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이메일 : bamjoongsori@bamjoongsori.org

 

  
로마서 5장
 밤중소리  01-13 | VIEW : 1,824


  ≈ 26 ≈            하나님과의 화평


  (본문 : 로마서 5 : 1 - 2)

  서 론 : 바울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의를 얻은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의를 얻은 사람의 특권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그리고 의를 얻은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면 율법아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두려움과 정죄 의식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생활을 못한다면 세상에 얽매인 생활 속에서 지난날의 육신의 정욕과 탐심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1. 믿음으로 의를 얻은 우리

  화평이란 말은 화목, 평안, 평강을 뜻합니다. 이 말씀이 많은 경우 화목을 누리게 되었다 란 말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면 그것은 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I) 믿음으로 의를 얻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기 전 까지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화목이 아니라 원수지간으로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먼저 하나님과의 원수의 담이 헐어져야 합니다. 원수의 담이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죄악을 말합니다. 이 죄악의 담이 무너지지 아니하고는 화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담을 허시는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이 같은 화목이 가능케 된 것입니다(엡2:14-18).

  하나님과의 화평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싼 길이 열려야 합니다.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마지막 외치심과 함께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그 찢어진 휘장 한가운데의 길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입니다. 이길 외엔 다른 아무런 길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4:12).

  하나님과의 화평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가능합니다. 탕자가 입고 있었던 옷을 벗기고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 새 옷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옷입니다. 이 옷을 입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 화평은 고사하고 진노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롬5:9).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된 것은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평의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
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 사람의 생활은 어떻게 나타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의 생활은 첫째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 나타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인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화평의 교재를 이루십니다(요4:23,24). 다음에 하나님과의 화평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소원의 간구로 하나님과의 화평의 표시입니다. 진실한 간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과 응답이 나타납니다(시145:18,19).

  다음에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생활에 들어간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새로운 삶에 들어갑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명한 말씀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자들의 생활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10:31).

  2.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 우리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서 있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우리의 영적인 장소를 말합니다. 이 자리는 곧 은혜에 들어간 자리라고 밝혀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는 다른 자리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자리인 것입니다. 믿음과 은혜란 말은 각기 다른 뜻을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연결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출발점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1) 그러므로 은혜 안에 들어갔다는 말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문은 구원의 문인데 이 문은 믿음으로만 들어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2) 아무나 믿음으로 은혜 안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나 은혜는 사람이 자기 힘이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선물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2:8 ; 요 4:10 ; 행 2:38).

  믿음은 모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살후3:2).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행13:48 ; 엡1:4).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주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고전12:3 ; 롬8:9).

  (3) 그리고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어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후사의 영광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했습니다(롬8:17,18). 우리는 아직 장래 우리에게 나타날 소망을 어떻게 누리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는 없지만 장차 주님이 나타나심이 되면 그와 같이될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요3:2,3). 이 같은 소망을 가진 자의 생활태도란 분명합니다. 즐거워하는 생활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현실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중에도 이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참여하는 일에 왜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 론 :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의를 얻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을 위한 모든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들이니 화평을 누리는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소망의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 27 ≈            성도의 환난과 소망


  (본문 : 로마서 5 : 3 - 4)

  서 론 :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환난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누구나 무시하거니 경히 여길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환난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환난에 성경적으로 대처하는 슬기로운 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은 신앙생활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으로 말미암은 유익을 깨달아 우리의 생활에 환난이 올 때 이를 지혜롭게 대처하여 손실이 아니라 유익을 가져오도록 해야 합니다. 환난은 신앙생활의 파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에 찾아오는 환난을 통하여 놀라운 영적인 풍성한 결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비록 우리 앞에 환난이 온다고 해도 오히려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중생한 성도들의 생활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환난이 온다고 해도 즐거워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이란 말은 ‘들립시스’로 억누른다. 괴롭힌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상태를 말합니다.
  (1)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환난이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님께서도 필요 없이 아무에게나 환난을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처음에 인간 사회에 환난이 도래한 것은 죄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아담이 이마에 땀이 흘러야 식물 을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라든가 하와가 잉태하는 고통을 받은 것 등은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우리들의 생애에 당하는 환난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로 인한 것임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레26:14-20).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찾아오는 경우의 환난도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욥1:11-12). 이 환난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불가피하게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환난에 동참하는 환난도 있습니다(계1:9). 이 환난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으로 동참해야 할 환난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환난을 주시는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범한 죄의 형벌로 주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윗 왕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삼하12:9-12).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죄는 사유함을 받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형벌이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2:8). 다음에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환난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대하15:4). 탕자는 분명히 그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아버지 집을 떠나 방탕한 생애를 지내고 있었지만 그 아들의 지위는 살아지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흉년을 만나 돼지 치는 집의 목동으로 일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기에도 주린 것은 그가 당한 환난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시게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눅15:11-24).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또한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1:7). 그리고 또한 우리들의 생활에 환난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신8:3).

