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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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밤중소리  01-12 | VIEW : 813


  ≈ 102≈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        


  (본문 : 요한복음 20 : 1 - 18)

  서 론 : 우리는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복된 만남의 장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만남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그의 생애의 최대의 기쁨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영광을 마음속 깊이 길이 간직하는 가운데 그의 평생의 남은 생애의 전부를 주님을 위해 바쳤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8:17). 마리아와 같은 천한 여자일지라도 그가 주님을 사랑하였을 때 그는 주님의 큰 사랑을 입었으며 주님을 간절히 찾는 그에게 부활하신 영광의 몸올 맨 먼저 보여 주신 것입니다.

  1.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

  마리아의 신분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그가 전에 일곱 귀신 들였던 여인”이라고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나 들려 정신이상이 된 이 여인에게 획기적인 그의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그가 예수님올 만나 주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1) 마리아는 평생 주님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긴 일은 주님의 복음전도 초기부터였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했습니다(눅8:2-3). 오늘날에도 주님을 섬기는 여인들은 돈이 많은 여자들이나 인품이 훌륭한 여자들이 아닙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천한 여인, 마리아와 같은 여자들입니다.

  (2) 이 마리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모든 괴로움을 함께 맛 본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병을 고쳐 주셨을 그 당시에만 주님을 사랑하고 섬긴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주님이 어려움을 겪으실 때 그 자리에 늘 함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 그 곁을 울며 따랐습니다. 마리아는 골고다에 끝까지 남아서 주님의 모든 괴로움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마음으로 그 괴로움을 나누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리마데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주님의 장사지냄을 확인하고 그날 어두울 때에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 무덤에 찾아 간 마리아

  이른 아첨에 주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오직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나타나셔서 그 몸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1)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을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때 마리아는 혼자만 온 것은 아닙니다. 자기 이외,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등등의 여인들이 있었지만 이곳에서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국한시킨 것은 아마도 그가 맨 먼저 서두르고 그 선두에 나섰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전날 밤을 눈을 부치지 못한 채 뜬눈으로 새였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같은 정성은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눅7:41-47).

  (2) 마리아는 무덤에 이상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랜 나머지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무덤에 당도해 보니 무덤을 막고 봉해져 있어야 할 돌이 무덤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시신까지 없어진 일에 대해 마리아는 놀랬습니다. 그는 단숨에 제자들이 묵고 있는 집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달려간 일은 다른 여인들 보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더 깊은 사실을 보여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다른 제자들이 다 간 후에도 마리아는 홀로 그곳에 남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울음은 가슴이 터지고 마음이 찢어지는 울음입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대하여 연약한 여성의 마음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눈물입니다. 그녀는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 안에는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4) 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고 있는 이 여인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그 날 새벽에 계속해서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이 천사들이 나타나기는 마리아에게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질문한 말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마리아의 심정을 모르거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르거나 그가 주님의 시체가 없어진 일에 낙심하고 그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한 말은 아닙니다. 울 필요가 없는데 왜 울고만 있느냐는 말입니다. 너는 기뻐해야 하는데 왜 울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5) 마리아는 천사의 이 같은 물음에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다”고 대답하고는 뒤를 돌이켜 바라볼 때에 예수님이 그의 뒤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그 동산을 지키는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마리아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녀의 변함없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바라 보게되는 것입니다. 이때 그분은 마리아야 하시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쳐다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에 깜짝 놀라 주님께 의지하면서 “랍오니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랍부니’로, 아랍어에서 유래된 “나의 주” 또는 “나의 선생”이란 뜻입니다.

  (6)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일러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의지하려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은 부활하신 몸을 가지시고 올라가지 못하셨음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하신 마지막 기도와 함께 주님의 영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신 것입니다(눅23:46).

