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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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
 밤중소리  03-02 | VIEW : 5,820




  ≈ 13≈         중생의 교리

  (본문 : 요한복음 3 : 1 - 7)

  서 론 : 우리는 이곳에서 니고데모라고 하는 인격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지만 나다나엘과 같이 그 안에 간사가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관한 기사가 성경에 세 곳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7:50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경고를 준 일이 있었으며 요한복음 19:39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후 그의 장례를 위하여 정성을 드린 일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니고데모의 훌륭한 일은 그가 어느 날 밤 예수님을 찾아와서 중생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들은 후부터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거듭난 새 사람으로 변화 받아 주님을 위한 참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1. 니고데모의 예수관

  (1) 니고데모는 여러 가지 면에서 완벽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가장 열심이 있고 정통적인 신앙을 자랑하는 보수적인 교인이 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말씀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경건하고 또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말은 메시야를 대망 하는 그의 믿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는 공회 의원으로 그 당시 유대교의 최고 종교 의결기관의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도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불리실 만큼 모든 사람에게 선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은 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이 같은 신앙고백을 할 지경에까지 이르지 못했으면 그 사람은 아직 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모든 면에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예수님께 대한 신앙관은 바르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랍비란 말은 선생님이란 존경어입니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랍비란 말을 듣는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존경할 만한 훌륭한 선생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를 도덕적인 선생으로 보는 일은 바른 신앙관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3) 니고데모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알았습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란 곧 선지자란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알았습니다. 선지자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선지자는 메시야를 증거 하는 사람일뿐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는 정도라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4)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 이 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많은 표적을 보아온 사람들입니다. 흥해를 건넌 표적, 만나를 먹은 표적, 반석에서 물을 마신 표적 등 이런 것들이 하나의 신앙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만 보고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표적은 더 큰 표적을 원하기 때문에 결국은 불 신앙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2. 중생의 교리

  예수님은 이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는 이치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하는 이치에 대하여 이곳 요한복옴 3장에서만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셨지만 이 중생의 짤막한 말씀은 기독교의 중심교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사람이 새롭게 태어남이 없이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그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 그의 백성들의 기업으로 주시는 하늘에 있는 영구한 도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니고데모는 이같이 질문했습니다. 영적으로 생각할 때 너무나도 어리석고 유치한 질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점점 늙어 가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난다는 말은 우리가 어머니 배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온단 말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알며,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중생은 영적인 탄생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육의 생명이 태어났을 때 그에 게 육적인 생명이 있는 것처럼 사람이 영으로 태어남이 없이는 영의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혈과 육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요 영적인 생명으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영적인 생명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중생은 바로 이 영적 생명의 출생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 영적 생명은 어떤 방법으로 출생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이 요한복음 1:12절 이하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랑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은 중생의 원리에 대하여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에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전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물이란 세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회개를 뜻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이란 말씀의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하여 정결하게 하는 의식으로 물을 사용해 왔으며 이런 뜻에서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물세례가 나온 것입니다. 물로 깨끗함을 받는 이 물의 근원을 캐보면 결국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는 상징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히 10: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물은 곧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에의 첫 메시지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고 선포하셨습니다(마4:17). 회개가 없이는 중생할 수 없습니다.

  (3) 성령이란 사람이 거듭나는 일에 필수요건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회개하는 자의 심령에 임하시어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을 주심으로 그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갈3:2).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의 영적인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데 이것을 우리 주님은 중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이 중생의 교리를 잘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은 이미 성령을 선물로 받아 거듭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애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 14≈         성령으로 난 사람

  (본문 : 요한복음 3 : 1 - 13)

  서 론 : 주님은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 시키시는 영적인 역사의 모습과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변화의 역사를 바람을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는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나도 그같은 사실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성령의 바람 같은 역사로 인하여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로 불려집니다. 이 말은 바람, 기운, 생기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중생의 과정에서 성령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바람이란 비유로 설명하신 것은 그 뜻이 깊은 것입니다.

