮겨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처럼 다시 살아나심을 본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신분은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아담 안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영원히 그리스도안에 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2.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

  바울은 6철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합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라고 초두에 말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의 바울의 논증을 통하여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옛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란 그리스도안에 들어오기 이전 아담 안에 있었던 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옛사람은 우리의 죄악성, 도덕성, 타락성,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옛사람이란 옛날 내 안에 있었던 부패한 성품을 지적하는 표현인 것이 아니라 지난날 아담 안에서 살아 온 나라고 하는 전인격을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아담과 연합함으로 정죄 받은 인간, 지옥 갈 인간, 이런 내 인간의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이런 나, 지금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와는 분리된 옛사람인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나와 이 옛사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나는 이제 옛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우리에게는 아직 옛사람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옛사람과 싸우는 생활을 해서 승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할 일은 우리의 옛사람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든 존재치 아니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이 옛사람인데 지금 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옛사람이 나에게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까?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올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나에게는 옛사람이 절대로 존재치 않는다”고 확신을 가지고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옛사람이 지금 자기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이 옛사람을 벗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일은 어리석고 헛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 론 :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처리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해답은 6절 하반부에서 명확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곳에 나와 있는 죄의 몸이란 우리의 옛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 그리스도안에 거하게 되었지만 이 새 생명의 몸은 온전히 성화 된 몸이 아니라 아직도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몸,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몸입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도 죄가 들어올 수 있고 죄의 유혹을 받아드릴 수 있는 연약한 그릇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우리의 몸을 멸하여야 죄에게 속아 종노릇하는 일을 모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멸한다는 말의 ‘카타르게오’란 말로 효력이 없게 하다, 헛되게 한다는 뜻으로 기회를 틈타 유혹하는 죄의 효력을 헛되게 할 수 있으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를 믿고 이 사실을 우리의 실  생활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에 거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에 죽은 사람들이며 우리의 육체에는 비록 죄의 유혹을 받아 드리는 악한 요소들이 잠재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생명으로 연합된 사실을 깨달아 죄의 유혹을 받는 우리 몸의 욕구를 헛되게 하여 다시는 죄의 종노릇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강조점인 것입니다.





  ≈ 40 ≈         죄에서 벗어난 우리


  (본문 : 로마서 6 : 6 - 7)

  서 론 :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새로운 탄생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엄연한 사실로 실질적이고 현실적임을 거듭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우리의 새로운 존재를 강조하는 이유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새로운 지침을 주장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 일”에 대한 말씀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1.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의 두 가지 결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대로 우리가 아직까지 배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해서 다시 언급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옛사람”이란 말과 “죄의 몸”이란 말에 대한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옛사람이란 아담 안에서 있었던 나의 전부를 말합니다. 죄의 전체적인 지배를 받았던 나,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나, 이 같은 나의 전 인격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죄의 몸이란 그런 우리의 옛사람과는 판이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전체적인 인격을 표현하는 죄악된 우리의 인격적인 몸이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있었던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그때와는 상관이 없는 전혀 다른 인격, 의롭다하심을 선언 받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이 같은 우리의 몸이 죄의 지배에서는 벗어났고 율법의 정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죄악성에서조차 벗어날 수 있는 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 몸에는 그 옛날 옛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습성, 죄악성 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죄가 유혹하여 범죄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악성을 지녔다고 하는 말은 죄의 지배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몸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범해도 그 죄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나란 말은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난 나를 가리킨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내 속에 죄가 하는 짓이요 나는 다만 그 죄에게 미혹을 받아 죄를 짓는 장소로 제공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런 원리를 이처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롬7:19,20).

  지금 우리의 몸에는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옛사람의 습성이 머물러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죄악성이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 죄의 몸이 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옛사람이 죽은 것은 바로 이 같은 죄의 영향에서까지 벗어나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聖化)를 이루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2) 또 다른 이유로 바울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의 종으로서의 우리의 신분은 옛사람으로, 이 같은 신분을 가진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내 몸에 죄를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범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미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으므로 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쉽게 죄의 영향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죽게 하신 것은 다시는 옛사람처럼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란 뜻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리가 멸해야 할 죄의 몸