  3. 다른 제자들의 경우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다른 몇몇 제자들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리아의 보고를 받고 급히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둘이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먼저 달려간 사람은 요한이며, 베드로는 요한 보다 나중에 왔으나 무덤에는 먼저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에 들어가 세마포가 놓인 것과 딴 곳에 개켜 있는, 머리를 썼던 수건도 발견했습니다. 그 후 요한도 무덤 속에 들어와서 이 모든 사실들을 보고 난 후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었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9절에서 그 해답이 밝혀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육안의 통찰력이 뛰어났지만 요한은 영안의 통찰력이 뛰어나 주님의 부활하신 사실을 믿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요한의 마음에는 설렘과 기대가 교차되는 가운데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주님의 실종은 그의 하신 말씀대로의 부활하심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결 론 : 마리아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친히 보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주를 보았다고 말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면 그의 임재하심을 알게 되며 그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 103≈        주님이 주시는 평강        


  (본문 : 요한복음 20 : 19 - 20)

  서 론 :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날 새벽 일찍 무덤을 찾아 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 처음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나 요한도 무덤까지는 찾아갔으나 빈 무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감으로 주님을 만나 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끝까지 찾아보려고 남아 있었든 마리아에게 주님이 그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신 일은 마리아의 사랑을 귀히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평강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1.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

  19절에서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자기들의 선생님이 잡혀가실 때 등을 돌리고 도망가 버렸던 제자들에 대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장사지내며 이제 안식일이 지난 첫날이 될 때까지 잠잠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때에 가서야 한 곳에 모인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달려갔던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무덤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마리아가 무덤에서 돌아 온 후 그가 제자들에게 찾아가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실과 주님의 분부를 전해 준 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 둘 씩 늘 주님과 자주 모인 그 장소로 모여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행 12:12). 그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1) 주님은 언제나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하셨습니다(요15:16). 우리를 택하신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 죄악 세상에까지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이신 분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도 먼저 찾아 가셨으며 요한에게도 먼저 가셨고 레위에게도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이 “먼저”라고 하는 말에는 지극한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배신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같은 주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형제들과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을 때 먼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두려움 중에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밖에는 얼씬도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후 다시 그의 제자들에 대한 어떤 제재를 강구하려는 계획을 세웠을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에 모였지만 두려옴으로 문단속을 단단히 하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이 그곳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3:25-26).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에는 흥해요 뒤에는 바로의 군병들이 쫓아 올 때 큰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14:13-14).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두려움이 없어야 하겠지만 두려워 할 일이 있어도 그때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두려움을 물리쳐야합니다(시23:4).

  (3)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누가 자기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잠24:16). 주님이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자주 넘어졌지만 주님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계속 일으켜 주시며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는 우리의 존재가 너무나도 귀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찾아오십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0). 제자들은 비록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나 그들의 모임은 주님의 이름을 위한 모임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곳에는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모임에 주님이 그 자리에 동석하고 계심을 알고 거짓된 말을 버리고 세상적인 말을 삼가고 언제나 주님이 들으셔서 기뻐하실 말씀만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말라기에 이 같은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말3:16).
  
  2.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제자들이 문을 닫고 숨어 있는 곳에 들어 오셔서 제일 먼저 그들에게 주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평강이란 말은 ‘에이레네’로 이 말은 다양한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평안, 화평, 평화, 화목, 염려 등등입니다. 그 어느 쪽 말이건 이 말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 머물어 있어야 할 기본조건입니다. 이 말이 가리키는 뜻은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확립되는 질서를 의미합니다. 이 마음의 질서가 파괴될 때 우리는 바른 정서를 잃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마음의 공포, 주검에 대한 두려움, 불안, 염려 등은 이 평강의 결핍에서 오는 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영적인 마음의 선물은 이 평강입니다.

  (1)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두려움을 쫓아 냅니다. 평화로운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값싼 평화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서 샘솟는 깊은 마음속의 평화입니다. 모든 정죄에서 벗어난 확실한 의에서 나오는 영원한 평강입니다(롬8:31-34).