  1. 성령으로 난 사람

  사람이 자신이 성령으로 난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내가 성령으로 중생한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질문에 흥미를 가지고 어떤 육감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런 증거를 발견하거나 찾는데 실패하고는 낙심하거나 자기는 아직도 중생치 못한 줄로 속단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중생한 사실을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경험이나 육체적인 어떤 작용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중생한 장소와 시기까지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계시해 주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판단은 성령의 역사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중생이 흔히들 다메섹으로 가는 길가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바르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에 그때 바울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았을 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도,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도, 우리의 육적인 눈으로 볼 수도 없으려니와 육적인 감각으로 감지할 수는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영적인 능력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에 불가견적이요 불 감각적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우리의 영적 생명이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엡2:1). 그리고 지금 역시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의 생명이 살리심을 받았지만 육신적으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5:24). 우리가 이 같은 영적인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성령이 우리의 거듭남을 증거해 주시는 증거는 영적인 증거인데 그 영적인 증거란 곧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니”(요 5:1). 이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것으로 자기의 중생한 사실을 확인하려는 일은 무모하고 위험한 일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바람과 같이 역사하시는 성령

  성령의 역사는 마치 바람과 같이 활동합니다. 바람과 같다는 말의 뜻은 성령이 하시는 사역을 나타내는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는 분명히 있는 것 같이 성령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그 행방에 대하여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도 역시 그 움직이는 사실은 분명하나 그 움직이는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성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주님은 바람의 움직이는 사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는 일이 마치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성령의 역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바라보며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믿음은 영적입니다. 사람이 영으로 거듭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변화를 받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영향을 받기 때문에 육에 사람의 자리에서 영에 사람으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먼저 성령으로 우리의 영이 새롭게 됩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인의 경우 한결같이 공통적입니다. 그 다음에 이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마음이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우리의 마음에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이 강퍅하여 성령의 감화를 거역할 때는 그 변화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변화에 따라 우리 육신은 영의 열매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부단히 우리의 생애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하심을 거역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죄악으로 강퍅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이런 마음을 깨시기 위하여 죄를 버리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징계의 손을 쓰십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이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라고 하셨습니다(히12:11).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성령의 감화하심을 거역하고 육신의 뜻대로 세상풍습을 따른다고 해도 평생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빌1:6).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인가? 성령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 나가는 사람이 축복된 생애를 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3)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계속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고 끝까지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가라지들은 성령은 없지만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하여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유19).

  죽는다는 다른 또 한가지 해석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화하심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그의 생활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징계와 간섭하심으로 마치 죽은 자와 같이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방법을 통해서라도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인간의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시는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모든 변화는 바람과 같이 역사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중생은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지만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 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의 행실을 새롭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그의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새로워집니다. 육의 일을 버리고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생활양식이 변화 받습니다. 세상적인 생활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생활로 변화 받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의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온 우리의 인생이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고 예수를 위한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역사 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충만히 받는 생활은 강한 영적 바람이 우리 생활 가운데 나타나 우리로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 15≈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본문 : 요한복음 3 : 14 - 15)

  서 론 :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중생의 교리를 이해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리를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도리를 니고데모에게 구약성경에 있는 사례를 통하여 설명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다는 사건이 바로 그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건은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에 기록되고 예언된 모든 사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1.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직접 나타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시는 과정을 그린 계획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선택으로부터 본격화되었으며 이삭의 탄생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표로 삼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의 표준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직접 자신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들어오시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역사는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하여 바로의 손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에서 40년간의 생활을 하게 하심으로 모든 인류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에게 내리신 열 재앙은 수백만의 애굽 민족이 몸소 체험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일도 6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사건이며 애굽 군대가 몰살한 사건임으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강물같이 내신 일, 40년간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나를 먹게 하신 일 역시 너무도 오랜 역사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온 민족이 역사 속에서 체험한 사건이기 때문에 부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일, 낮이면 구름기둥, 밤이면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일 등을 누가 감히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그리고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그들의 역사 속에 수도 없이 일어나 오늘날 이 모든 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모세의 불 뱀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증거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2. 구리 뱀을 쳐다보게 하신 놀라운 사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놀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구약적인 모든 사건이 그리스도의 속죄사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5:39).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대속의 제물은 어쩌다가 바리새인들의 고소와 빌라도의 인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수천년 전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이런 사건을 미리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든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하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가?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니는 생활 중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둘러서 에돔 땅을 지나게 되었을 때 그 길이 험한 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우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민21:5). 이때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불 뱀을 보내셨습니다.