  죄의 몸이 멸한다는 말을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말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들 옛사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죽은 우리의 옛사람이 또다시 죽어야한다는 말은 이상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1) 우리의 죄의 몸은 죽어져야 합니다. 나의 옛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옛사람을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죽일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죄의 몸이란 이런 우리의 옛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을 정복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의 여부를 시험해 보시려고 얼마간의 가나안 족속을 남겨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로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영원한 의를 주셨지만 우리들 몸 안에 죄의 영향력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2) 우리의 죄는 내 안이 아니요 내 지체 속에 역사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라고 하는 나의 전인격은 죄에서 벗어난 몸이요 의롭다 하심을 선언 받은 온전한 몸입니다. 죄는 내 안에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죽을 우리의 몸 안에서 곧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만 역사 하는 것입니다. 이 몸은 우리의 구원받은 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몸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 받을 때 죽을 지체이기 때문에 구원이나 정죄에 영향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의 지체는 우리의 생명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옛 나의 습성이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의 신앙적인 태도

  위와 같은 사도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거듭난 우리들에게도 옛사람에게 있었던 죄의 본성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따라 그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때 자기는 이제 죄의 종이 되었다, 나는 이제 죄인이 되었으니 구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냐?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냐? 이 같은 상념에 사로잡혀 낙심하고 타락하고 교회를 등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바른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바른 신앙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 내가 범한 죄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지체 속에 있는 죄가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다만 의롭다 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몸에서 우리를 다시 지배하려고 죄로 유혹하는 이것까지도 이기게 하시기 위해서 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와 상관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2) 그러면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드릴 필요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자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롬6:12,13).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지 못하고 죄의 종으로 다시금 죄에게 드린바 되었으니 이일이야말로 얼마나 한심스럽고 탄식할만한 일입니까?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저 버리는 생활을 했음을 뼈저리게 통회하는 회개가 마땅히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의의 종으로 돌이키는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하는 바는 죄의 종노릇했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죄의 유혹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죄의 종노릇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는 경종이 되는 것입니다.





  ≈ 41 ≈         주님의 부활의 참 의미


  (본문 : 로마서 6 : 8 - 10)

  서 론 :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철저하게 복음의 진수를 밝혀 주고 있는데 그는 복음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살아나심입니다(고전15:3-4). 바울은 이제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일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진리의 설명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참 뜻을 되새겨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바울은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연합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하는 사실은 의미가 매우 크며 그 사실의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의 처리가 결정되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한 그 진리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기 위하여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사건을 재차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에 확실히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입니다. 아담 안에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 죄의 체제 아래서 그 종으로 지배를 받아 온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자칫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롬5:20, 6:1). 이 같은 반론은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될 것이 아니냐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바울은 이 같은 잘못된 오해를 반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합하여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롬6:2).

  (2)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살 줄 을 믿는다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합하여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연합한 자가 된다고 하는 이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하는 표현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의 부활을 뜻하는 미래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광범위한 해석에는 그것도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 바울이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과는 계속된 생명이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살아 온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 생명은 이제 그 어느 곳에도 존재치 아니합니다. 장사까지 지내버렸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수도 없습니다. 영원히 결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우리의 생명은 전혀 새로운 생명입니다. 아담에게 물려받은 생명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생명입니다. 무덤 안에 장사지낸 바 된 그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새롭게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으로 죽은 나와 새 사람으로 살아난 나와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는 전혀 별개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전의 죄 가운데서 살아온 그 옛사람과는 상관이 없고 그리스도안의 새 생명가운데서 새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이 같은 구원의 도리를 분명히 하려는데 있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

  우리는 이제 9절에 있는 말씀에 접하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연결된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 국한된 사건만을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사건을 철저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의 죽음과 부활사건이 그리스도교의 전체적인 교리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시는 사건이 있기 전에 죽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는 죽기 이전의 삶이 있으셨습니다. 주검이전의 그리스도의 삶은 죄의 지배아래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죄의 권세아래서 살아가는 생애였습니다. 그에게는 죄는 없으셨지만 스스로 죄와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자신의 선택을 따라 죄와 율법아래 있는 세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우리를 위해서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14,15).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으로 이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이제 다시 죽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죽으실 수 없습니다. 그는 죽음의 사역을 이미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으로 모든 문제를 다 이루었습니다. 그는 다시 죽으시려고 오실 필요도 없고 죽으실 수도 없습니다.