  (3)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당할 때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내 보입니다. 낙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잠24:10). 이런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역 자로 쓸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환난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번번이 거역했다가 수다한 징계를 맞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환난이 닥쳐왔을 때 하나님 앞에 불평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 환난이 더 오래 계속될 것입니다.

  환난을 만났을 때에 성도들의 신앙적인 태도는 먼저 자신에게 온 환난에 복종하는 자세입니다(욥1:20,21). 다음에 성도들은 그가 당하는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시18:6, 34:17). 그리고 환난 날에 성도들의 취할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의뢰입니다(시37:39, 46:1). 다음에 환난을 당한 성도들은 그 환난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롬12:12). 마지막으로 환난을 당한 성도들의 가장 높은 신앙적인 자세는 즐거워하는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에서도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셨고, 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 1:2-4).

  그러면 누가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나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뒤에 오는 결과를 바라 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즐거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사도 바울이 환난을 즐거워하는 이유로 맨 마지막에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 과정이 몇 가지 들어가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1) 환난은 성도들로 어려움 속에서 인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환난은 일정한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찾아오고 물러서기까지는 일정한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그 환난의 기간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인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인내심을 하나님은 이처럼 환난을 통해서 공부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환난 중에 인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난을 당했을 때 그 환난을 인내로 이길 사람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눅8:15).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보고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롬5:2). 다음에 믿음의 시련으로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약1:3).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서 그의 자녀들에게 인내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내의 훈련을 통해서 소망의 경주에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연단이란 말은 ‘도키메’로, 이 말의 뜻은 인정된 성격이나 기질, 자격, 신분을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정해진 목적을 위해서 맹렬히 연습시켜 순수한 것으로 증명되게 하는 것입니다. 연단은 시련과 다릅니다. 시련이 시작이라면 연단은 그 결과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루고 그 결과 연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 사람은 이미 가장 순수한 것으로 증명되는 결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는 반드시 결실합니다(눅8:15). 성도의 인내의 결과는 “너희로 온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약1:4). 인내는 마치 불 풀무 속에 들어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쇠붙이처럼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사람으로 연단 시키십니다.

  결 론 : 바울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되는 일입니다. 이 후사를 이루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8:17). 이 같은 우리의 소망은 환난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들이 환난을 당할 때 온전히 인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 인내가 연단이 되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품은 그 위대한 영광의 소망을 이루는 원동력이 될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 28 ≈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본문 : 로마서 5 : 5 - 8)

  서 론 :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무엇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었는가? 우리의 구원이 어떤 대가를 치러 받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적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적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셨는가에 대한 영적 지식이 부족한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을 인간의 이기적인 사랑과 비교해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의 소망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에 대하여 모욕적인 언사로 부끄러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천국을 가보고 왔느냐” “천국이 어데 있느냐” “천국을 보여 달라 그러면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겠노라” 등등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우리들의 소망을 헛된 것이 아닐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란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불신으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 한다고 하셨습니다.