  이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수히 죽어갔습니다. 이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즉각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9). 모세 자신도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게 하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던 구리뱀 사건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린 불 뱀은 죄를 가리 킵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이스라엘의 죄는 결국 뱀에게 물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범죄한 인간이 죄의 종이 된 사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롬6:16).

  (2)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은 죄인을 가리킵니다.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독으로 죽은 것처럼 죄인들은 그 죄로 인하여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죗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3) 죄를 상징하는 놋뱀은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죄의 회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 모든 죄인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죄를 대표한 놋뱀이 되신 것입니다.

  (4) 뱀을 달아맨 장대는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이 장대를 상징하는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5) 바라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 살게 되었던 것처럼 모든 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므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곧 주님에 대한 믿음을 말하며 이 믿음은 곧 그가 하신 속죄사업을 받아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소멸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죗값을 갚아주셨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죄는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정죄치 못합니다. 죗값을 다시는 요구하지 못합니다. 죄의 권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바로 이분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에 눌리고 사망권세 아래 주검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뱀에 물려 죽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바라보았을 때 그 시로 그들이 물린 뱀의 독이 사라져 버리고 죽어야할 몸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같은 기적 은 다른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면 살아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때문인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영생을 얻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모세의 놋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이 온전히 풀려집니다. 그 완전한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뱀에 물려 죽게된 여러분 자신을 발견했습니까? 그리고 이 사망의 자리에서 살아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랐습니까? 저 갈보리 언덕 위 높은 장대(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바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 바라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므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빨리 십자가 위에서 속죄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 16≈         하나님의 사랑

  (본문 : 요한복음 3 : 16)

  서 론 :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한 구절로 나타낸 곳이 있다면 그 구절은 바로 요한복음 3장16절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할 것 같으면서도 사실인즉 잘 모르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를 안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한복옴 3장16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는 아주 평범하게 알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전부를 측량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어디에 있을 것인가?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이 가장 간략하고 정확하게 표현된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 이 말씀을 빌린다면 하나님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이시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원천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7절에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할 줄 알고 또 사랑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다만 하나님의 사랑의 한 그림자만 지녔을 뿐입니다. 그것만이라도 인간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받아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요일4:10). 이처럼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로 보내주셨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셨을 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했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5:8). 죄인 되었을 때란 말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최악의 상태에서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요, 공의로우신 분이시요, 죄를 용납치 아니하시는 분이시요,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사역도 다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2.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우연한 사랑이 아니십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기 이전부터였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사랑의 근거는 에베소서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오직 인간을 창조의 중심으로 하여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환경과 조건들을 구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모리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중에 인간은 홀로 서 있지 않다‘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자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살피고 조사했는데, 해와 지구와의 거리, 지구의 경도, 기울어진 도수, 지구를 감싸고 있는 대기와 공기, 지구를 뒤덮고 있는 바닷물, 지구를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 등, 이 같은 것을 자세히 연구하여 얻은 결론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실 때에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셨고 인간이 살기에 알맞도록 만들어진 사실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도 우리들에게 분명히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증거하기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한 것입니다(롬1:20).