  (3)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사망을 이긴 증거입니다. 새롭게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 다시는 사망의 권세가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율법을 이루신 일을 증거 해 줍니다. 그는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율법은 정죄에 있고 정죄는 곧 죽음인데 그리스도는 이 같은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죄와는 상관이 없는 새로운 생명, 의로우심으로 살아 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자신이 창세 이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그 의로우심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시지 아니하셔도 역시 그의 영적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위치에 돌아가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그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전혀 우리를 위하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의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4:25). 우리는 범사에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때문에 그가 부활하셔야 우리들이 새로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이 되고 그리스도의 의에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 의미는 오직 우리와의 연합에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4)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는 죄로 말미암아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죄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지배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죄로 인하여 죽으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대신한 죄를 말합니다. 단번의 죽으심이란 오직 한번만의 죽으심이란 뜻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한번만으로 족하십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한번뿐입니다. 그 한번뿐인 죽으심으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의 사역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그가 부활하심으로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전의 영광의 보좌에로의 복귀를 의미하시는 말입니다.

  결 론 : 바울은 왜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보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확실해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오는 진리가 분명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42 ≈         승리적인 생활의 방법


  (본문 : 로마서 6 : 10 - 11)

  서 론 : 바울은 11절에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직까지 바울이 그토록 간절히 증거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결론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아직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자의 그 연합의 효과에 대하여 증거 했던 것입니다.

  1.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

  바울이 10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살으심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 같은 모든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1절에서 “이와 같이”라고 표현된 말에서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 “여길지어다”의 여기라는 말은 어떤 가정적인 말에 동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로기조마이’로 원래가 ‘로고스’에서 유래된 말로 세다, 계산하다의 뜻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계산된 말씀으로 그대로 믿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마쳐집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는다면 그 연합이 우리의 신분에 미친 사건 그 자체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것이요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을 대하여 하신 것 같이, 너희 자신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나 살아나심의 의미가 전혀 없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뜻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2) 여기라는 말은 믿으라는 말로써 체험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체험이 수반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전부입니다. 믿음에 육신적인 체험이 따라야 한다면 이미 그것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하여 죽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체험이거나 그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체험의 토대 위에서 출발한다면 그에게서 아무런 결실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토대 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3)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체험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 해답이 불가능해 집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하는데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그는 분명히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체험은 바로 우리의 체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그 때 그 몸을 그대로 소유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체험적으로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나를 위한 죽으심이기 때문에 나의 죽음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줄로 여기고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누구라도 이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면 그런 사람은 실상인즉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도 믿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으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죄를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끊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죄가 내 안에서 죽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나는 이제 아담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아 온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죄는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나에게 명령하거나 지배할 권능을 상실했으며 나는 완전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죄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4) 이제 죄는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권능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죄의식이 있고 죄의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옛사람에게 있었던 그 습성이 아직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습성의 완전한 청산은 아마 우리의 육신이 죽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옛사람이 아직 어디인가에 살아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사람들입니다. 죄의 기능도 우리에게 작용될 수 없으며 죄의 권능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에게 비 체험적인 사실에 대하여 여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이 바로 이 시점에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다음에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끝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은 이전 옛사람의 연장이 아닙니다. 이전 죄 아래로 들어오셨던 육신의 옛사람은 죽으시고 장사되심으로 끝장이 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실 수 없는 것은 이미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나셨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어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이전에 세상에 살아 계실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계셨지만 우리로 인하여 죄의 영역 안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은 그를 다시 이 영역으로 들어오실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다른 영역에서 살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기 그 이전의 영역으로 돌아가셔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십니다.

  (1) 그리스도인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영역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가신다면 우리도 그리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경험은 모두가 우리의 경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된 연합이란 말속에 함유된 뜻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었으며 죄의 종도 아니요 죄의 지배를 받아야 할 신분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은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야 하는 영역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신분을 의미하는 말이며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밝혀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살아가고 계시는 삶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롬6:2). 이 같은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이처럼 죄의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삶의 신분으로 바뀐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새로운 삶은 실질적으로 가능케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는 죄의 법에 얽매어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빌1:6 ; 엡3:20,21).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이 바로 이런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죄와 접촉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종으로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죄의 영향은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과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검이 나를 주장치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주검은 육신의 잠에 불과합니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같이 영원히 살아있으며 잠자는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 43 ≈        성결 생활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본문 : 로마서 6 : 12 - 14)

  서 론 : 사도 바울은 11절까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신분에 관한 교리적인 논술에 주안점올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교리적인 지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입각한 교리적인 지식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근본적인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는 언제나 지식에 머물러 있을 뿐 그것이 우리의 생활을 성결케 하거나 성화 시키지 못합니다. 교리적인 지식에는 그 교리에 명시된 대로 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지고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12절에서부터 시도하고 있습니다.