  (1)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말은 우리의 소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너무나도 값진 것입니다.󰡒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성취까지에는 많은 시련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소망이 불확실하여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면 우리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신기루처럼, 우리가 확실하게 소유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공허한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야말로 부끄러운 소망, 헛된 소망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2) 그러면 우리의 소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닌 증거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부은바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은바 되었다는 말은 ‘엑케오’란 말로 쏟아져 나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폭포처럼 쏟아진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망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 바 된 것이기 때문에 변함이 없으며 거짓이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이 성령은 또한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심어 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야의 언약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그 언약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구원의 속죄의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치 아니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연약함이란 몹시 약하여 힘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선고는 사형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선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영원한 생명과 하늘에 예비된 영광의 후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됨으로 우리의 소망은 그 어떤 경우에도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같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타난 사랑의 확증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알려주기 위하여 인간의 극치한 사랑과 비교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랑의 확증을 논함에 있어서 인간의 죽음과 연결 시켰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남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3).

  (1)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지신의 생명을 회생하는 일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의인을 위한 경우요, 다른 하나는 선인을 위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의인을 위한 경우는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의인이란 ‘디카이오스’로 결백한 사람, 공의로운 사람, 무죄한 사람을 뜻합니다. 쉽지 않다는 말은 가까스로 있다는 말로 거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자신들이 죽는 자리에까지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배반할지라도 자기만큼은 주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마26:35). 그러나 그들에게 생명의 위기가 왔을 때에 그들은 한결같이 도망쳐 버렸고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조차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인이란 말은 ‘아가도스’로 좋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물론 이 선한 사람이란 말속엔 의롭다고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보다 사랑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 말로 의로우면서도 사랑이 많은 사람의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의롭고 선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혹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보면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선한 남편을 대신하는 일이라면, 선한 자식을 위한 경우라면 혹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 같은 경우를 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고상해도 목숨을 바쳐가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며 대가 적인 사랑입니다.

  (3)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함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의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베풀 수 없는 사랑을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나타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죄인이란 하나님을 대척하는 자를 말합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을 행하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의와 선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죄인을 말합니다(롬3:10-18). 이 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은 인간의 사상과 사랑을 초월하신 신비적인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고 했습니다(요3:16).

  결 론 : 이것은 하나님의 큰사랑이요 큰 구원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3).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랑이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부은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소망을 견고히 잡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29 ≈          구원받은 자의 생활


  (본문 : 로마서 5 : 9 - 11)

  서 론 :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귀중한 대가를 치른 결과에서 온 것입니다.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으며 우리의 의나 구원이나 소망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함을 얻은 이후의 생활에 대하여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말씀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란 표현이 계속적으로 세 번씩이나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9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10절에서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11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말함으로써 이 모든 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1.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된 의에 대하여 로마서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의는 순전히 은혜임을 밝히면서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 믿음자체에 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가 그 근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의는 그리스도의 피가 그 발생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는 사죄의 은총이 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9:22).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망은 곧 피 흘림을 말합니다. 그러나 죄인의 피 흘림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죄 없는 자의 피 흘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따라 짐승으로써 피 흘림의 제물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짐승의 피 흘림은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 흘리심임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피 흘리심으로써 정결함을 얻은 것입니다(히9:14, 22 ; 마26:28).

  (2) 그리스도의 피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사죄뿐 아니라 우리에게 깨끗함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 1:7-9). 그리스도의 피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우리로 그리스도안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는 일에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였습니다.

  (3)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니고 있는 의는 “얻을 것이라”가 아닙니다. “얻을 수 있다”가 아닙니다. “얻었느니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과거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유는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한 소망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이다”가 아닙니다.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그 의를 이미 소유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를 보시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부담이 없습니다. 넉넉히 소유할 수 있고 넉넉히 이길 수 있으며 넉넉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소유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소유로 주셨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결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에 대하여 세 가지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란 것이고 둘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요 세 번째는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죽기 이전에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리스도안에 거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이 진노아래 있게 됩니다.  진노란 말은 다시는 노여움에서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격노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의 한계를 넘은 노여움이십니다(벧후3:8,9). 하나님은 이 노여움으로 인류를 심판하십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히9:27). 이 심판은 사람이 죽은 후에 누구나 면할 수 없는 영적인 심판입니다(녹16:19-31).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진노는 인류의 종말에 흰 보좌심판대 앞에서 모든 인류에게 일시에 벌어질 것입니다(계20:12-15).