  (2) 하나님의 사랑은 변질됨이 없는 순수하고 영원한 사람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이루고 등을 지고 있는 것인가? 이 책임은 절대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으며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의 사랑올 저버렸으며, 하나님의 대척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를 통하여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져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죄가 들어오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되면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성경은 이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능욕, 교만, 자랑, 부모거역, 무정, 무자비한 것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은 이처럼 스스로 하나님을 그 마음에서 내어쫓을 뿐 아니라 두기조차 싫어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원수로 여겨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생애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받을 보응은 그 마지막이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망이란 영과 육이 아울러 지옥에 들어가는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실로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이갈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화목제로 보내심으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 사랑하사란 말은 ‘에가페센’란 말로 아무런 조건 없이 단순히 사랑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조건마저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이란 말은 ‘후토스’로 다음과 같이 란 뜻입니다. 말로만 나타내신 사랑이 아니라 이처럼 어떤 실제적인 증거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보이신 사랑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생명을 얻으려면 그 죗값을 대신 갚을 회생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인들을 위해 죗값을 대신 갚아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가장 악한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인간이 저지른 죗값을 대신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같은 회생제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을 사랑하는 지극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천사에게 이런 사랑이 있겠습니까? 그 외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이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할 존재가 있겠습니까? 이 같은 사랑을 가지신 분은 오직 한 분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우신 일을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독생자란 말은 참으로 유일하고 귀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죄고의 귀한 존재”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품속에 영원전부터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과 똑같은 본체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이보다 더 귀한 존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보잘것없다거나 그 사량이 온전치 못하다면 어떻게 이런 분을 당신을 대적한 죄인들의 희생 제물로 세상에 보내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결 론 :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내대신 십자가에서 나의 죗값을 대신 받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받으라고 사랑으로 목 메이게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사랑을 그저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란 그 아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 아들의 이름을 믿음으로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함으로써 죄로 죽어 가는 이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 17≈         하나님의 심판 기준

  (본문 : 요한복음 3 : 17 - 21)

  서 론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심판에 있지 아나하고 구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일은 무서운 죄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조건이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인류를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그 이름으로 구원하시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일이 아니요 소망이 없는 세상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물론 심판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 심판을 취한 결과인 것입니다.

  1. 인간이 스스로 취한 하나님의 심판

  인간들은 원래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와 허물로 우리 인간은 죽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엡2:1).

  (1)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롬5:12).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셨지만 우리는 그같은 선물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나 공로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 선물은 다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데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기회는 우리 인간들에게 다시는 올 수 없는 최종적인 기회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두 분의 독생자를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구원의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이 비참한 상태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소망이 전혀 없는 인생들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심판은 무슨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무서운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이것을 죗값인 사망이라고 했지만 이 사망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신 형벌이 죗값으로 돌아올 인생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입니다(막 9:43-49).

  (3)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믿으면 이 같은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누구에게는 받아야할 필요성이 있고 누구에게는 그럴 필요성이 없는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한 명의 예외자도 없이 모두 이 같은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선고에서 풀려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이 같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의 새로운 기준

  그런데 18절 말씀에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독생자가 오시기 전에도 이미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죄인들에게 더욱 무서운 죄 하나가 더 추가됨으로서 더 비참하고 더 절망적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피할 수 없는 그 무서운 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되지만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그를 믿기를 거절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자신의 죄에 대하여 더욱 무서운 심판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않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불순종함으로 따먹은 죄도 주검의 선고를 받았거늘 하물며 그토록 사랑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하는 자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심판한다는 ‘크리노’의 3인칭 완료형으로써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정죄되고 심판 받은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룰 믿지 아니함으로 정죄를 받는 이유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인간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빛이 그 마음속에 임재하기 때문에 어두움과 짝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거할 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빛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에 요한은 ‘아가파오’의 사랑을 썼습니다. 이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마치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듯 이들은 세상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를 세상을 위하여 다 바칠 뿐 아니라 자기 생명까지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못한 인간의 생애는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아가파오’적인 사랑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거역하며 계속하여 어두움에 거하기를 스스로 원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고의적인 배신임으로 자기가 자신의 정죄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3.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온다.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지만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는데 그 이유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빛으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일은 빛 가운데 나타나는 선한 열매들입니다. 이런 열매는 다 내 안에 빛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5:8).