  1. 죽을 몸에서 왕 노릇 하려는 죄

  바울은 11절에서 12절을 잇는 말씀의 연결에 있어서 “그러므로”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란 말을 쓰기 이전의 논술에서는 교리적인 이론을 선명히 밝혔습니다. 그런데 12절로부터는 자신이 논술한 교리적인 지식의 바탕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생활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 징검다리 격으로 “그러므로”란 말을 중간에 걸쳐놓은 것입니다.

  (1)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로 너희 죽을 몸이란 표현을 “죄로 인하여 죽게된 너희 몸”이란 식으로 해석을 부치면 안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죄로 죽게된 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 죽을 몸에 죄로 다시는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너희 죽을 몸”이란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너희 죽을 몸”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2) “죽을 몸”이란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옛사람은 온전히 죽었을 뿐 아니라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죽을 몸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죽을 몸이란 우리의 육신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우리의 육신은 불가불 죽을 몸입니다. 우리의 참 생명은 지금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있습니다(엡2:6). 그리고 우리의 이 육신(몸)도 장차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그 영화로운 몸으로 연합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탄식함으로 그 날을 기다립니다(롬8:23). 그러나 그날까지는 우리의 육체는 후패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이 육신은 죽을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부활의 영광을 위한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몸”이란 이름이 부쳐진 것입니다.

  (3)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이 죽을 몸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옛사람과 구분되기는 하지만 죽을 몸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처럼 소망이 없는 몸이 아닙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했습니다(고전15:53). 이 죽을 몸은 분명히 옛사람과 구분된 전혀 별개의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옛사람의 습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본능이 그대로 있는데 이 본능 이 죄의 유혹을 받아 죄의 지배아래 놓여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의 죽을 몸만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의 생명이나 우리의 인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결된 생활을 이루기 위해 남아 있는 중요한 과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우리의 죽을 몸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파멸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에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죄의 종처럼 죄의 이끌림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몸은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된 몸이기 때문에 버린바 될 수 없습니다.

  2.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죄가 왕 노릇 한다는 말은 “죽을 몸”에 국한된 말입니다. 죄는 우리를 지배하거나 우리의 인격이나 생명을 지배하는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와 죄와의 주종 관계는 이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완전히 끊어져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같은 권고가 우리의 “죽을 몸”에 국한시킨 것이란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1)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죽을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리 육신(죽을 몸)의  사욕을 건드리고 유혹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이후에도 죄로 인한 심각한 문제가 계속 머물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의 몸에서 왕 노릇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죽을 몸이 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응당 자기를 지배해야할 의와 은혜의 생명의 역사를 스스로 거역하고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이미 관계가 영원히 끊어져 버린 죄를 다시 이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죄는 우리의 육신 안에서 가짜 왕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가짜 왕은 잠정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죽을 몸을 마음대로 지배 하지만 조만간 하나님의 간섭의 손길이 나타나 하나님의 권능의 손안에서 강권적으로 성결된 생활로 이끄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로 이 같은 죄로 우리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몸의 사욕을 순종치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했습니다 죄가 그리스도들을 유혹하는 무기는 몸의 사욕입니다. 몸의 사욕이란 인간의 선한 본능을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 육신의 뜻대로 쓰려는 욕심입니다. 죄는 그리스도인의 욕심을 그 유혹의 미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물질적인 욕구를,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유혹합니다. 인간의 성적인 욕구를, 음란으로 유혹합니다. 인간의 명예에 대한 욕구를, 교만으로 유혹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같은 죽을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치 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말은 우리는 그같은 사욕에 순종 아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죄의 요구에 불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 안에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이긴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모든 권세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이길 수 있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애를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사욕을 이기려고만 한다면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시는 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14). 우리에게는 이 같은 자기 욕심을 이기고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빌1:6; 고전1:8).

  결 론 :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죄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입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나는 이제 죄의 지배권밖에 있습니다. 죄는 이제는 나의 주인으로 나를 종처럼 부려먹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죄는 나의 죽을 몸 안에 있는 본능에 의한 각종 욕구를 사욕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나의 이 죽을 몸이 죽기까지 끊임없이 유혹하므로 나를 그의 종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죄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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