  (3)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사죄는 또한 하나님과의 화목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일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그 죄가 용서받았다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자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은 또한 화목제물로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골1:20). 그러면 하나님과의 화목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원수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의 기업의 후사가 되었다고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인간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4)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과 화목된 자의 당연한 결과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자의 구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3. 화목된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즐거워한다는 말은 ‘카우카오마이’로 자랑한다. 뽐낸다는 뜻입니다.

  진노에서 벗어났으니 두려워 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죄책에 눌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을 얻었은즉 담대함으로 소망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확실하고 영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고 말했습니다(롬8:35).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신 데 누가 정죄하겠느냐”고 했습니다(롬8:33).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고 했습니다(롬8:3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했습니다(롬8:32).

  결 론 : 그러므로 오직 즐거워하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즐거움이 없는 생활은 아직 은혜가운데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여 즐거워하는 생활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된 이 한가지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의 생애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환난 중에도, 고난 중에도, 핍박 중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주석 설교 \ 123


  


  (본문 : 로마서 5 : 12)

  서 론 : 한사람으로 말미암은 죄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의가 온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는 일에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또 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성경해석과 인류의 구속사에 대한 바른 해답을 주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1.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

  우리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씀에서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은 “좋았더라”의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엿새동안에 창조하신 후 이처럼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창1:31).

  땅에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들이 무성하여 인간의 충족한 식물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지면에는 육축과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온 지면에 깔려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각종 물고기들로 채워져 넓고 깊은 바다 속을 마음껏 헤엄쳐 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들의 거처인 에덴에서 그곳에서 탐스럽게 결실하고 있는 여러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서 행복스럽게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좋았더라”의 결실이었기 때문에 그 창조 가운데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2.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이 같은 세상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1) 아담은 생명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명하신 생명언약은 이러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 2:16,17). 언약이란 인격체로 창조된 인간에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과 같은 인격체로 지움을 받은 사실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조건으로 그가 순종해야할 한가지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이 언약은 아담이 능히 지킬 수 있는 합리적인 언약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인간에게 주는 다른 또 하나의 생명언약인줄로 잘못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율법은 생명언약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20, 갈2:16, 2:21). 율법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있어서 그 구원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2) 아담의 죄에 뱀이 가담한 것은 죄의 기원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을 죄의 종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롬6:17,20). 죄의 종이란 말은 사단의 종이란 말과 같은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단으로부터 죄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밝혀주고 있는 죄의 기원은 뱀으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뱀이 사단이었느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했습니다(창3:1). 뱀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창조 역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예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창1:31). 그러면 어찌하여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간교하다는 말은 간사하고 교활한 성품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것은 간교한 사단이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미혹했기 때문에 뱀이 간교한 존재로 등장한 것입니다. 뱀에게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건넨 것입니다. 그리고 뱀은 하와를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한다는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이 같은 간교한 지혜는 들짐승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사단이 뱀 속에 들어가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죄로 인도한 것입니다.

  (3) 죄를 지은 장본인은 하와였지만 아담이 모든 책임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도 그 실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담은 아내인 하와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진 것은 하와가 그 실과를 먹은 후인 것이 아니라 아담이 먹은 후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로 알았다”고 했습니다(창3:6,7). 우리는 여기서 죄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단지 실과를 먹은 일이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 죄가 되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처럼 반론을 제기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안 먹은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과의 언약은 불순종에 대한 대가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사망선언이기 때문에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 불순종의 결과는 아담에게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아담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9,10).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라고 말한 아담은 실과를 먹기 이전에도 벗은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벗은 몸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게 된 것은 선악을 알게 되었고 눈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유혹한 말이 정말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것이 선한 에덴에서 그들은 악을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게되었을 뿔 아니라 그 악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악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악을 바라보는 일에 밝아졌습니다. 그 결과 심히 좋고 선한 모든 것에 대하여 정욕과 탐심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눈이 새롭게 열린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3.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의 결과

  아담 한 사람의 죄는 인류사회에 다음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들어냈습니다.