  결 론 : 우리가 빛으로 나오려면 먼저 자기 자신의 악한 행위를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두움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어두움을 내어쫓고 빛을 영접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것은 일시적인 문제이거나 우리 생애에 어느 한 부분에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멸망이냐? 영원한 구원이냐? 하는 문제가 이 문제입니다. 한번 잘못 선택한 인생의 길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자기 운명의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신 이 말씀이 내 생애에 중대한 결정을 이루는 심각한 문제임을 알고 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심판을 이기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 18≈         요한의 기쁨

  (본문 : 요한복음 3 : 22 - 36)

  서 론 :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할 선지자의 사명을 받아 이사야를 통한 예언대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줌으로써 그가 곧 자기가 증거 해야 할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의 생애는 바로 이곳에 초점을 맞추어 나갔던 것입니다. 요한은 신랑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제부터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잘 알고 지혜롭게 처리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세례요한의 겸허한 자세를 본받는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욱 널리 효과 있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1. 요한의 기쁨

  신랑의 음성을 들은 요한은 기뻐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무엇으로 듣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1) 인생을 크게 기뻐하는 생활, 자기 생애에 기쁨이 충만한 생활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신랑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 같은 음성을 주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이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으며 그 일 외에는 그에게 다른 어떤 것도 주어진 사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증거 해야 할 신랑을 찾은 것입니다.

  (2) 요한이 그리스도를 신랑이라고 비유한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가리켜 그 신랑의 친구라고 말한 것은 그는 신랑을 세상에 나타내야 할 사명이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입니다.

  신부의 최대의 소망은 신랑입니다. 그리스도를 최대의 소망으로 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에서 최대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신부는 항상 신랑과 동거함을 가장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인생에서 충만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의 희생

  세례는 요한이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요단강에서 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세례를 주게 되었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하나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고 불안해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의 위치와 사명에 대하여 분명히 천명해 줌으로써 자신은 다만 그분을 증거 하는 작은 존재에 불과할 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해주었습니다.

  (1) 세례요한은 제자들에게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의 사명에 대하여 “나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가리켜 메시야가 아닌가 기대했지만 요한은 들어내어 분명히 증거하기를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말했습니다(요1:23).

  (2)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증거 해야 할 자기 선생의 존재에 대하여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은 자기자신이 제자들로부터 바르게 증거 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하였으며 자기 제자들이 그를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요1:36-37).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세례요한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기는 감추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설교를 들으려고 갔습니다. 어느 한 교회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난 그 사람의 말은 그 분은 참 훌륭한 설교가 이며 학식이 대단하고 그 언변이 유식했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나온 후 다른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 설교를 들은 후 그 사람은 자기는 설교한 목사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심을 비로소 깨달았으며 그런 분이 예수 시라면 자기도 믿겠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자기를 감추고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만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3)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자기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자신의 말처럼 예수님이 공생애에 나타나신 이후 자신은 점점 그늘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은 자기가 흥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만이 흥하고 자기는 쇠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학식이나 능력은 다 숨기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임으로 그를 영화롭게 해드려야 합니다. 요한은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신들메 풀기조차 감당치 못할 존재라고 낮추고 자신을 숨겼습니다. 우리는 내가 쇠할 때 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흥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세례요한의 겸손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3. 아들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

  31절부터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부연해서 설명을 해주는 말씀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1) 요한 사도는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와를 비교하기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와 땅에서 난 이로 구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이시오 만물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라 할지라도 그가 땅에서 난 이상 땅에 속한 사람이요 그의 말 역시 땅에 속한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미 하늘에서 보고 들으신 것을 말씀하심으로 그분의 증거는 확실하지만 이 땅에는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는 것입니다. 셰례 요한은 그 증거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증거를 받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옛날부터 끊임없이 그의 아들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2) 우리에게는 이제 여러 가지 증거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여주신 증거가 있으며 또 세례 요한의 증거가 있으며 성령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세에 이르도록 영원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가 있습니다. 이 증거를 통하여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지만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믿는 자란 말은 현재에 믿는 상태에 있는 그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언제나 현재와 관계된 말입니다. 믿음이란 과거의 소유물도 아니요 미래의 소유물도 아닌 현재의 소유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소유한 그 한사람에게만 관계된 문제입니다. 이처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그 생명을 가졌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그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세례요한의 사명이 주어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 함에 세례 요한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타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그의 신부들에게 소개해 주는 일에 큰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가 늘 기쁨에 충만하고 보람을 느끼려면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만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정말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최대의 기쁨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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