  (2)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로 하나님과 교통케 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욥22:21).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중재자로 오셔서 그 회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했습니다(골1:20).

  (3)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우리로 소망 중에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 인생 길에는 가난, 실패, 질고 등 많은 괴로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 길을 파멸의 길로 안도합니다. 그러나 이 주님의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보다 위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우리들의 그 모든 것들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고난 중에도 즐거움을 잃지 않습니다.

  결 론 :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 본 제자들은 이제 두려움은 살아지고 예수로 말미암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 서 계시는 주님을 영인 줄로 알았다가 십자가에서 찔리신 손과 옆구리를 보고는 기뻐한 것입니다. 주님의 몸의 이 같은 상처는 고난의 표적이요, 부활의 표적으로 제자들에게 능히 큰 기쁨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 104≈        성령을 받은 자의 권세        


  (본문 : 요한복음 20 : 21 - 23)

  서 론 :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 곳에 모여 있었던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하시는 예수님올 바로 보았을 때 몹시 놀랬습니다. 잠긴 문에 장애를 받으심이 없이 그들 앞에 나타나 그 모습을 보이셨으니 아마도 제자들은 유령이 아닌가? 놀랬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일은 예수님이 그곳에 다만 영적인 존재로서만 아니라 이전에 지니고 계셨던 몸으로 서 계심을 그들에게 보이심으로 두려움을 쫓고 마음의 평안을 주시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앞으로 그들이 성령을 받을 일과 그 책임에 대하여 교훈적인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1.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은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는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주셨다고 하신 말씀은 보내셨다고 하신 뜻입니다. 그러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신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선 것입니다(요6:39-40). 아들을 향하여 보이신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수님은 이 일을 완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아버지의 명을 따르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빌2:8).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중에 하나도 잃은바 되지 않으시고 그들에 대한 마지막 생명의 부활을 보장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온전히 이루신 구원사역에 있어서 영광스럽게도 그의 교회들에게 동역자적인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같은 사역은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온전히 이루신 일이요 그가 책임지시고 끝까지 성취하실 일이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사명을 교회인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① 예수님이 우리를 보낸다는 뜻은 복음 전도자의 사명자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28:19-20). 그리고 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1:8).

  ②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이 어떤 자세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어 드렸는가에 대하여 살펴볼 때 이 문제는 자명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겸손과 순종으로 이루셨습니다(빌2:6-8). 우리들도 보내신 주님의 뜻을 이루려면 주님이 가지신 겸손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③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교훈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도자들에게 의식주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10:10). 그리고 전도자들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16). 이 말씀은 전도에는 최대한의 지혜를 사용하되 그 지혜는 순결한 지혜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뱀을 인용하신 것은 마귀를 상징한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뱀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인데 뱀은 공격하는 경우와 물러서는 경우를 지혜롭게 잘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뱀 같은 지혜의 처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2.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처럼 말씀하신 후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는가? 성령을 받는 일과 숨을 내쉰 일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 예수님이 숨을 내쉬신 일은 성령이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기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 그의 생기로 코에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창2:7). 산골짜기에 흩어진 마른 뼈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있는 여호와의 큰 군대를 이루셨습니다. 생기는 성령을 상징해 주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숨을 내쉰 일은 성령을 보내실 분이 예수님이심을 나타내신 뜻입니다. 성령을 보내시는 이는 예수님이십니다.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7).