  (I) 죄가 세상에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이 세상에 악한 죄가 들어 온 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담은 이 세상에 죄를 들여 온 최초의 죄인이 된 것입니다. 아담이 들여 온 이 죄는 심히 좋았던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인간의 고난도, 만물의 탄식도, 땅의 저주도 아 아담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2) 사망이 왔다고 했습니다. 사망이란 육신의 주검을 말합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에 따라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망의 선고는 당장 실현되는 주검의 선고가 아닙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에 아담은 땅에서 삶의 제한된 지속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아담의 저주는 그 자손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검의 선언은 신약시대에 와서 영원한 주검인 영적인 주검까지 포함된 뜻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계20:14,15).

  결 론 : 이처럼 한 사람 아담의 죄는 전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선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아담은 최초의 죄인이 되었고 그 결과 죽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아담은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와 같은 죄인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그들도 역시 아담과 같은 죄인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죄에서 건지심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며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아담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 31 ≈              죄와 율법


  (본문 : 로마서 5 : 13)

  서 론 :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죄가 율법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증거로 사망을 들 수 있습니다. 사망은 죄 값으로 온 것이기 때에 비록 죄가 율법으로 죄로 드러나 정죄 받기 이전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사망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은 죄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년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에 따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죽게 되었으며 이것이 죄 값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성경에서는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롬5:12).

  1. 율법이 있기 이전의 죄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을 말합니다. 이처럼 모세가 계명을 받기 전에도 이 세상에는 많은 인류들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건 죄가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가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죽음으로 아담과 함께 매장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자손들에게 그의 죄가 그대로 계속되어 내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같은 죄가 이 세상에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이 범한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담과 똑같은 죄로 말미암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의 주검을 아담처럼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 다음에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거슬린 죄가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지혜로 우심 등 하나님의 이 같은 형상이 인간에게 어느 정도 심겨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이 창조하심을 받은 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 이 같은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졌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간의 타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타락은 안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의 인격가운데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지만 그 그림자는 그대로 살아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2:14).

  (3) 아담에게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아래 서 있는 하와에게 뱀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유혹했습니다(창3:5). 사단의 이 같은 유혹은 겉으로는 사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에 하와에게 한 말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 하와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는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사단의 악을 받아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에덴에는 악이 존재치 아니했으며 아담에게는 악의 그림자마저도 없었기 때문에 악을 알 필요가 없었으며 또한 선악을 대조하는 지각도 필요 없었습니다. 아담의 밝아진다는 눈은 육신의 눈이었고 이 눈이 사단의 말처럼 밝아지자 그의 몸에 정욕과 탐심과 시기와 투기와 부끄러움이 들어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선악으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이제 선을 알고는 있었지만 행할 능력은 상실해 버렸고 악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인 줄 알았지만 이 악을 물리치고 그 악을 이길 수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롬7:23).

  2.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무엇인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지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I) 이것은 죄가 아니란 말이 아닙니다.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인정치 아니했다는 말인데 이것은 율법적인 정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들입니다. 이 같은 증거는 양심의 율법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서로 송사 함으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들어내 놓고야 마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한 어떤 형벌을 제정치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나타난 죄에 대한 보응과 형벌이 가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은 율법이 밝혀주고 있는 죄에 대한 응징입니다(마5:38). 죄에 대한 응징이 없는 율법은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없을 때에도 분명히 죄는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응징이 없었습니다. 법 조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법률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있는 죄는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죄임에는 틀림없지만 형벌은 면죄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같은 미비한 점을 보충해서 법을 개정합니다. 일단 법이 개정되어 그것을 죄로 다스리게 된다면 당연히 응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죄를 죄로 들어내지 아니하였을 뿐이란 뜻입니다. 율법의 가장 뚜렷한 사명 중에 하나는 죄를 죄로 들어내 놓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죄악이 관용 될 수록 그 마음의 율법인 양심이 더럽혀 가기 때문에 죄를 죄로 인정치 아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들에게 그들의 죄를 분명히 나타내기 위하여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영원히 지을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는 돌비에 죄를 죄로 들어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법을 새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영원성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눅16:17). 그러므로 율법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죄는 영원히 숨길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한 정죄를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율법이 있은 후의 죄

  인간 세상에 율법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죄와 깊은 관계에서인 것입니다.