  (3) 이같은 일은 제자들이 앞으로 성령을 받을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실제적인 교육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실 이때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오순절 날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4-5).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기로 약속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할 때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오순절과 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성령을 받은 자의 권세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다시 한번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너희가 뒤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의 권세가 복음 전파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로 해석이 되며 이같은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은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 중에도 나타나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의 죄의 사유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의미하는 데 복음 전도자의 전도로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죄에 대한 사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예수의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처럼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이며, 반대로 전하지 않는 일은 그의 생명을 버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겔3:17-19). 우리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처럼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우리 인생의 최대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105≈          도마의 신앙        


  (본문 : 요한복음 20 : 24 - 31)

  서 론 : 도마라고 하면 우리는 에수님의 12제자 중 가장 의심이 많은 회의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제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문이 잠긴 집에 들어오셔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자리에 한 명의 제자가 빠져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도마였습니다. 이같은 일이 있은 후 도마가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도마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분명히 못 박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말은 어느 모로 보든지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어느 한 명이라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나서 자기들 앞에 나타나리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도마의 이같은 말은 그를 가리켜 회의주의자라고 비난할 만한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

  1. 도마의 확인적인 신앙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도마가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믿을 수 없노라고 한 말은 크게 나무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도마는 오히려 이 불 신앙적인 행동처럼 보이는 이 일로 말미암아 더욱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누구도 고백할 수 없었던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1) 도마가 보지 못한 것을 믿지 않은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이 부활에 대하여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직 성령을 받기 이전인 도마에게 부활을 믿을 만한 신앙을 요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도마가 이처럼 확실한 일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으려고 한 일은 찰 한 일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언제나 확실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신앙은 다 이같은 믿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요일1:12).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히3:14). 아름답고 견고한 믿음은 언제나 처음에 확실한 것을 잡아야 하며, 처음에 잘 배우고 믿어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3:14).

  (3) 도마의 신앙은 순교적인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마가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고 해서 그의 신앙이 다른 제자들 보다 못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룰 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가 죽게되어 주님이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니이까”고 말했습니다(요11:7-8). 그러나 이때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용기 있게 나셨습니다(요11:16). 이같은 도마의 믿음은 귀한 믿음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왕이 되시는 영광의 입성으로 생각했지만 도마는 그곳에 고난이 있음을 알았고 그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자고 말한 것입니다.

  2.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런 일이 있은 후 다시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의 인사는 이때에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도마를 주목하시고 그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을 확인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도마의 불 신앙적인 신앙을 주님은 그대로 놔두신 것이 아닙니다. 그간에도 도마는 많은 갈등 속에서 제자들이 말한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마 주님의 부활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하여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그의 부활의 모습을 확인시키시기 위하여 다시 이곳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2)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믿음 없는 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여기서 “믿음 없는 자”라고 하신 믿음 없다는 말은 ‘아피스토스’로 신실치 않다고 하는 뜻이 담겨진 말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신실치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신실성이 없다면 그 믿음은 얼마 안가 파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 믿음이란 말은 ‘피스토스’로 충실한, 믿을 수 있는, 충성된 이란 뜻으로, 믿음은 충성된 사람, 충실한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3. 보지 못하고 믿는 자의 복

  도마는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올 바라보았습니다.

  (1) 도마는 주님께 대한 새로운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도마의 고백은 사도들 중에서 도마가 제일먼저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일시한 위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나의 주라고 한 주는 ‘큐리오스’로 주, 주인, 소유자란 뜻입니다. 이것은 자기 인생의 주를, 자기 인생의 소유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에 적용 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한 하나님은 ‘데오스’로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마의 이같은 신앙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도마의 고백을 그대로 인정하셨고 오히려 칭찬하신 듯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를 보다 나중에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의 눈으로 친히 확인한 그의 믿음은 이처럼 놀라운 신앙고백을 나타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2) 도마의 이같은 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란 사도들 이후세대들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이 무리들 중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같은 믿음은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 주님이 친히 보이신 증거를 통해서, 그리고 성경의 예언을 통해서 밝히 들어내시는 데, 성령께서 이같은 사실을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고전2:10-12). 여기서 믿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피스튜오’로 깨닫고 의탁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적인 믿음을 가리킵니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도 ‘마카리오스’로 영적인 축복, 행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 론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증거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놀라운 복음인 것입니다(롬1:4, 행9: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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