  (1) 율법이 인간의 죄를 들어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그에 대한 보응에 대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그 죄를 시인치 않고 있으며 죄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 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롬12:28-32). 그러나 율법이 존재한 후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죄의 대가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율법이 인간의 죄를 정죄 합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무엇이 죄인가에 대하여 제시해 주며 또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무릇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 3:10).

  결 론 : 율법은 인간의 죄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은 죄에 대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시게 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생명을 얻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32 ≈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본문 : 로마서 5 : 14)

  서 론 : 아담은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존재로 등장합니다. 아담은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왔고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의와 생명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표상이란 말은 보통 상징이란 말로 해석하지만 헬라어의 뜻은 ‘튀포스’로, 어떤 자국을 의미합니다.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 자국이 나타난 현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을 볼 때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함을 알게 됩니다.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두 존재는 얻어맞은 자국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를 바라볼 때 속죄의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사망이 왕 노릇한 모세 때까지의 세상

  지금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가? 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아담과 똑같은 죄인이 되어 아담이 선언 받은 사망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대표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창1:28). 이 축복의 선언은 아담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미치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이와 똑같이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선언에서 죽는다고 하신 말씀은 아담이 먹었을 때 비록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산할 그의 자손들까지 포함시킨 언약으로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아담의 대표성을 깨달아 인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깨달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의 역사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고 하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 같은 증거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 것이냐?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는 것으로 그 증거가 나타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비록 인간의 죄가 율법에 의하여 정죄 받지는 아니했지만 인간사회에 여전히 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인류에게 찾아온 사망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이란 반드시 죄의 대가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반대적인 의미에서 아담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셨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세상에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에 대한 응징으로 사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에도 죄로 인한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그 죄에 대한 심판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우심을 인간들에게 율법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3:19).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므로 우리에게 마지막 아담이 되어 주셨습니다.

  (2)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었습니다. 에덴에는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오직 죄가 있는 곳에만 필요하며 율법의 임무는 그 죄를 정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그가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지난날의 영광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에 팔린 인간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의를 이루시어 인간에게 의를 주시는 의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3) 아담의 주검은 하나님의 영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엡2:1). 죽은 자는 살아날 소망이 없으며 영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소망이 없는 인간들에게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요5:24).

  (4) 우리가 여기서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담의 실패는 완전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게 된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의 실패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더욱 크신 사랑을 받게 했습니다. 아담의 실패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더욱 크신 은혜를 나타내 보이시게 했습니다. 아담의 실패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담의 죄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하심이 죄인들에게 이처럼 나타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3.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우리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할 때 아담은 분명히 오실 자의 표상임을 알게 되는데 이 경우의 표상은 반대적인 의미에서의 상징인물로서의 표상인 것입니다.

  (1) 아담은 첫 아담이요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 되십니다(고전15:45) 첫 아담은 죄를 범한 사람이요, 그리스도는 이 첫 아담이 범한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첫 아담의 허물을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갚아 주심으로 죄를 범한 인류의 빚을 청산해 주셨습니다.

  (2) 아담은 산영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고전15:45). 산영이란 생령을 의미하며 이 영은 살아 있기는 했지만 죽을 수 있는 영이기도 했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자신의 산영이 죽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의 영까지 죽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려 주시는 영으로 오셨는데 이처럼 아담으로 인해 죽은 우리의 영을 살려 주는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살리심을 받은 영은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3) 아담은 육이 있는 자지만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로 오셨습니다(고전15:46). 인간의 육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후패할 요소가 있으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 요소가 있습니다. 아담이 그 육신이 늙고 후패하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된 원인이 여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이시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자는 다 그의 형상을 본 받아 신령한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4) 아담은 땅에서 났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셨습니다(고전15:47). 아담이 땅에서 났기 때문에 땅에서 난 모든 인류는 흙에 속한 아담을 닮게 되어 한결같이 죄인이요 사망아래 있지만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자이심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아담은 첫 사람이요 그리스도는 둘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15:47). 첫 사람 아담은 실패하므로 죽었으며 그의 자손들도 다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는 둘째 사람으로 새로운 인류의 표상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첫 사람 아담의 죄나 사망과는 상관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의 죄의 빚을 다 갚았고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보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33 ≈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풍성한 은혜


  (본문 : 로마서 5 : 15 - 16)

  서 론 : 로마서 5장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표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사회에 범죄를 가져 온 대표자로 나타나 그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그와 대조적으로 인류사회에 의를 가져와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공급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변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의와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이 선물은 범죄 함으로 인간사회에 정죄를 가져온 것과 같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은 선물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을 선물이란 말로 표현하지는 아니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아담이 준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죄의 기원은 사단을 그 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었고 아담에게도 죄의 품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사단이 등장하면서부터 사단의 유혹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뱀을 그의 활동의 발판으로 하여 하와를 유혹하였고 아담과 하와는 이 사단의 유혹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러나 그 불순종의 결과적인 책임은 아담에게 있었습니다. 아담은 사단이 동장하기까지는 불순종에 대하여 생각해 본 바조차 없었습니다. 선하기 만한 아담과 하와에게 불순종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명령은 이미 사단의 유혹을 바라보시고 하신 말씀이셨던 것입니다(창2:17). 아담의 참 순종은 사단의 유혹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아담의 불순종은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것일지라도 결과적으로 책임은 아담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3) 불순종을 택한 아담은 죄에 팔린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아담에게 있어서 선은 하나의 환상이 되었고 죄의 세력이 아담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죄에 팔린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롬7:14,15).

  (4) 이 같은 아담의 신분은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계약하셨고 아담에게 선언하셨지만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세우심을 받은 존재였기 때문에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아담과 같은 동일한 운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가 인류에게 나타났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왕 노릇 하는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14절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말씀하므로 허상인 아담은 물러가고 이제 실체이신 오실 자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실 자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고 의와 생명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롤 예비하셨습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하셨기 때문에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바라보시고 이미 그 죄를 소멸하고 의를 주실 뿐 아니라 참 생명까지도 주실 수 있는 놀라운 섭리가 서 계셨던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바울은 탄성을 쳤습니다(롬11:33).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주 선하신 뜻에 의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그 결과는 아름답고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실 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때 밝히신 것입니다(창3:15). 이에 대하여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1:20).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했습니다(사55:3). 이 같은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으로 성경은 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 꽉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언약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아담의 언약은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생명대신에 죄와 사망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은 죄를 사유하고 사망을 승리하며 의와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값진 대가인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했습니다. 이 선물은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입니다. 선물이란 아무런 대가없이 그저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선물을 대가없이 그저 받았습니다. 다만 이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께서 이 선물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받으면 누구든지 이 선물의 수행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 내용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누가 왜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면 이미 선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4) 많은 사람이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의와 생명입니다. 이 같은 선물을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차별을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인종의 장벽이 없습니다. 가문이나 지식의 장벽이 없습니다. 빈부나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수효의 다수의 장벽이 적용이 안됩니다. 그리스도안의 은혜를 받는 일에 아무런 요소도 장애 됨이 없습니다.

  (5) 넘쳤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은혜라고 하셨습니다(엡3:8).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위에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린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 풍성함이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풍성한 은혜가 강처럼 넘칩니다. 넘쳤다는 말은 넉넉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넉넉합니다. 구원 얻기에 넉넉하고 의를 얻기에 넉넉하고 생명을 얻기에 넉넉한 것입니다.

  결 론 :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에 이름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이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은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정죄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많은 범죄란 인류의 범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은사는 모든 사람으로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사는 인류의 범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 34 ≈       한 사람 아담의  죄와 한 분 그리스도의 의


  (본문 : 로마서 5 : 17)

  서 론 :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말씀은 죄와 의의 전가에 대한기독교 교리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우리에게 오게 된 사망과 생명의 역사에 대한 교리적인 진리를 횃불처럼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망이 왜 이 세상에 오게 되었으며 그 사망이 우리들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그리고 생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왔으며 이 생명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 대하여 영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한 사람으로 인한 범죄와 사망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사망과 생명, 죄와 의에 대하여 매우 대조적으로 비교하면서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교리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특별히 이 “한 사람”에 대하여 강조 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범죄라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아닙니다. 18절에서 인간의 범죄에 대해서도 “한 범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도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사망이나 인간의 정죄나 인간의 죄인 된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들로 말미암아 사망이나 정죄나 죄가 오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아담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논리는 비록 아담의 자손 중에 선하고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 역시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사망과 정죄와 죄인 됨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2) 우리는 아담 안에서 무조건 죄인이 되었고 정죄를 받았고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 하나님의 언약자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세우신 언약은 그를 대표자로 한 그의 모든 자손에게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이처럼 자기 자손들의 법적 대리인의 자격까지 겸해서 언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왕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했다면 그리고 그 조약의 조건에 의해 그 왕이 책임을 지게 되었다면 그 왕의 지배아래 있는 모든 백성들이 왕과 똑같은 운명에 쳐해 진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로 아담이 바로 이 같은 입장에 서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 때문에 모든 인류는 무조건 아담의 범죄에 동참자가 되었고 아담의 정죄에 동참자가 되었고 아담의 사망에 동참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아담과의 동참자는 그의 혈통적 지손 들을 말합니다.

  (3) 사망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왕 노릇하였다는 말의 왕은 ‘바실류오’로 통치권이나 지배권을 의미합니다. 사망이 우리를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인류 중에 누가 이 사망의 통치에서 벗어날 자가 있는 것인가? 사망은 완전한 권세로 인간을 지배하므로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망권세는 바로 마귀의 권세이기 때문에 인간은 마귀의 권세아래서 그의 지배를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같은 사망에서 벗어날 존재란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를 보아도 어디를 보아도 어느 곳에 가도 소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2.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생명

  그런데 인간들이 전혀 예견치 아니한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아닌 다른 한 사람이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이 사람은 아담과 다른 사람입니다. 첫째로 아담의 혈통에 속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담의 자손은 남녀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녀의 결합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4). 하나님 품속에 계셨던 영원히 독생하신 하나님이 성령의 권능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시어 그 분이 사람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담의 자손이 아니십니다. 이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곧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2) 이 분은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넘친다는 말은 넉넉한 여분을 수반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넘치다의  ‘페릿세이아’란 말은 과다하다, 여분이 있다. 더욱 이란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의의 선물은 이처럼 우리에게 과다하도록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안에서 왕 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은혜와 의의 선물은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이기 때문입니다(요1:16).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모든 선물은 넉넉하도록 넘치는 것입니다.

  (3) 이 선물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사람”과 “한 분”에 대하여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범죄와 정죄와 사망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이와 똑같이 의와 생명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이곳에는 다른 요소란 전혀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의와 생명을 얻는 일에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받을만한 의로움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그분 때문에 값없이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을 사람은 아담의 자손이 아닙니다. 아담의 혈통적인 자손은 그 아담 한사람 때문에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이 같은 범죄한 자, 정죄 받은 자, 사망이 왕 노릇하는 자들이 어떻게 의와 은혜의 넘치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 선물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은 아담처럼 육의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을 태어나게 하시는 방법이 영적이십니다. 이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탄생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2,13 ; 요5:13). 여기서는 아담의 경우와 똑같이 이유나 단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적입니다.

  (4) 이들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문맥을 한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의 경우는 사망이 우리 가운데서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은혜의 선물을 받은 경우는 그것을 받는 자들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서 왕 노릇해 온 사망은 영원히 쫓겨났습니다. 사망대신에 그것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이 나에게 영원한 선물로 수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 안에서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모든 범죄와 모든 정죄와 모든 사망을 능히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왕 노릇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이전에 아담이 가졌던 의는 자신이 소유한 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의는 사단의 공격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의는 우리의 것이나 아담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의는 우리에게 다시는 정죄나 사망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것입니다.

 PREV :   로마서 6장 밤중소리 
 NEXT :   로마서 4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